"팀.장.님!!!!!!"
김대리의 외침은 마치 사막에서 물한모금 없이 한 달쯤 연명하다가 풀잎에 맺힌 이슬 한방울에 생명을 걸고 달려드는 애절한 반가움이 느껴져 도저히 외면할 수 없었다.
그러나 내게는 정말 '난감+당황=재수 없음'이란 공식까지 성립되고 있었다.
거기다 그들은 방이 없고, 나는 60평짜리 콘도가 예약된 '체험 극과 극'의 상태였다.
게임이면 그들을 외면할 테지만 현실에서 그들을 외면한다는 것은 앞으로 내 사회 생활의 암흑을 예고하는 것이리라...
그나저나 일단 용평 간다는 김대리의 일행이 왜 휘닉스에 와 있는지 이유라도 듣고 싶었다.
"아니...팀장님이 주말에 약속 있으시다더니 결국 옆팀의 강팀장님하고 ... 둘이서 여기 오신 거에요?"
방도 없는 주제에 낄낄거리며 너스레를 떨기는....
"용평 간다고 안했나?"
"그게요...제가 용평 예약한다고 하고 휘닉스를 예약했나봐요. 그래서 용평 갔다가 예약이 안되어 있다길래...다시 확인해보니까 제가 휘닉스를 예약했더라고요...."
이런...해깔릴 거를 해깔려야지...본인 이름을 안까먹고 사는 게 신기하다....
"팀장님은 이해가 안되실 겁니다. 전 숫자에는 강하잖아요. 당췌... 글자는 좀 해깔려요. 방호수하고 금액은 정확히 기억했는데 콘도 이름이...."
하긴 숫자는 인정해주지...내가 60억과 6억을 해깔리는 것과 김대리가 용평과 피닉스가 해깔리는 게 같은 단점이라는 거지...
"어떻게 용케도 방 예약하셨나봐요. 그나저나 큰 일입니다....."
난감..난감...내가 예약한 방도 아니고 다음 날 민준도 온다고 했고...그렇다고 여기서 안된다고 하기도 그렇고...
이럴 때 선뜻....그래 우리 방으로 가자! 이렇게 말해야 멋있는 팀장이 되는 건데....
내막을 알리 없는 김대리는 그저 구세주를 만난 것처럼 들떠 있었다.
주여..저 대신 이 어린 양들을 구해주심 안되나요?
전 그저 한 남자와 데이트를 즐기고 싶은 정상적인 여인네랍니다....
그러나 내가 이런 기도를 끝낼 틈도 없이 나와 김대리가 얘기 나누는 것을 본 팀원들이 커피숍에서 몰려나와 인사를 했다.
"어머머...팀장뉨~~~~"
팀내에서 가장 어린 하연이 콧소리 섞인 목소리로 반가워했다.
김대리의 반가움까지는 그럭저럭 버티려고 했는데 그녀의 목소리와 눈빛에 난... 착한 책임감에 굴복하고 말았다.
어째 민준과 있을 땐 내 인생이 로맨스 영화였다가 김대리와 팀원들만 엮이면 재미 없고 짜증나는 '시트콤'이 되어버리냔 말이다...
"팀장님...저희 좀 어떻게 해주세요. 김대리님 믿고 따라온 게 실수에요. 예약도 안되어 있는 이 강원도 바닥에..."
하연보다 한 살 많은 은수는 거의 울 지경이다.
그래..입장 바꿔놓고 생각하자...팀장이 방도 넓은 걸 쓰는 사람이....아니다...방이 좁아도..같이 있자고 하는 것이 '사람'의 도리인 것이다.
"자자...내 방으로 가자!"
정말 입이 안떨어지는 것을 참고 웃으며 말했다.
"우와~~~~~"
일제히 그들의 환호성이 5.1채널을 가진 우퍼 스피커에서 나오는 소리처럼 콘도 로비에 넓고 크게 울려 퍼졌다.
그래...착한 일 했다 치자...대신 하루에 하나...만이다....
방안으로 들어오자 다들 난리가 났다. 이런 좋은 방은 첨이라는 둥...거기다 30명은 자도 될 거라는 과장 섞인 감탄과 하루 더 묵고 가고 싶다는 염장지르는 발언까지....
덜렁이 김대리가 또 은근히 여행 준비는 잘하는 덕에 그들이 가지곤 온 먹거리를 어느 새 주방을 채웠고...각 방마다 그들의 짐이 여기저기 놓여졌다....
내가 꿈꾸던 넓직하고 고요한 콘도에서의 휴식은 산산히 무너지고 있었다.
"걱정이다. 낼 민준이 온다고 했담서?"
지선이가 나중에 그런 걱정을 안해줬더라면 난 지선도 내 마음을 몰라주는 그들과 공범죄 가중처벌로 잠시 마음의 감옥에 가두려고 했었다.
"그래...낼 민준이 오기 전에 이들을 내쫓을 방법 없을까?"
"네가 팀장이니까 일시켜서 회사가게 만들어~"
방법이 없다....휴우......
내가 사실을 말해버리면 하루 아침에 회사에 내가 어떤 남자와 연애 중이고 주말에 콘도에서 같이 자고 왔다는 소문까지 돌 것이 뻔했다.
민준과 이들을 마주치지 않게 따돌리고 서로서로 즐겁게 하는 방법은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그들을 먼저 보내고 나혼자 혹은 지선과 단둘이 남을 핑계를 고민해보기로 했다. 아직 시간은 있으니까....
전화가 울린다...
'요즘 남자들 감동이 없어~' 렉시의 애송이 노래...미지정 벨소리....
나는 민준일 것이라는 기대감에...기쁘면서도 한편으론 마음이 무겁다.
"나야. 잘 도착했어?"
민준의 목소리....반갑지만 주변의 소음이 걱정이다. 왜 이리 팀원들은 시끄러운지....주방을 아예 불도우저를 밀어버리고 있는 듯 했다.
"응. 주말이라 그런지..사람도 많네...."
"그렇지...나도 엘에이에 오래 있어서 눈 구경은 몇년 만이라 기대된다. 근데...누구랑 갔는데?"
"지선이라고 기억 안나? 전에도 같이 일했고..."
"난 너밖에 기억 못해...."
잠시...할 말을 잃었다.
'너밖에 기억 못해...' '너밖에 기억 못해....'
신기하다. 누가 내 귀에 오토리버스 기능을 달아놓았는지 저절로 내 귓가에서 반복된다. 그것도 듣기 좋은 말만....
"어머님 생신이라면서?"
"응. 이제 막 같이 밥먹으려고....낼 오후 쯤 도착할 것 같은데...."
지금..그렇게 오후..라고 말하면 안된다...치밀한 시간 계산아래 서로를 엇갈리게 만들어야 하는데....
"몇 시쯤?"
"글세...2-3시쯤? 일단 비행기로 가려고 하니까 오늘 예약하고 이따가 밤에라도 알려줄게..."
어떻게든 그 시간이 되기 전에 팀원들만 먼저 보내면 된다...어떻게든...
무슨 좋은 수가 있겟지...
"스키는 탔어?"
"아직...."
"야간 스키는 타지 마...위험하니까...내일 나랑 같이 타자...."
무언가 하지 말란 말이 구속이 아니라 따뜻한 배려로 느껴진다. 이럴 수가.....
위험하니까....날 걱정해주는 사람이 엄마 아빠 외에 정말 오랫만에 한 사람 더 추가되었다.
행복하다.....이 추운 겨울마저도 따뜻할 정도로....
내가 전화 통화를 끝내자 하연이 특유의 콧소리로 불러댔다.
"팀장뉨~ 저녁 드세요~~~~"
그들이 주방을 불도우저로 밀어 내는 소음을 일으키며 차려낸 저녁은 삼겹살 구이였다.
"팀장님 덕에 좋은 방 묵게 되었으니까 좋아하시는 발렌타인 한잔 먼저 드릴게요."
김대리는 내게 술잔을 내밀며 말했다.
평소라면 발렌타인이라고 하면 아무도 못먹게 하고 나 혼자 마시려고 했겠지만 머릿속은 오로지 이들을 어떻게 하면 내일 오전에 내쫓을까라는 생각에 빠져 있어서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내 시큰둥한 반응을 김대리는 눈치챘는지 술잔을 다시 내려 놓으며 말했다.
"어째 이상하다...22년산 아니라고 그러시는 겁니까? 이거 제가 비싸게 주고 산 건데..."
으...정말..어리버리 김대리...22년산이 아니고..21년산이지.....
"됐어...난 오늘 술 안마실래...."
"왜요? 밤에 혼자 맥주 드시지 말고 같이 먹을 때 드세요~"
김대리의 저 눈치 없는 발언!!!!!
밤에 혼자 맥주 먹는다는 소리는 또 어떻게 기억하고...
"몸도 피곤하고 낼 스키 타려면 오늘 무리하지 말아야지..."
"야간 스키 안타실 거에요? 우리는 저녁 먹고 탈 건데...야간 스키가 얼마나 분위기 좋은데요..."
"스키를 분위기로 타나?"
"그럼 스키 경주라도 나가시나요? 즐기자고 타는 건데..."
다들 또 조르기 시작했다. 야간 스키 타러 나가자고.....
나를 포함해서 한팀이 아니라 나만 빼고 한팀인 것 같았다. 어째 나를 빼고는 이렇게 쉽게 의견 통일이 잘되는 건지...
나는 귀찮고, 춥고, 기운 없고.....갖가지 이유를 대다가 '가기 싫다....'라는 결정적 이유를 말하며 야간 스키를 거절했다.
주방과 각 방을 불도우저로 밀고 다니던 그들이 야간 스키를 타러 나가고 나니 정말 이제 좀 한숨 돌릴만 했다. 스키 타고 와서 치운다는 주방의 설거지꺼리만 눈에 띄지 않는다면 내가 꿈꾸던 낭만에 근접한 분위기였다.
"난 솔직히 니네 팀 부러워~"
"뭐가?"
"각자각자 보면 불안해 보이지만 모여 있으면 서로들 유쾌해하잖아...."
"내가 그 불안한 거 땜에 걱정이다...김대리 맨날 까먹고 실수하지...하연이는 콧소리로 모든 일을 하려하지...은수는 걱정부터 앞서지...."
"그런데 그게 합치면 독수리 5형제의 불사조...처럼 되는 거 아냐?"
"몰라~암튼 낼 아침에 저들을 내쫓아야 해!!!"
함께 일할 때는 합체하면 불사조 같은 힘이 나올지 모르지만 그들은 내 데이트를 방해하려고 작정한 훼방꾼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이 장애를 넘어 데이트를 해야 한다....불타오르는 이 사명감!!!
텔레비전을 보면서 그들을 내쫓을 묘안을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텐미닛테미닛'벨소리를 울리며 은수가 전화를 했다.
"팀장니임!.....저....김대리님이요.....ㅠ.ㅠ"
다급하게 나를 부르며 울먹거리는 목소리다.
"왜? 무슨 일인데?"
"클났어요....우리 김대리님...... 어떻게 해요......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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