밖으로 뛰쳐나가서 아무나 붙잡고 내 얘기좀 들어달라고 사정사정 하고 싶은 그런 밤이다.
하지만 그럴 용기는 없으니 방에 박혀 익명의 힘을 빌려 주저리 주저리 하소연 해본다.
나는 스무살 재수생이다. 오늘 수시 자소서 입력까지 최종 마감한 날이라서그런지
더 기분이 별로다. 6시까지 마감이었는데 다섯시 반부터 내가 한달넘게 매달려온 자소서를 세번이고 네번이고 계속 읽었다. 심장은 엄청 쿵쿵 뛰고 손에서는 땀이 물흐르듯 흘렀다.
그리고 여섯시가 되어 최종 마감이 되고나니 몇 분 동안은 멍하니 아무행동도 못했다.
그리고 저녁을 먹었는데 저녁 먹으면서 엄마랑 통화하니 조금 정신이 들었다. 엄마랑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통화했다.
재수를 시작하면서 나는 서울로 혼자 올라와서 살고 있다. 오늘은 엄마도 보고싶었고 아빠도 보고싶었고 누나가 집에 있을때가 더 좋다며 보채는 나보다 7살 어린 동생도 보고싶었다. 그리고 항상 날 응원해주는 친구들 또한 보고싶었다. 그냥 하루종일 기분이 씁쓸했고 오늘따라 더 외로웠다.
오랜만에 페북 비활했던걸 풀고 뉴스피드를 보는데 강아지 고양이 사진과 글이 많았다.
강아지나 고양이를 키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쁜 이름을 붙여주고 내 앞에 앉혀놓고 눈을 마주치며 내 얘기를 들려주고 싶다. 아니 내 얘기를 들어줬으면 좋겠다.
그리고 또 대학 간 친구들이 올린 대학 축제사진도 많이 보였다. 나도 가고 싶었다. 나도 대학생이 되고 싶다. 앞날이 막막한 지금같은 스트레스 말고 과제에 치이는 스트레스를 받아보고 싶다. 물론 대학생이 되고 나서는 지금과 같은 생각을 한 과거의 나에게 딱밤을 때리고 싶어질 것 같기도 하다.
벌써 9월 말이다. 재수를 시작한지 벌써 수개월이 지났다. 올해따라 유난히 더 푹푹 쪘던 여름도 이제 지나고 나는 긴팔 긴바지를 입는다. 작년 수능날은 별로 춥지 않았는데, 올해는 아주 혹독하게 추웠으면 좋겠다. 수능이 끝나고 먹먹할 마음이 단단해지도록. 그리고 너무 추워서 아무생각도 나지 않을 수 있도록.
아빠는 6월 말부로 퇴직하셨다. 이제는 엄마가 혼자버신다. 원래 집에 몇천만원의 빚이 있는 상태였기에 우리집은 더 힘들어졌다. 내가 수시든 정시든 대학에 붙었을 때 등록금을 내려고 마련한 적금도 다 깼다. 내가 스무살이 된 이후부터 엄마아빠는 나에게 돈얘기를 많이 하신다. 처음엔 정말 죄송했지만 나중엔 정말 지긋지긋해서 말 안해도 충분히 아니까 그만 말하라고 엄청 다투기도 했다. 욱 했던 마음에 내뱉은 말이라 다음날 사과했다. 그리고 지금은 돈 관련 얘기는 체념했다. 그리고 죄송하다. 엄마 아빠는 정말 좋은 분인데 돈이 뭐라고 이렇게 초라해질까. 엄마아빠한테 돈얘기 들을때의 내모습도 정말 초라하지만, 예쁜 딸 귀중한 딸에게 돈얘기를 했어야만 했던 엄마 아빠의 심정은 감히 내가 이해할 수도 없다. 동생은 내년에 중학생인데 나한테 들어가는 돈이 너무 많아서 학원도 제대로 못다닌다. 미안해 누나가. 내년에 꼭 대학가서 국어랑 영어는 내가 가르쳐야겠다. 동생은 과학자가 꿈이라 수학 과학 과목을 좋아하는데 누나가 미술해서 수학 과학을 못가르쳐 주는게 좀 아쉽다.
아빠는 정말 좋은 분이다. 나의 존재를 알게되시면서 담배를 끊으신지 20년이 됐고, 유머러스하시고 깔끔하시고 성실하시고 목소리도 좋다. 그리고 착하시다. 단점은 너무 착하시다. 우리 사회가 우리 아빠의 착하고 성실한부분만 이용해먹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빠가 성공했으면 좋겠다. 적어도 의식주 관련 돈문제로 고민을 하지 않을 정도로만 성공했으면 좋겠다.
엄마는 요즘말로 츤데레이신 분이다. 나에게 하시는 말은 항상 잔소리로 시작해서 잔소리로 끝나지만 그 말들에 깔려있는 전제를 스무살이 된 이제는 안다. 엄마는 정말 쾌활하고 밝고 부끄러움도 없고 자신감 넘치는 분이셔서 나는 엄만 정말 눈물이 없는 사람인 줄 알았다. 하지만 집안이 힘들어진 요즘 엄마는 나에게 잔소리를 울먹울먹한 목소리로 건내실 때가 종종 있다. 나는 엄만 또 왜 울고그래요 ~ 하면서 장난식으로 넘기지만 마음 한구석으론 캥긴다. 자랑스러운 딸이 되고 싶은데 요즘 마음이 풀려서 공부가 안돼서 더 죄송하다.
사실은 최근 한두달을 정말 공부 하는 듯 마는 듯 보냈다. 자꾸 미루고 미뤘다. 미룬 공부들은 오르막길에서 굴린 눈덩이처럼 점점 불어났다. 요즘 진짜 정신을 못차렸다고 생각하면서도 한번 깨진 리듬은 쉽사리 잡히지 않았다. 수시가 마무리 된 지금 시점부터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려고 노력할 것이다. 재수학원 담임쌤과 상담도 했다. 요즘 내 자신이 많이 풀렸다고. 자꾸 불안한 마음도 든다고. 재수학원 담임쌤은 불안한 생각이 떠오르지 않도록 공부에 매달려보라고 했다. 이제부터 매달려보려고 노력할 것이다.
이 글은 그냥 아무나라도 내 얘기를 들어줬으면 하는 단순한 마음에 쓴 글이다. 하지만 이 글을 쓰면서 내 자신을 많이 돌아보게 됐다. 그래서 생각보다 긴 글이 써졌고 쓸 생각이 없었던 내용까지 다 나왔다. 많이 털어놨다. 쓰길 잘했다는 마음이 든다. 그동안 열심히 해야지 열심히 해야지 마음만 먹고 생각만 하고 실천을 못하고 있었다. 근데 막상 내 지난 날들을 한자 한자 글로 작성하며 반추하는 소처럼 곱씹어보니 정말로 실천할 마음이 솟아오른다. 내일부터 내가 새로운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아니 나는 내일부터 새로운 사람이다. 엄마가 예전에 들려준 책 내용이 생각난다. 자기최면을 하고 자기암시를 하고 나는 ~하고싶다 보단 나는~되었다 라는 생각을 하다보면 온 우주가 나서서 도와준다고. 예전엔 말도 안되는 소리라며 웃었지만 지금은 정말 그럴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아까 이유없이 속이 울렁거리고 토할거같고 어지럽고 두통을 느끼던 것이 한시간동안 글을 쓰는 과정에서 사라졌다. 내가 지금 이 글을 쓰면서 느낀 이 마음이 내가 자연으로 돌아가는 그 날까지 유지됐으면 좋겠다
내가 당장 내일 살아있을거라는 보장은 없다. 하지만 내가 여느 평범한 사람들처럼 산다면 나는 앞으로 6~80년은 더 살것이다. 앞으로 살아갈 수 있는 6~80년을 지금 두세달 사이에 바꿀 수 있다. 두세달만 더 노력하자. 믿을것이다. 나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