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이번 역은 삼성, 삼성 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오른쪽 아니 왼쪽.. 아니 오른쪽인가... 승객 여러분들은 문이 열리는
곳으로 내려주시기 바랍니다
이런 망할, 오늘도 지각이다.
저 놈의 시계 바늘은 조금도 날 생각해 주지 않고 미친 듯이 8시 40분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아니 날아가고 있다는 표현이 더 맞을지도 모른다.
내 언젠가 저 째깍이는 초침바늘을 망치로 때려부수고 말꺼야!!
뛰자, 뛰어.
소프라노가 부럽지 않은 파트장의 목소리가 귓전에 울린다.
지하철역부터 엘리베이터까지는 무려 7분거리.
잘하면 아슬아슬하게 도착할 수 있을지도 몰라.
지금 나는 3분전. 숨을 몰아쉬며 엘리베이터 앞에 길게 늘어선 줄에 합류하고 있다, 발을 동동 구르며.
어떻게든 이번 엘리베이터를 타야 지각을 면하게 될텐데.
이런! 하필이면 내 앞에서 자르다니.
이제 남은 건 나와 내 뒤에 있는 이 남자.
그러고 보니 이 사람 얼마 전에 새로 온 고객 지원실 팀장이로군.
"지각하셨나보세요"
당신도 마찬가지 아닌가, 팀장?
"아 네 뭐 조금"
이 어색한 분위기는 뭐지?
"몇 파트에 근무하세요?"
"우수 고객 3파트요"
아침부터 뭐 이딴 걸 물어보는 거야, 나는 바빠 죽겠는데.
"그러고 보니 초면이죠? 전 지난주부터 고객 지원실에서 근무하게 된 정은율입니다"
"아 네. 전 이준아라고 합니다"
그럼 초면이고 말고!!
내가 당신과 만난 적이 있었어야 말이지.
당신 여유 있어 좋겠다.
나는 지금 일분 일초가 아까운 현실인데.
띵똥-
아 왔다, 엘리베이터!!!
17층 버튼을 누르는 동시에 19층을 누르려고 다가오던 이 남자와 손이 맞닿았다.
끼아악- 전자파를 잔뜩 먹은 텔레비전을 만지는 듯한 느낌은 뭐냐.
"오늘 날씨가 많이 건조한가 보네요"
"네 아무래도 날씨가 추우니까요"
"17층에 계시나보네요"
"네. 19층에 계세요?"
이런 유치한 대화를 우린 왜 주고받고 있는 걸까?
더군다나 왜왜 어째서 엘리베이터는 층마다 서는 걸까?
이 어색한 분위기, 얼음맨~ 날 구해줘 help me~
두구두구두구 17층이다.
"그럼 전 이만... 클레임 없는 하루 되시구요"
"아 네, 감사합니다. 그럼 내일 또 뵙기를..."
샤아악- 하고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나는 엘리베이터 문을 걷어차며 말했다.
"이 나쁜 자식아. 그럼 나보고 내일도 지각하란 말이냐?"
슬금슬금 걸어서 내 책상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 이크- 걸리면 벌금 오천원. 아직 파트장이 오지 않은 것 같다. 잘됐다. 오늘 지각도 이렇게 무마되는 구나. 히히-
"이준아- 넌 오늘도 지각이야?"
끼아악- 파트장님?
"아하하하- 오늘은 지각이 아니구요. 지하철에서 고객지원실 정은율 팀장을 만나서 오다가
글쎄 지하철에 손목이 심하게 끼는 바람에 상처가 나서요. 그래서 같이 약국에 갔다가
늦었어요"
"그-으-래? 그럼 좀 있다 문병이라도 다녀와야겠는걸"
문병? 문병? 안돼~~!!
그럼 내 거짓말이 들통나버리잖아.
설마 요즘 같은 요금 주기에 파트장님이 고객지원실까지 갈 리가 없어.
진정하자, 이준아.
아침부터 콜이 밀려들어온다.
대체 인간들은 뭐가 이렇게 궁금한 거야.
벌써부터 목이 따끔따끔 거리는 게 퇴근 때까지 어떻게 버틸지 걱정이다.
게슴츠레한 눈으로 인터넷 쇼핑몰을 항해하고 있는데 새로운 개인 알림이 등록되었다는
메모가 팝업된다.
-이준아씨, 지각비 오천원은 면했나요? 지각비만 아니면 아침마다 만났으면 좋겠는데..
매일 지각비 오천원 지원해줄 테니 같이 출근할 마음 없나요?
아니 이게 무슨 실없는 소리야.
고객지원실 팀장 정은율씨!! 당신 약 먹은거 아니야?
이 인간이 아침부터 왜 이러지?
자기가 날 언제부터 알았다고 이렇게 친한 척을 하는 거야.
어제 일요일이라고 너무 무리하게 논 탓인지 벌써부터 온 몸이 나른하다.
일도 하기 싫은데 화장실에라도 다녀와야겠다.
그 곳만이 내 유일한 안식처이니.
화장실에서 나오는데 정은율 팀장이 내 앞으로 걸어오고 있다.
"점심 식사했어요?"
"아뇨. 오늘은 점심시간이 좀 늦네요"
그럼 난 이만... 어 근데...
"손은 왜 그러세요?"
아침에 못 본 거 같은데 이 남자의 손목에 붕대가 감겨 있다.
"몰라서 물어요?"
"네? 제가 뭘?"
"준아씨 지각 면하게 하기 위해 내 손목이 희생한 거"
응? 뭐라는 거야, 이 사람.
"이은주(우리 파트장)씨가 오전에 올라와서 손목 어떠냐면서 묻더라구요"
아아- 파트장... 진짜 올라 간거야?
"내가 이 정도 희생을 치뤘으니 오늘 저녁 정도는 기대해도 되는 거 아닌가요?"
으씽-
"내가 언제 희생해달랬어요?"
나는 쌩~하고 돌아와 내 책상에 앉았다.
붕대를 감은 그 인간의 손목과 흐트러진 그 인간의 앞머리가 번갈아 가면서 떠오른다.
아아- 어찌하면 좋단 말이냐.
"야!! 이준아. 점심 먹으러 안 가?"
같은 파트의 유일한 동갑내기 친구 해정이다.
요즘 그녀는 애절한 짝사랑을 하느라 정말 보기 안쓰러울 정도다.
"뭐 먹으러 갈까?"
"지하식당으로 돈까스 벤토 먹으러 가자"
"그러자. 뭘 먹고자 하는 욕망조차 없는 날이다"
"왜? 무슨 일 있어?"
오늘따라 해정이가 기운이 없어 보이네.
"글세 오늘 오다가 준서(해정이가 짝사랑하는 그) 오빠를 봤는데 둘이 다정하게
팔장 끼고 출근하더라"
"아- 그래"
정말 이럴 땐 어떤 위로를 해줘야 할지 난감할 뿐이다.
해정이가 좋아하는 통품파트(통화품질 파트를 그냥 줄여보자)의 준서 오빠는 우리센터에서
소문난 닭살 커플이다.
하필이면 골키퍼 있는 남자를 골라 가지고 왜 이런 맘 고생을 하는 건지, 원.
골키퍼도 이렇게 바싹 붙어 있는데... 쯧쯧쯧.
"가자 가. 오늘은 이 언니가 쏜다"
너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내가 뭔들 못하겠니.
점심시간을 비켜간 ZAN(지하식당의 일식집)은 한가하다못해 적막하기까지 하다.
종업원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릴 정도.
"돈까스 벤토 두 개 주세요"
정말 기분대로라면 둘이 낮술이라도 들이키는 건데 아까워 죽겠다.
해정이의 표정이 어둡다.
"야!! 뭐 그런 거 본 거 한두 번이냐? 이제 면역도 될 만 하구만"
그래 니 심정을 내가 백 번 천 번 이해한다, 이해하고 말고.
"맛있게 먹고 올라가서 열심히 일합시다!!!"
아무리 아양을 떨어도 꼼짝도 하지 않는군.
아무 말도 없이 멍하니 앉아있는 해정이와 괜히 싱숭생숭해져 주변을 둘러보고 있는데
앗!!! 정은율 팀장, 당신이 아닌가?
메뉴판으로 황급히 얼굴을 가리고 무사히 그가 지나가기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뚜벅뚜벅 걸어와서 내 옆에 앉아버린다.
으- 이런!
정은율 팀장이 메뉴판 너머로 날 물끄러미 쳐다본다.
아하하하하- 등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구나.
"두 분 이제 식사하시는 겁니까?"
"아-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