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모스크바 노점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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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저씨, 어떻게 그리 한국말을 잘해요?'
'빛고을이 고향이니까.'
'에이, 아저씨 한국사람이 누가 이런 일을 해요? 고려인이 서울말 쓸리는 없고 조선족 맞죠?'
춥고 배고프고 발 시려 죽겠는데, 황당한 질문에 기막혀 우물쭈물 하고 있으니까, 언뜻 보기에 도저히 집에서 김치를 담가먹을 줄도 모르게 생긴, 곱상 한 빛고을 유학생 아가씨가, 불쌍하고 측은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마지못해 '배추 얼마예요?'
한겨울 눈보라 날리는 매서운 정월의 모스크바에서, 도착한지 한달 만에 수중에 남은 전 재산 단돈 50달러로 시작한 사업이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로켓을 몽땅 쓸어다 빛고을에 가져가서, 조국 과학을 한 30년 앞당기겠다고, 터무니없는 사업을 벌렸다가 당연히 쫄딱 망할 때쯤이었다. 부산에서 제일 가는, 무지하게 부자라는 사업가가, 명성(?)을 익히 들었다며 무조건 투자하겠다는 말만 믿고 들어왔다가, 불과 보름 만에 또 터무니없는 이유로 소식을 끊어버려, 돌아갈 차비도 없는 국제미아가 된 터였다.
식은땀 흘리고 자다가, 갑자기 허공에 삿대질 해가며 '너그들 날 잘못 봤어!'라고 고함지르는 심각한 병에 걸려 있었다. 당연히 집도 없었다. 코스모스탐험대시절 폼잡고 다니다가 알게 된 고려인 사무실에, 아직도 고향에는 막강한 조직이 있는 것처럼 허풍을 치면서 뻔뻔하게 숙소를 정하고, 마치 바쁜 일이 있는 것처럼 아침부터 이 시장 저 시장 기웃거리다가 시작한 일이었다.
새벽 6시에 일어나 미뜨로(지하철 역)에서 전철을 타고 나가, 새벽시장에서 배추, 파, 버섯 등을 사다가 무작정 한국인이 제일 많이 산다는, 모스크바국립대학 '엠게우'의 기숙사 입구에 늘어놓았다.
그 당시 모스크바에는, 대사관 통계로 한국교민 약 4~5천명이 거주한다고 하였다. 이중 약 3천명이 한국에서 온 유학생이고, 나머지는 선교사 가족들과 대사관가족, 그리고 현대, 대우, 삼성, LG등의 상사 가족, 가죽옷과 속옷 등을 도매로 판매하는 소규모 무역상인이 있었고, 자영업자는 식당, 당구장, 비디오가게 등을 운영하는 10여가구가 전부였다. 그래도 사회주의 종주국답게 딴 나라 교민사회에 간혹 있는, 하루를 어영부영 보내는 백수들은 거의 없었다. 교민들 모두가 열심히 일을 하거나 아니면 학업에 열중하고 있었다.
모두가 번듯한 신분을 자랑하고 있는 곳에서, 시장잡일을 도맡아 일하는 중국인도 베트남도 아닌 한국인이, 다 팔아봐야 30달러 치도 안되게 보이는 배추쪼가리 등을 늘어놓고, 더구나 중국이나 베트남. 일본학생도 많이 거주하는 기숙사 앞에서 처량한 모습을 연출하니, 한국인이라고 믿지 않는 것은 당연할지도 몰랐다.
말이 노점상이지, 사방이 툭 트인 호숫가 옆에 달랑 서있는 기숙사 건물주위는, 약간 높은 언덕으로 마치 거친 냉동가스 같은 바람이 휘몰아쳐서, 어쩔 때는 주머니 속의 잔돈 꺼내는 것도 힘들었다. 허우대 멀쩡한 이놈도 견디기가 힘든 데, 한국에서부터 죽어도 같이 죽자고 따라온, 체중 40킬로그램의 뼈만 남은 자칭 신사임당의 후손 배추장수 동반자는, 꼭 털 뽑힌 병아리가 냉장고속에서 오돌오돌 떨고 있는 모양이다.
내 처지를 생각해도 기가 막힌 데 그 모습을 보면 차라리 울고싶다는 생각이 사치라고 생각되어 숨이 막힌다. 기대와는 다르게 이곳에 와서 한번도 병치레가 없었던, 재산이라고는 엉뚱한 사업을 한다며 빛만 남은 이놈을, 죽자 살자 물고 놓아주지 않는, 하는 일이 하도 당돌해서 내가 '미끼'라고 별명 지어주었던 이 한심한 처자는, 차라리 일찍 병이 나서 외동딸 걱정에 밤잠도 설치는 부모에게 돌아가 주었으면 하고 생각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고향의 엄동설한보다 더 차갑고 삭막한 기후였다. 이런 곳에 변변한 옷도 없이 배추 앞에 쪼그리고 있으니, 차라리 고려인으로 보여지는 것이 다행으로 생각되어진다. (배추와 미끼는 진눈깨비 내리는 모스크바에 도착한 첫날부터 고행의 시작이었다. 공항에서 자칭 박사라는 루스끼 할아버지가 운전하는 지굴리 승용차에 트렁크와 옷 보따리를 실었었다.
그러나 나중에 숙소인 호텔에 도착하니, 미끼의 옷 보따리와 약간의 패물과 귀중품이든 선물보따리가 증발하고 없었다. 어찌 된 일이냐고 추궁하자, 출발 전에 뒤 트렁크가 덜 닫힌 것 같아서 이 보따리를 차 안으로 옮기려고 끄집어내어, 운전대 옆 땅바닥에 놓았다가, 깜박 자신만 올라타고 출발하였노라고 변명했다. 곧바로 차를 돌려 공항에 가서 분실물 창고까지 확인했지만, 있을 리가 만무했다.
원하지도 않은 이분들을 데리고 마중 나왔던 한국인 신나라씨는, 코스모스탐험대 시절, 자칭 모스크바 라이온스 클럽에 소속된 유일한 한국인이라고 소개를 받았는데, 그 후 신나라씨가 소개한 중국 조선족으로부터 강도를 당한 뒤 소식이 끊겼었다.)
한국에서부터 유독 추위를 잘 타는 체질을 뻔히 알고 있는데도, 추운 체 하면 더 못 견디는 배추에게, 추운 내색을 하지 않으려는 능청이 더 가슴을 시리게 하였다. 미국 이민사 30년의 배추 가족들에게 원조를 부탁했다가, 자신들은 미국도착 첫날부터 짐도 풀기 전에 얼음공장에서 일했다며, 야박하게 거절 당한 것을 잊어본 적이 없었다.
배추도, 배추장수 꼬붕 미끼도, 지구상 천상천하 단돈 10원을 빌릴 데가 없었다. 그리고 당연히 살붙이 하나 없는, 찬바람만 휭휭 불어대어 빛고을 주민까지도 자작나무같이 찬바람 나는 표정으로 생소한 모스크바에서는, 불과 1원도 구할 데가 없었다. 더더구나 배추와 미끼는, 없으면 굶지 돈 빌려달란 말은 고시공부해서 판검사 되는 것보다 어렵다는 주변머리밖에 없었다.
결론은 단 하나였다. 죽자. 그래도 이대로 죽으면 억울하니 싸우다 죽자...사방이 고층 아파트이고 빌딩만 서있는 곳에서, 미끼는 당연히 하루 팔아 남은 돈 10달러를 가지고, 눈보라 치는 귀가 길을, 지나가는 거지도 사양할 버스요금을 아끼려고 걸어갈까 버스 타고 갈까 궁리하고 있는데, '미끼야, 우리 목표는 모스크바에서 제일 높은 빌딩을 갖는 거다'는 배추의 흰소리를, 마지못해 고개라도 돌려주는 듯 허망하게 웃어주었다.
하루는 배추에게 사무실을 숙소로 빌려준, 전에 러시아 공군 대령이었던 고려인 박클림이 소문을 들었는지 자신의 번쩍 번쩍한 검정 아우디를 타고 찾아왔다. 어이가 없는 표정이었다. 한때는 코스모스과학연구원의 원장이라고 제법 허울좋은 명판을 달고서 큰소리치던 한국 땅 본토인이 고려인들 보다 더 기가 막힌 처량한 모습을 연출하고 있었던 것이다.
배추쪼가리를 사이에 두고 배추도 클림도 서로 말문을 잃고 말았다. 배추도 무어라 설명하기가 곤란하여 마냥 주저하고 있는데, 클림은 배추쪼가리를 한참동안 넋을 잃고 보더니 '김선상님, 선상님은 요즘 이 땅에 온 한국인 중에 처음으로 역사를 쓸 거요.'(박 대령은 나중에 한국농장에서 깻잎을 수확했을 때도 같은 말을 했고, 김치공장에서 처음 공식 허가된 김치가 나왔을 때에도 같은 말을 했다. 마치 루스끼들이 보드카 잔을 마주칠 때마다 멋진 공치사를 뽐내어 말하듯이, 참 이상한 방법으로 기운을 띄워줄 줄 아는 멋쟁이다. 전역 후에 지금은 한국화장품을 자신의 브랜드로 수입 판매하는 회사 사장이 되었다.)
사나흘 지나자 50달러가 100불쯤으로 불어나서, 횡재라도 한 마냥 배고파 죽을 염려는 없겠구나 하고있는데, 진짜 죽어야 될 일이 일어났다. 한심한 배추장사 꼬라지를 보고 한국유학생 중 철없는 무리들이, 재들 한 달을 못 넘길 거라며, 그때까지 살아있을 수 있는지에 내기를 걸었단다.
그 당시 모스크바는, 정상영업을 하고있는 한국식당에도 하루에 수 차례씩 경찰관들이 들어 닥쳐서, 노동허가가 없는 종업원들을 잡아가고, 경찰관보다 한술 더 뜨는 세무·소방 공무원이, 사사건건 시비를 걸어 영업정지 시킨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었다. 그리고 마피아의 본고장답게, 깡패들이 대가리 큰놈 작은놈 가릴 것 없이 찾아와 지 구역이니 알아서 하라고 협박을 하였다. 더구나 백주 대로상에서는, 스킨헤드라는 나찌의 유령에 씌운 일명 빡빡이 들이, 만만하게 보이는 아시안 노랭이들을 무차별 집단구타하고 금품을 빼앗아 가는 일이 비일비재 하였다.
그뿐이 아니라, 대다수의 중국인들이 신분증이 없다는 약점을 이용하여, 밀리짜(경찰관)들은 복장이 허술한 동양인만 보이면 무조건 신분증 검사를 하여, 증명서가 없으면 경찰차에 태우고 유치장에 넣겠다며 수중의 돈을 다 빼앗아 가는 게 상식이었다. (그 당시인 1997년부터 99년의 모스크바는, 하루가 다른 나라 10년이 변하듯 변하던 때였다. 풍문으로는 루쉬코프시장의 저돌적인 지도력으로 모스크바의 밤이 매일매일 한층 더 밝아졌으며, 하루에 새롭게 문을 여는 상점들이 수백 개였다고 한다. 배추도 전날 갔던 거리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바뀌어 헤매던 때였다. 한국과 거의 동시에 IMF 비상사태를 맞고도 지금의 모스크바는, 오히려 훨씬 안정되고 불과 1-2년 사이에 시내 중심지역은 시간대 없는 교통지옥으로 시달리고 있었다. 또한, 거리는 명동의 밤거리보다 더 붐 비는 곳이 만들어졌고, 그리고 거짓말같이 잔챙이 깡패들이 모두 자리를 감추었다.)
허가서류라고는 빛고을 증명서밖에 없는 완전 무허가 노점상이니, 배추가 생각해도 황당 그 자체여서, 한 달은커녕 하루를 무사히 보낸 것도 감사해야 할 처지로 철부지 학생다운 내기였다. 살맛 나는 세상이었다. 이 정도쯤은 완벽한(?) 치안을 유지 해주어야지 고생을 해도 했다는 훈장을 달 수 있는 게 아닌가.
하루 이틀 자리를 잡다 보니, 가끔 순찰을 돌던 밀리짜가 모스크바에 웬 정신 나간 놈이 서툰 짓을 하는가 싶어 다가왔다. 배추상자를 발로 톡톡 치더니 뭐라 뭐라 하는데, 러시아말이라고는 도브리젠(안녕 하냐) 스빠시바(고맙다) 다스비다냐(잘 가라)밖에 모르는 배추가, 뻔뻔하게 눈 똑바로 뜨고 악수하자 며 손 내밀면서 '짜샤, 도브리 젠'하니까 동문서답에 기가 막혔나 보다. 산적 같은 넉살 좋은 놈과, 토깽이 같이 겁먹은 가냘픈 처자가 신기하다는 듯이, 한참동안 멀뚱히 얼굴을 마주치고는 깔아놓은 배추쪼가리를 대충 훑어보더니, 지딴에도 벼룩의 간을 빼먹지 라고 생각을 했는지, 뒤 돌아 가면서 움찔 허수아비 같은 모션을 취하고는 가버렸다.
죽을죄를 지은 듯이 얼굴이 하얘지던 미끼가, 이해를 못하겠다는 표정이다. 아무 소리 못하고 처분만 기다리던 놈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한 마디 했다.
'미끼야, 프로는 척하니 눈빛만 마주쳐도 프로를 알아보는 법이야.'
지 동료들에게도 말했는지, 그 후로 다른 밀리짜는 순찰을 나왔다가는 눈도 마주치기 싫다는 듯이 관심 없는 표정으로 지나갔다. 그럭저럭 한 달이 지나고 당연히 명물이 된 배추장수는 단골들이 늘어나고, 일부러 멀리서 찾아와 격려를 해주는 빛고을 가족들도 생겨났다.
배추로 시작한 노점에는, 점점 단골들의 요구에 의해 간장. 고추장. 콩나물. 두부 등 품목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한국식당 들이 배추를 한꺼번에 100Kg 이상씩 주문을 하기 시작했다. (모스크바는 다른 사회주의 국가와 마찬가지로 채소나 과일, 생선들을 모두 Kg단위로 거래를 한다. 배추 가격은 계절에 따라 가격차이가 심한데 한여름에는 1달러에 3Kg이상씩 하다가 첫눈이 올 때쯤이면 1달러에 1Kg이고, 모든 채소가 떨어지고 네덜란드. 스페인. 중국 등의 수입배추만 남을 때인 봄에는, 1Kg에 2달러까지 오르는 등 가격차이가 심하다.)
3개월 이상 죽자고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자리를 지키는 배추에게, 하루는 내기를 걸었었다는 학생녀석이 찾아왔다.
'아저씨 별명이 무언지 아세요?'
'뭔데?'
'무대포 라고 아세요?'
호사다마라고 3개월쯤 제법 터를 닦아 놓았더니, 그 터무니없는 무대포도 꼼짝할 수 없는 강적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웬 한국인이 자릿세도 없는 목 좋은 곳에서, 신나게 잘 팔아먹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는지, 중국 조선족 아줌마들이 같은 품목을 짊어지고 와서, 슬쩍 엉덩이를 깔고, 좌판을 늘어놓기 시작한 것이다. 아줌마만이 아니라 모녀 지간에 와서, 배추가 처음 시작할 때처럼, 다 팔아봐야 30달러도 안 되는 채소 쪼가리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이들과 경쟁해야만 하는 처지가 갑자기 한심해지는 것은 둘째로 치고, 혼자서 독점할 때는 주변공기를 개의치 않았지만, 이들이 온 뒤부터는 기숙사 경비원들과 디렉터, 그리고 가끔 나오는 밀리짜들의 짜증 섞인 표정이, 도둑 제발 저린 다고 처음 시작했던 무대포 때문이라는 걸 감지했다. 그렇다고 이것도 원조라고 후배(?)들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며 생색을 내고 싶지는 않았고, 설령 말해봐야 본전도 못 찾을 게 뻔했다.
배추의 상대는 원래 나보다 잘난 인간들이었지, 어찌 보면 같은 핏줄인 빛고을 후배들과 경쟁한다는 것은 명분도 없는 노릇이었다. 후임(?)들에게 엄동설한에 터닦아 놓은 곳을, 춘풍이 불어오기 시작하는 때에 물려주기로 작정했다. 터무니없는 궤변이지만 '미끼야. 빛고을에는 물러가야만 할 때 미그적거리다가 쪽박 찬 중생들이 있었다지. 아마?'
그러나 장사가 잘되고 안 되고 떠나서 지독히 고생했던 터를 옮기는 게, 왕창 미련이 남는 것은 인지상정 이었다. 배추장사 1학년 첫 수업을 무사히 마친 미끼에게 상장이 필요했던 것이다.
'미끼야, 우리 큰 맘먹고 한번 날자꾸나.'
따뜻한 훈풍이 불어오는 날, 결국 한국인 최초의 모스크바 노점상은 처음보다 조금 더 갈무리된 깃털을 세우고, 한국인 식당과 술집, 사무실 등이 밀집되어 있는 알료녹(새끼 독수리)호텔에 둥지를 틀어 자리를 옮겼다.
* 단돈 50불을 가지고, 새벽시장에서 30불 어치 배추를 샀다. 남은 돈으로 차비를 주고 나니 10달러도 안되었다. 허기진 배를 채우려고 흘롑(러시안 식빵)과 쏘시지를 샀다. 아끼다가 꽁꽁 얼어버린 그 흘롑과 쏘시지를 먹고 나니, 남은 것은 배추였다. 전재산은 배추였던 것이다. 누군가 멀대를 배추라고 부르지 않아도 스스로 배추가 되어버렸던 것이었다. 속으로 흐르는 눈물과 함께 꽁꽁 얼어버린 흘롑을 나누어 먹던, 그 해 그 겨울의 울리짜 클라프첸까(거리이름) 엠게우 대학기숙사가 있는 폭풍의 언덕을, 배추가족은 죽어도 잊지 못한다.
윗글은 저가 모스크바에서 민박하던곳의 주인아저씨 이야기 입니다. 어래 주소로 가시면 더 많은 이야기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