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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쌉싸름한 30살(15)

리드미온 |2004.01.26 15:07
조회 17,612 |추천 0

지선이 짧은 음성 메시지는 나에게 여러 가지 의혹을 유발하기에 충분했다.

본능적으로 이런 얘기가 좋은 얘기가 아니라는 것은 누구라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한국에 와서 전화하라는 것'은 지금 민준과 같이 있을 때 들으면 곤란할지도 모른다는 지선의 암시일지도 몰랐다.

지선에게 지금 당장 전화를 할까 아니면 한국에 가서 민준과 헤어진 후에 전화를 할까 고민되었다.

지금 지선에게 전화를 하면 지금의 내 행복감이 한꺼번에 와르르 무너질 것 같은 불안감....

이럴 때 좋은 방법은 이왕 무너질 탑이라면 조금 뒤로 미루는 것....아니 악착같이 뒤로 미루는 게 나을 수도 있다...내 개인의 정신건강을 위해서라도....말이다.

나이 들면서 깊이깊이 느끼는 진리가 하나 있다.

'오늘 일을 내일로 미루어라, 잘하면 하지 않을 수도 있다!'

'오늘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아라....'같은 모범답안만으로 세상을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지 이미 오래 되었다.

나는 일단 지선에게 전화하는 일은 한국에 가서 하자고 마음 먹었다.

영원히는 아닐지라도 지금 당장 행복할 수 있는 권리....그 정도는 내가 선택할 수 있다고 다짐하며...

 

 

나는 침대 옆으로 있는 호텔 창쪽으로 가서 커튼을 젖히고 런던 시내를 내려다 보았다.

약간 멀리 템즈강이 보이고 그 뒤로 황금색 건물의 빅벤이 보였다. 언제나 정확한 시간을 자랑한다는....

시계가 귀했던 시절에 만들었으리라...그것도 시간이 정확한 시계가....

아마도 그 시절의 공공 시계 개념이었을 것이다.

그러고보니 우리도 예전에 역 앞의 시계탑에서 만나는 일들이 있었던 것 같은데 언젠가부터 시계탑을 사람들이 의식하지 않고 살게 되었다. 아마도 빅벤과 같은 나중에 장식품으로도 쓰일 수 없는 가치가 없어서였던 것은 아닐까...

빅벤도 언젠가부터 시계라기 보다는 런던을 상징하는 상징품 정도가 되었으리라....

저렇게 용도가 변해도 아름답게 그 자리에 꿋꿋이 버틸 수 있는 값어치....그런 게 과연 나한테도 있을까....이십대의 여성스런 풋풋한 매력을 다 잃은 삼십대가 되더라도 삶에 조금 더 관조하고 여유있는 원숙미를 갖고 살아갈 수 있다면....그러면 여전히 아름답다는 말을 들을 수 있으리라....

 

나는 호텔 구석에 놓인 미니바에서 따뜻한 커피 두 잔을 만들어 놓고 아직 침대에서 자고 있는 민준에게 다가갔다. 약간 헝클어진 머리, 살짝 감겨져 있는 눈, 그리고 시트에 하체만 덮여 있어서 드러난 가슴.... 

나는 민준의 입술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아직도 그의 얼굴엔 향긋한 스킨냄새가 남아 있었다.

민준은 내 입술의 감촉을 느꼈는지 눈을 뜨며 말했다.

 

"벌써 일어났어?"

 

"응."

 

"창밖의 빅벤 보다가 옆에 보니까 웬 멋있는 남자가 알몸으로 누워 있잖아....그래서 키스하고 싶어졌어."

 

"자다가 눈을 떴는데 웬 미녀가 속옷바람에 날 덮치려 하고 있네...."

민준은 나를 끌어당겨 침대 옆에 눕혔다.

 

"어...지금 커피 끓여 놨는데..."

나는 그렇게 말하면서 못이기는 척 민준의 옆에 누웠다.

 

"왕비마마...조금 더 자면 안될까요?"

민준은 익살스럽게 그렇게 말하며 나에게 키스를 퍼부었다.

 

"자꾸 이러면 나 서울에 가기 싫어진단 말야~"

나는 응석을 부리며 민준을 꼭 끌어 안았다.

 

"그거 생각해볼만하다...우리 평생 어디 도망가서 둘이만 있을까?"

"응."

나도 모르게 너무 쉽게 그렇게 대답해버렸다.

민준과 함께 있으면 나의 보잘것없는 현실들을 다 잊을 수 있고 또 이렇게 평생 살 수도 있다는 희망이 생겼다.

 

"아니...라고 했으면 정말 데리고 도망가버렸을 거야..."

제발...민준 날 데리고 멀리멀리 가줘.....

라고 말하는 대신 나는 웃음으로 대답하고 그의 품에 안겼다.

그의 품은 너무나 깊고 넓어서 한번 빠지면 영원히 출구를 찾을 수 없어 계속 그 안에 머무를 수 밖에 없는 달콤한 늪이었다.

 

런던에서 서울에 도착한 시간은 월요일 아침 7시가 되어서였다.

런던이 서울보다 9시간이 빠르니까 다시 런던에서 서울로 올 때는 9시간이 더 걸려서 일요일 밤시간을 뚝 잘라 먹은 셈이 되었다.

민준은 나를 데려다 주고 리츠칼튼호텔로 돌아간다고 했다.

민준은 같이 호텔에 들렀다가 출근하라고 했지만, 나는 바로 출근 준비를 하려면 가방도 두고 집에서 옷도 갈아입어야 했기에 거절했다.

 

나는 잠은 못자서 피곤하지만 즐거운 마음으로 조금 일찍 출근을 했다.

제일 먼저 눈에 띈 것은 일주일만에 출근한 김대리였다.

김대리를 보자, 나는 주말 동안 잊고 있었던 은수의 메일 사건이 생각나서 은수 자리를 바라보았다.

은수는 아직 출근을 안했는지 아직 자리가 비어 있었다.

내가 없는 주말 동안 저 두 사람은 어떻게 되었을까.....

차라리 모르는 편이 나을 뻔했다. 괜히......메일을 봐서......

양심의 가책도 느끼고....또 두 사람 사이도 신경이 쓰이고....

 

"김대리, 다리는 괜찮아?"

 

"그럼요. 백두산에 열두번은 오르락내리락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썰렁한 과장법....

기운 차리긴 차린 것 같았다.

 

"팀장님은 백두산 열두번 오르락 내리락 한 후에 한라산으로 뛰어가는 사람처럼 기운이 넘쳐 보이는데요?"

"왜? 에베레스트에 24번째 오르는 중인데?"

눈에는 눈...이에는 눈....이라는 똑같은 대응보다는 한 단계 더 높인 것으로 과장법엔 확장법으로 대항하는 것이 상대방을 제압하는 것일 수도?

그렇게 김대리와 짧은 인사를 끝내고 자리에 앉아 가장 먼저 한 일은 지선에게 전화하는 일이었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게 여유있게 마음 먹고 있었지만 참고 견딘 궁금증이 폭발할 지경이었다.

 

"아구..왕자만난 공주님...빨리도 전화하네...."

내 전화에 지선의 첫마디는 적당한 야유와 부러움이 있는 듯 했다.

 

"음성 들었는데...무슨 소리야? 민준이가 로스쿨 다니는 건 어떻게 알았대?"

 

"내가 말하는 것보단 직접 보는게 나을 거다...너 지금 인터넷 들어가서 KBS 연예가중계...다시 보기나 해봐라...지난 토요일 거...."

 

나는 긴장을해서인지 KBS사이트를 어떻게 들어가야할지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야...케이비에스...거기 어떻게 들어가지?

 

"KBS쩜 CO쩜 케이알...."

 

손가락이 떨려서 자꾸만 오타가 나서 몇번씩 다시 치고 나서야 지선이가 말한 연예가 중계 다시 보기를 실행할 수 있었다.

 

--------------------------<클릭, 달콤쌉싸름한 30살 16편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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