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참 기분 좋은 꿈이었다.
꿈속에서 화순이 언니-내게 영감을 주는 처녀귀신-랑 참 즐겁게 놀았다.
귀신들의 모습은 제각각이고 죽은 이유에 따라 깃든 감정도 다 달랐다.
억울함, 분노, 아쉬움, 기쁨등 자기 색깔을 가지고 있는데 화순이 언니는 슬픈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혼자 있을 때면 기분이 좋더라도 가끔 그 기분에 전염이 되어 슬퍼서 눈물이 나올 때가 있었다.
그런데 꿈속의 언니는 너무나 즐거워보였다.
같이 먹을 것도 먹고 수다도 떨면서 즐거운 한때를 같이 보낸 것이다.
마지막에 날 보며 박장대소하는 언니의 모습이 마음에 조금 걸리기는 했다.
‘내가 우습나? 뭐 웃기니까 웃었겠지.’
기분 좋게 일어났는데 머리가 아파왔다.
‘참! 술을 먹었지. 그것도 많이. 쭉쭉 들이켰던 것 같은데.’
갈증이 심하게 나서 냉장고에서 얼음을 꺼내 물에 넣고 시원스레 들이켰다.
‘아싸! 좋은걸.’
찬 물이 내 창자를 따라 흐르는 느낌이 찌릿찌릿한 게 정신이 드는 것 같았다.
그와 동시에 어제의 추태가 기억나서 하마터면 물 잔을 손에서 놓칠 뻔하였다.
페어 플레이 하자던 주리는 술기가 오르자 바람 옆에서 아예 술시중을 들고 있었다.
나름대로 참고 있는데 눈앞에서 러브샷을 하는 바람과 주리를 보니 눈에 불꽃이 일었다.
“야! 바람. 나 술잔 비웠다. 술 좀 따라봐라. 꺽.”
나의 큰 소리에도 바람은 그냥 바라 볼 뿐 술을 따라 주지 않았다.
“왜 여자한테 술 따르는 것도 처음이냐?”
“알았어. 따라줄게 소리 좀 지르지마.”
“술 따라 줬으니 내 고마워 한마디 하는데. 너 그렇게 사는 거 아니야. 네가 상처 준 여자들 지금 이갈고 있어. 몇 년은 괜찮겠지만 그 상처 너 도로 받는다. 내말 새겨들어.”
바람은 그냥 웃어 넘겨듣는 듯했다.
‘하긴 어렸을 때부터 놀아서 별의별 여자들을 다 겪어 봤으니 이정도야 우습겠지.’
“그리고 너 우리 주리한테 작업 치지마. 여자친구도 있으면서 이러면 안 돼지.”
“왜 그래? 정우 아까 만나는 여자 없다고 말했잖아. 너 취했어? 정우한테 계속 너 왜그래?”
주리는 또 껴든다. 푹 빠졌군.
“여자친구한테 전화는 했냐? 뭐라고 거짓말하고 나온 거야?”
사실 혀가 꼬일대로 꼬여 발음이 불분명했는데 알아듣는 얘들이 신기했다.
“네가 나 여자친구 있는 거 봤어? 너 아까부터 나 거짓말한다고 이상한 사람 만드는데.”
“한번 볼까? 음. 얼굴은 별로 안 이쁘네. 너 그것 때문에 그런 거냐? 사람은 얼굴이 다가 아니라구. 성격도 좋구 너한테만 목매고 있구만. 키도 크고 쭉쭉빵빵인데. 몸매보고 사궜나봐.”
바람은 그냥 이상한 술주정이라고 생각했는지 잘 듣고 있었고 멀대는 재미있다는 표정이었다.
약하게 웃음 짓는 표정이 너무나 귀여웠다.
“너 웃으니 귀엽다.”
“너도 술 취하니 귀여운데. 어디 계속 해봐.”
술을 한잔 또 마셨다.
술을 마시면 영감이 더 발달해선지 더 잘 볼 수 있었다.
“음악하는 여자네. 너보다 나이도 많고. 내말이 틀리냐?”
“...”
바람이 약간 긴장한 표정이다.
“돈쓰는 거 좋아하고, 사치는 심해도 너한테는 잘하는데. 그 돈 너한테도 얼마간 가있겠어. 돈 좀 받아썼지? 거주지가 남쪽이라 강남 사나봐.”
주리는 정우에게 쏘아대는 내가 밉쌀스러웠는지 삐져서 조용했지만 정우는 이미 세상에서 제일 오싹한 술주정을 듣고는 어쩔 줄 몰라했다.
정우도 더 이상의 말대꾸는 하지 않아서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 때 멀대가 말했다.
“나는? 나는 어떻게 보여?”
“난 꽁짜로는 안보는데.”
“맞추면 어떻게 해줄까?”
“부탁하나 들어줘라.”
“알았어.”
“너 대학생이라는 거 뻥이지? 학운이 안들어있어 올해 대학갈 운이 없었는데”
“맞어. 그리고?”
“너 친구들에게 인기가 좋구나. 성격도 호탕한게. 한무리를 이끌 만한 재목이네. 리더쉽도 있고. 사람이 널 따르네.”
“그것두 맞는 것 같고.”
“부모덕이 없어. 아버님이 일찍 돌아가셨구만. 근데 아버님이 너 항상 돌봐주신다. 진짜 사랑하셨나봐.”
“...”
“학운은 없어도 인덕이 많으니 앞으로도 선심 쓰며 살면 좋은 날 꼭 올게다.”
“야! 기집애가 어디서 술꼬장이야? 니 친구 입좀 막아라.”
드디어 바람의 본성이 나왔는지 힘들게 지켜온 매너는 간 데 없었다.
어디가나 꼭 저런 사람들이 있다. 자신의 감추고 싶은 진실들 들춰내면 오히려 화내는 사람들.
“조용히 얘기 들어줬더니 끝을 모르네. 너 무당이야?”
“무당이라고 말하는 거 보니 혜림이 얘기가 맞는 거야?”
내숭떨던 주리가 바람에게 쏘아부쳤다.
바람의 말이 심해서 화가 난 게 아니라 여자가 많다는 말에 화가 난 모양이었다.
‘지가 바람 마누라인 것처럼 굴고 있네. 사랑 앞에서 우정도 없는 거냐? 나쁜 기집애.’
“뭐라구? 이젠 쌍으로 난리구만.”
“틀린 얘기 없잖아. 난 재미있는데 뭐. 얘 여자친구 있어. 우리 나이가 많은 것도 아니고 여자친구랑 당장 결혼할 것도 아닌데 미팅 나오는 거 그리 큰 흉 아니잖아.”
화가나 당장 한 대 칠 것 같은 바람의 말을 멀대가 잘랐다.
멀대의 말에 바람은 씩씩대면서도 빨리도 입을 다물었다.
‘멀대가 파워가 더 센 모양인데.’
“다들 많이 취한 거 같으니까 우리 노래방이나 갈까?”
“그래. 그러자. 혜림아 일어나.”
멀대의 제안에 나는 누군가에게 몸이 일으켜져서 노래방으로 끌려갔다.
노래방에서의 기억은 잘 나지 않는다.
거의 인사불성이 되어서 화장실을 들락거렸고 정신을 잃고 잠을 잤던 것 같다.
멀대의 다리를 베고. 멀대의 다리는 참 편안하고 따뜻했다.
‘그럼 집에 어떻게 온 거야?’
술에 취해 끊겨진 필름.
그건 점쟁이라 해도 모르는 법.
오로지 술에 취하지 않은 친구만 알 것이다.
주리에게 전화를 걸려고 전화기를 열었다.
[술 취하니 귀엽더라. 내일 보자. 전화할께]
문자가 와 있었다.
‘멀대? 아니 왜 내 핸드폰에 멀대의 번호가? 내가 귀엽대. 그건 좋은데 오늘 보자니.’
주리에게 전화를 했지만 퍼 자고 있는지 받지 않았다. 하긴 아침 7시가 조금 넘었으니 기대도 안했다.
씻고 아침 지성을 드렸다.
무슨 일이 있든 아침 시간은 경건해야 했다.
지성을 드리지 않는 날은 하루 종일 영기가 딸려서 빗맞추는 경우도 많고 무리하게 집중을 하게 되어 몸져눕는 경우도 있었다.
머리를 비우고 마음을 비웠다.
오후 3시가 다 되서야 일을 마치고 핸드폰을 보니 멀대의 전화가 12통이나 와 있었다.
‘감취진 기억 속에 사건이 있긴 한가본데. 제발 멀대랑 얽힐 만한 사건은 아니였으면 좋겠는데.’
또 멀대의 전화였다. 받을까 말까 하는 사이 전화벨은 계속 울려댔다.
‘주리부터 통화해야 되는데. 에라, 모르겠다.’
- 야! 여지껏 잤냐? 전화 무지 했는데.
‘왜 소리를 지르고 야단이야?’
“응. 피곤하네. 나 자는 중인데 이따 전화하면 안될까?”
자다 일어난 연기치고 목소리가 너무 옥구슬이었다.
작전 실패였다.
“그렇게 자고 또 자냐? 너처럼 생긴 얘들은 많이 안자던데. 집 앞으로 갈게. 나와”
“우리집?”
“그래. 한시간 줄게. 준비하고 있어.”
“왜?”
“택시비줘야지. 내가 어제 빌려줬잖아.”
‘기껏 택시비 때문에 집까지 받으러 오다니. 쪼잔한 놈. 관상은 그렇지 않더구만.’
하지만 빚진 것이 있으면 갚아야 하는 것이 인생.
인간이 어찌 인과응보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으랴.
“야! 택시비. 만원이면 되냐?”
멀대와 만나서 택시비만 주고 집에 들어갈 생각이었다.
멀대에게 호감은 갔지만 얽히는 걸 별로 원하고 있지는 않았다.
멀대를 만나면 주리가 바람과 친하게 될 확률도 높을 것 같았고, 이상형과 비슷하긴 해도 키가 너무 큰 것도 싫었다.
“돈으로 받을 생각 없으니까 집어넣어. 밥이나 사줘.”
“싫어. 이 돈 받고 너 가.”
말은 이렇게 했지만 사실 꽃단장하고 나온 나.
“돈으로 줄 거면 세탁비에 너 집에 데려다준 왕복택시비. 내 인건비까지 십만원줘.”
머리를 재빨리 굴렸다.
‘굴리나 마나 너한테 줄 10만원이 없다. 밥 사주고 빨리 보내는 게 좋겠군.’
나란히 걷고 있는 멀대는 진짜로 컸다.
“키가 몇이야?”
“188”
“진짜 크네. 그럼 농구 잘해?”
멀대 어이없다는 표정이다.
“나 농구 못해. 키 크면 다 농구 잘해야 되나? 그럼 넌 역도 선수냐?”
‘이 자식아! 그래 나 똥자루다. 그리고 왜 하필 역도 선수야. 리듬체조 선수들도 작던데. 비유 이상하게 하네.’
“어제는 잘 맞추더니 농구 못하는 건 안 보이나봐.”
진땀난다. 하하하 웃어야지.
“나 그런 거 못 맞춰. 하하하”
웃어야지 하는 생각에 너무 헤벌레하며 말해버렸다.
여태까지의 컨셉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그래도 바보 컨셉은 아니였는데.
진짜 바보같이 웃으며 멀대를 바라봤는데 멀대는 웃지 않았다.
‘수습을 해야해. 빨리.’
“나 안 무섭니?”
‘말을 돌리려다 보니 이상한 말이 튀어나왔네.’
“내가 너같이 조그만 여자애 무서워하면 남자가 아니지.”
‘자식. 남자답기는 하구만.’
그 대답이 참 고마웠다.
고등학교 때는 신기 있는 얘란 소문에 날 가까이 하려는 얘들이 많지 않았다.
그래서 친구도 주리뿐이었다.
마음을 열어준 멀대에게 미안하기도 했지만 아직은 다른 사람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모양인지 자리를 빨리 피하고만 싶었다.
참 성의도 없이 제일 먼저 눈에 보이는 식당에 들어갔다.
“여기 제일 빨리 되는 거 두개요.”
곧 순두부 두개가 테이블에 놓여졌다.
허겁지겁 먹고 있는데 멀대가 말했다.
“누가 쫓아오니?”
“원래 빨리 먹어. 그리고 나는 밥 먹을 땐 말도 안 해.”
착한 멀대는 그냥 웃고 있었다.
‘자식! 정말 성격 미남이네. 키만 조금 작았어도 아니 주리만 아니였어도 너 내 남자친구 삼았을텐데.’
아무 대화도 없이 진짜 밥만 먹어선지 식당에 들어간지 15분후에는 밖에 나올 수 있었다.
“안녕! 잘 가라.”
인사를 하고 뒤돌아서는데 멀대가 팔을 잡았다.
“나 집에 데려다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