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턴쉽 끝나고 드디어 돌아온 학교.
예전에는 뭐가 어디 있는지 몰라 허둥거린 반면, 이제는 나름 익숙해졌는지 경치 좋은 자리 찾아 밥을 먹는 여유도 생겼습니다.
특히 카페테리아, The Egg는 식당 뒷문만 열고 나가면 이렇게 허드슨 강의 전경이 시원하게 펼쳐집니다.
처음에 학교 바로 옆에 강이 있는 것을 보고 두 가지를 꼭 해 보고 싶었는데, 하나는 낚시해서 물고기 잡아 요리 해 먹기고 다른 하나는 이 강을 따라 배 타고 노 저어 내려가며 맨하탄까지 가 보는 것이었지요.
하지만 둘 다 포기할 수 밖에 없었는데, 일단 낚시는 수질이 별로인지라 공식적으로 이곳에서 낚은 생선은 한 달에 한 마리만 먹는 것을 권장하고, 그나마도 임산부와 노약자는 먹지 말라고 하더군요.
예전에 강 상류에서 공장들이 화학 약품을 마구 써대며 강을 오염시켰기 때문인데 수 십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파가 남아있다니 환경 오염의 심각성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보트 타고 맨하탄 가는 계획은, 일단 보트라는 게 부자들이나 타는 거라는 인식이 박혀 있어서인지 제가 원하는 조각배를 대여 해 주는 곳도 없고, 혹여 조각배나 오리보트를 구하더라도 속도를 계산 해 보면 당일치기로 맨하탄까지 가는 건 어림도 없을 뿐더러, 무엇보다도 허드슨 강이 바다에 면한 탓에 조수 간만의 차가 심할 때는 바닷물이 역류하면서 굉장히 위험해지기 때문에 포기할 수밖에 없더라구요.
그냥 뉴욕 시내 갈 때 타는 기차에서 보는 경치가 좋으니 그걸로 만족하기로 합니다.
이번 학기 들어와서 달라진 점이라면 지금까지 오후반이었다가 오전반으로 바뀌었다는 사실이지요.
무려 새벽 여섯시 반에 수업이 시작됩니다. 그런데 이건 주방 작업을 그 때 시작한다는 거고, 보통은 '셰프 타임'이라고 해서 그보다 30분 일찍 일을 시작해야 합니다. 필요한 식자재나 물품 등을 미리 창고에서 가져와야 본격적인 작업을 시작할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졸린 눈 비비며 학교에 도착하면 아침밥을 안 사먹을 수가 없습니다. 커피와 함께 속을 든든하게 채우지 않으면 버틸 수가 없거든요.
불만인 점은 맨날 비슷한 메뉴라는 거. 베이글과 식빵을 비롯한 빵 몇 종류, 두 세가지 달걀 요리, 아침식사용 소시지와 버거 패티, 해쉬 브라운. 이 정도가 전부입니다.
식사를 만들 사람이 없으니 (더 정확히 말하면 제가 그 식사를 만드는 사람이다보니 -_-;) 어쩔 수가 없네요.
예전부터 학생 식당에서 밥 먹은 사진 올린 것을 보니 왠지 모르게 죄다 고기 사진만 올렸더군요.
아무래도 상대적으로 고기가 잔뜩 올라간 식사가 더 화려하게 보이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채소와 과일도 먹습니다. 뷔페식으로 채소와 과일을 마음껏 담아 먹을 수 있지요. 무게 달아서 포인트를 깎긴 하는데 단가가 저렴해서 수북히 담아도 그렇게 비싸지 않습니다.
재미있는 건 요리학교인데도 의외로 채식주의자 학생도 종종 보인다는 사실입니다.
하긴, 전 세계에서 학생들이 모여있다보니 돼지고기 못 먹는 이슬람 학생, 소고기 못 먹는 힌두교 학생도 꽤나 있는 판국입니다.
미국에서 유행하는 채식주의를 지키는 학생이 있을 법도 하지요.
채식주의에도 여러 종류가 있는데 요리업계 트렌드 중의 하나가 지속가능한 (Sustainable) 음식 자원이다보니 이 쪽의 채식주의자들이 많습니다.
환경 보호 및 에너지 절약 차원에서 채식주의를 하는 학생들이지요.
그래서 수업 시간에 요리 맛은 봐야겠고, 고기를 먹자니 신념에 어긋나고 해서 씹어 뱉는다더군요.
처음엔 '요리학교에서 뭔 그런 말도 안되는 일이?' 싶었는데 셰프 말로는 굉장히 예의바르고, 씹어 뱉을 때도 아무도 모르게 자기가 들고 다니는 개인 용기에 몰래 뱉는다더군요.
어찌 보면 고행을 자처하는 수도자의 이미지 같기도 하네요.
하지만 샐러드를 아무리 색깔 맞춰 쌓아도 역시 고기의 화려함은 따라올 수 없는 듯 합니다.
보통은 질겨서 기피되는 브리스켓(양지머리)도 오랜 시간 간을 하고 바베큐 조리를 하면 이렇게 분위기부터가 다른 음식이 됩니다.
그러고 보니 브리스켓 전문 요리책을 도서관 세일 때 중고로 한 권 샀는데 짬이 안 나서 요리를 못 하고 있네요.
나름 저렴한 부위인지라 큰 걸로 한 덩이 사서 이래저래 요리를 해 먹고는 싶은데, 문제는 화이트 보드에 적어 놓은 '직접 해 보고 싶은 요리 목록'이 이미 꽉 찬 상태라 언제쯤 시도 할 수 있을지 예상도 못 하겠다는 거지요.
감자 샐러드, 코울슬로를 곁들인 양지머리. 위에는 튀긴 양파와 바베큐 소스를 얹었습니다.
이 바베큐 소스가 일반적인 식당에서 주는 화학첨가물 가짜 소스가 아니라 진짜로 브리스켓을 왼종일 바베큐 하면서 그 육즙으로 만든 소스입니다.
소스의 깊이가 확 다른 게 느껴지네요.
그릴로 구운 참치. 지중해식 버터 소스를 곁들여 나옵니다.
그런데 참치야 뭐 언제나 먹던 그 맛이라 쳐도, 저 브로콜리. 브로콜리가 끝내줍니다.
누가 요리했는지는 모르겠는데 이 정도면 거의 브로콜리만 한참 요리하다 온 학생이거나, 어쩌다 운빨이 맞고 하늘이 도와서 만든 브로콜리인 것 같네요.
일단 채소 상태도 좋고, 조리 정도도 완벽하고 간도 딱 알맞게 되었습니다.
평소에 브로콜리 별로 안 좋아하는데 소스 묻혀가며 싹싹 긁어 먹었네요.
간단한 요리일수록 진짜 맛있게 만든 것을 먹기는 힘든데, 운이 좋았습니다.
지난 번에는 한국식 치킨을 팔던 이노베이션 키친이 이번에는 불고기 타코를 팔고 있습니다.
이거 꽤 괜찮네요. 갓 튀긴 바삭바삭한 타코 위에 불고기를 듬뿍 얹고, 그 위에 과콰몰리 소스와 치즈를 얹어 불고기의 열로 녹인 다음, 쪽파를 송송 썰어 얹었습니다.
받으면서도 '이게 어울려? 팔기 전에 먹어보기는 한 건가?'라는 생각이었는데 맛있습니다.
한국에서 푸드 트럭 메뉴로도 좋을 법한 요리입니다.
별 거 아닌 것 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손이 많이 가고, 또 사람들이 이건 손이 많이 가는 요리라는 사실을 다 알고 있는 음식이 몇 가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집들이를 하는데 갈비찜이라도 나오면, 뭐 대단히 고급스러운 것 같지도 않은데 "아유, 갈비찜까지 하셨네"라는 감탄사가 나오기 마련이지요. 이거 하나 만들려면 몇 시간동안 불 앞에서 요리해야 하는 것을 다 알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겉보기엔 그리 대단해보이지 않아도 일단 메뉴에 올라 와 있으면 '야, 이거 손 많이 가는 요리인데'라고 다들 알아주는, 그래서 생색내기 좋은 메뉴가 베네딕트입니다.
수란 만들기나 홀랜다이즈 소스 만들기가 참 까다로우면서도, 막상 익숙해지면 또 그렇게까지 힘들지는 않은 탓이지요.
그렇다고 맨날 똑같은 에그 베네딕트만 내놓을 수는 없으니 오만가지 베네딕트 변형 버전이 다 나옵니다.
오늘 나온 것은 크랩케이크 베네딕트.
잉글리쉬 머핀 대신 바게트를 깔아두고 베이컨이나 햄 대신 게살 패티를, 시금치 대신 아스파라거스를 올렸습니다.
قلیه-میگو(ghalieh maygoo) 라고 불리는 중동 지방의 새우 스튜.
어떻게 읽는 게 정확한 발음인지는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바스마티 쌀과 각종 향신료로 양념한 새우 요리입니다. 중동 지역 음식과의 유일한 교차점이라면 예전에 이집트 여행 갔을 때 뿐인지라 중동 음식만 먹으면 이집트 갔던 기억이 떠오르네요.
맛을 표현하기 참 곤란한 음식이기도 합니다. 인도와 유럽의 풍미를 반씩 섞어서 사막 느낌을 끼얹은 이미지랄까요.
모로코식 닭고기 타진(tajine). 원래 타진이라고 하면 이 요리를 만드는 흙냄비를 의미합니다. 원뿔 모양이 인상깊은 조리도구지요.
하지만 학교 주방에서 그런 조리도구를 구경한 적 없으니 스테인레스 냄비로 끓였을거라 생각합니다.
나중에 타진 하나 사서 만들어 먹어 보고 그 맛을 비교하는 것도 재미있겠네요.
광동식 돼지 요리. 돼지고기 로스트인데 중국식으로 간장과 식초, 설탕, 팔각 등을 이용해서 조리했습니다.
부드러운 돼지고기와 소스 듬뿍 머금은, 좋은 의미로 흐물흐물한 양배추가 참 맛있습니다.
밥은 뭐... 나쁘지는 않은데 그래도 개인적인 취향에 맞춘다면 한국식 흰쌀밥 한 공기 엎어놓고 돼지고기 소스에 섞어 먹으면 참 맛있겠다 싶었지요.
지중해 키친에서 만든 해물 파스타.
파스타가 버미셀리 면을 사용한 게 재미있네요. 면 종류라면 다 좋아하는지라 불나방이 가로등에 끌려가듯 복도 지나가다 이걸 보고 급선회해서 빨려들어갔지요.
면은 언제나 옳습니다. 날아다니는 스파게티 몬스터님 만세.
6월의 마지막에 먹은, 그릴로 구운 배스 요리.
곡류와 채소 요리와 생선 요리와 양배추 절임을 케이크처럼 차곡차곡 쌓아 올렸습니다.
평소 프로덕션 키친에서 나오는 요리 수준이 기본에 충실한 동네 레스토랑 수준인데 비해 이건 나름 고급 레스토랑에서도 먹힐 법한 메뉴 구성이네요.
처음에는 맛을 음미하다가도 곧이어 '이거 손 많이 가겠는데, 나중에 이 주방에서 수업 들을 때 이 메뉴 걸리면 고생 좀 하겠네'라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이렇게 보니 어느 새 CIA에 입학 한 지도 일 년이 지났습니다.
메인 다이닝 홀을 보며 '호그와트다, 호그와트!'라고 신기해 했던 게 딱 일년 전 6월이니까요.
처음엔 수업 내용을 하나도 못 알아듣고 어버버 거렸는데, 지금은... 여전히 어버버 거립니다. -_-;
그런데 이건 미국 애들도 마찬가지. 나름 주방 경력 있는 학생들도 매일같이 새로운 요리를 접하다 보니 이래저래 실수 만발이죠.
숙련된 셰프들도 새로운 주방에서 적응하려면 최소 일주일은 걸린다던데 학생들은 오죽할까요.
다만 갈수록 메뉴 적응 속도나 실수를 만회하는 노하우는 느는 듯 합니다. 이렇게 어버버 거리면서 배우는 거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