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장 및 요리 형태별로 배우는 단계의 마지막 수업인 Garde Manger.
처음에는 이걸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감도 못 잡았더랬지요. 가르드 망거? 가르데 맹저?
Garde는 가르드. 프랑스어로 '지키다, 보존하다'는 뜻이 있고, Manger는 망제. 음식을 의미합니다.
다만 Manger를 읽을 때 프랑스어 특유의 콧소리가 들어가기 때문에 정확히는 마제와 마흐제의 중간 발음 쯤 되더군요.
그래서 미국 애들이 발음할 때 보면 거의 "가르마제"로 들리기도 합니다.
교실 앞의 삼천만원(!)짜리 고기 숙성용 냉장고에서 숙성중인 각종 햄과 소시지가 여기서 뭘 배우게 될지를 예고하고 있습니다.
냉장고가 없던 옛날에는 고기나 생선 등을 저택의 가장 서늘한 장소에 보관하는 것이 원칙이었고,
그러다보니 이런 식재료들을 손질하는 작업 역시 불 때느라 온도가 높은 주방이 아니라 보존 창고 옆에 따로 공간을 마련해서 하곤 했습니다.
이렇게 저온의 환경에서 재료를 손질하는 장소를 가르마제라고 불렀지요.
그러던 것이 냉장 시설의 발달 덕에 바뀌면서 지금은 보존 처리한 고기나 생선은 물론이고 이를 활용해서 만드는 차가운 음식까지 통틀어 가르마제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일단 시작은 각종 고기를 소금 혹은 소금물에 절여서 훈제하는 방법부터 배웁니다.
단순히 소금에 절이기도 하고, 각종 양념을 묻히기도 합니다.
인류가 고기를 보존하기 위해 가장 먼저 사용했던 방법이 염장, 훈제이지만 의외로 그 방법 자체는 크게 변한 게 없습니다.
기껏해야 소금의 양을 조금 줄인다거나 초석 대신 아질산염을 사용한다거나 하는 정도의 차이지요.
커다란 훈연기에 각종 고기와 생선을 꽉꽉 채워넣고 연기를 피워 훈제를 시작합니다.
나름 오랫동안 훈제를 해 온 덕에 저온 훈제까지 집에서 할 수 있는지라 훈연기는 별로 안 부러운데 환기 시설만큼은 정말 부럽습니다.
집에서는 스테이크 굽다가 연기만 좀 심하게 나도 화재 경보기가 울리는 반면,
교실의 환풍기는 어찌나 강력한지 실내에서 연기 팍팍 내며 훈제를 해도 그 연기를 다 빨아들입니다.
고온 훈제를 마치고 나온 통닭.
저온 훈제를 할 경우에는 날것으로 먹을 수 있는 생선이나 육류만 가능하고, 그게 아니라면 나중에 따로 조리를 해 줘야 합니다.
반면에 아예 훈제를 하면서 일정 수준 이상으로 온도를 올리는 고온 훈제는 만들자마자 그대로 먹어도 되지요.
물론 가르마제 시간에 만드는 고기들은 차갑게 식혀서 먹는 게 기본입니다. 이른바 냉육이라고도 하는 음식이지요.
그래서 갓 훈제를 마치고 나온 닭이 사람 환장하게 만드는 냄새를 풍기는데도 먹을 수가 없습니다. 차갑게 먹을 때의 맛이 어떤지를 배워야 하거든요 ㅠ_ㅠ
어린 왕자가 상자 속의 양을 볼 수 있듯이, 마음의 눈으로 보면 보이는 오리 콩피.
오리 가슴살이나 다리 등을 오리 기름에 푹 담근 다음 오븐에 조리를 하고, 그대로 식혀서 굳히면 사진처럼 됩니다.
하얗게 굳은 기름 아래에 오리 고기가 가득하지요.
살코기에서 빠져나왔던 기름이 다시 스며들기 때문에 고기가 촉촉하고 육즙 가득할 뿐 아니라
굳은 기름이 공기와의 접촉을 막기 때문에 장기간 보관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특히 오리 기름은 상온에서도 굳어있기 때문에 냉장고 없던 옛날에는 그냥 유리병에 고기 넣고 오리기름 채워서 몇 개월씩 보관하곤 했지요.
이렇게 고기도 훈제하고, 생선도 훈제하고, 피클도 만들고, 잼도 만들며 정신없이 일을 해도 정작 맛을 보는 건 훨씬 뒤의 일입니다.
저장식은 만들어서 바로 먹는 것보다 며칠 더 숙성시킨 다음 먹는 게 더 맛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가르마제 수업의 중반부에 들어서면 그 동안 만들었던 음식들을 다 꺼내서 맛보며 잔치를 벌입니다.
사워크림과 새싹채소를 곁들인 훈제연어 및 염장연어 카나페를 만들다보니 예전에 눈 맞으며 연어 훈제하던 게 생각나네요 (https://blog.naver.com/40075km/221238434056)
훈제 송어를 빵 위에 얹고 딜 줄기로 장식한 카나페도 만듭니다.
짭잘하면서도 생선 특유의 고소함이 마치 우리나라 간고등어와 비견될 만 합니다.
처트니 (인도식 과일잼)을 곁들인 훈제 오리 가슴살도 먹음직스럽네요.
타쏘(Tasso)라고 불리는 훈제 소고기.
염장한 쇠고기의 겉에 각종 향신료를 듬뿍 바르고 훈제한 다음 얇게 썰면 이렇게 예쁜 모양이 나옵니다.
향신료가 굉장히 강하기 때문에 꽤나 이국적인 풍미를 맛볼 수 있지요.
차가운 수프인 비시수와즈(Vichyssoise), 각종 샐러드와 냉 파스타, 지금까지 만들었던 수많은 종류의 소스와 피클까지 모두 곁들여 맛을 봅니다.
어찌나 그 종류가 다양한지 커다란 작업 테이블의 자리가 모자라서 보조 테이블까지 가득 채울 정도.
당연한 이야기지만 전반적으로 달고 짭니다.
그런데 그 달고 짠 맛이 그냥 거기서 그치는 게 아니라 고기나 채소, 과일 등이 숙성되면서 좀 더 깊은 맛을 낸다는 게 재밌습니다.
그래서 서양에서는 겨울의 제철 음식을 보존식으로 꼽기도 합니다.
봄, 여름, 가을에 잔뜩 모아서 피클을 담거나 잼으로 만든 제철 음식들, 그리고 늦가을에서 초겨울 사이 겨울을 나기 위해 살을 찌워 둔 동물들을 사냥해서 만든 보존 고기들.
이런 음식들이 숙성되며 깊은 맛을 낼 때 쯤이 바로 한겨울이기 때문이지요.
가르마제 후반부로 들어서면 본격적으로 작업에 들어갑니다.
고기 개론 시간에 배우며 잠깐 만들었던 것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대량 생산 모드에 들어간 소시지.
이 정도면 거의 조그만 소시지 공장 수준 아닌가 싶을 정도로 마구 만들어 냅니다.
소시지 옆에는 염장 돼지 뱃살이 건조 중입니다. 이제 조금 지나면 껍질 벗기고 훈제 해서 베이컨이 될 운명이지요.
벗겨낸 껍질도 간이 잘 배어있는데, 서양에선 돼지 껍질은 거의 버리는 부위인지라 셰프한테 부탁해서 제가 다 가져왔습니다.
잘게 잘라서 말린 다음 기름에 튀겨먹으니 완전 맛있더라구요.
껍데기 양이 워낙 많아서 처음에는 '절반 정도는 학교에서 나눠 먹어야지'라고 다짐했었는데, 조금씩 집어먹다보니 어느 새 혼자 다 먹어버렸습니다. 그 벌인지는 몰라도 턱이 아파서 한동안 고생했지만요.
파테 엉 크루트 (Pate en Crute). 냉육 요리의 끝판왕이라고 해도 좋을만한 요리입니다.
고기를 잘 갈아서 각종 향신료와 견과류 등을 섞는 것 까지는 좋은데
파이 반죽으로 틀을 만들어서 고기 반죽을 감싸고, 반죽에 구멍을 뚫고 굴뚝을 세운 다음 고기 젤리를 부어 넣고 요리합니다.
완성된 파테는 차갑게 식힌 다음 썰어서 먹지요.
정말 손이 많이 가고, 시간도 많이 가고, 그래서 만드는 사람도 별로 없고, 어쩌다 파는 건 한 조각(한 줄이 아님!)에 만 원 가까이 하는 고급 요리입니다. 생각 난 김에 찾아보니 900그램에 12만원 정도 하네요.
하지만 제대로 만들면 그만한 가치가 있는 음식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열심히 음식들을 만드는 이유는 수업 후반부에 열리는 졸업식 연회에 음식을 공급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른바 케이터링 서비스 실습인 셈이지요.
졸업식 사나흘 전부터 스케쥴 짜서 음식을 미리 하나씩 만들어 놓고 행사 당일이 되면 한꺼번에 모아서 잔칫상을 차립니다.
그간 열심히 만들었던 훈제 고기와 피클, 그리고 베이킹 클래스에서 공수 해 온 갓 구운 빵을 합쳐서 만든 미니 샌드위치.
엄청 비싼 결혼식 피로연 음식이 이런 거구나 하고 실감하게 됩니다.
카나페도 종류별로 잔뜩 만들어 둡니다.
가르마제의 좋은 점은 주문 들어오기 전에 음식을 미리 만들어 놓을 수 있다는 거지요.
시트팬 가득한 카나페를 냉장고에 보관 해 뒀다가 서비스 접시에 음식이 떨어질 듯 하면 그대로 다시 채워넣으면 됩니다.
심혈을 기울여 만든 파테, 갈랑틴(닭껍질을 이용해서 만든 소시지) 역시 보기 좋게 잘라서 진열 해 놓습니다.
손님들이 아무 생각 없이 한 조각씩 집어 갈 때마다 "그거 한 조각에 만 원 짜리야!"라고 알려주고 싶은 욕망에 휩싸입니다.
이런 음식들은 주로 결혼식 피로연, 그 중에서도 진짜 돈 많이 쓰는 최고급 결혼식 피로연 음식 수준이라고 하더군요.
음식 준비해서 셋팅까지 해 주는데 만 달러 이상 받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고 하니 왜 수많은 요리사들이 레스토랑보다 케이터링 서비스 쪽으로 빠지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직접 만든 소시지에 직접 만든 각종 소스와 피클을 곁들여 제공하는 핫도그 스테이션.
당연한 이야기지만 가르마제 수업을 듣는다고 해서 연회 음식을 몽땅 차가운 메뉴로만 제공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핫도그 스테이션은 물론이고 주문 받으면 그 자리에서 만들어 주는 파스타 스테이션, 행사장 뒷편 주방에서 바로 만드는 각종 튀김류, 직접 한 조각씩 썰어주는 뜨거운 고기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에 질세라 베이킹 클래스에서는 축하 케이크를 만들어 진열합니다.
개인적으로는 별로 안 좋아하는 버터케이크라서 실망했지만요.
버터케이크가 예쁘게 꾸미기에 최적화된 음식인지라 맛은 별로 없습니다.
그래서 케이크보다는 디저트 코너에 더 눈길이 끌렸네요.
여러가지 요리를 다 먹고 나면 입가심으로 각종 달다구리를 맛볼 수 있게 동선이 짜여져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행사 연회 실습을 마지막으로 CIA의 전반부 수업이 모두 끝이 났네요.
기본 다지기(요리 기초, 고기 개론, 해산물 개론)를 거쳐 외부 인턴쉽과 업장별 수업(연회, 뷔페, 단품, 대량 조리, 베이킹, 가르마제)에 이르기까지.
이제 남은 건 나라별 요리(미국, 지중해, 아시아)와 레스토랑(캐쥬얼 다이닝, 파인 다이닝) 실습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