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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으로는 아무 문제 없어요.

ㅇㅇ |2020.04.14 00:26
조회 9,534 |추천 35

안녕하세요. 저는 평범한 20대초반 여자입니다. 그냥 밤에 갑자기 그때 일이 서럽기도 하고 따로 털어놓을 데도 없어서 여기에라도 털어놓아봐요. 모바일이라 오타 양해 부탁드립니다.

저는 남부럽지 않은 가정에서 태어났어요. 아버지는 개인병원 원장님이시고, 어머니는 주부십니다.

모자란 거 없이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유복하게 살았습니다. 부모님께도 참 사랑을 많이 받으면서 자랐던 것 같아요.

그런데 저에겐 딱한가지 깊게 패인 상처가 있어요. 비록 저 밑에 꽁꽁 숨겨놨지만 저에겐 꽤나 큰 상처에요.

이 이야기를 하려면 초등학교 6학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해요. 그 날은 무더운 여름날이었어요. 여느때와 같이 우리 가족은 저녁을 같이 먹고 티비을 보며 이야기를 나누다가, 아빠는 피곤하셨는지 잠드셨습니다.

엄마는 이미 안방으로 들어가 주무시고 계셨고, 저는 호기심에 아빠 휴대폰을 열어봤어요. 그러면 안됐는데.. 지금도 후회해요. 그때 열어보지 말걸..

아빠는 항상 휴대폰 보안을 철저히 해놓으셨어요. 잠금화면, 카톡. 그래도 저는 비밀 번호을 다 알고 있었어요. 아빠는 그렇게 치밀한 편은 아니었거든요.

휴대폰을 구경하던 찰나에, 익숙한 이름의 카톡방이 눈에 들어왔어요. 아빠가 제 피아노 선생님과 카톡을 주고받고 있더라구요.

원래도 저희 가족과 자주 저녁을 먹고 저희 병원에도 다니시고, 저희 엄마랑도 자주 왕래하는 사이여서 그럴 수 있겠다 생각했어요.

그런데 내용이 그럴 수 있는 내용이 아니더라구요. 서로 사랑고백은 기본, 하트 이모티콘을 써가며 아빠는 그 선생님에게 너가 세상에서 제일 예뻐, 보고싶어 이런 말들을 하고 있더라고요.

그때 생각하면 심장이 벌렁거리고 아직도 손이 떨립니다. 가족들이 다 잠들어 있어서, 소리지르고 울고싶은 걸 이불 물어가면서 울었어요. 잠도 못잘 정도로 울었어요.

솔직히 그런 상황은 나에겐 일어나지 않을 것만 같았거든요. 다 드라마나 소설 속의 얘기라고만 생각했는데 막상 닥치니까 정말 죽을 것 같았어요.

그때는 어려서, 캡쳐하거나 이런 건 상상도 못했어요. 사실 지금이라도 캡쳐하거나 그러진 못할 것 같아요.

그런데 제가 더 미치겠는 건, 아직도 이 사실은 저밖에 모른다는 거에요. 엄마께서는 저랑 오빠을 위해서 한평생을 다 바치셨고, 아빠만을 의지하며 살아오셨어요. 그리고 정말 여리셔요.

제 앞에선 아무래도 자식이니까 대놓고 울지는 못하시고, 다른 일에서도 남몰래 우시는 걸 제가 몇번 본 적이 있으니까요.. 인생에 좋은 일만 있는 건 아니잖아요. 제가 못본 것까지 합하면 정말 많이 우셨겠죠.

그런 엄마에게 전 절대로 말못해요. 아마 전 무덤까지 말 못할 것 같아요. 만약 말한다고 해도, 엄마는 절대로 이혼은 안하실 거에요. 경제권도 다 아빠한테 있고, 제가 괜히 가족 사이 멀어지게 한 애가 되는거죠.

그래서 이건, 정말 저 혼자서 꾹꾹 눌러담으며 살아가야 하는 거에요. 아빠는 제가 그 사실을 안지 십년이 되었는데도 아직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은 듯해요.

솔직히 저 그동안 너무 힘들었어요. 아빠를 볼 때마다 역겹고 정말 하루도 그 생각 안난 적이 없어요. 거짓말 안보태고요.

그 일 이후에 전 아빠와 되도록이면 말을 섞지 않으려고 해요. 근데 또 딸바보시라(그런 척 하는 걸수도 있지만) 저에게 들러붙어요. 그럴때마다 전 한결같이 밀어내죠.

곁에서 지켜보고 있는 엄마는 아빠한테 좀 잘하라고 해요. 엄마 마음도 이해가요. 엄마한테는 제가 제일 미안해요. 딸이 아빠한테 잘하면 정말 좋겠죠.

근데 전 너무 싫어요. 아빠를 볼때마다 경멸스러워요. 한번도 바람 안핀 남자는 있어도, 한번만 피는 남자는 없잖아요?

그냥 전 이렇게 한해 한해 살아갑니다. 십년을 넘게. 남들이 보기엔 정말 한없이 단란하고 화목한 가정이에요. 비록 제 속은 깊숙한 곳에서 타고 있지만요.

길고 횡설수설한 글 여기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추천수35
반대수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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