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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살려달라고 글 썼던 사람입니다.

sha1004 |2020.10.16 16:11
조회 1,496 |추천 6

며칠 전 살려달라고 글 썼던 사람입니다.


https://m.pann.nate.com/talk/354844773


 


긴 글임에도 읽어주셔서 너무 감사 드리고 또 몇 분께서 힘내라는 댓글도 달아주셔서 너무 감사했어요

방송 쪽에서도 연락이 와서 응원 해주셨습니다.

제가 저의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저 자신에 대한 확인입니다. 제가 어떻게 살아왔고, 어디쯤을 살고 있는지.. 그래야 살아 있음을 느끼고 더 열심히 살아갈 수 있을 것 만 같아요

심한 악플만 아니면… 쓴 소리도 달게 받겠습니다. 더 열심히 살아 갈 거에요!!

용기 낼 수 있게 도와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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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세월이 흘러 어느덧 어른이 되었고 사회에 나가게 되었지만 늘 허드렛일 중에서도 사람과 만나지 않는 일만 하게 되고 매일 찾아오는 죽음의 유혹은.. 저를 힘들게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는 신문 한 귀퉁이에 일본 엔화가 한국보다 값어치가 높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비행기 값만 겨우 벌어서 단돈 10만 원을 들고 무작정 일본으로 떠났습니다.

일본에서도 한국 분이 많다는 오사카 코리안 타운을 겨우겨우 물어 찾아가 일을 시작했고 숙식은 가게 안쪽에 간신히 한 사람 누울 정도의 쪽 방에서 잠을 자며 끼니는 가게에서 팔다 남은 것들로 때우면서 악착 같이 일을 했습니다.

벌은 돈을 한 푼도 쓰지 않고 찢어진 속옷을 입고 구멍 난 양말을 꿰매어 신고 옷도 여름 두벌, 겨울 두벌밖에 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샤워할 곳이 없어 가게 문을 닫고 나면 주방 한쪽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가스레인지로 물을 데워 빨랫비누로 머릴 감고 빨랫비누로 세수하고 씻고 그날 입은 옷은 그날 빨아 널었습니다. 그렇게 마지막으로 바닥 청소를 하고 나서야 잠자리에 누웠습니다. 머리 자르는 돈도 아까워 주방 가위로 그냥 잘랐습니다.

여행비자로는 3개월 밖에 못 버텼기에 1년동안 총 4번을 한국에 왔다 갔다 해야 했지만 일본의 돈이 더 값어치가 있었기에 그 정도는 아깝지 않았습니다.

그런 저의 성실한 모습을 보신 가게 사장님께서 1년 비자를 받아주셨고 그렇게 1년에 한번씩 한국에 들어 왔지만… 집에는 절대 가지 않았습니다.

저에게 한국은 상처뿐이었으니까요. 아빠도 엄마도 동생들도 그리고 친구들도 모두 다 저에게는 쓰라린 상처였고 건들기만 해도 소스라치게 놀랄 아픔이었습니다. 딱지가 생길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래도 늘.. 눈에 밟히는 엄마, 아빠.. 꼭 돈 벌어서 집 걱정 없이 편히 쉬게 해주겠다라는 굳은 마음으로 잠자는 시간도 아껴가면서 죽어라 일만 했습니다.

가게 오픈 시간은 11시, 마감 시간은 새벽 2시까지 였습니다. 가게 문을 닫으면 새벽 2시부터 5시까지 주 3일 우유배달도 했습니다. 하루 4~5시간 남짓 잠을 자고 죽어라 죽어라 일만 했습니다.

그렇게 약 10년이란 세월이 흘렀고 제법 일본어를 일본 사람이라고 해도 전혀 의심하지 않을 정도로 구사하게 되었습니다.

구순열 특유의 콧소리가 일본어를 하기에 적합했던 모양입니다. 말문이 트이고 글을 읽을 줄 알자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졌고, 주방 이모가 그만두시고 주방 일을 맡아 하기도 했고 음식에 맛을 내는 것에도 제 의견을 받아들여 줄 정도가 되었습니다.

의외로 장사도 잘 되었고 한국 전통 김치 같다며 사가시는 분들도 많아져 사장님의 인정도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또다시 3년정도 지나게 되었을 쯤 원룸 2만 5천엔 정도인 허름한 방을 구했습니다. 그래도 한국의 저희 집보다는 나았습니다. 안에 화장실도 있고 세탁기도, 냉장고도, 따뜻한 물도 나왔으니까요.

하지만 그렇다고 마음까지 편하진 않았습니다. 아직도 그런집에서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는 가족들이 생각나 또 저의 심장을 쥐어짜듯 저며오게 만들더군요...

마음만 먹으면 보러 갈 수도 있고 어느 정도 용돈도 드릴 수 있었지만 아직은 찾아가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아직은 편히 모실 돈이 부족했습니다. 아직 집을 사기엔 너무도 부족했습니다.

아빠 수술도 해드리고 엄마 관절 치료도 해드리려면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세상 밖으로 나와 보기로 했습니다. 사람들 만나는 건 아직도 두렵지만 일본은 한국보다는 괜찮았습니다. 일본은 그저 내 일만 열심히 하면 누구도 선을 넘어오거나 누구도 나에게 그 이상의 관심도 주지 않았습니다. 지극히 개인주의였지만 오히려 그런 부분이 저에겐 더 편하게 느껴졌습니다.

친구도 곧 잘 사귀었지만 진정한 마음을 털어놓을 만큼 마음을 열지 못했습니다.

사장님은 10년동안 일해줘서 고맙다고... 사업하다 진 빚을 다 갚았다며 퇴직금도 챙겨주셨습니다.

일을 알아보던 중 골프장에서 청소하는 일을 하게 되었고, 새로 이사 온 원룸 옆집에 사시는 할머니를 알게 되었습니다.

어느 나라에든 계시는 곱고 인자하게 생기신 분이셨습니다.

손녀가 그리웠는지 아니면 사람이 그리웠는지 모르겠습니다만 할머니는 저를 정말 친손녀처럼 아껴주셨습니다.

처음에는 오며 가며 인사하는 정도였지만 시간이 지나 차츰 마음의 거리가 좁혀졌고 거의 매일 저녁을 함께하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고 서로의 개인 공간은 최대한 침범하지 않으면서 우리는 점점 한 공간에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할머니로 하여금 고향을 느끼게 되고 저는 할머니와 수다 떠는 시간이 너무나도 좋았습니다.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사람이 없었던 저로서는 일본 할머니와 대화를 많이 했고 그렇게 정이 깊어갔습니다.

살아계실 동안은 참 미워도 했지만 돌아가신 우리 할머니가 생각나기도 했고 따뜻한 이 시간들이 너무 소중했습니다.

할머니께선 조용히 저의 이야기를 듣고 계시다가 이따금씩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고 그 따스한 손길이 너무 좋았습니다.

마음 둘 곳이 없는 처지에 찾아온 할머니는 어느새 저만의 안식처가 되어갔고 저의 삶에 없어선 안될 존재가 되어갔습니다.

그리고 할머니가 좋아하던 게 하나 더 있었는데 바로 제 노랫소리였습니다.

한국어는 하나도 모르시면서 제가 한국 노래를 부르면 그렇게 좋아하실 수가 없었습니다.

뜻은 모르지만 제 노래에는 사람을 감싸주는 포근함이 있다며 어두운 노래보다는 밝은 노래를 부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1년 가까이 시간이 흐르고 어느 날 일을 마치고 돌아와 할머니 집에 가자 할머니는 저를 보시곤 "아가씨 누구세요?" 라고 하더군요. 치매 증상이었습니다..

할머니는 자신이 치매라는 것을 아셨는지 갑자기 무언가 바쁘게 움직이셨고 원룸을 벗어나 시골의 어느 큰 집으로 이사를 하셨습니다.

그리곤 저에게 그곳에 같이 들어와 살자고 제안을 하셨고, 전 고민 끝에 그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할머니의 병세는 조금씩 악화되었고 더 이상 일을 병행하면서 할머니를 돌봐 드리는 게 힘들어 졌습니다.

살면서 한 번도 할머니의 개인 사정에 대해서 묻지 않았지만 묻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가족이 있다면 가족에게 알려야 했고 간병인을 두어야 했으니까요.

할머니를 부양하는 것은 생각보다 더 많은 돈이 들었고 일을 할 수 없는 지금 돈이 가장 걱정이었습니다. 그렇다고 돈을 벌러 나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할머니의 안전이 제겐 최우선이었으니까요.

제 인생 통틀어 처음으로 마음을 터놓을 사람을 만났는데 그런 할머니를 이렇게 잃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전 모든 일을 제 처 놓고 할머니 돌보는 일에 전념했습니다.

할머니는 정신을 놓으실 때도 저만은 기억하셨습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지는 모르겠지만 외출을 하고 돌아오시지 않으시면 꼭 저와 처음 만난 곳에 계셨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두려움을 느끼시다가도 제가 있으면 안심을 하며 제 손을 꼭 잡아주셨습니다.

그럴 때마다 눈물을 속으로 삼켜야 했지만 그렇게 따뜻했던 손은 없었기에.. 그 온기를 잊을 수 없었기에.. 차마 할머니에게 눈물을 보일 수는 없었습니다.

할머니의 손이 더 거칠어지기 전에 할머니의 손이 더 차가워지기 전에 어떡해서든 방법을 찾아야 했습니다.

이런 일이 있은 후 저는 치매에 관한 모든 지식을 닥치는 대로 공부했습니다.

치매라고 해서 아무것도 못하게 하는 것은 더 안 좋다는 것을 알았고 힘든 일을 제외한 집안일이나 바느질 등 소일거리를 계속하게끔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말을 걸었습니다. 사소한 말들도 계속 계속 이어나가게 했고 소변 실수를 하시더라도 절대 나무라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대변을 손에 들고 와서 이게 뭐냐고 물으시는 할머니를 본 순간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란 걸 알았습니다. 어떻게 케어 해야 할지 책을 읽어도 도무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할머니는 먼 산을 바라보며 자식이 하나 있다고 말했습니다.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지,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른다고 말하셨습니다.

할머니에게 연락을 해보라고 청하였지만 절대로 그것만은 안 된다고 우시면서 이야기 하셨습니다.

" 내 자식은 사람이 아니고 괴물이야.." 라고..

그것은 모두 자신의 탓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저를 걱정하셨습니다. 이게 밝혀지면 저에게 무슨 해코지를 할 줄 모른다고..

그래도 알아야 했습니다. 아무리 남보다 못한 사이라고는 하더라도 가족은 가족이었으니까요. 할머니를 어렵게 어렵게 설득한 끝에 전화번호 하나를 주셨습니다.

떨리는 마음으로 연락을 하게 되었고 다행히 전화를 받으셨습니다.

옆집에 사는 사람이라고만 밝힌 저는 할머니께서 치매 판정을 받으셨다고 말했습니다.

눈물이 날 것 같은 거를 억지로 참으며 이야기 했지만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는 눈물을 흘리고야 말았습니다.

"그 노인내 그냥 요양원에 보내!"

라는 한마디와 며칠이 지나 찾아온 아들... 차를 태워 어디론가 데려가는.. 그리곤 할머니의 행방을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 후 할머니를 찾아 여기저기 요양원이란 요양원은 다 찾아 다녔고 그러던 어느 날 전에 살던 원룸 집주인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할머니가 계신 곳을 알아냈다고 할머니께서 전화를 하셨다고 합니다. 딸 아이가 찾으면 알려주라고..

그렇게 찾아간 곳은 정신병동, 지적장애, 특별요양, 입주요양 등 할머니는 그렇게 많은 시설이 모여 있던 곳에 계셨던 것이었습니다.

할머니는 이미 요양 3급 특별요양원에 들어가 계셨던 겁니다. 저는 일반 요양병원만 찾아다녔던 거구요..

제가 찾아뵈었을 땐 저를 알아보시진 못했지만 저의 손을 잡고 놓지 않으셨습니다.

전 요양원 원장님에게 할머니를 직접 모시고 싶으니 취직을 시켜 달라고 이야기 하였습니다. 월급은 안 줘도 좋으니 제발 모시게 해 달라고.. 부탁 드렸습니다.

처음엔 정신병동 에서 3개월 일을 해야 했고, 그 기간 동안 우수사원에게만 자격이 주어지는 홈 헬퍼 자격증을 취득해야 할머니가 계신 요양원에서 일을 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3개월을 버티면 요양원 쪽으로 옮겨올 수 있다는 말에 믿도 끝도 없이 때리고 우는 정신지체장애 아이들과 이해 할 수 없는 행동과 말들만 하는 정신병동 환자들과의 힘겨운 싸움 끝에 연수기간을 겨우 채우고 요양사 일을 시작했습니다.

처음엔 배우는 기간이어서 똥 기저귀 등 오물 기저귀만 빨았습니다. 일이 힘든 건 참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서야 알게되었지만 그것은 직원들 사이에서 텃새 아닌 텃새 였습니다.. 그래도 그때는 할머니를 볼 수 있다는 생각에 힘든 줄 모르고 일을 배웠고 회사 내에서 우수사원에게 혜택을 주는 요양사 자격증을 딸 수 있는 니치이라는 학원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입사 4개월째 홈 헬퍼 자격증을 취득했고, 그 후에도 회사 내 행사나 이벤트 등을 전담 하며 조금씩 입지를 다지기 시작했습니다.

입사 3년이 지나 취득조건이 생기는 요양사 자격증도 취득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조금 더 시간이 지나 원래 잘 걸으시지 못하는 할머니는 다리가 쇠약 해져 휠체어에 앉게 되셨고, 그렇게 늙고 병들어 가는 할머니를 보며 무언가 계속 시도했었습니다...

그런데 하필 제가 쉬는 날.. 침대에서 휠체어로 옮겨 타시다가 침대에서 떨어져 골반부상을 입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누워 지내는 상태가 되셨고... 병동도 옮겨지게 되었습니다.

제일 마지막 급인 특별요양4급...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너무나도 마음이 아팠습니다.

2시간에 한번씩 오른쪽, 왼쪽으로 돌려드려야 했지만 이미 연세도 많으신 할머니의 골반은 쉬이 낫지 않았고.. 족창이 생겨 기저귀를 빼야 하는 상태임에도... 기저귀를 뺄 수도 없는 상태였습니다.

하루 종일 할머니만 돌봐드릴 수 없었기에.. 너무도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할머니가 갑자기.. 제 이름을 제대로 부르셨고 처음 만났던 그때처럼 저에게 펜과 노트를 달라며 무언 갈 쓰셨습니다.

아들에게 쓰는 편지...

읽어 볼 수는 없었지만 어떠한 내용이었을지 짐작할 수는 있었습니다.

저는 그런 할머니의 모습에 너무 불안 했습니다.

이미 일하면서 많이 봐 왔던 모습들 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 조용히 눈을 감으신 할머니...

전 세상을 잃은 듯 했습니다. 죽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할머니가 계셨던 곳이 너무 힘들고 아파서 그곳에 계속 있을 수 없었습니다.

할머니가 계속 생각나고 아직도 그곳에 계시는 것만 같았습니다. 다시 한번 제 손을 잡아 줄 것만 같았습니다.

그래서 그만두었습니다. 그곳에 조금이라도 더 있으면 미칠것만 같았습니다. 할머니의 죽음이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머리로는 알고 있는데 가슴으론 받아들여지지가 않았습니다.

할머니를 잊기 위해 방황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못 마시는 술도 마시고... 옷도 사고 화장도 해보고... 처음으로 돈을 쓰며 미친 듯 하루 하루를 잃어갔습니다.


오늘은 여기서 그만 적어야 겠네요 할머니 생각에 가슴이 너무 아파서 더 쓰기가 힘들어요

정말 행복하기도 했지만, 너무나 힘들었던 시기였어요 할머니가 너무 보고 싶어요

추천수6
반대수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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