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에도 몇 번씩 죽음의 유혹을 뿌리 칩니다. 아니 태어나서 40년 동안 죽고 싶지 않아서 계속 살고 싶어서 발버둥 쳤습니다. 이따금씩 조여오는 호흡곤란과 점점 작아져 가는 제 세상에서 어떻게 해야 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제발 가르쳐 주세요..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던 나라는 작은 생명..
저는 구순열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흔히 아시는 구순열이란 언청이라고도 합니다. 입술이 갈라져 태어나 심하면 입천장과 입술이 없이 아니.. 위 상악 뼈가 없는 상태로 태어나기도 합니다.
저야말로 수술하기도 힘든 양측 구순열 입니다. 입천장이 없이 괴물같이 태어난 나의 얼굴...
심한 사람은 이빨이 입천장 여기저기 주구 난방으로 흩어져서 나기도 한다고 합니다.
발음은 물론 젖도 제대로 물지 못하고 입안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그런 장애입니다.
그런 구순열을 가지고 태어난 저를… 아직 핏덩이도 가시지 않은 그 생명을… 할머니께서 이불더미에 둘둘말아 다락방에 가두었다고 합니다.
금방 죽을 거라며 엄마 품에도 안겨 주지도 않은 채 탯줄을 자르곤 그 어둡고 습한 쥐들이 우글거리는 다락방에 열쇠를 채우고 가두셨답니다.
자신의 아들도 구순열로 태어나 그 모진 수모와 멸시를 어떻게 견디어 냈는지,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가 훤히 보였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저는 남자가 아니라 여자였으니까요. 이 부분은 저희 아빠도 동의 했었습니다. 그러나 생명을 죽이는 게 어디 쉽나요. 할머니는 제가 죽을 때를 기다리며 다락방에 자물쇠를 달아놓고 열쇠를 가지고 다니셨습니다.
시골에 그 흔한 땅도 없어, 농사를 짓기는커녕 남의 밭 붙여먹을 형편도 안되었던 우리 집은 아빠가 흔히 막노동을 하시며 겨우겨우 살아갔었습니다.
그럼에도 엄마는 젖이라도 먹이고 싶었는지 간신히 조금 열리는 문틈으로 손이 찢겨가며 이불더미를 끌어당겨 간신히 보이는 틈으로 숟가락에 젖을 짜서 제게 먹이셨다고 합니다.
앞으로 제가 살아갈 고난과 고통들을 생각하면 너무나 아파서 차라리... 지금 고통을 없애주자.. 라고도 생각하셨다고 했지만 도저히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아빠가 일 하러 나가시고 엄마는 할머니를 도와 집안일을 하시다가 할머니가 잠시 외출을 하시면 젖을 숟가락에 짜서 제게 먹이시고 기저귀도 몰래 틈틈이 갈았다고 합니다.
기저귀를 할머니에게 들키면 안 되니 갑자기 누가 들이닥치면 품속에 숨기시기까지 하셨답니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나고도 제가 울지 않아 죽었을 거라고 생각한 할머니는 다락방 문을 열었고, 그 곳에 아등바등 몸부림치며 놀고 있는 아이를 보고는 다시 문을 잠그셨습니다.
그리고 독한 년이라며 자물쇠를 하나 더 달으려고 하자 엄마가 우시면서 그랬다고 합니다.
"이 쬐끄만것도 이리 살려고 발버둥 치는데 다 큰 어른들이 어찌 그라요??"
"내 혼자서라도 키울 테니 그라지 마시오. 어무이."
그 순간 제가 처음으로 울었다고 합니다.
그 동안의 설움이 한 순간에 폭발이라도 한 듯 너무 크게 울어 동네 사람들이 무슨 난리라도 난 줄 알고 다 나와 보았다고 합니다.
아이는 우는 걸로 의사 표현을
합니다. 배고플
때도..답답할 때도..
짜증날 때도.. 자고
일어나서도.. 등등
아이가 우는 게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데..
저는 태어나서 한번도 울지 않았답니다. 마치 축복받지 못한 걸 알고 있는 것처럼 말이죠.
차라리 그때 죽게 내버려두지..그랬어... 커가면서 수만 번도 더 생각했었습니다.
저는 한살이 되어도 할머니의 반대로 호적에 올리지 않았고 어느 날 동네보수공사로 나오신 군부대 사단장님께서 저를 보시곤 군인 병원에서 무료로 수술을 해주셨다고 합니다.
잘못 호적에 올린 탓에 2살이나 많은 나이가 되었지만.. 그런 것 쯤이야... 제가 살아온 인생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축사들로 둘러 쌓여 똥 냄새와 파리들이 우글거리던 곳.. 그곳이 저의 집이었습니다.
똥 냄새를 맡는 건 일상이었고 깨끗히 청소를 하고 빨래를 해도 옷에 베어나는 냄새는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국민학교만 간신히 졸업하신 엄마는 사람들의 말을 빨리 이해하지 못합니다.
구순열 장애로 놀림 받는 학교가 싫어서 국민학교도 다니지 않으신 아빠.. 어쩌면 저에게 가난이란 미리 준비되어있던 인생이었습니다.
할머니와 아빠는 까막눈입니다. 의사소통에는 문제가 없지만 쓰실 줄은 모릅니다. 엄마는 완전한 까막눈은 아니지만 까막눈이라고 해도 거의 무방합니다.
2살, 7살 터울인 남동생들은 심하진 않지만 발달장애를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인지 모르지만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형편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빚만 늘어 갔습니다. 식구들이 많아져 아빠와 엄마가 같이 막노동을 하셨고, 저희들은 할머니 손에 자랐습니다.
어른들은 몰랐습니다. 세상이 변했다는 것을.. 할머니 엄마 아빠 세대에서는 괜찮았을 겁니다.
말만 하면 돈이 없어도 파는 물건을 외상으로 내어 주고 집문서 땅 문서 없이 살아도 그저 여기 살고 있으면 아무도 문제 삼지 않았으니까요. 그러나 우리 세대에서는 달랐습니다.
있는 사람들은 더 했고, 없는 사람들은 그 없는 형편에서도 더 뺏겨야 했습니다.
사기꾼들이 판치는 공사현장에서 뼈 빠지게 일하고 아무것도 못 받고.. 원래부터 우리 집이었던 곳이 갑자기 모르는 주인이 나타나 나가라고 내 쫓기었고…
그래서 힘들게 구한 월세 3만 원짜리 집인데도 월세가 밀려 쫓겨나는 건 다반사였습니다.
어느 날은 글도 모르는 엄마에게 빚이 있다며 사체업자들이 찾아왔습니다.
그래도 아빠는 그걸 갚기 위해 열심히 일을 했지만, 고용주들은 돈을 주기는커녕 구순열이신 아빠를 무시했습니다. 돈을 달라 물어 물어 집을 찾아가도 문전박대를 당하는 일이 허다했습니다.
이게 다 글을 몰라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근로계약서라는 것도 모르고 집문서라는 것이 뭔지도 몰랐으며 싸인을 하라는 문서가 무슨 문서였는지도 몰랐으니까요.
"병신이 병신을 낳았네.." 제가 어렸을 때 항상 듣던 말입니다.
하루는 막노동을 하시던 엄마가 다쳐서 집에 들어오셨습니다.
건장한 남자분들도 하기 힘든 벽돌을 지고 나르는 일을 하시다가 계단에서 발을 헛디뎌 발목을 삐었습니다.
넘어질 때 그 무게에 눌려 손가락에 금도 가서 집안일도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어떡해서든 가족들 밥은 먹여야 했기에 밥을 하기 위해 저와 같이 나갔습니다.
저희 집은 밥을 하려면 마당에 있는 천막까지 나와야 했습니다. 따로 주방이 없었기 때문에 아빠가 임시로 각목을 새우고 비닐로 천장을 둘렀습니다.
수도도 없는 집이라 물을 구하려면 산으로 올라가 길어와야 했습니다. 마을에 우물도 없었습니다.
손이 불편하신 엄마를 도와드리고 싶었지만 어린 저는 힘이 없어 그 작은 바가지에도 5~6번을 받아 날라야 겨우 한 바가지를 채웠습니다. 그리고 겨울에는 길어온 물이 얼지 않게 방안 제일 따뜻한 아랫목에 물을 두고 살았습니다.
지금은 그 흔한 보일러도 없어 나무를 패러 다녀야 했고 나무장작이 없으면 밥을 지어먹을 수 없으니 늘 나무를 구하러 산을 올라야 했습니다. 나무 장작도 얼면 불이 잘 안 붙어 방 안으로 들여놔야 했습니다.
엄마는 일하다 다쳤으니 산재를 받으려고 했지만 산재는커녕 일한 돈도 다 받지 못하고 또 쫓겨나게 되었고 그런 엄마를 보고는 아빠도 속이 상한 나머지 언성을 높이셨고 제가 듣고 있는지도 모른 채 엄마를 나무랐습니다.
그런데 엄마는 아픈 손과 아픈 다리를 이끌고 제 귀를 막고는 미안하다고 했습니다.
아빠에게 뿐만 아니라 저에게도 미안하다고 너무 미안하다고... 착한 엄마.. 불쌍한 우리 엄마...
그날 이후로 엄마의 휜 손가락만 보면 지금도 눈물이 납니다. 쩔뚝거리는 다리를 보면 눈물이 납니다. 엄마는 늘 옷도 어디선가 주워 오셔서 입으셨습니다.
구순열이신 아빠는 늘 일 하고 돈도 못 받고 간신히 받아와도 이미 여기저기서 외상값을 갚고 나면 또 다시, 쌀독은 늘 비어있었습니다.
태어나 한 번도 수술을 받지 못한 아빠는..시골구석으로 구석으로 점점 들어가셨고 그렇게 어찌어찌 살 수 밖에 없었던 것 같습니다.
하루 세끼를 아니..한끼도 못 먹었던 적이 많았던 어린 시절의 저는 늘 이유 없이 힘들어야 했고 이유 없이 무시당해야 했습니다.
가끔 마을에서 잔치가 열리면 잔치에서 남은 닭고기, 염소고기를 나누어 주실 때가 있었습니다. 그 고기가 얼마나 맛있었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외상도 너무 밀려 안 될 때는 엄마가 저와 동생을 절에 데려가곤 했습니다.
엄마는 절간 허드렛 일을 하시고 얻어먹는 밥을 배부른데도 더 먹어두라고 밥을 산더미처럼 퍼주시곤 했습니다. 집에 가면 쌀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국민학교 어느 날 저는 손으로 점심으로 싸주신 도시락에서 반막 먹고 남긴 밥을 둥글게 말아 나뭇잎에 싸서 집에 가져왔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엄마, 아빠는 일을 가셨고 밥은 당연히 없으니 배고프다고 우는 동생을 위해 어제 먹지 않고 남겨놓은 밥에 그래도 집에 있는 김치로 죽을 만들어 먹었습니다.
개울가에 가서 가재를 잡아 된장을 풀어 넣어 끓여먹고, 다슬기를 잡아 끓여먹고 칡을 캐서 씹어 먹기도 하고, 그래도 배고프면 된장을 그냥 퍼 먹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게 힘든 건지 몰랐습니다. 원래 사람들은 다 그렇게 사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저의 힘든 삶은 우리 마을을 벗어나 다른 지역에서 학교를 다니면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같은 마을에서 학교를 다닐 때는 몰랐습니다. 다 비슷비슷한 것도 있지만 어렸을 때부터 같이 자랐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른 지역에서는 다르더군요.
초등학교 6학년 시절 음악시간엔 "나무야~ "
이 한 구절을 부르자 "앉아" 라고 말하시는 선생님...웃는 반 친구들...
아직도 상처로 남은 음악시간... 발음이 이상하다고 한 구절도 부르지 못한 채 앉으라는 선생님이 너무도 미웠습니다.
구순열이라는 이유로 꿈 조차도 갖지 못했고 희망조차도 갖지 못했습니다.
어린 12살의 나이에 이미 그 무엇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버린 저는 마음속에 계속해서 내 자신에게 스스로 상처를 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늘 주워오신 옷을 얻어왔다고 저에게 거짓말을 하시며 입히시던 엄마가 미웠습니다.
조금 색이 이쁜 옷은 잘라 꿰매어 저를 입히셨지만.. 그 옷 조차도 너무나 싫었습니다.
한참 멋 부리고 싶은 나이임에도 늘.. 남자아이의 옷인지 누구의 옷인지도 모르는 옷을 입어야 했고 새옷은 꿈도 꾸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사춘기가 되었고 사춘기였던 저는 더욱 구순열인 아빠가 원망스러웠습니다. 제 속을 이해 못하는 엄마가 미웠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지긋지긋한 가난도 너무 너무 싫었습니다.
늘 배가 고팠습니다. 친구들이 사먹는 떡볶이가 너무 먹고 싶어서.. 내일 갔다 주겠다며 외상으로 사먹은 적도 있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아주머니에게 무릎 꿇고 사실대로 말했습니다.
아주머니는 괜찮다며 떡볶이 한 접시를 주셨습니다.
저는 봉지에 담아 집으로 가져와 팅팅불은 떡볶이를 동생에게 주었습니다. 눈물이 났습니다.. 저도 너무 배가 고프지만 동생에게도 먹여야 했기에 동생이 누나 먹으라며 내민 떡볶이에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습니다.
'아빠가 구순열만 아니었다면... 엄마가 조금만 더 현명했다면..' 이렇게 하루하루를 원망과 미움으로 채워갔습니다.
그래도 집에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원망스럽고 미워도... 불쌍한 우리 아빠, 엄마에게 차마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중학생이 되어 운동부가 되면 학비를 내지 않아도 된다는 친구의 말에..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운동을 하면서 저의 반항심은 더욱 커져만 갔습니다.
친구들은 운동부인 저를 함부로 대하지 못했고 저는 운동부가 뭐라도 된 양 보는 애들마다 시비를 걸었습니다.
그렇게 방황하는 저를 주지스님이 부르시고는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1가지를 잃은 대신 9가지를 가질 것이야! 참고 견디면 그때가 올 것이야!"
하지만 이미 가난 이란 걸 알아버린 저였기에 그런 말씀을 하신 주지스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때부터 절에도 가지 않고 저는 그저 슬플 때마다 동네 방죽에 앉아, 그저 생각나는 대로 가사를 붙여 노래하고 실컷 울고.. 죽고 싶은 마음에 물속에 뛰어 들어가 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가슴 팍 까지 물이 차오르던 순간 물이 무서웠습니다.
이내 죽지도 못하고...혼자 그렇게 아픔을 견뎌냈습니다.
동네에선 귀신소리가 난다고 소문까지 돌 정도였습니다.
그게 저였다는 걸 아무도 모른 채 말이죠.
저는 그렇게 가난에 찌들어 매일매일 죽고 싶다는 생각으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쓰다 보니 옛 기억이 나서… 또 눈물이 하염없이 흐르네요…
저는… 살고 싶습니다.
이제는 정말 죽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매일 밤마다 죽음을 생각하게 됩니다.
너무 힘들어요. 제발 제게 버틸 수 있는 용기를
주세요. 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