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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버린 똥차가 벤츠랑 결혼한다

나호구 |2020.12.30 06:24
조회 4,995 |추천 0
열아홉에 오빠를 처음 만났지. 


약속시간이 10분, 20분 지나 갈수록 연락도 되지 않는 사람을
계속 기다려야하나 고민하다
오기가 생기고 화도 나고 그래서 계속 기다렸어 

40분쯤 지나고 사람들 사이로 
키 큰 남자가 허둥지둥 다가오더라
미안하다고
많이 기다렸냐고 
나를 보며 해맑게 웃는 얼굴을 보는데
첫 눈에 반해버리는 저주에 걸려버렸어

롯데리아에 마주 앉아 햄버거를 먹는데 
오빠는 몇 입 잘 먹지 못하더라. 
눈도 잘 못 마주치고 얼굴은 자꾸 빨개지고 수줍어 하면서도 
이쁘다고 말해주는 오빠를 보면서 가슴이 설렜어

나도 오빠처럼 잘생긴 사람을 본 적이 없었어


다음날에 또 만났고 
그 다음날에 또 만났지

텅 빈 학교 운동장에 앉아 여자친구가 되어 달라는 고백을 받았고
오빠라는 저주에 점점 깊이 빠져 들어갔어


그러다 어느 날 이상한 메시지를 받았어

내 남자랑 같이 놀아서 좋은지
롯데월드는 재미있었는지
왜 그러고 사는지


누구냐고 물어보니 오빠의 와이프라고 하더라

뭐라고?
꽃 같은 열아홉에 영화와 같은 사랑에 빠졌는데
상대가 유부남이었다고?

처음 고백 받은 그 운동장에서 오빠는 내게 두 번 째 고백을 했어.결혼을 한 적이 있다고.

고향에서 사귄 여자친구였는데
취업하고 상경 할 때 두고 올 수가 없었대
친아버지한테 계속 학대 받으면서 지내게 할 수 없어서
같이 올라와 결혼했다고

그런데 여자가 매일 술 마시고, 친구 사귀어서 연락 두절도 되고,
그러다 폭력까지 쓰더래

오빠는 너무 도와주고 싶고
사랑하고 지켜주고 싶어서 노력했는데
정신이 온전하지 않은 그 여자 때문에
지금은 이혼 소송 중 이라고

처음부터 다 말하면 내가 만나줄 것 같지 않아서 
내가 너무 좋아서 말하지 못 했다고.

오빠는 울었어.
나도 울고.


기묘하고 이상한 시간들을 보내며 기다렸어

마침내 오빠는 돌싱이 되었는데
그때부터 뭔가 달라졌어

우연히 여자 동창과 나눈 메신져 대화를 봤는데
오빠는 나에 대해 이렇게 말하더라

와이프와 헤어지고 새로운 여자를 만나긴 하였으나
사랑까지는 아니라고

나에게는 무릎 꿇고 눈물까지 글썽이며
부족한 오빠를 사랑해줘서 너무 고맙다고
나를 너무 사랑한다고
내 배꼽에 얼굴을 비비던 사람이.


배신감에 물어보니 그랬지
중요하지 않은 사람에게 그런 감정까지 시시콜콜 말하는 게 싫다고
자기를 믿어달라고.
자기의 사랑을 믿어달라고.

나는 이미 오빠 없으면 숨도 못 쉬는 호구가 되어 있어서
자꾸 마음 아픈 일이 생겨도 참았어


오빠가 제일 잘 하는거 있잖아
가스라이팅.

그리고 정신 못 차릴 만큼 사랑해주는거 
혹은 사랑 받는다고 착각하게 만드는거.

돌이켜보면 나는 인지부조화를 겪고 있었던 것 같아.
오빠를 믿었어.

나와의 미래를 위해서
직장에 1년 더 계약 연장을 요청한다고 했을 땐
얼마나 고마웠는데.

근데 막상 그 시간이 다가오니 말이 달라지더라.

아주 중요한 시기에
여자 때문에 (나)
인생 계획을 수정 하는 게 맞는건지 모르겠다고.

그래서 원래 계획대로 계약이 끝나고 오빠는 고향으로 돌아갔어.

여름 방학 때 꼭 놀러오라고 말하는 창백한 오빠를
터미널에서 껴안으며
이게 마지막임을 직감했어.

그렇게 오빠는 돌아가고 딱 삼일만에 그러더라
장거리 연애는 힘들다고.
좀 더 자유롭고 싶다고.

태어나서 처음 느껴보는 고통이었어.

새 학기가 시작 되었는데
학교도 못 나가고
밥도 안 먹고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서
프리즌 브레이크 정주행을 몇 번이나 했는지.


더 이상 결석 할 수 없을 때 지하철을 탔어
오빠와 자주 가던 역이 나오면 내려버렸어


울면서 집에 가는 길에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안 하면 죽을 것 만 같아서 전화를 했어

어떤 여자가 받더라.


나는 이렇게 힘들고 죽을 것 같은데
오빠는 도전하고 모험하고
새 출발 할 필요도 없는
오빠의 삶을 살고 있더라. 

그 후로는 오빠를 잊는 것이 목표가 되었어.

남자는 남자로 잊는 거라며?

더 놀고
더 나가고
더 만나는데
한 번 걸린 저주는 나를 놓아 줄 생각이 없었나봐


3년 후
오빠와 나는 영화처럼 재회했어

우리는 좀 더 성숙해졌다 믿었어

사랑하지 않아서 헤어진 게 아니라
장거리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헤어졌던 거라고 자위하면서 
오빠는 내게 남겨둔 저주의 씨앗에 부지런히 물을 주었어

우리는 다시 만났고
나는 오빠를 더 사랑했어

다시 만난 오빠는 불미스러운 일로 직장에서 해고를 당하고
음식 배달 일을 하고 있었어

불미스러운 일 이라니?

사내 연애 중 이었는데 미혼모였대
그런데 여자가 노는걸 좋아해서 주말마다 클럽에 가고
양육도 제대로 하지 않아서 둘 사이가 좀 삐걱거렸대

어느 날 술 취한 여자친구가 데리러 와 달라고 해서 갔더니
실신 직전이라 좀 과격하게 업고 나왔는데
다음 날 그 여자친구가 폭행으로 고소를 했고
그 일로 직장에서 해고 당했다고

그 때는 오빠가 안쓰러웠어
오빠 주위에는 왜 항상 이상한 여자만 꼬일까

오빠가 얼마나 연기를 잘했으면
내가 얼마나 물러 터졌으면 사람을 그렇게 못 알아 봤을까.

힘든 상황에서도
궂은 배달일 하면서 다시 시작하려는 오빠 모습이
오히려 좋아보였어

우리가 다시 연애를 시작하고
오빠 주변의 이성 친구들로부터 질투 비슷한 감정을 느꼈는데
내가 예민한 건 줄 알았어
근데 그 질투가 이상한데서 터지더라


오빠랑 친한 친구라고 했던 그 여자가
대마초 소지로 오빠를 신고했어

살고 있는 집에서도 쫓겨나고
오빠는 장기 민박을 구해 살았지
경찰에 협조하면 기소되지 않는 조건으로
오빠는 몇 달 동안 와이어를 차고 대마초를 사러 다녔고

바퀴벌레도 살 것 같지 않은 장기 민박집 방에서
하루하루를 버텨냈어

그 일이 끝나는 날
도망 치듯 초라한 짐을 싣고
내 자취방으로 들어왔고
그 후로 우리는5년을 함께 살았어

그 첫 해에 생긴 일 기억나?
왠 무섭게 생긴 아저씨가 찾아와서는
오빠를 찾더니
친자확인소송 고지 받은 날

나는 삼류막장드라마에서 살았어.

전해받은 고소장에는
오빠 이름 이외에 세명의 이름이 더 있었지.
그게 다행이라 생각했어.

오빠가 아닐 확률도 저만큼 있으니 다행이다.

구차하고 궁상맞은 정신승리하면서

나는 오빠에게 천천히
그러나 확실히 길들여져 갔어

햄버거 하나도 마음대로 못 먹었어
먹으려고 하면 오빠가 내 배를 쿡쿡 찌르면서
귀여운 목소리로 배가 조금 나온 것 같지 않아? 하니까
못 먹겠더라

언제부터인가 배달 음식 몰래 시켜먹고
안 먹은 척 연기하는 나.

게으른 나를 너무 싫어해서
혼자 있을 때만 낮잠 자던 나.

지인들 앞에서 오빠가 나에게 큰 소리치고 막 대해도
이상함을 못 느낀 나.

알바 두 개 뛰면서 임용고시 공부도 열심히 했는데
당장 취업이 아닌 알바나 하고 있다고
쓸모없는 사람이라는 오빠의 말에 
아무 말도 못한 나.

수많은 이성 친구들을 이해 하려고 노력한 나.

그리고
그런 나를 너무 잘 알았던 너.

처음 보는 사람도 집으로 데려올만큼
만인에게 친절한 너.

나에게만 너인 너.


내 질투를 매도했지만 느낌이 너무 쌔했어

그 중에 한 명이 거의 오피스 와이프 수준이더라

오빠를 믿지 못한다고 
믿음이 부족한데 어떻게 같이 사냐며
오빠는 내게 화를 냈고
나는 대화 좀 하자 했어

양념 치킨을 두 손가락으로 쩝쩝 먹는 오빠를
가만히 보는 게 견딜 수 없어서
제발 대화 좀 하자 부탁했어

쳐다도 안 보고
눈도 안 마주치고
대답도 안 하는데
내가 뭘 어떻게 하겠어?


얼굴을 가까이 댔더니
양념 묻은 손가락을 내 눈앞에 갖다대더라

내가 모르는 얼굴로 오빠가 말했어
밥 먹는데 건드리지 말라고


그러다 그 손이 내 눈에 닿았고
너무너무 아파서 울었어
너무너무 서러워 울었어

마음이 너덜너덜 해져야 저주가 풀리나봐
저주받은 마음 조각까지 다 태워 먹고서야
앞이 보이기 시작했어

나도 오빠처럼 이성 친구들 만나고
메신저로 대화하고
문자로 대화했어

나는 왜 안 돼?


우리 헤어지고
나는 오빠가 만났던
정신 나간 이상한 여자들 중 한 명으로 회자 되겠지

오빠는 우리 지인들에게 내 험담을 하고 다녔지만
나는 끝까지 오빠의 치부를 지켜줬는데

예전 부인과 이혼하고
함께 키우던 강아지를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서
익사시키고 묻어주었다는
오빠의 오싹한 과거를.


경찰 조사 받을 때
쉽게 거짓말 탐지기를 통과했다는
오빠의 비뚤어진 무용담을.



나의 빛나는 20대를 온전히 다 주었는데
우리 헤어지고 두 달 후에 오빠는 운명의 상대를 만났다고 했어

그 여자를 만나기 위해 이 모든 일을 겪은 것 같다고.


좋겠네.
나는 아직도 오빠 생각이 나서 페이스북을 종종 보는데.

요즘 오빠 잘 나가나 보더라.
여자친구한테 열기구타고 프로포즈도 하고.


우리 헤어지면 오빠는 똥차를 만날 줄 알았는데
연봉 1억 의료계 종사자 돌싱 연상녀를 만났더라.

내가 아는 오빠는그 여자를 절대 놓치지 않겠지.

나는 아직도 가끔 울어


우리는 이미 헤어졌는데
동거 정리하는 애매한 며칠 동안 정말 힘들었어

술이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취하고 눈 감으면 다 없어지니까.

마시고 마시다 속을 개워내는데
뒤에서 머리를 잡아주고
맨손으로 오물 닦아주고
등 두드려 주는 오빠 때문에 죽고 싶었어

혼자 움직이지도 못하는 나를 침대에 눕히고
오빠도 내 배 위로 올라 오더라

너무 싫은데
꺼지라고 말 한 마디 못하는 나를
마지막으로 보란듯이 그러고 싶었니.


다음 날 오빠는 없었어.

나는 동생이 없었으면 굶어 죽었을거고.



오빠가 불행하길 바라지는 않아.


다만

오빠도 나와 똑같은 고통을 당하길

똑같은 아픔에 허덕이길 바랬나봐.


그런데 행복한 오빠의 사진을 보니

모든 것이 너무 허무하다..
추천수0
반대수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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