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올해 35살 직장인 남자입니다.
저에게는 어린시절 같은 동네에서 놀던 동네친구가 있었습니다. 유치원도 들어가기 전부터 한동네 살던 친구라서 같이 골목에서 공도 차고 술래잡기도 하면서 놀던 사이였습니다.
근데 초등학교 때부터 다른 학교를 다니게 되어 자연스럽게 소원해졌습니다. 물론 같은 동네에 계속 살았으니 오며가며 인사는 했지만 예전처럼 따로 만나서 놀 정도로 친하진 않았습니다.
그 친구를 다시 만난건, 고1때 같은 반이 되면서 였습니다. 저는 반갑기도하고 해서 친하게 인사를 했죠. 그 친구도 반가워하긴 했지만, 거의 10년만에 만난 그 친구는 많이 달라져 보였습니다.
노는 친구들이랑 다니면서 소위 '일진' 노릇을 하고 있더군요. 저는 전교권까지는 아니지만, 반에서 5등 안에는 드는 학생이었습니다. 중학교 때는 반장 같은 임원도 많이했구요.
어쨌거나 저랑은 좀 다른 그룹이 된거 같아서 인사는 했지만, 별로 친하게 지내진 않았습니다. 그 친구도 별로 저랑 친하게 지낼 생각은 없는것 같았고요. 그런데 첫 중간고사 기간에 사건이 터졌습니다.
그 친구가 저에게 시험 시간에 답안을 적어서 쪽지를 전달해 달라고 하더군요. 자기는 어짜피 수능봐서 대학갈 실력은 안되고, 내신 관리나 잘해서 인서울 낮은 학교라도 가는게 목표라고 했습니다.
처음엔 당연히 거절했고, 그 친구는 집요하게 부탁을 했습니다. 어릴적 친구 좋다는게 뭐냐며.. 만약에 걸리더라도 저한테는 절대 피해가지 않게 하겠다고 신신당부를 했습니다. 저보고 답을 다 알려줄 필요는 없고 80점만 맞게 해달라며, 그러면 어짜피 저보다 낮은 등수일테니 피해가는거 없을꺼라는 이상한 논리까지 들이댔습니다.
고민 끝내 첫 시험에서 부정행위를 했습니다. 다행인지 걸리진 않았고, 그 친구는 원했던 80점대 점수를 받았습니다. 고맙다고 연신 인사하며 맛있는걸 사주겠다느니 너밖에 없다느니 계속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저는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선을 그었습니다.
다음 시험에도 역시 쪽지를 요청했고, 저는 지금 아니면 학창시절 내내 시달릴꺼라 생각해서 과감히 요구를 거절했습니다. 결국 그렇게 시험은 끝났고 그 친구는 바닥 점수가 나왔지요.
그 다음날 그 친구는 저를 끌고가서 폭행을 가했습니다. 상처가 보이는 곳은 안된다며 복부랑 옆구리 같은데를 가격하고 담배불로 눈을 지지겠다느니 꼬챙이로 사타구니를 찌르겠다느니 등의 협박을 했습니다. 그때부턴 어릴적 친구가 아니라 괴물로 보일뿐이었습니다.
한술더떠 그때부터 반에서 왕따를 시키기 시작했습니다. 저랑 같이 다니는 친구가 있으면 따로 불러서 비슷한 식으로 협박하고, 누군가 저에게 호의를 보이면 찾아가서 응징했습니다. 저는 그때부터 학교를 혼자 다녀야 했습니다.
그렇게 지옥같은 시간이 끝나고 저는 대학에 진학했습니다. 다행히 인서울 상위권 대학에 입학했고, 원래 성격대로 친구들 잘사귀고 과대표도 하고, 동아리 회장도 하는듯 행복한 대학생활을 마쳤습니다. 졸업해서 지금의 공공기관에 입사했고, 그렇게 고등학교 시절 트라우마는 잊혀지는듯 했습니다.
그런데 지난주에 외주업체 미팅 자리에서 그 친구를 만났습니다. 참고로 제 업무가 하청기업에 발주를 맡기고 업체선정 및 프로젝트 관리감독을 하는 역할이라, 관련 중소기업 사장님들을 많이 만납니다. 그렇다고 절대 갑질하는 위치는 아니지만, 업무 특성상 다양한 기업 사장님들이 저에게 찾아와서 사업설명을 하시긴 합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그 친구가 있더군요. 어찌된 일인지 그 나이에 신입으로 그 회사에 들어간거 같고, 이번에 OJT 겸 해서 처음으로 회의에 따라 온것 같습니다.
회의 자리에서 서로 눈이 마주쳤고, 어색한 침묵만 흘렀습니다. 서로 누가 먼저 인사하기로 어색한 순간이었습니다. 근데 그 친구의 회사 사장님이 눈치를 채셨는지 서로 아는 사이냐고 물어보셨고, 너무 잘됐다며 너스레를 떠셨습니다. 아마 사장님 입장에선 작은 인맥이라도 활용해서 본인 회사의 입찰에 유리하게 이끌고 싶으셨나 봅니다.
저는 자리를 박차고 나왔고, 바로 팀장님께 얘기해서 동 사업 담당자를 변경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사실 저희는 각 PM이 여러 프로젝트를 분배해서 담당하기 때문에 서로 합의하에 업무를 변경할수 있습니다.
사실 그 프로젝트를 계속 맡아서 그 친구를 곤경에 빠뜨릴수도 있고, 나쁜 말로 갑질을 해서 복수를 할수도 있었습니다. 근데 그 친구 얼굴을 본 순간 옛날의 트라우마가 떠오르면서 얼굴이 심하게 떨리고 심장이 터질것 같아서 도저히 앉아있을수가 없었습니다.
살면서 절대 마주칠일 없을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다시 만나니 세상이 좁긴 좁은것 같습니다. 저는 후배에게 이 프로젝트를 넘겼고, 제 과거에 대해선 얘기하지 않았지만 심사과정을 저에게 중간 보고해 달라고 요청해 두었습니다.
저에게 평생 잊지 못할 트라우마를 준 사람인데 절대 제대로 살지 못하게 하고픈 마음과, 그래도 이제 나랑 무관한 사람인데 마음 속으로 용서하고 잊어버리자 라는 마음이 복합하게 공존해 어지러운 마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