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 뜨기 직전이 가장 어둡다 현재 나의 심리적, 사회적 상태는 중2병과 같은 매우 불안정하고 아슬아슬한 상태이다. 나의 유년 시절은 굉장히 기대적이였다.어렸을 때부터 주위 이웃들에게 인사를 잘 하며, 특히 마을에서 5일마다 열리는 5일 장에어머니와 함께 나가 상인들에게 인사를 하면 “아휴 IMF 때문에 힘들어서 죽을 것 같아도 너 덕분에 내가 산다.” 라는 이야기를 듣을 정도로 인사를 잘하며 이쁨받는 아이였다. 이런 내가 변한 것은 16살, 어떤 한 계기를 통해 바뀌게 되었다.중학교 시절, 외모적 열등감으로 그것을 덮기 위해 외향적 치장과 돈으로 주위를 사려고 한아주 안 좋은 방법으로 학업에 임하였고, 이는 더 안 좋은 결과를 초래하게 했다.아무리 외향적으로 나 자신을 속여가며 꾸민다 한들, 이것은 분명 거짓말 임이 틀림 없었고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었으며 내 거짓말을 이용하는 사람도 있었다. 돈으로 친구를 사려 하면 그 돈을 위해 친해진 친구들, 외모를 꾸미고 오면 그것을 웃음거리 삼아 놀리던 친구들.하지만, 그땐 미처 알지 못하고 잘못된 방법을 고집하며 중학교를 졸업 하였다. 고등학교에 진학을 해도 이는 달라지지 않았다. 예전에는 빠른년생일 경우 초등학교를 1년 빠르게 입학할 수 있었고 나 또한 그런 케이스였다. 그래서 나는 16살에 고등학교에 입학을 하였고 내 과거를 숨기고자 내가 졸업한 중학교에서 아무도 지원하지 않은 멀리 떨어진 공업 고등학교에 입학을 했다. 이 또한 학우들에게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 교복 바지를 줄이고 염색과 파마를 하여 무섭게 보였으면 했고 담배도 피우며 무서운 학생들을 어설프게 따라 하였다. 그렇지만 아무 연고 없는 내가 다시 처음부터 친구들을 사귀는 일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니였다. 반 친구들 주위를 겉돌다 보니 학교에 가기 싫어졌고 동네 친구들과 함께 학교에 가지 않고 노는 것이 더 재밌었다. 하지만 그런 나에게 다가와 주는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는 반에 꼭 있는 정말 착한친구였다. 그러나 그때의 나는 무서운 친구들을 어설프게 따라 했던 나였기에 그 친구와 놀게 되면 다른 친구들이 날 얕보게 될까봐 마음의 문을 여는 것이 쉽사리 되지 않았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계속 다가와줬던 친구이기에 그 친구를 의지하며 보다 나은 고등학교 생활을 하던 중 여름방학이 찾아왔고 그 여름방학은 정말 빨리도 지나갔다.여름방학이 끝나갈 무렵, 그 친구에게 오랜만에 연락이 왔고 정말 일상적인 대화를 나눴다.이야기가 끝난 후, 우리는 개학식에 밝은 모습으로 다시 보자는 기약을 하며 통화를 마쳤고,개학식 날 학교에 갔다. 모든 학생들이 열심히 교실로 향하고 있었지만, 대부분에 학생들표정이 어두웠고 서로 속닥거리며 등교를 했다. 나는 ‘무슨 일인가’ 하는 마음으로 교실에 들어섰고, 내가 오자마자 한 친구가 말을 걸었다. “뉴스 기사 봤어? OO이가 죽었대.”라며 나에게 처음 말을 걸어준 내 친구가 개학 하루 전에 물놀이 사고로 죽었다고 하는 것이다. 나는 가방도 내려놓지 않고 뉴스 기사를 찾아봤고 그 기사에는 ‘교회 야유회에서 물놀이 도중 16세 아이가 물에 빠진 13세 아이를 구하고 파도에 휩쓸려 사망 하였다’는 글이적혀 있었다. 곧이어 담임 선생님께서 들어와 다시 한번 기사에 대해 설명해줬고 방과 후 친구의 장례식에 갈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셨다.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내 소중한 사람이 내 곁을 떠난다는 충격을 받게 되었고 그 충격은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비참하고 참담했다. 장례식에 가는 내내 비통하였고 식장에서 본 그의 부모님 표정을 보자 내 비통함은 더 커졌다. 그렇게 허무하게 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내 소중한 사람을 처음 보내게 되었다. 그 후로 나는 마음을 바로잡지 못했고 학교도 더 가기 싫었다. 동네 친구 집에 놀러 가서 게임하고 놀러 다니며 학교에 아예 적응하지 못했고 집도 들어가지 않아 부모님께 혼나기 일수였다. 그렇게 학교에 가면 담임 선생님은 나에게 “그렇게 학교에 나오지 않을 거면 부모님 모시고 와서 자퇴해.”라는 말을 하셨고 그 말에 어린 마음에 어머니께 가서 “학교에 가지 않겠다, 선생님도 오지 말라고 하는데 내가 왜 학교에 가서 앉아있어야 하는지 모르겠다.”라고 말하였고 부모님 역시 선생으로서 학생에게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하여 다음 날 나를 데리고 학교로 갔다. 교무실에서 담임 선생님을 앞에 모시고 이야기를 하셨다. “정말 우리 아이에게 자퇴하라고 하셨나요? 우리 아이가 선생님께 잘못을 했다면 때리시고 야단치시는 건 이해하는데 선생이 되셔서 아이를 지도하지 않고 포기하시는 것이 선생으로서 맞는 행동이라 생각하시는 건가요?”라고 말씀하셨고선생님 말씀을 듣지도 않으시고 자퇴서를 쓰고 나왔다. 집에 가는 길에 차 안에서 엄마는 나에게 “검정고시 합격할 자신 있지?”라고 물으셨고 난 이제 학교에 가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네.”라고 대답했다. 그렇게 난 자퇴를 했다. 자퇴 후 난 인터넷 강의를 들으며 검정고시 준비를 했고 ‘이 기회에 나도 돈을 벌어보자’라는 생각에 내 나이를 받아주는 한 주유소에서 일하게 되었다. 그렇게 매달 150만원 남짓 되는 월급을 받으며 일과 공부를 병행 하였고 당연히 돈을 벌고 쓰는 재미에 공부는 자연스레 하지 않았다. 친구들과 만나서 놀러 다니고 술, 담배를 하며 정말 안 좋은 일들만 골라서 하였고 노는 것을 제일 좋아하는 뽀로로 같은 삶을 살았다. 그렇게 검정고시 시험 날이 한 달여 앞으로 다가왔을 때 위기의식을 느낀 나는 바짝 공부를 하고 시험을 보게 되었다. 누구나 그렇듯 답안지에 적은 답을 수험표에 조그맣게 옮겨 적어 가 채점을 해 보았더니 시험 커트라인인 평균 60점을 넘었다. 하지만 큰 점수로 넘은 것이 아니기에 크게 안심하지 않고 하고 있던 일을 하며 지내던 중 운명의 합격자 발표 날이 다가왔다. 발표 전 날에 잠을 잘 못 잤던 나는 평소보다 늦게 일어났고 일어나자마자 컴퓨터를 켜서 합격자 확인을 했다......‘합격’이였다. 나는 기쁜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부모님께 전화했다. 부모님은 이미 나보다 먼저 확인을 하셨고 축하한다는 말씀을 해주셨다. 그렇게 나는 고등학교 졸업자가 되었다. 나이가 많으신 부모님 밑에서 태어난 나에게 부모님께선 항상 “부모님 나이가 있으니, 남들보다 더 빠르게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고 이를 17살 나이에 고등학교 졸업이라는 일로 얼떨결에 이룬 나에게 우리 부모님은 더 욕심을 내셨다. 어느 날, 아버지께서 나에게 “너의 검정고시 성적으로 대학교까지 갈 수 있을 것 같은데 한 번 해보는 것이 어떠냐?”라는 조언을 주셨고 은근히 욕심이 났던 나도 도전하겠다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그렇게 난 18살 나이에 전문대학 사회복지학부에 진학하게 되었다. 입학 후 대학에서는 한바탕 소란 이였다. 18살 나이에 대학교에 온 내가 신기한 것 당연했을 것이다.온갖 관심을 받게 되었고 그 느낌이 나쁘진 않았다.그렇게 난 내 또래보다 2년이나 빨리 대학에 진학했고 물론 용돈도 받지 않으며 학교 근처에 있는 치킨집에서 배달 일을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은 어쩔 수 없이 헤어진 여자친구도 만나게 되었다. 내 여자친구는 집안이 엄청 엄했다. 아버님은 물론 여자친구의 애인도 공무원 이길 바라셨고 그렇다 보니 나랑 만나는 것을 싫어하셨다, 그래서 우린 부모님 모르게 만나는 비밀 연애를 했다. 하지만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2학년이 되고 여자친구는 기숙사를 나와 자취를 하며 1년 동안 같이 살게 되었다. 여자친구는 되게 바른 사람 이였고 나는 반대로 아직 어린 남자친구였다. 학교와 배달 일을 겸하며 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였고 학교를 나가지 않더라도 뭐라 하는 사람이 없다 보니 학업에 소홀하게 되었다. 그러나 배달 일에는 진심이였다. 누구보다 열심히 하려 노력했으며 그 노력을 알아주셨던 사장님께서 분점 운영을 제안하셨다. 그렇게 나는 대학을 다 마치지 못하고 본격적으로 사업에 뛰어들었다. 처음에는 굉장히 어렵고 힘들었다. 처음 하는 사업이였고 요식업 특성상 자리 잡힌 가게를 권리금을 지불하고 인수 받는 것이 아닌 처음부터 홍보해야 하는 상황에 육체적 정신적 피로가 극에 달하였다. 하지만 ‘내 가게’라는 타이틀 덕분에 버틸 수 있었다.사업을 한다는 명목으로 학업을 놓는다는 내 자기 합리화가 내 여자친구에게는 아쉬움으로 남았고 한 학기 남은 학업을 온라인 수업으로 병행하여 끝내길 바랬다. 그러나 나는 큰 돈을벌고 있다는 생각에 크게 생각하지 않았고 이는 지금까지도 후회하고 있다. 사업은 점점 잘 되었고 주위 상권 또한 나를 도왔다. 그러나 위기는 갑자기 찾아온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하는 사건이 찾아왔다. 어느 날 일을 하고 있던 도중 어머니께 전화가 왔다.“당장 집으로 와야겠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평소 지병을 앓고 계시던 외할머니가 우리 곁을 떠나셨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화를 하신 어머니의 목소리는 담담하셨다. 그렇게 부모님을 모시고 대전에서 인천으로 올라갔고 외할머니의 장례식에서 자리를 지켰다.장례식이 진행되는 동안 어머니는 간질환 때문에 식장 한 켠에 마련된 상주 휴게실에서 누워 조문객을 맞이하지 못하셨고 이는 내가 해야했다. 그리고 어머니는 장녀라는 책임감 때문에 장례식 내내 사람들 앞에서 우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셨다. 그렇게 장례식이 정리되고 마지막으로 외할머니를 보내드리는 화장터에서 어머니가 우셨다.외할머니의 관이 화장대에 실리시고 해당 호에서 지켜보던 중 외할머니께서 화장터에 들어가시고 커튼이 닫히고 있던 도중 어머니께서 어린아이처럼 우셨다.그리곤 이렇게 말씀하셨다. “엄마, 조금만 기다려요. 제가 금방 따라 갈게요.” 그 말이 내게 비수로 날아왔다. ‘그동안 나는 우리 부모님께 얼마나 큰 잘못을 했던가, 아직 어리다는 핑계로, 부모님께서 내 곁을 떠나가실 날이 아직 많이 남았다는 안일한 생각에 정작 지금 큰 불효를 하고 있지 않은가.’ 그 날은 외할머니가 내 곁을 떠난다는 것 보다 내 생각보다 우리 어머니가 내 곁을 떠날 날이 머지 않을 수 있다‘ 라는 생각에 더 큰 슬픔을 느꼈고 그렇게 내 소중한 사람을 다시 한 번 떠나보내야 했다. 외할머니를 떠나 보내드린 뒤로 어머니의 병세는 악화 되었다.병원에 입원하는 수가 많아졌고 수술을 받는 수도 늘었다. 부유하지 않았던 우리 집은 어머니의 큰 병원비를 부담하기 힘들었고 결국 내가 운영하던 치킨집을 권리금을 받고 팔아야 했다. 그렇지만 그때도 지금도 후회는 없다. 하지만 매달 많은 돈을 만졌던 나는 씀씀이가 커져 있었고 그에 맞는 직업을 찾게 되었다. 그렇게 시작한 일은 핸드폰 판매원이였다. 일자리를 찾고 있던 내게 그 당시 신선했던 공고가 하나 올라왔다.“판매를 잘하는 사람에겐 그에 맞는 급여와 자리를 제공하고 그게 끝이 아닌, 직책을 부여하여 이 일에 대한 목적의식과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분야에서 최고의 전문가로 성장하는 것을 도와 서로가 성공 할 수 있는 기회를 드리겠습니다.”나는 이 구인공고를 보고 아무 고민 없이 핸드폰 판매원을 시작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굉장히 어려웠다. 모르는 사람에게 말을 걸어야 했고, 핸드폰과 나를 어필해야 했다. 그러려면 핸드폰의 스펙도 공부해야 했고 상담하는 방법도 공부해야 했으며, 고객을 관리하는 방법도 공부해야 했다. 하지만 먼 미래를 기약하며 난 즐겁게 배웠고 용기 있게 도전하였다. 그러나 영업직이라는 것은 결과에 비중이 더 높았다. 처음 시행착오를 겪으며 나의 실적은 바닥을 쳤고 이는 내 월급과 직결됐다. 그렇다 보니 점점 동기부여도 사라지고나 혼자 지치게 되었다.물론 정확한 안내 상담 없이 판매한다면 잘 팔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고 싶진 않았다.이 일을 시작하면서 핸드폰 판매직의 부정적 이미지를 벗어나고 싶었고 바꾸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나 혼자 열심히 한다고 해서 바뀌지 않았다. 오히려 노력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있었다. 그렇게 낙심하고 있는 나를 이끌어 준 사람은 다름 아닌 여자친구였다, “너는 잘할 거라 믿어, 지금도 잘하고 있어”라며 나를 격려했고 이는 내가 다시 동기를 되찾게 해주었다. 그렇게 발전하여 잘하진 못해도 당장 고정지출을 해결하고 어느 정도 여유를 되찾을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자신감을 되찾던 중 모든 것을 무너뜨리는일이 찾아왔다. 함께 일하던 동료 중 기본적인 설명도 없이 일명 ’날려 판다‘는 직원이 있었다. 그 직원은 고객에게 자세한 설명은 물론 기본적인 색상 설명도 없이 팔았고 이는 컴플레인으로 돌아왔다. 이를 처리하는 과정에도 고객에게 설명 없이 화를 내며 다그쳤고 나는 이를 못마땅했다. 그 날도 그 직원은 고객에게 색상을 설명하고 재고를 파악하던 도중 설명한 색상이 없었고 고객에게 안내 없이 다른 색상으로 재고요청을 하여 판매하였다. 고객은 아무 의심 없이 구매하였고 집에서 확인한 고객은 다른 색상을 받아 변경하려 다시 매장을 찾았다. 하지만 직원은 자신이 설명한 색이 그 색이 맞다며 고객을 다그쳤고 고객은 겁에 질려 울며 나갔다. 그 모습을 지켜본 나는 너무 화가 났지만, 선임이라는 이유로 잘 못 되었다 이야기 하지 못하였다. 결정적으로 핸드폰 판매업에서 암묵적으로 지켜지는 규칙 중에 내가 유선 및대면으로 상담한 고객이 나중에 찾아와 구매하게 된 경우 내가 자리에 없더라도 나의 실적인 것인데 내가 휴무 전날에 유선으로 상담이 끝난 고객께서 내 휴무일 날 밖에 시간이 되지 않아 어쩔 수 없이 점장에게 “저 문제 되는 직원에게 실적을 주실 바에 점장님께서 실적 챙기십쇼”라고 전달했고 “알겠다.”라는 대답도 받았다. 그리고 휴무 당일 날, 개인적인 업무를 보던 중 실적 메신저 방에 내가 유선으로 상담한 고객 실적이 올라왔고 판매자에는 그 직원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이에 화가 난 나는 점장에게 물어 따졌고 “어쩔 수 없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나는 실적을 뺏긴 것이 화가 난 것이 아니라 내가 믿고 따랐던 점장이 실적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넘겨 줬다는 사실에 화가 났으며, 이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감정까지도래하였다. 그렇게 나는 퇴사를 결정하고 결국 핸드폰 판매직이라는 곳에서 가지고 나온 것은 빚 뿐이였다. 처음 생활이 되지 않아 핸드폰 개통 후 기기를 판매하는 방식의 가개통을 하게 되었고 이는 불법 이였으며, 어리석은 행동으로 인해 갚지 못한 빚이 되었다. 그 빚은 현재 지금까지도 내 금융 거래에 막대한 피해를 행하고 있다. 핸드폰 판매직을 그만둔 후에 난 ’사람을 대하는 직업으로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지 말자‘ 라는 생각에 PC방 야간 일을 시작하였다. 밤 세는 것은 힘들었으나, 큰 스트레스 없이 편히 일할 수 있었고 덕분에 좋은 사람들도 많이 만나게 되었다. 하지만 여자친구와 만날 수 있는 시간이 없었기에 우리 둘은 싸우는 일이 잦아졌다. 이는 우리가 헤어지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고 모든 커플이 그렇듯 다시는 안 볼 사이처럼 대차게 헤어지게 되었다. 그렇게 큰 슬픔 없이 지내던 중 같이 일하던 직원에게 “술 마시고 있는데 오빠도 올래?”라는 연락을 받게 되었다. 그렇게 그 자리에 가게 되었고 그 여직원과 또 같이 일하던 남 직원, 여직원의 친구까지 4명 이서 술을 마셨고 취기가 올라올 때쯤, 내 옆에 앉아있던 남 지원에게 “형이 장난치는 건 다 너 사랑해서 그러는 거 알지?”라는 장난을 치고 있었고 그러던 와중 앞에 앉아있던 여직원의 친구가 “저도 사랑해 주시면 안 돼요?”라는 말을 했다. 당황한 나는 “아 당연히 사랑하죠~” 라는 대답으로 넘겼고 그렇게 우리 둘의 관계가 애매해져 갔다. 그렇게 서로 마음이 생긴 그 날에 둘이서 아침까지 술을 마셨고 집에 데려다주며 “내일 시간 되면 영화 보러 가자”라는 약속을 청했고 긍정적인 대답을 받았다.그렇게 우린 서로를 알아가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그녀를 알아가다 보니 그녀의 가정사가 안 좋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현재 양 아버지와 같이 살고 있다고 했다. 그렇다 보니 우울증이 심했고, 매 사에 부정적이였지만 내가 품을 수 있다고 생각했으며 행동으로 보여줬다.그렇게 어려웠던 그녀의 마음을 열 수 있게 되었다. 나는 그녀가 불편한 양 아버지 집에서 같이 있는 것이 싫었고 집에서 3분 거리의 원룸을 잡아 그녀와 같이 살기로 했다. 그러나 그녀가 나에게 완전히 마음을 열고 의지했을 때 나는 그것이 내 예상보다 훨씬 큰 무게로 온다는 것을 그땐 몰랐다. 나 없이는 안 됐고, 혼자 있는 시간을 두려워하는 그녀는 내게 큰 부담이 되었고 이는 빠르게 불만으로 바뀌게 되었다. 그렇다 보니 싸우는 일이 잦았고, 점점 지쳐갔다. 그렇게 냉랭한 분위기 속에 동거는 계속되었고 우울증이 있는 사람의 마음의 문이 열리는 것은 오래 걸리지만 닫히는 것은 쉽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나에게 그녀는 나에게 이별을 고했다. 분명 그것은 ’나 너무 힘들다, 내 편이 없어진 것 같다, 나를 붙잡아 달라.“ 라는 의미였을텐데, 그때 나는 미처 알지 못하여 그녀를 놓게 되었다. 그리고 헤어진 다음 날, 출근을 준비 중인 나에게 그녀가 연락해 왔다. ”술을 마셨는데 여기가 어딘지 모르겠다. 한 번만 데리러 오면 안 되겠냐.“라고 하였고 대략적인 위치를 파악 후 그녀를 데리러 갔다. 그녀를 차에 태운 후 손목을 봤는데 자해를 한 흔적이 보였다.”그러지 말라“며 이야기했고 ”우리가 지냈던 곳은 너가 일을 해서 월세를 낼 수 있을 동안엔 내가 내 줄테니 그 집에서 지내라“며 그 집에 데려다주고 출근을 했다. 그렇게 많은 고민 속에 일을 맞추고 야간 일을 하는 나는 시간 상 금, 토요일이 휴무이기에 금요일인 그날에 개인 업무를 보고 잠을 자지 못한 상태에서 저녁에 친구들과 술을 마시게 되었다. 술을 먹고 있는 도중 그녀에게 연락이 왔다. ‘오빠, 나랑 술 한잔할래?” 나는 “지금 친구들과 술 마시고 있어서 이 자리 끝나고 만나던가, 아니면 다음에 보자”고 보냈고 그녀는 오랫동안 답장이 없다가 사진 한 장이 왔다. 아파트 옥상에서 밑을 내려다 보고 찍은 사진이였다.순간 걱정이 된 나는 같이 술자리를 하고 있던 친구들에게 사진을 보여주며 “어떻게 해야 하냐”고 말했고 친구들은 “겁도 많은 친구인데, 그리고 결심한 사람은 그렇게 티를 내고 죽지 않는다.”라고 했다. 그 말을 납득한 나는 그 자리를 지켰고 다만, 너무 걱정된 나는 그녀의 양 아버지께 전화하여 “그녀가 이런 사진을 제게 보냈는데 지금 술을 마셔서 운전하여 찾아가기 어렵습니다. 괜찮으시다면, 한 번 가 봐주셨으면 합니다.”라고 말씀드렸고 술자리를 이어 갔다. 그래도 걱정이 된 나는 대리운전을 불러 집에 가던 도중 그 아파트를 돌아봤다. ’분명 극단적인 선택을 하였으면 그 아파트가 소란스러웠을 것이다‘는 생각을 하며 돌아 봤으나 아파트는 고요했다. 그렇게 한 시름 놓은 나는 집에 가게 되었고 술기운에 쓰러져 자게 되었다. 잠을 자던 도중 전화가 걸려왔다. 그녀의 양 아버지였다.“혹시 어제 그녀와 같이 술 마셨니?”“아뇨, 저는 선약이 있어 친구와 술을 마셨습니다.”“음... 알겠다.” 나는 점점 불안해졌다.그렇게 한 15분 지났던가,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혹시, 그녀와 어제 술 마신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있어?”“아뇨, 잘 모르겠습니다. 무슨 일 있으신가요?”“하.... 죽었어.”나는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정말.그래도 어렵게 말씀드렸다.“위치 알려주시면 식장에 찾아뵙겠습니다.”“알겠어.” 솔직히 무서웠다. 마지막으로 연락한 사람이 나였기에, 모든 질타가 나에게 온다는 걱정에 무서웠다. 그렇게 알려주신 식장으로 찾아가 아버님과 대화했다.“널 부른 이유는 네가 살면서 자책하며 살지 않았으면 한다는 얘기를 해주고 싶어서 불렀다.”난 이 한마디 말씀에 무서웠던 감정이 그녀에게 미안한 감정으로 바뀌었고 배가 되어 돌아왔다. 아버님 앞에서“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막지 못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라며 울며 빌었고 아버님은“자책하지 마라, 네게 전화를 받고 나도 찾아 나서지 않은 잘못이다.”라며 말씀하셨다.난 그 미안한 감정을 주체하지 못했고 그 자리에서 우선 벗어나 생각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 생각했고, 아버님께 양해를 구한 뒤 집으로 돌아와 친구에게 알렸다.모두들 큰 충격이였고 나의 안위를 물어주었다. 그렇게 찢어진 마음과 당황한 상태에서 아버님께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혹시, 그녀 사진을 가지고 있는 것이 있나? 영정사진으로 쓸 사진이 없다.”“네, 보내드리겠습니다.”그렇게 사진을 보던 중 같이 찍은 사진에서 그녀는 카메라가 아닌 나만 보고 있었던 것을 그제 서야 알게 되었다. 너무 마음이 아팠고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그 날 저녁, 연애하던 날 함께 어울리던 내 친구들과 함께 그녀에게 갔다.입구에서 나는 너무 미안한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였고 머뭇거렸다.마음을 가라앉힌 후 장례식장에 들어가 영정사진을 보자, “이제는 정말 미안하다는 말도 못 하는 구나.”라는 생각에 아이처럼 울었다. 그리고 지금 생각해보면 그래도 자리를 지켜야 했지만 너무 죄스러운 마음과 멈추지 않는 눈물과 감정 때문에 인사만 하고 나왔다. 그렇게 집 근처 술집으로 가서 친구들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고 그 날 술을 많이 먹고 친구가 집에 데려다 줬고 친구는 집으로 가던 도중 3층으로 가야 했던 내가 옥상에서 친구에게 인사를 했다고 한다. 그는 헐레벌떡 뛰어와 나를 막았고 친구와 나는 옥상에서 펑펑 울었다. 그렇게 내 소중한 한 사람을 또 보내게 되었다. 그 후 나는 일상생활이 어려울 정도로 우울증에 시달렸고 심지어 그녀가 보이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술 마시고 울며 지내던 중 내 자초지종을 알게 된 전 여자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전 여자친구는 “자기 동네에 오게 되면 연락해라. 얼굴 보며 이야기하자.”고 했고 얼마 가지 않아 전 여자친구 동네에서 약속이 있던 나는 연락을 했다. 그렇게 카페에서 우린 만났고 나는 미안한 감정에 얼굴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그러자 전 여자친구가 먼저 말을 뱉었다.“많이 힘들지? 어쩌다 보니 알게 되었어.”그 순간 죽은 그녀에 대한 미안함과 지금 내가 이렇게 사는 비참함과 그것을 다 이해해 주는 전 여자친구에게 대한 고마움이 복합적으로 들었다. 그리고 전 여자친구는“힘들면 나한테 얘기해. 언제든지 얘기해.”라고 위로해줬고 그동안 힘들었던 나날에 날 위로해줬던 많은 사람들보다 더 힘이 되었다.죄스럽지만 부모님보다 더 힘이 되었다. 날 욕해도 좋다. 하지만, 벼랑 끝에 있던 나에게는 전 여자친구가 내민 그 손이 정말 절실하게 다가왔다. 힘들더라도 당신 옆에서 힘들었으면 한다는 그 말은 누구보다 큰 위로가 되었으니까. 그 날 나는 결심했다. 그녀 주위에 있으며 그녀와 지내며 다시 한번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람이 되어 떠난 사람을 잊지 않으며 용서를 구하며 살자.이는 내 욕심일 것이고, 생각해보면 내가 못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면 나도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 것이다. 그렇게 그녀 동네로 독립하였고 그녀가 나를 물심양면 도왔다. 하지만 혼자 술을 먹는 날이면 ’이것이 맞는 것인지, 떠난 그녀를 배려하지 않은 행동이 아니였는지“ 등의 걱정과내 미래의 걱정들이 겹치며, 점점 안 좋은 생각을 하게 되고 이는 끝이 어딘지 모르는 곳 까지 나를 빠져들게 했다. 그런 생활을 반복하던 중 하루는 정말 안 좋은 생각까지 하게 되었고 술을 마신 후 옥상으로 올라가 극단적인 생각에 빠져 고민하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아직 살고 싶었나 보다. 마지막으로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고 나는 그녀에게 전화를 걸게 되었다. 전화를 받은 그녀는 ”무슨 일이야? 나한테 말해줘“라 하였고 나는 울며 ”나 이제 모든 것이 자신 없어, 편찮으신 어머니 모시는 것도 경제적으로 큰 부담이고 큰매형에게 부모님께서 빌려준 돈 때문에 무너지는 우리 집안 붙잡고 있는 것도 너무 힘들고 모든 부분에서 놓고 싶어. 미안해 마지막으로 목소리 듣고 싶어서 전화했어.“그러자 그녀는”절대 나쁜 생각하지마, 지금 내가 갈게 얼굴 보고 얘기해줘.“라며 나를 말렸다.그녀도 그동안 몰랐을 것이다. 모든 남자들이 그러는 것은 아니겠지만 대부분의 남자들은 자신의 힘든 부분들을 여자친구와 함께 나누려 하지 않는다. 그렇지 않아도 힘들어 하는여자친구에게 그런 부담까지 안겨주고 싶은 남자친구는 없을 것이다.그러던 내가 이렇게 모든 속마음을 털어놓았고, 그녀도 처음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오랜 통화를 통해 그동안 하지 못했던 모든 말들을 하며 술기운을 깨다 보니 점점 마음이 가라앉았다. 그리고 그녀는 나에게”혼자 두면 불안해, 부모님께 말씀드리고 결혼을 전제로 연애하자, 우리“라고 했고 나는 정말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였다. 그렇게 다시금 행복이라는 것을 찾아가고 있었고 그녀와 결혼할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하고 있었다.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우리는 분명 그녀의 부모님께서 반대하실 것이라 예상하였고, 각오한 후 말씀드렸다.하지만 그녀의 부모님 반대는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심했다. 여자친구를 때리고 헤어지지 않으면 둘 다 죽이겠다는 보다 심한 으름장을 놓으셨지만 우리는 포기하지 않고 시간을 가지며 부모님께서 인정하실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드리면 분명 인정해 주시리라 믿었고 필요하다면 그때 동안 서로 되도록 만나지 않으며 인정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하리라는 다짐까지 하였다. 하지만 그녀 부모님의 반대는 가면 갈수록 심해졌고나는 직접 대면하는 것이 아니지만 여자친구는 집에 가면 항상 봐야 했고 시달려야 했기에 힘들었던 것 같다. 그러던 어느 날, 출근하던 도중 그녀에게 전화가 왔다.”어디야? 나 너 일하는 곳 주차장에 잠깐 왔어, 얘기 좀 하자.“그렇게 도착해서 그녀를 태우고 주차 후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녀는 나에게”부모님께서 반대가 심하셔, 솔직히 나는 너무 무섭고 너무 많이 힘들어. 우리 여기서 그만 하자.“라고 했고 나는”그래... 알겠어...“라며 우는 그녀를 달래주었다.나였어도 그랬을 것이다. 부모님의 거센 반대를 혼자서 견뎌낸다는 것은 죽을 만큼 힘들었을 것이다. 그녀는”그동안 좋은 추억 쌓아줘서 고마웠고 잘 지내야돼...“ 라고 하였고나는 덤덤하게 보내주었다.아니, 덤덤한 척했다. 서로 울면서 헤어지게 되면 둘 다 힘들 것이고 그녀는 내가 힘들 때 나를 안아주었던 사람이었기에 나 또한 그녀가 조금이라도 덜 힘들었으면 하는 마음에 찢어지는 마음 부여잡고 덤덤한 척하며 보냈다.그렇게 다사다난했고 헤어짐도 많았던 우리의 7년여의 연애는 정말 끝났다. 지금 나는 그녀의 프로필 사진을 매일 확인하고 연애 당시에 불러 달라 했던 노래를 못 불러준 아쉬움에 그 노래만 계속 들으며 지내고 있다. 이 글을 적는 이유도 혹여나 나와 같거나 비슷한 이유로 자신의 목숨을 포기하려 하는 사람들에게 ”당신의 목숨은 누구보다 소중하며 현재 나도 경제적 어려움에 허덕이고 있지만 분명 돌파구가 있을 것이다. 당신이 생각하는 한계점보다 조금만 더 힘을 내면 분명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대신 술을 끊어라. 술을 마시게 되면 나처럼 안 좋은 생각으로 미칠 수 있다.“ ‘해 뜨기 직전이 가장 어둡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