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 의해 묻혀버린 연개소문...
위에분들 중에 너무 어렵게 쓰신분이 있는데..(참 좋은 내용이더군요)
저는 좀 쉽게 써볼까 합니다. 미리 말씀드리지만 저는 약간 국수적인 관점(고구려 옹호론)에서 글을 써내려갈까 합니다.
대막리지 연개소문.
현재 대중매체등을 통해서 많이 알려져 있고, 그가 고구려 말기에 대단한 위인이었다는
사실은 요즘 누구나 알고 있을겁니다.
하지만, 불과 몇년전만 하더라도 연개소문에 대한 일반인의 평가는 '독재자'라고 흔히들 알고 있었습니다. 그에 대한 자세한 기록도 없어서 평가할 수 있는 자료가 충분치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뛰어난 인물이긴 했지만, 왕을 살해하고 왕보다 더 큰 권력을 가진 독재자' 라고 생각하기 일쑤였죠..
우선 그가 왕을 살해한 배경부터 알아볼까요?
저는 미리 말씀드렸지만, 약간 국수적인 관점에서 본다고 미리 말씀드렸습니다^^
연개소문이 살해한 영류왕은,
고수전쟁당시 고구려 수군을 이끌던 건무였었죠.(건무는 왕이 되기전 이름..)
육군은 연개소문이 이끌면서 살수에서 수나라를 대패시켰고,
바다에서는 건무가 수군을 이끌면서 수나라의 보급선을 저지하게됩니다.
이처럼 고수전쟁 당시 건무는 큰공을 세웠다고 할 수 있죠.
하지만, 그는 고수전쟁에도 그러하였듯이 중국에 대한 온건파였습니다.
즉 중국, 특히 당나라에 대해서는 친화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어서f당나라에 대한 강경적인 태도를 보이는 연개소문과는 항상 대립할 수 밖에 없었던것입니다.
그후 건무가 영류왕으로 즉위한 뒤에는 그들의 관계는 더욱 첨예하게 대립할 수 밖에 없게됩니다.
결정적인 사건은 당나라가 막 중국을 통일할 무렵에는 대내외적으로 많이 약해질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때 연개소문을 비롯한 무인세력들은 이 기회를 틈타 군사를 일으킨다면 중원을 넘볼수 있다고 주장하게 됩니다. 하지만 당에 대한 온건파였던 영류왕(건무)은 연개소문의 주장을 묵살하고 오히려 그를 더욱 경계하게 됩니다. 이에 연개소문은 결국 연개소문을 따르는 세력들이 늘어나고 그를 점차 경계하던 영류왕은 평양귀족(온건파)와 더불어 연개소문을 제거하기로 하고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하지만 이 소식을 알게된 연개소문은 미리 선수를 치며 영류왕을 비롯한 온건파들을 살해하게됩니다.
흔히들 이부분에서 연개소문을 왕을 살해한 반역자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오히려 저는 연개소문을 두둔하고 싶습니다. 영양왕과는 달리 영류왕은 지나치게 당에대한 화친적인 태도를 보였고, 중원을 넘볼수 있던 기회도 뿌리쳐버렸을 뿐만 아니라 연개소문 자신을 살해하려 하였으니, 스스로 역사속의 '희생자'가 되기보단 '개혁가'의 길을 택했다고 봅니다.
영류왕을 시해하고 보장왕을 옹립하면서 스스로 대막리지가된 연개소문은 강력한 군사정권을 바탕으로 당에 대한 강경책을 실시하게 됩니다. 그 후 1,2차 고당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당의 고구려 침공을 여러차례 저지하게 되지만, 연개소문 사후는 어이없을정도로 쉽게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연개소문에 대한 평가가 폄하될수 밖에 없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우선, 삼국통일의 주인공이 고구려가 아닌 신라였던 것입니다.
역사는 진실을 기록하기 보다는 승리자에 대한 당시의 평가라고도 할수 있습니다.
통일국가 신라의 관점에서는 그들의 통일을 정당화 하기 위해서라도 고구려 특히 연개소문을 깎아내릴 수 밖에 없게됩니다. 삼국지 정사를 읽어보신분은 알고 계실지만, 정사는 지나칠 정도로 위나라 중심입니다. 촉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다고 봐도 되죠..
(대표적인게 조조의 부분은 책한권분량이지만, 관우 장비 촉에 장수들은 한두장에 불과하죠..). 더욱이 연개소문은 삼국통일을 했던 신라의 문무왕의 아버지 무열왕 김춘추에게 굴욕을 안겨준 위인이기 때문입니다. (간략히 설명하자면 고구려와의 화친을 맺고자 했던 김춘추는 직접 사신으로 가서 연개소문을 만나 화친을 주장하지만, 연개소문은 백제의 성충의 의견을 들어주며 백제와 동맹을 맺고 김춘추를 옥에 가두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나라 고대사에 대한 자료가 부족한 실정이라, 고대사는 대부분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의존 할 수 밖에 없었는데, '삼국사기'는 누구나 알고 있듯이 사대주의적인 관점으로 유명합니다.^^
이런 신라의 평가뿐 아니라, 중국의 몫도 크게 작용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역사상 가장 뛰어난 성군으로 추앙하는 '당태종'에게 굴욕을 안겨주었기 때문에 연개소문을 폄하할수 밖에 없었습니다.
대표적인것으로 당태종이 안시성에서 물러나면서 안시성성주에게 비단을 내렸다는것,
고당전쟁당시 당나라 수군이 풍랑을 만나 스스로 물러났다는점 등,
참혹했던 그들의 고당전쟁을 축소시키죠..
하지만, 이것은 조금만 생각해보면 터무니 없는 말이란건 알수 있습니다.
수십여일동안 안시성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부상까지 입혔던 안시성에게 돌아가는 길에 비단을 하사했다는 얘기는 말도 안되는 얘기인데다, 수군이 풍랑을 만나서 자멸했다는 얘기는 더욱 신빙성이 없습니다.
그당시는 항해술이 발달하지 못해서 장시간 바다를 통한 항해는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이 대륙과 근접하여 항해를 하였는데, 이렇게 항해를 하는 수군이 풍랑을 만나 자멸하였다는 얘기는 더더욱 신빙성이 떨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이렇듯 고구려에 대한 평가..특히 연개소문에 대한 평가는 신라와 중국에 의해 묻혀버릴수 밖에 없게됩니다. 심지어 연개소문뿐만 아니라 그당시 고구려의 명장이던 을지문덕,양만춘에 대한 자료는 아예 없애버림으로서, 과연 그들이 실존인물까하는 의문이 들게끔 만든것입니다. 물론 연개소문도 무리한 천리장성의 축조, 그의 사후에 아들들에 의한 내분등은 그의 치명적인 오류이긴 하지만, 그것들이 연개소문의 업적을 깍아내리기엔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최초로 통일국가였던 신라를 비난하고자함은 아니지만, 나당연합을 통한 삼국의 통일로 인해 중원에 대한 기틀이 사라진것은 큰 아쉬움으로 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