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적부터 알았다. 우리집은 가난하다는 걸
고만고만한 동네에 살았지만 단칸방에 화장실이 밖에 있는 집은 우리집밖에 없었다.
동생이 태어날 때 즈음에 아빠가 사기를 당했다고 한다.
부모님은 하루 종일 일을 나가 보통 셋만 있었지만 그 시간이 힘들거나 하진 않았다. 엄마는 아침 일찍 출근했지만 새벽에 일찍 일어나 우리가 종일 먹을 걸 준비하고 나가셨고, 엄마보다 이른 퇴근을 했던 아빠는 저녁에 우릴 챙겨주셨다. 부모님도 그렇고 우리 자매도 사이가 매우 좋았다. 가난했지만 불행하진 않았다.
초등학교 때 오래되긴 했지만 아파트로 이사를 갔다. 물 내려가는 변기가 있는 화장실이 있어 너무 좋았다. 물론 살림이 폈다던가 하는 건 아니고 그 때도 가난했지만 남부럽지 않았다.
다행히 우리 자매들은 머리가 좋았다. 학원 한 번 다니지 않았지만 언니가 날 가르쳤고 내가 동생을 가르쳤다. 공부를 잘 하면 무시당하지 않았다. 물려받은 낡은 교복이지만 엄마가 항상 다려주셔서 멀끔했고 주눅들지 않고 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
하지만 아쉬운 건.. 꿈을 크게 가질 수가 없었다. 외교관이 되고 싶었던 언니는 교대에 갔고 나도 그림 그리는게 좋았지만 공대에 갔다. 장학금 없이는 대학에 가기 힘들다는 걸 걸 일찌감치 알아서였다. 부모님은 최선을 다 하셨지만 애들 셋 대학 보내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그래도 장학금 때문에 선택한 대학은 생각보다 재미있었다. 취업도 동기 중에서 이른 편이었다. 운이 좋았다. 사회생활은 쉽지 않았지만 연봉을 생각하면 못 견딜 것도 없었다.
내가 살면서 유일하게 현실 생각 없이 욕심낸 건 내 신랑 하나 뿐이었다. 두 살 연하의 사업 준비 중인, 사실상 백수. 소개팅이었다면 만나보지도 않았을 조건이었지만 아는 언니의 남자친구 후배라 술자리에서 동석했는데 그게 인연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너무 잘 맞았고, 딱 세 번 만났을 때 사랑인가 싶었다. 하지만 쉽게 만나기에는 내 사정이 쉽지 않았다.
사귀기까지 1년이 걸렸고, 그로부터 1년 뒤 결혼을 했다.
그 사이에 신랑은 한 번의 사업을 말아먹었는데 그게 결혼의 계기가 됐다. 내가 보기엔 비젼이 있는 사업이었고 그 동안 보여준 신랑의 됨됨이를 믿었다. 힘들어하는 그 사람의 곁에 있어주고 지지대가 되어주고 싶었다.
가족들은 당연히 반대했다. 설득도 하고 강짜도 부려보고.. 부모님 앞에 엎드려서 펑펑 울기도 하고.. 어쨌든 결국 허락을 받고 결혼했다.
시작은 예상보다 고됐다. 하지만 내가 선택한 길이라 묵묵히 받아들였다. 항상 여유있게 웃는 사람이었지만 신랑도 나보다 더 힘들었을 시기였다.
처음 2년간은 내 수입만으로 생활했지만 그 즈음부터 조금씩 신랑일이 풀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피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첫 아기가 생겼을 때, 어이없으면서도 너무 좋았고, 하지만 출휴나 육휴 등 그 시기는 어쩌나 막막한 마음이 들었던 그 때.. 그 이후로 거짓말처럼 신랑의 사업이 미친 듯이 잘 되기 시작했다.
우리 아이의 태명은 복덩이 말고 생각할 수도 없었다.
아이는 열 네살이다. 사업에는 부침이 있다지만 너무 다행스럽게도 신랑 사업은 코로나 시국에도 굳건하다. 지방이긴 하지만 가장 좋은 아파트에서 살고 있고 건물도 한 채 있고 지금 생활은 더없이 안정적이다. 언니도 동생도 다들 결혼해서 잘 살고 있고 부모님도 잘 지내신다. 결혼 초반에는 시댁 문제가 있었지만 신랑이 무조건 내 편을 들어 지금에 와서는 오히려 사이가 좋아졌다.
아직 살아갈 날이 살아온 날보다 더 많겠지. 80되서도 그 동안 잘 살았어, 그렇게 생각할 수 있기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