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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에서 성공한 김구는 왜 해방정국에서 실패했는가?-1

#김구 #김신

난 김구 주석의 아드님이신 김신 장군님이

아니었다면 김구의 업적까지도 묻혔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만큼 김구 주석의 마지막 행보(평양행)가 아쉽다

수많은 반대자들을 포함, 아들 김신조차 김구의 평양행을 반대했었다고 한다

김신 장군은 아버지 김구 주석의 뜻(앞으로의 전쟁은 공중전)에 따라 중국 공군 군관학교를 졸업, 대한민국 공군에 투신, 한국 전쟁에서 빨치산 토벌, 승호리 철교 폭파 작전 등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5.16 군사혁명을 지지했던 김신 장군은 전역 이후 아버지 김구 관련 사업을 활발히 진행했다.

박정희 정권에서 많은 지원이 있었으리라 본다.

왜냐하면 박정희 아버지 박성빈은 동학 접주였다 

김신은 5.16을 지지했었고 

김신의 아버지는18세에 동학에 입교했었던 김구였으니 

박정희와 김신은 그 부분에서 뜻이 맞았던것이다.

아버지 뜻을 기념하려는것은 

대부분의 효자들이 가진 생각일것이다

(동학농민운동을 대대적으로 띄운 박정희)

박정희는 선산지역의 접주로 동학혁명에 가담했다가 간신히 살아남은 아버지(박성빈)의 뜻을 살려, '난'으로 불리던 동학을 '농민혁명'으로 승화시켰다

좌빨들도 이런 점만은 박정희를 높이 평가한다 

그러나 좌빨들이 동학 혁명을 기리는것은 대중 선동으로 공산주의 혁명을 성공시킬 수 있다고 보기때문이고

박정희가 동학 혁명을 기린것은 5.16혁명이 동학을 계승한다고 생각했기때문이다. 

썩어빠진 조정을 그대로 둘 수 없어 농민들이 들고 일어났던것과 

민주당 신구파 갈등과 경제 혼란을 그대로 둘 수 없어 군인들이 들고 일어났던것을 같은 같은 의미로 보았던것이다.

당시 경찰의 숙청으로 인해 사실상 치안 공백 사태나 다름 없었고 종일

파업과 시위와 폭동의 연속이었다

국민들은 그러한 피로감을 종식시키고 질서를 바로잡은 군인들에게 상당한 기대를 걸었다(당시 군대는 상당한 엘리트 조직이었는데 이승만이 미국 군사학교에 우수 인재들을 유학 보냈음)

마찬가지로 김구 선생의 아들 김신 장군도 박정희의 군사 혁명을 지지하셨다 

김구와 김좌진 모두

공산당을 싫어했던 우파 민족 지도자였기때문에 그 아들인 김신, 김두한도 좌익을 싫어하셨건만 

이번에 이재명을 지지하는 

김구의 증손자가 나왔다 

김용만씨라고 하심

역시 대한민국엔 아직 사상의 자유가 있어ㅋ

암튼 살아 생전엔 우파였다가 좌파가 되기도 하고 그 반대나 혼합일수도 있고 또는 그냥 계속 중도인것도 가능하지만

내 생각엔 나는 존교죠 교육의 직간접 영향으로 좌경에 가까웠다 

내가 본 덕혜옹주, 군함도, 택시 운전사 등

영화를 보면서 눈물도 많이 흘렸었지ㅋ

그런데 안보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보수였다. 특히 군에서 주적관, 대적관 교육을 정훈교육을 통해 확실히 받았기때문이기도 하지만 어쨌거나 좌경 우경이 반반 섞인 중도였던 사람으로써 내가 중도였던 이유를 돌아보면 뭘 몰라서였음 

그게 아닌 중도는 박쥐같은 기회주의자라서인데

나는 박쥐과가 아니었고 정말 뭘 모르는 과였다

그래서 아직도 배우고 있는데

최근엔 왜 우파 민족 지도자였던 김구 주석을 우파들이 까는것인지? 

왜 좌빨들이 김구 주석을 높게 평가하는가? 

그래서 백범일지도 읽었다 

만화책 버젼으로

좌빨들이 높게 평가하는 이유는 

위장술이다 

진짜 김구를 좋아해서가 아니라

김구를 대신 내세워야 

이승만을 깔 수 있기때문이다

마지막에 김구가 민족 단일의 통일국가를 염원했던것이랑 남북 연석회의 참가를 두고 좌빨들이 이용하는것

이승만과 김구 사이를 갈라놓는 획책

빨갱이들 전략

두 분은 무척 사이가 좋았다

그러나 권력 앞에서 부모형제도 없다지 않는가? 

해방정국에서 김구 주석은 가장 늦게 귀국했다

늦게 귀국한 이승만보다도 한달하고 칠일을 더 늦은 11월 23일 귀국한 것이다.

국제적으로 정식 승인을 받지 못한 임정의 수반이었던 이승만과 김구는 임정 요인의 자격이 아닌 개인의 자격으로 귀국하게 된다 

독립운동 조직이 통합되지 못하고 분열되어있었기에 정식 승인을 못받았고 지원도 못받았던 것이다

이승만은 미국의 귀국 방해도 있었다

앞으로 한반도에서 좌우 합작 정부 수립을 추진할 계획이었던 미국과 소련이 보기에 해외파 독립운동가인 이승만이나 김구의 임정 세력이 고분고분하지 않을것같아보였기때문이었다

실제로 이승만과 김구는 미군정 하지를 여러번 엿먹여 좌우 합작 노선을 방해한다.

귀국 과정에서 이승만은 단 한 명이었으나 김구는 김구와 동반 귀국한 임정 10여명이 있었다.

지지기반이 없는 이승만은 김구와 각별히 지내는 한편 한민당(친일 우익)과도 틀어지지 않게 처신했다.

그런데 김구는 힘들게 고달프게 독립운동을 했기때문에 그런지 한민당 세력이 좀 고깝게 보였다 

한민당에 친일 인사도 있었고 또 미군정에 달라붙는 모습이 김구, 임정 세력이 보기에는 앞잡이 or 부역 세력으로 보였을것이다.

반면 김구는 이승만을 존경했다.

40년을 독립운동에 투신한 항일 노 투사로서 인정했던것이다.

그래서 먼저 귀국한 이승만이 김구 입국 시 하지 장군과의 면담도 주선했다

이승만은 귀국 과정에서 미 국무부의 방해를 받았지만 다행히 맥아더 장군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맥아더 장군 전용기 타고 일본 도쿄 거쳐 귀국)

도쿄에서 이승만은 맥아더, 하지와 3자 회동을 갖고 해방정국에 대한 대책을 논의할 수 있었고 귀국 후 열린 연합국 환영 대회에서 하지는 이승만에게 VIP 대우를 해준다. 

다만 둘 사이 좋은 관계는 오래가지 않는다. 하지 개인은 반공 성향이었으나 미국무부 명령대로 좌우합작 정책을 시행해야 하는 군인이었다. 이승만은 미소공위 및 좌우 합작이 결렬될것으로 정확히 예측했고 도미 외교 시 하지를 용공으로 모는 등 적극 방해했다

당시 해방 정국의 초기 주도권은 좌익에게 있었다

그 이유는 중도 좌파 여운형이 일제로부터 통치권(치안권, 사면권, 식량배급권)을 인수받아 해방정국의 초기 주도권을 좌익에 가져왔기때문인데 

형무소에 수감되어있던 좌익 사범들이 사면되어 각 지방의 지하 조직을 구성했다 

계급 모순에 더해 민족 모순까지 겹친 덕에 일제 하에서 많은 조직과 투쟁력을 갖출 수 있었던 공산주의 세력이 정국을 주도할 수 있었던것이다.

여운형은 우파와도 협상이 가능한 인물이었으나 박헌영에게 밀려난다. 

조직력, 투쟁력 측면에서 중도좌파 여운형의 건준은 박헌영의 공산당을 상대하기엔 부족했고 한달도 못가서 공산당의 거두, 박헌영에게 조직을 내주고 정국 주도권을 빼앗기게 된다.

박헌영의 지도 하에

극좌 공산당(장안파, 재건파)및 중도 좌파 (건준)세력은 결집(인공)을 했으나 

우파였던 이승만, 김구, 한민당은 여러 이유로 결집하지 못하던 상황이었다.

이승만은 독촉을 구성,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외치며 결집을 모색했으나

박헌영 공산당은 불참을 선언했다.

김구-임정 세력 또한 이승만의 독촉에 참여하지 않았고 인공(박헌영)의 접근도 거절했다. 한민당은 임정을 봉대하며 김구에게 경교장을 마련해주고 정치헌금도 상납하였으나 임정이 한민당을 친일파로 비난하자 감정의 골이 생기기 시작한다

옛날부터 좌빨은 결속을 잘 하고 투쟁을 잘 하는데 우파는 그러지 못했던걸 보니 특징인것같다

이승만과 하지는 12월 17일 모스크바 3상 회담에 앞서 독촉에 김구를 끌어들이고싶었다.

그러나 김구는 독자노선을 고집한다.

12월 19일 특별정치위원회 구성

임정 개선 환영대회에서 민족 통일 주장

당시의 관점에서 김구가 독촉에 참여함으로써 정치적으로 얻는 것이 더 컸을듯 싶은데, (예를 들면 미군정 사령관 하지에게 적극 협조했던 한민당 세력이 얻었던 각종 치안, 경찰 관련의 직책들) 

아무와도 함께하지 않으려 했던

김구와 임정 세력은 한마리 고고한 학이었고 선비였다

까마귀 우는곳에 백로야 가지마라 

민족의 독립에 있어서 감히 한민당(친일파)와 더러운 타협을 할 수 없다며 

한민당이 모금한 정치헌금도 거절했다

해외에서 배고프게 투쟁했던 임정 입장에서 보면 국내에서 배부르게 민족 운동에 나름 힘썼던 세력들까지 친일파로 보일 수 있었던 것이다

김구는 공산당 세력도 인정하지 않았는데 중국 임정 시절에 워낙 빨갱이들의 깽판으로 독립운동에 방해가 있었던 탓이다.

나쁘게 보자면 포용력이 부족했고 

해외에만 있었던 탓에 국내 현실을 잘 몰랐던것으로 볼 수도 있다.

김구 임정 세력은 혼란스러운 미소공위 정세 속에서 자신들만이 이상적인 민족 독립국가 건설을 할 수 있다고 믿었던것같다.

공산당은 안되!, 친일파는 안되! 정통성은 임정에게 있어! 라고 생각하며 명분에서 스스로 앞서있다고 보았던것같다

객관적으로도 임정이 가장 정통성 있는

것은 맞지만 정치란 국민을 위해 때로는 더러운 선택을 해야하는것인데...

아무튼 임정은

국민들이 결국 임정을 선택하게 되어 있으니 독자노선을 구축하고 때를 기다리자는 주의였고 마침

12/28 모스크바 3상 회의 결과 신탁통치안이 나왔다

신탁 통치에 찬성하는 것(찬탁)은 매국하는 길에 서는 반독립분자이다. 

그러한 낙인이 찍힐 수도 있는 정도의 거센 반탁 열풍이 전국적으로 몰아치는 가운데 임정 김구 세력은 반탁운동을 주도하며 정국의 흐름을 잡았다

이때 이승만은 반탁에 동의했으나 전면적인 행동에 나서지 않았다

반면 김구는 적극 투쟁에 나섰다(철시, 파업 등으로 미군정 업무 마비)

순수했던 애국 행위였지만

미소공위를 추진해야 하는 미군정 입장에서는 김구의 이러한 행위들이 미군정에 대한 선동 및 쿠데타로 인식되었고 

임정이 하지의 눈밖에 나는 결과를 가져왔다

미군정은 임정 인사들을 구속하여 해외로 추방하려고까지 했으나 한민당(송진우, 조병옥)이 중재에 나서 겨우 말렸다

미군정은 이승만의

독촉으로 좌우합작을 시도했다가 실패 후

대안으로 김구를 택하려고 했었는데 

이 일로 완전히 김구를 버린다

12/30일 송진우 암살의 배후에 

김구 세력이 관련되었다는 의심까지 겹쳤다

https://www.newdaily.co.kr/site/data/html/2021/12/14/202112140003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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