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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아동학대 생존자입니다. 궁금한 이야기 Y 주인공의 고백 2

최주승 |2023.05.16 12:13
조회 39,172 |추천 477
안녕하세요.
동생이 올린 글에 많은 분들이 위로와 응원을 보내주셨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https://m.pann.nate.com/talk/370080373?&currMenu=talker&vPage=1&order=RAN&stndDt=20230511&q=&gb=d&rankingType=total&page=1

사람은 생존과 관련된 기억은 절대 잊지 못한다고 합니다. 생명의 위협을 느꼈던 순간은 어린시절이었어도 뇌리에 각인되어 절대 잊을 수 없습니다. 저희는 그런 시간을 지나왔습니다. 그래서 학대 당한 순간 순간을 기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정말 떠올리고 싶지도 않았지만, 저는 대부분 8살 이후의 기억이기에 동생보다 더 자세히 기억할 수 있었습니다.

저희의 이야기가 그 어떤 거짓도 보태지 않은 사실임을 맹세합니다.

************************

2023년 5월 5일 SBS 궁금한이야기Y 635회.
<저는 아동학대 피해자입니다>

저와 동생의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그동안 인터뷰하고 친부와 계모를 대면하는 등 힘든 시간을 보냈습니다. 방송에는 많이 편집되어 짧게 나오기는 했습니다.

저희는 원래 3남매로 제가 8세, 남동생 7세, 여동생 4세 때 친부가 계모와 재혼을 하여 살았습니다.

8세때는 부천과 성남에서 반년씩 지내다가
9세때부터 충남 서산에 친부가 목회지를 옮기게 되어 이사갔습니다.

8세때 부천에서 단칸방 생활을 할때부터 계모의 폭행이 시작되었습니다. 저와 남동생이 학교를 가면 4세인 아직 만으로 36개월밖에 안 된 여동생은 계모와 집에 있었습니다. 학교 다녀와서 보면 그 조그만 아이의 속눈썹은 가위로 잘려 있었고 얼굴에는 멍이 들어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친부가 집에 없을 때만 저희 3남매를 때리다가 한 번은 친부가 알게 되었습니다. 계모는 저희 3남매가 자신을 '새엄마, 밥해주는 아줌마'라고 불렀다며 잘못한 것처럼 뒤집어 씌우고 아빠에게는 타당한 이유로 혼내는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그 후로도 자주 맞았는데 성남으로 이사갔을 때 4세이던 여동생은 한글을 제대로 못 쓴다는 이유로 때리고 밥을 굶기기도 했고, 오래된 냉장고가 문이 잘 안 닫혀서 물이 새곤 했던 것을 저희 3남매가 새벽에 일어나 냉장고 뒤져서 음식을 몰래 꺼내 먹었다며 때렸습니다.

계모는 본인이 원하는 대답이 나올 때까지 저희를 계속 때리는 독한 사람이었습니다.

제가 9세때 이사간 서산은 시골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저희 남매에게 평생에 남을 악몽이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저는 9세, 남동생은 8세, 여동생은 5세였습니다.
저희에게 집안일은 기본이었고 시골일들을 시켰습니다. 빨래는 직접 손빨래를 시켰고, 교회 화목 보일러에 넣을 땔감으로 사용할 나무를 구해오고 톱질하는 것, 마늘 하루 종일 까기, 더운날 땡볕에서 낫이나 호미로 풀 베고 뽑게 하기, 산에 하루 종일 다니면서 고사리 꺾어 오기 등등.

마늘 까기를 시키면서는 까놓은 생마늘을 먹으라고 해서 억지로 몇 번씩 먹은 적이 많습니다. 입안이 아플 정도로 맵고, 볼이 퉁퉁 부어오르는데도 마늘을 먹이는 일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 트라우마로 저는 지금도 마늘이 조금이라도 들어간 음식은 입에도 못 댑니다.

그것도 모자라 교회 성도의 집에 보내서 과수원일 돕기, 논 모내기, 추수 일 돕기, 그 집의 나무땔감일 하기 등등 어린 아이들이 할 수 없는 노동을 강요당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계모는 저희 남매끼리 성관계를 한다고 의심하며 본인이 원하는 대답이 나올 때까지 계속해서 온몸을 때렸습니다. 때로는 물속에 얼굴을 쳐박고 변기 레버를 내리는 물고문을 하기도 했습니다.

계모의 말도 안되는 의심병으로 인해 저희의 감금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저와 남동생을 한방에 가두고 여동생은 다른 방에 가두었는데, 여동생의 경우는 비좁은 옷방에 가두기도 하고, 외부에 있는 작은 화장실, 나무 궤짝 같은 곳에도 가둬두기도 했습니다. 여동생은 아직 초등학교 입학하지 않은 6세, 7세 때의 일입니다.

방문 밖에 자물쇠를 걸고 열어주지 않는 이상 나가지도 못하는데 계모는 저희 남매가 문을 따고 나와 저희끼리 성관계를 한다며 때리기 일쑤였습니다.
맞기 시작하면 몇시간은 계속 온몸을 타작하듯이 때렸습니다.

제대로 못 먹고 자주 구타를 당해서 몸이 쇠약해진 저는 코피를 자주 흘렸고, 코피를 닦아내다 보니 손에도, 옷에도 피가 묻었는데 계모는 이를 보고 자위를 해서 이런 것이라며 말도 안되는 모함을 하며 또 때려댔습니다.

이렇게 때려놓고 학교에는 아프다는 핑계로 보내지 않기도 하고, 혹시라도 보이는 곳에 맞아서 생긴 멍이 있으면 넘어졌거나 어디 부딪혀서 그런 것이라 말하게 시켰습니다.

그리고 계모는 항상 저희 남매에게 일기장이라는 명목으로 진술서처럼 쓰게 했습니다. 본인이 원하는 문장이 나오지 않으면 맞고 다시 써야만 하는 정말 너무나도 힘든 시간들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큰 사건이 하나 발생합니다.
제 바로 밑에 한살 어린 남동생이 10세 때의 일입니다.
그 날은 가정통신문을 보여주지 않았다는 이유와 그에 대한 본인이 원하는 대답을 듣기 위해 저희 형제는 팬티바람으로 하루종일 맞아야만 했습니다.
그렇게 때려놓고 물 한 모금 못 마신 채 하루종일 굶기다가 자두가 든 봉지를 방에 던져주고 그날도 마찬가지로 감금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동생이 계속 신음소리를 내며 끙끙대고 누워서 침도 못 삼키고 바닥은 동생이 흘린 침으로 흥건했습니다. 저는 문을 두드리며 동생이 이상하다고 와쳤습니다. 그런데 계모는 저에게 입닥치고 조용히 있으라며 동생을 때려서라도 조용히 시키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동생은 서서히 힘든 시간을 향해 가고 있었습니다.

그날 밤을 그렇게 보내고, 친부와 계모가 새벽기도가 끝나고 지나가면서 들었는지 뛰어들어왔습니다. 그때까지 동생은 신음소리를 내며 끙끙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친부와 계모는 바로 병원으로 데려가지 않았습니다. 친부가 동생의 다리를 잡고 거꾸로 들어서 흔들기도 하고 뜸을 뜨고 침을 놓으며 저에게 옆에서 동생 팔과 다리를 주무르라고 했습니다. 어느 순간 동생이 더 이상 신음소리도 내지 않고 조용해졌습니다.

그제서야 친부와 계모가 동생을 데리고 병원으로 갔습니다. 제가 본 동생의 마지막 모습은 팬티바람에 온몸이 멍투성이었습니다. 제가 기억하는 동생의 마지막이었습니다.

사망원인은 자두씨가 목에 걸려서 그렇다고 했습니다. 교인들에게는 밤에 몰래 나와 냉장고 열어서 자두를 꺼내먹다 질식사 했다고 설명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제 기억으로는 동생은 자두를 먹기 전부터 침을 흘리고 있었고, 제가 아무리 일으켜 세우려고 해도 쓰러지고 반복하며 사경을 헤매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남동생이 허망하게 죽고나서 친부와 계모도 이제는 달라질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 이후로도 감금과 폭행은 계속되었습니다.

장례식 부조금 100만원이 없어졌다며 저와 여동생을 또 추궁하며 훔쳐갔다고 말할 때까지 때렸습니다. 동생을 잃은 슬픔을 받아들이기도 전에 저는 그저 더 맞지 않으려고 100만원을 훔쳤다고 자백 아닌 자백을 해야만 했습니다. 당장 돈 찾아오라며 빗속에 자전거 하나 던져주며 쫓겨난 기억이 납니다.

저희 남매는 친부의 얼굴을 주로 일요일과 수요일 예배시간에 교회에서 보는게 다였고 어쩌다가 마 당에서 일하고 있으면 지나가는 모습만 보기도 했습니다.

친부는 저희가 학대 당할 때 방관하였고 지켜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계모에게 설득당하여 계모의 편에 서서 저희 남매를 대했습니다. 그래서 저희 남매는 아버지와의 추억이라고 할만한 것이 없습니다.

제가 6학년이 되던해 제 여동생이 1학년이 되어 입학을 했습니다. (제가 빠른년생이라 12세에 6학 년, 여동생은 8세에 1학년.) 그런데 6학년이 되던 날, 저는 저도 모르는 사이에 학교 자퇴 처리가 되었습니다. 친부와 계모가 학교에 찾아와 저를 미국 유학 보낼 준비를 한다는 명목으로 자퇴시킨 것이었습니다.

계모는 저와 여동생이 같은 공간에 있는 것도 못 견뎌 했습니다. 저는 그날부터 학교를 다니지 못하고 낮에는 산에 가서 고사리도 꺾어 오고 나무를 해오는 일을 하며 보냈습니다.

그리고 또 계모의 의심병은 계속 되었습니다.
저희 남매가 학교에서 친모로부터 전화를 받으며 자신(계모)을 욕하며 지냈다고 의심을 했습니다. 그 때까지 저는 친모를 8세 때 헤어진 이후로 본 적도 없었고 소식도 들은 적이 없었습니다. 당연히 전화통화를 한 적도 없었습니다.

이 의심으로 계모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본인이 원하는 대답이 나올 때까지 계속해서 하루 종일 때리고 힘들면 쉬었다가 다시 때리기를 반복할 정도였습니다. 그 때는 친부까지 가세해서 번갈아가며 때리기도 했습니다.

그런 날이면 온몸을 닥치는 대로 두들겨 맞았는데 정말 '개 패듯 팬다'라는 표현이 이럴 때 쓰는 표현이구나 느낄 정도로 사정없이 머리며 팔, 다리, 얼굴을 두들겨 맞고 계모가 원하는대로 일기장에 적어야 했습니다.

이렇게 저희에게 강제로 받아낸 일기장에 적은 내용을 가지고 계모는 학교로 찾아가 선생님들을 닦달하며 누가 아이들에게 전화를 바꿔줬는지 자백하라며 난리를 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말같지도 않은 일들로 의심해서 때리고 본인이 원하는 대답을 들을때까지 또 때리고 그런 일들이 반복되는 삶이었습니다. 정말 그때는 오늘은 안 맞았다는 것에 감사한 마음이 들 정도로 맞는 날이 너무나도 많은 나날이었습니다.

이렇게 하루하루 지옥 같은 시간들을 보내며 저는 미국 비자 발급이 안 돼서 다음 해에 다시 학교에 복학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것도 2~3개월 다니다가 또 계모의 의심으로 인해 학교를 못다니게 되고 방안에 갇혀 지내며 시골일들을 하며 시간을 보내는 것이 다였습니다.

그래도 결국 저는 큰아버지 가족이 살고 있는 미국을 가기는 갔습니다. 그 때가 2001년 8월 제 나 이 13세 때였습니다. 큰아버지댁에는 딸만 2명이 있었고 저보다도 한참 누나들이었습니다. 아들이 없던 장남인 큰아버지는 저를 데려다 키우려 하셨었지만 저에게는 미국에서의 일도 모든 사건들이 비극이었습니다.

제가 미국 도착하기 일주일 전에 큰아버지께 늦둥이 아들이 태어났고, 제가 미국에 간지 한 달도 안 되어서 9.11테러가 터졌습니다. 6개월 비자만 겨우 받아서 갔던 저는 비자 연장을 받기도 힘들었고, 큰아버지 집에서도 애써서 저를 데리고 있을 이유도 없었습니다.

6개월만에 한국으로 돌아온 저는 그 때 14살이었고 2002년 2월이었습니다. 제가 미국 갈 때나 한국에 들어올 때나 친부와 함께 차를 타고 온 동료 목사가 한명 있었는데, 그 사람은 제가 미국 간 것도, 한국에 들어온 것도 알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서산에 도착해서 늘 갇혀 지내던 그 방으로 다시 끌려 들어갔습니 다. 계모는 저에게 찍소리도 내지 말고 조용히 입닥치고 살라고 했습니다. 방 옆에 붙어 있는 화장실만 사용할 수 있는 게 다였고 저는 그 방에 갇혀서 절망의 시간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내일이면 나갈 수 있겠지, 일주일 후면 나갈수 있겠지, 한달이면 나갈 수 있겠지...

그렇게 살면서 1년 반이라는 세월이 지났습니다. 그 때까지도 동네 사람들은 제가 미국에 있는 줄 알 정도로 저의 존재를 철저히 숨기고 있었습니다.

제가 15세이던 때에 한번은 서산 시내로 보내서 시험을 치르게 했는데 그것이 초등학교 졸업 검정고시였습니다. 시험을 치르고 와서 방안에 중학교 과정 책을 넣어주고는 3개월동안 그것만 읽으라 하고 다시 서산 시내 시험장에 가서 시험을 치렀는데 그것이 중학교 졸업장을 따는 검정고시였습니다.

검정고시만 2번 치른 채, 언제 그 곳에서 빠져나갈 수 있을지 알지도 못하며 희망이 없이 하루하루를 살아갔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친부가 고향 후배와 연락이 닿아 저를 인천으로 올려 보내게 됩니다.

그 때 제 나이 15세였고 2003년 8월이었습니다.
저는 친부의 후배분께서 운영하는 노숙인쉼터에서 1년 동안 노숙인 아저씨들과 함께 먹고 자며 지냈습니다. 낮에는 그 곳에서 운영하는 사회복지 시설에서 봉사도 하고 지역아동센터에서 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6개월 정도 공부를 하며 16세(2004년 4월) 검정고시 시험을 봐서 고등학교 졸업장을 따내게 됩니다.

제 어릴 적 꿈이 교복 입고 야간자율학습 해보는 것이었는데, 초중고 전부 검정고시로 졸업을 하게 되어 이 꿈은 평생 못 이루게 되었습니다.

17세 때(2005년 7월)는 친부의 또 다른 아시는 분의 회사에 들어가서 한달 월급 8만원을 받으며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을 했습니다. 처음에는 청소, 설거지, 복사, 잔심부름 등을 하다가 하나씩 하나씩 일을 배우며 회사 생활을 했습니다.

17세 때부터 19세까지 일을 했었는데 한달 월급이 8만원부터 시작해서 그 다음해는 16만원, 그 다음해는 24만원 이렇게 3년동안 다녔습니다.

이렇게 적은 월급을 주는 명목은 대학교 입학금을 회사에서 지원해 줄 예정이라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당시 아침 8시부터 밤 12시까지 피곤에 찌들게 일을 시키는데도 제가 들이는 시간에 비해 턱없이 낮은 월급에 너무 힘들었습니다. 당시 다른 직원들은 저와 달리 정시 출퇴근을 했고, 지켜줄 보호자가 없던 저만 이렇게 노동 착취를 당해야 했습니다. 이런 불합리함 때문에 회사를 그만두고 싶었습니다.

또한 저는 사회복지사로 일을 하고 싶어서 진로도 그렇게 정하려고 했지만 회사에서는 제 진로를 탐탁치 않게 여겼기 때문에 저는 회사를 차라리 그만두겠다고 하였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친부와 계모는 인천으로 달려왔습니다. 15세에 인천으로 보내놓고 한번도 찾아와 보지도 않았던 부모라는 인간들이 4년이나 지나서야 19세 때 처음으로 찾아온 것입니다.

하지만 그 때도 제 이야기를 들어주기 보다는 너만 힘든 줄 아냐, 참고 버티면 회사에서 대학도 보내준다, 너가 뭐가 잘난 게 있냐, 자기 인생도 똑바로 못사는 애가 무슨 사회복지를 한다고 하냐 등등의 말을 쏟아내며 저를 나무라고 서산으로 돌아갔습니다.

그 당시에 참 많은 회의감이 들었습니다. 그래도 부모라고 있는 사람들이 어릴 때는 학대를 일삼고 커서는 인천에 보내놓고 한 번을 안 찾아오다가 와서 한다는 소리가 그러했기에 앞으로는 연락을 끊고 살기로 결심을 하고 저를 착취하던 회사에서도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 때 제 나이는 19세(2007년 8월)였습니다. 짐은 친구 집에 맡겨 놓고 돈이 없어서 버스정류장에 앉아서 밤을 보내기도 하고, 공원 벤치에서, 은행 계단 앞에서 밤을 보내기도 하고, 돈이 생기면 목욕탕에 가서 잠을 자기도 하고, 급하게 아르바이트를 해서 고시원에서 시간을 보내곤 했습니다.

그때도 늘 마음속에는 그 집에 남아 있는 여동생에 대한 걱정이 늘 컸습니다. 하지만 저도 혼자 힘으로 못 살고 있는 마당에 미성년자인 동생을 빼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힘들게 살아가다가 22세에 군대를 가고 24세 병장일 때 친부에게 연락을 해보게 됩니다. 그 때는 서산이 아닌 아산으로 목회지를 옮겼고, 제가 전혀 알지도 못하는 동네에서 친부와 계모를 다시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때는 과거는 다 잊고 오순도순 살아가기를 바라는 마음도 마음 한켠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여동생이 어릴 때의 일을 잊었기를 바랐습니다.

하지만 그 참혹했던 시간이 어떻게 잊힐 수가 있을까요? 당연히 동생도 기억을 하고 있었고 저의 기억에서도 잊혀질 수 없는 그런 일들이었습니다.

제가 군대 제대를 하고 25세에 인천에서 회사 생활을 하며 지내고, 여동생은 대학교를 다니고 있을 때 뜻하지 않게 친모와 연락이 닿았습니다. 친모와 함께 여동생을 그 집에서 빼내기 위해서 조심스럽게 카카오스토리로 접근했습니다. 그리고 여동생이 다니던 대학교에 찾아가 드디어 탈출시킬 수 있었습니다.


그 당시 저희 남매의 이야기를 들은 친모는 이대로는 못 넘어간다며 고소하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기억을 다시 끄집어내고 누군가에게 증언하는 것 자체도 너무 힘들어서 그냥 그 사람들을 잊고 우리끼리 행복하게 살자라고 이야기하며 덮어두고 가려 했습니다.

그 때 친부도 자신의 목회 인생에 위협을 느꼈는지 인천으로 올라와서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고 갔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누가 봐도 아들을 찾지도 않던 친부가 자신의 자리가 위험하다고 느끼니 먼저 그렇게 찾아온 것이라는 걸 직감으로 알았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참 어이가 없기는 했지만 아버지의 인생이 불쌍해서 그냥 넘어갔습니다.

그 모습이 방송국과 함께 동행하여 만나기 전까지 본 친부의 마지막 모습이었습니다. 친부는 제 결혼식에는 당연히 오지 않았고, 제가 첫 아이를 낳았다는 이메일에도 답장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저도 자식을 낳아서 키우다 보니 아버지를 떠올릴 때마다 너무 화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처음에는 친부를 어떻게든 이해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계모랑 살면서 어쩔 수 없이 사람이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지 않았겠는가 이해해보려 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아이들을 키우다 보니 아버지라면 당연히 자기 자식들을 지켜줘야 하는 사람인데, 저의 친부는 저희를 지켜주지는 못할망정 방관하고 폭력에 가담하고 자물쇠도 직접 달아서 채우고, 남동생은 겨우 열 살의 나이에 생을 달리하게끔 만든 사람이었습니다.

사실 저는 이번 방송에 나갈 용기가 없었습니다.
제 여동생도 본인이 자식을 낳아 키우면서 엄마가 되어 보니 너무 화가 많이 난다고 했습니다. 10년 전 그 집에서 빠져나올 때 고소하지 못한게 너무 한이 된다고 했습니다. 잠도 못자고 그 기억에 사로잡혀서 너무 힘들게 지낸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동생이 먼저 방송에 제보를 하게 되었고, 저는 방송에 나가길 원치 않았다가 이번에도 동생을 만류하게 되면 평생 후회하고 미안한 마음이 들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용기를 내어 방송에서 인터뷰를 하고 친부와 계모 앞에 섰습니다.

촬영을 진행하는 일주일 동안 너무나도 힘든 시간이었습니다. 잊고 지내려고 노력해왔고, 기억해내지 않으려고 무던히 노력하며 지내왔는데...

그 기억들을 끄집어 내어 증언해야 했고, 다시는 볼 일 없을거라고 생각했던 친부와 계모를 대면하며 지난날들을 낱낱이 따지며 이야기 해야했습니다. 계모는 기억이 안난다는 태도로 일관했지만 친부는 인정을 했습니다.

공소시효가 끝나서 그 사람들에게 처벌을 내리는 것은 어렵겠지만 이 일이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서 사회적으로라도 벌을 받았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주변에 그들을 도와주고 그들의 편이 되어 주는 친한 목사들과 교회 성도들이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계속해서 말도 안되는 말들을 하며 친부와 계모 편을 들고 있다고 합니다.

제가 여기에 적은 일들은 극히 일부입니다.
어릴 때부터 그렇게 수많은 날들을 학대 받으며 살아온 저희 남매가 이런 것들을 어떻게 잊을 수가 있겠습니까. 이 기억은 평생토록 가지고 갈 트라우마입니다.

하지만 조금이나마 저와 동생이 이 악몽과도 같은 기억에서 조금이나마 평안함을 얻을 수 있도록
많은 분들이 도와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추천수477
반대수6
베플ㅇㅇ|2023.05.16 14:07
방송도 보았고 동생글도 전부 읽었습니다. 방송끝에 두 연놈은 그 마을에서 도망갔다고 나오던데요. 아들이기 때문에 그 악마들의 소재지를 알수 있지 않을까요 끝까지 추적하고 따라가서 그 더러운 것들을 이땅에 살수 없게 계속 폭로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한마디로 복수를 권합니다. 법으로 못한다니까 직접 복수하기를 바랍니다. 인간이 아니므로 쓰레기를 치워주세요. 더도덜도 말고 님과 동생이 당한 고통만큼 돌려주는 길을 찾길 바랍니다. 이 더러운 법에 저촉되지 않는 방법을 찾아서요.
베플ㅇㅇ|2023.05.16 18:48
글잘읽었어요ㅠㅜ너무마음이 아파요ㅠㅠ 생존하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정말대단하십니다.. 어떻게그렇게 살아오시면서 이겨내셨는지...정말 그 두놈년들 때문에 너무화가나고 분노에 차서 그간저도 며칠동안 힘들었네요. 그 인간같지도않은 인간들 그 악행에 대한 댓가 다 받을겁니다. 힘내세요!!! 살아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베플ㅇㅇ|2023.05.16 15:14
셋 다 안죽은게 기적이다 싶습니다. 나는 마늘 트라우마보다 개독 목사들이 더 역겹고 혐오스럽습니다. 정인이도 그렇고 어찌 아동 학대에 개독 목사나 목사 자식들이 뻔질나게 등장하는지. 우연의 일치일까요? 남은 생을 얼굴도 못들고 살고 아는 사람들과 섞여 살지 못하고 모르는 사람들도 알아볼까 신경쓰는 인생 살게 되길 바랍니다. 들은것중 최악의 아동 학대입니다.
베플휴유|2023.05.16 15:49
동생분글도 읽었고 님글도 읽었는데 참 가슴이 먹먹하네요.. 어찌 인간으로서 그런짓을 할수가 있는지 어쩔때 보면은 목사나 교인들이 셀프로 죄를 사해서 그런지 더 잔인하고 나쁜짓도 더많이 하는것 같아요.. 님 걱정마세요 그 두인간사이에 자식이 있다고 했으니 그자식이 꼭 부모대신으로 벌받을겁니다..
베플남자쓰니|2023.05.16 14:20
친부와 계모가 살아있을 가치를 느끼지못하겠네요. 그사람들이 아니라 그 친자손이 더한 벌을 받길 바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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