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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싹속았수다보고 쓴 3대 결혼이야기

쓰니 |2025.03.25 17:32
조회 2,713 |추천 3
실제 어느 가족 이야기를 일부
각색을 했습니다

애순ㅡ친,외할머니들, 엄마
관식ㅡ 친, 외할아버지들, 아빠

1950
애순이는 6.25전쟁 중에 남편을 잃었다. 한창 전투 중이 아니라 전투는 거의 멈췄고 전쟁 막바지에 시절이 흉흉 할때였다. 관식이가 부산에서 사업 자금을 싸 들고 서울로 가는 중에 살해당했다. 관식이가 사업 자금을 가지고 이동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국군장교가 있었다. 그때는 많은 것이 군인들을 통할 때였다. 애순이가 그 국군장교를 만나러 서울까지 갔지만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전쟁 막바지였고 적군과 아군이 어지럽게 얽혀있었다. 그때 나의 엄마는 애순이 배속에 있었다.

1930-40
관식이는 동래고 재학 중에는 독립운동도 했다. 잡혀간 적도 있지만 학생인지라 금방 풀려났다. 그러다가 친척 어른의 소개로 증권회사에서 일했다.

1940-90
관식이와 애순이는 2남 3녀를 두었다. 채 10년을 같이 못 살았다. 하지만 관식이는 친절한 남자였다. 그래서 애순이는 술만 먹으면 울면서 다정한 관식이와 그 시절에 대해 이야기했다. 50년 동안.

1950
혼자 남은 애순이에게 자식이 5명이 있었다. 그나마 남아있던 돈을 정리해서 동래시장에서 포목점을 시작했다. 장사 경험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얼마 전까지 머슴이 아들 신발을 챙켜주던 집 안주인이었다. 장사를 잘하지 못했다.

1960
집은 늘 배고팠다. 유복자이자 막내딸인 우리 엄마를 다른 집으로 보내라고 주변에서 말했다. 남의 집에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시대였다. 애순이는 거절했다. 내 자식은 내가 키운다고 했다.

애순이의 얼굴을 많이 닮고 관식이의 성품을 닮아 부드러운 심성의 장남이 사고를 당했다. 관식이를 잃고 이사 간 집 근처에는 기차가 지나다녔다. 기차선로에서 놀던 장남이 한쪽 팔을 잃었다.

아들딸 구분없이 가르치고 사랑했다. 그래도 장남이었다.어린아이지만 그 장남이 온 집안, 특히 애순이의 희망이었다. 희망이 툭 끊어졌다. 더 무너질 곳 없는 집이 더 스러졌다.

1960-70
그래도 엄마는 막내딸이었다. 밝았다. 바다 근처에 살면서 물을 무서워했다. 동네 친구들 모여 방학 때는 기장 앞바다에 놀러 간 적도 있다. 과목 중에 영어를 잘했다. 대학에 갈리 없기 때문에 공부는 점점 재미 없어졌다.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바다 근처에 사는 집이 답답한 젊은 남자들은 바다로 모여들었다. 나의 작은 외삼촌은 해운대, 수영만으로 나갔다. 바다 근처에는 항상 형님들이 있었다. 소소한 싸움도 있고, 방황도 있었다.

베트남 전쟁이 일어났다. 베트남에 가면 돈을 많이 준다고 했다. 젊은 남자들이 돈을 벌려고 베트남에 갔다. 나의 작은 외삼촌은 가기 싫다고 했다.

1970-80
애순이는 결혼을 안 할 생각이었다. 50년대 생들이 몽땅 20대에 결혼을 한 그 시절 30살이 넘도록 결혼을 안 했다.

애순이는 자취를 하면서 친척이 운영하는 작은 공장에서 경리 일하고 있었다. 비키니 장롱에서 옷을 꺼내 입고 어느 날 택시를 탔다. 아직 도시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외진 곳이 많았던 시대였다. 택시가 이상한 곳으로 갔다. 택시 기사가 내리더니 애순이의 목을 잡아챘다. 애순이는 나 이 동네에서 장사 오래 했다고 아는 사람 많다고 거짓말했다. 택시가 다시 도시로 돌아갔다.

애순이는 경리로 일하면서 미용을 배우고 있었다. 혼자 살려면 미용을 배워두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공장에 있는 어떤 사람이 남자를 소개해 줬다. 안 만다는 소리는 안 했다. 그리고 관식이를 만났다.

관식이는 키가 182였다. 애순이는 이렇게 키 큰 남자는 가족 위해서 뭐라도 하겠지 싶었다.

182 관식이는 기차역이 있는 마을이 고향이다. 관식이의 아빠는 그 동네에서 유일하게 대학을 나왔다. 관식이의 아빠는 4대 독자였다.

1930-40
30년대생 애순이는 관식이가 사는 읍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태어났다. 그래도 농사로 밥은 먹을 수 있는 집이었다. 밥 혼자 떠먹을 때부터 집안 농사 일꾼이며 소며 밥해 먹이는 장녀였다. 대학 나온 관식이 따라 읍으로 시집가게 되었을 때 일꾼 밥이 아니라 내 가족 밥만 할 수 있게 되어 18살 애순이는 기뻤다.

1950-1990
애순이는 고모가 내 얼굴과 닮았다 하는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다. 대학나온 관식이는 읍 사무소를 다녔다. 1녀 3 남을 낳았다. 관식이가 일을 하다가 쓰러졌다. 농약사고였다. 살아는 났지만 더 이상 일을 할 수가 없었다. 애순이 나이 30살을 앞두고 시장에 좌판을 폈다. 시어머니가 아이들을 돌보는 동안 애순이는 항구에서 생선과 조개를 떼와서 팔았다.

1960-80
182관식이는 난전에서 조개파는 엄마의 장사 짐을 많이 날랐다. 맏딸인 누나는 도시의 은행에 취직하기 전까지 엄마 장사를 틈틈이 도왔다. 관식이 엄마는 남편 돈 없이 1녀 3남 고등학교까지 졸업시켰다. 공부 잘하는 장남 맏딸은 도시로 고등학교 유학 가고, 취직을 해서 나갔다. 막내인 관식이는 엄마 옆에 제일 오래 남아있었다.

1980
엄마 옆에 제일 오래 있던 182관식이가 애순이를 소개받았다. 관식이는 애순이를 처음 봤을 때 잉그리드 버그만 닮았다고 생각했다. 관식이는 애순이와 몇 개월 만에 결혼했고, 관식이는 당시 한창 일자리가 많은 조선소에 취직했다. 관식이 엄마는 장사 수완이 나쁘지 않았다. 결혼해서 처음으로 멀리 간 아들에게 줄 전세금을 준비했다. 도시에서 일하는 형에게 돈을 전달했으니 형이 가서 돈을 줄 거라고 엄마가 관식이에게 전화로 알렸다. 얼마지나지 않아 형은 왔었지만 관식이와 애순이가 사는 월세 단칸방만 둘러보고 밥만 얻어먹고 돌아갔다. 관식이는 형에게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금명이가 태어났다. 관식이와 애순이는 본인이 집에서 보고 배운 대로 아이를 키웠다. 관식이는 매일 아침 일어나서 일을 나가고 애순이는 집안을 쓸고 닦았다.

금명이는 키우기 수월한 아이였다. 잘 울지도 않고 잘 먹고 잘 잤다. 3년 후에 은명이가 태어났다. 조금 더 잘 울었지만 두 아이 모두 병원 한번 가지 않고 잘 자랐다.

1990
애순이는 옆집 아줌마의 소개로 얼떨결에 보험회사에 나가게 되었다. 관식이의 월급은 빠듯했고 애들은 커가고 있었다. 수줍지만은 않은 성격이었지만 남이 꼭 필요할 것 같지도 않은데 말 잘해서 뭔가를 팔 수 있는 성격은 아니었다. 그래도 시대는 호황이었고 애순이가 미혼일 때 경리 봤던 공장 사장인 친척이 큰 보험을 많이 들었 주었다. 보험은 중간에 해지만 안 하면 가입자도 이익이었다. 보험 만기금을 타는 재미를 알게 된 친척 어른이 본인 거래처 사장들에게 하나씩 들라고 말해두면 애순이가 가서 계약서를 썼다. 돈 많은 공장 사장님들이라 큰 건을 척척 들어줬고, 달마다 보험금도 밀리지 않아서 돈 달라는 수금 업무도 나름 수월했다. 보험 아줌마라 하지만 엄연한 금융업 종사자였다. 화장품을 판다고 이렇게 많이 벌었을까. 달마다 달랐지만 애순이는 300-400만 원을 벌었다.

금명이는 말도 빨리 시작하고 걷기도 빨리 시작했다. 유치원 발표회 때는 여자 사회자로도 뽑혔다. 발표회 당일 남자 사회자 아이는 울었지만 금명이는 울지도 않고 그 큰 강당에서 또박또박 대본을 읽었다.

애순이와 관식이는 처음으로 저들만의 집도 장만하고, 차도 샀다. 새로 생긴 홈플러스에서 장도 보고 금명이 윤선생 영어 학습지도 시켰다.

2000
금명이는 SKY에 입학했다.관식이는 일하느라 금명이 대학 입학식에 못왔다.

뒤도 계속 써볼까요

#폭싹속았수다


추천수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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