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보, 사랑합니다.
당신의 회갑을 축하드립니다.
우리들이 결혼한지도
벌써 32년이 넘었네요.
당신을 처음 만났던 건
지금부터 35년 전인
1978년 9월 어느 날이었던 것 같습니다.
내가 한일공업노조분회장
직무대리가 되어
금속노조 영등포지역지부 사무실에
갔을 때였습니다.
당신도 그 때
세진전자 노조분회장으로 된지
얼마 지나지 않은 때였나 봅니다.
나는 지역지부 청년부장이 되었고,
당신은 나보다 먼저
지역지부부녀부장이 되어있었지요.
그렇게 우리는 지역노조활동을 통해서
만났습니다.
어느 눈이 많이 오는 겨울날
“결혼할 사람 없으면 나와 결혼하지”고
제안했지만
당신은 “결혼할 생각, 해보지 않았다.”며
잘랐습니다.
나는 그 말에 자존심이 상했지요.
해가 바뀌고 1980년 봄
노총 민주화를 위해
남서울지역지부와 여의도 노총에서 함께
철야농성을 했습니다.
그 때문에 우리 둘은 모두
노총정화조치 대상자가 되어
노조분회장에서 강제사퇴 됐습니다.
나는 회사에서도 해고되고,
계엄당국에 의해 삼청교육대상자로
수배되어 쫓겨 다니는 신세가 됐습니다.
친구들 신혼집으로 피해다니다가
막다른 길에 다다랐을 때,
처제와 처남이 함께 자취하며
빵집을 하던 마포 제과점 다락방에
몇 달을 숨어서
무사하게 계엄해제를 맞이할 수 있었습니다.
여보 고마워요.
우리가 한달수 장로님의 각별한 배려로
봉천중앙교회교육관에서
청첩장도 없이 결혼식을 올릴 때,
당신은 웨딩드레스도 안 입었지요.
우리들의 하객은
봉천사거리에 대기하고 있던
닭장차 속의 전경들이 가장 많았지요.
동주를 낳고
당신이 세진전자를 그만두고
내가 하던 대학서점 운영을 맡으면서
당신은 우리 집의 가장이 되었습니다.
가장으로 서점을 운영하며,
동주를 혼자서 키우며,
나의 옥바라지,
우리 운동가들의 옥바라지까지
다 해냈습니다.
나와 함께
성원제강 노조결성 지원시위에 갔다가
우리 부부가 함께 남부경찰서 유치장에서
열흘간이나 구류를 살기도 했습니다.
그 때는 처제들이 동주를 돌봐줬습니다.
고문 당해 만신창이가 된 나를 찾아
보안사비밀분실로 경찰서 유치장으로
물어물어 찾아왔습니다.
서울 구치소, 안양 교도소, 목포 교도소,
광주 교도소. 아무도 찾지않는 감옥까지
면회 왔습니다.
어린 동주를 데리고 면회 왔을 때
나는 사랑하는 동주에게
아무 것도 해 줄 수 없었습니다.
동주야, 미안해.
감옥 속 캄캄한 중구금실에서
포승에 묶여 있을 때도
당신은 나를 찾아왔습니다.
그 멀리까지 와서
면회조차 거절당할 줄 알면서도
당신은 나를 찾아왔습니다.
면회금지조치로 당신을 만날 수 없었지만,
당신이 그 먼 교도소 바깥까지 찾아왔다는
귀뜸을 교도관으로부터 듣고
나는 갑자기 살아야겠다는
희망을 가지게 됐습니다.
당신은 교도소 담장 너머까지
당신의 따스한 사랑을
나에게 전해 주었습니다.
캄캄한 어둠 속에 묶여 있던 나에게
당신은 희망이었습니다.
여보, 설란영 동지 감사합니다.
늘 수배자로, 수감자로, 실업자로,
운동권으로 살아온 15년 동안
당신은 잘도 견뎌냈습니다.
1994년 민자당에 입당하며
우리들의 오랜 동지들로부터
‘배신자’라 욕을 먹을 때마다
당신이 얼만나 상처 받았을지 생각하면
미안합니다.
그러나 당신은
언제나 나를 믿고함께 해줬습니다.
부천 소사에서 당신이 없었다면
내가 어떻게
국회의원이 될 수 있었겠습니까?
어떻게 도지사가 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당신은
언제나 나에게 제 1 야당 당수였습니다.
당신은 늘 나에게 ‘조심을 잊지 말라.
은혜를 잊지 말라.
겸손하라’ 나를 흔들어 깨워줍니다.
여보, 세월이 많이 흘렀구려.
손주만 좋아하지 말고
나도 더 사랑해줘요.
설란영씨!
난 당신이 점점 더 좋아지는 걸 어떡해요.
2013.11.24.
당신을 사랑하는 남편 김문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