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랑스러운 장애아, 나의 차남
나의 차남은 장애아다. ‘장애아’. 단순한 이 세 음절을 발성해내기까지 아버지로서 겪어야 할 감정적 굴곡이 어떠할 지를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더구나 장애를 가진 자식이 세상의 편견과 그로 인한 불이익이 뭔지도 모른 채 커가는 모습을 보고 있는 아버지의 마음은 날마다 붉은 피를 뚝뚝 흘린다.
2002년 삼월의 어느 날, 아홉 살이던 나의 차남이 귀가 아프다며 학교를 조퇴하고 왔다. 평소 식성도 좋고 감기 한 번 제대로 앓은 적이 없던 녀석이기에 아내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이비인후과에나 데려가야지, 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프다며 침대에 누워있던 아이가 갑자기 온몸을 좍좍 펴가며 소리를 질러대기 시작했다. 아내는 급히 구급차를 불러 대학병원으로 갔다. 아마도 경기를 하는 모양이라 여기고 의식을 잃지 않게 하기 위해 계속 어르고 달래면서 병원으로 갔는데 응급실 의사 선생님은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며 검사를 해댔다. 방사선촬영과 뇌파검사 등 이리 저리 검사실을 들락거리고 나서 척수검사까지 했다. 정량을 7배 초과한 수면제와 진정제를 맞고 겨우 잠 든 아이를 인턴의 세 명과 내가 사지를 찍어 눌러 음료수 캔 구기듯 구겨놓은 뒤에 작살 같은 기구를 꽂아 노란 척수를 뽑아 올려 검사해 보았지만 원인을 찾을 수 없었다. 아이가 깨어나기 전 MRI 촬영을 하기위해 촬영실로 옮겨 촬영하기 직전 아이가 몸을 또 다시 움직이기 시작해 촬영이 곤란하자 1대의 진정제를 주사하자는 의사의 말에 나는 “더 이상 진정제를 투여하면 어떤 사태가 벌어질지 모르니 움직이지 못하도록 내가 붙들고 있겠다”고 하며 나는 시계와 주머니 속에 있는 모든 금속 및 소지품을 내어놓고 양팔로 아이를 귀를 감싸듯 붙잡고 그렇게 검사를 하는 동안 그칠 줄 모르는 눈물이 눈과 얼굴 근육을 간질어도 나는 움직일 수 없어 참으며 검사를 마쳤으나 역시 아이의 병명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겨우 잠든 아이를 억지로 깨워 머리 밑에 온갖 장치들을 붙여놓고 꼼짝을 못하게 한 채로 이십 사 시간을 지켜보는 검사를 받아야 했다. 침대에 앉아 삼십 센티도 채 움직이지 못한 채 먹고 자고 배설하면서 이십 사 시간을 견디고 나서는 또 정량을 초과한 수면제를 먹고 수면 뇌파를 찍었다. 일련의 검사과정을 거쳐 입원실을 잡아 뇌와 신경에 관한 검사란 검사는 다 해봤지만 뚜렷한 병명이 찾아지지 않았다. 아이는 일 분이 멀다하고 사지가 꼬이고 짐승 같은 소리를 질러대는데도 무슨 병인지 모르겠다니 보는 마음은 애가 타서 숯이 될 지경이었다. 심지어 많은 고통을 느끼면서도 자기의 양쪽 볼 안을 깨물어 50원 동전 크기의 상처를 내는가 하면 지켜보는 사람이 무서울 정도로 아랫니와 윗니를 꽉꽉 깨무는 등 상식으론 이해하기 힘든 행동과 소리를 계속 질러댔다.
그렇게 일주일 여를 온갖 검사 기구를 다 들이대고 나서 아이를 보낸 곳은 소아정신과. 거기서 내린 진단명은 틱장애(Tic Disorder), 또는 뚜레증후군(Tourette Disorder)이라는 듣지도 보지도 못하던 낯선 병명이었다. 귀가 아프다고 조퇴를 하기 전까지 아이가 눈을 자꾸만 깜박거리거나 뜻 없이 머리를 좀 흔들기도 하고 가끔 윽 윽, 하는 소리를 내기는 했지만 그것이 병인 줄은 아내도 나도 몰랐다. 알고 보니 틱장애란, 대체로 학령기 전후로 제 딴에 스트레스를 받게 되면서 저절로 눈꺼풀이 떨리거나 코를 씰룩거리는 가벼운 증세로 시작해 점점 정도가 심해지면 사회생활이 불가능해지는 지경에 이르기도 하는 무서운 병이었다. 뇌 속의 신경전달물질 중의 하나가 과잉 또는 과소 분비됨으로써 행동이나 음성을 스스로 조절할 수 없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병이었다. 나의 차남이 가장 심했을 때를 예를 들자면, 호흡마다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질러대다 보니 늘 목이 쉬고 저절로 팔 다리가 움직여대는 통에 밥 한 번 먹는 일도 전쟁이었다. 끼니때마다 밥이며 반찬이며 엎어지고 쏟아지는 건 기본이고 떠먹여주는 사람까지 온통 음식 칠갑을 해야 할 판이었다.
차남은 두 달 간의 입원 생활을 끝내고 돌아왔지만 증상은 전혀 호전될 기미가 없었다. 학교도 다닐 수가 없었고 병문안 온 친구들과 제대로 앉아있기도 힘들었다. 그러다보니 대인기피증과 우울증가지 겹치면서 본인은 물론이고 가족 전부가 지칠 대로 지쳐버렸다. 게다가 아침, 점심, 저녁, 배가 부르도록 먹어대는 약들은 뇌에 직접 작용하는 것이었고 부작용도 심각했다. 사물이 겹쳐 보이는 착시 현상을 비롯해 근육이완증, 물을 들이붓듯이 마셔도 가시지 않는 갈증. 그리고 사나흘에 1킬로씩 불어나는 몸무게. 다른 부작용들이야 약에 적응하면 없어질 거라는 희망이 있었지만 몸을 숙여 운동화 끈을 묶기가 함들만큼 쪄버린 살은 감당할 수가 없었다. 문 밖 출입을 하지 않고 병원만 오가던 투병 사 개월 만에 거의 20킬로의 체중이 늘어버리자 나는 더 이상 병원치료에만 아이를 맡겨놓을 수가 없었다.
어느 날 잠 이 든 차남의 머리맡에 앉아 가만히 생각했다. 아이를 데리고 소아정신과에 다니면서 내가 느끼게 된 것 중의 하나는 시대가 병 아닌 것도 병으로 만들어버린다는 것이었다. 내가 어릴 때만 하더라도 말을 좀 안 듣는다거나 행동이 산만하다든가 공부를 못한다고 해서 환자 취급을 하지는 않았다. 산만하고 공부 못한다고 약을 먹이는 일은 아예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런데 지금은 과잉행동장애니 학습장애니 해서 이런 아이들에게도 약을 먹인다. 그리고 뇌에 직접 작용하는 이 약을 먹으면 나아지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 아이의 뇌가 그렇게 균형을 잃고 이상행동이 나타나는 이유는 도대체 뭘까. 잠이 든 아이의 머리맡에서 동이 틀 때까지 나는 이 하나의 생각에 매달려 꼬박 밤을 새고 말았다. 그리고 그렇게 밤을 샌 다음 날, 무조건 아이를 데리고 산으로 갔다. ‘뇌의 균형을 바로 잡기 위해서는 몸의 균형부터 잡아야 한다.’ 내 머리 속에는 그 한 가지 생각만 등불처럼 걸어두고 차남의 살을 빼주리라 결심했다.
처음 차남을 데리고 마을 뒷산을 오를 때, 정확히 세 걸음에 한 번씩 아이는 울음을 터뜨렸다. 못 하겠어요. 한 걸음도 더는 못가겠어요. 그 때는 나도 차남 옆에서 같이 울고 싶었다. 땀을 비 오듯 흘리며 집채만 한 몸을 움직이려니 오죽 힘들겠는가 싶어 마음도 아팠다. 그러나 내가 강해지지 않고서는 아이를 그 춥고 어두운 병의 터널로부터 구해 나올 수가 없지 않은가. 내 걸음으로 오십 분이면 되는 등산로를 세 시간 반 만에 완주하고 나서 아들과 나는 약속을 했다. 이제 더 이상 병에 지지 말자고. 아들 역시 그렇게 울어가며 넘어온 산길을 돌아보며 결연하게 말했다. 꼭 나을게요, 아빠. 우리는 그렇게 부둥켜안고 약속한 날로부터 바로 자연요법으로 들어갔다. 나는 물론이고 아내와 장남까지 합세해 우선 운동을 시켰다. 오전에는 아내가 근처 산엘 데리고 가고 오후에는 학교에서 돌아온 장남이 운동장을 같이 뛰었고 저녁에는 내가 운동기구와 스트레칭을 들이댔다. 조금이라도 틈이 나면 숲이 있는 산으로 갔고 맨발로 흙을 밟게 했다.
뇌 속의 신경전달물질이 불균형을 이루게 되는 이유에 대해서는 설이 분분하지만 무엇보다도 환경오염이 주범이라고 본다. 아프리카에는 자폐아가 없다는 보도를 본 적이 있다. 천연 그대로의 자연 속에서 옷도 잘 입지 않고 맨발로 땅을 밟으며 사는 그들에게는 분명 자연치유력이 있을 것이다. 아니 애초부터 뇌 속의 어떤 것이 불균형하지도 않을 것이다. 내가 어릴 때만 해도 그러니까 자연이 그럭저럭 근처에 있을 때만 해도 지금처럼 무서운 병들이 흔치 않았었다. 그래서 식단도 파격적으로 바꿔버렸다. 가끔 아이들이 좋아한다는 이유로 피자나 햄버거로 대신하던 식사는 더 이상 허용되지 않았다. 가공식품이라고는 캔 하나, 콩 한조각도 식탁에 올리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그리고 채소와 더불어 해조류 반찬이 끼니때 마다 꼭 빠지지 말아야 했으며 폭식을 금했다.
차남에게 온 가족이 달려들어 운동요법과 식이요법을 실시한 결과 처음 두 달 간은 차남을 뺀 나머지 가족들의 살이 빠져버렸다. 아이는 아직도 61킬로에서 꼼짝을 않는데 아내는 겨우 40킬로가 될까 말까 할 만큼 가족들의 고초가 컸다. 이쯤 되니 나는 중대한 결심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던 사업을 포기하고 아이의 살을 빼기로 결심하고 우선 헬스클럽에 등록하였다. 물론 아이의 특징을 이야기해주고 회원들이 비교적 적은 시간대인 오전 10시 이후 2시간만 아이와 운동하겠다며 부탁을 하였다. 뒷돈이 조금 필요한 듯 잘 부탁한다면서 봉투를 건넸다. 큰 음악소리와 함께 넓은 공간이 있는 헬스장이라 아이가 소리를 질러도 비교적 안심은 되었지만 필요한 기구로 운동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없는 곳의 기구를 사용하면서 운동을 하고 또 다시 산으로 오르는 등 하루를 아이와 함께 보냈다. 정상 올랐을 때는 주위엔 사람을 의식하지 않고 아이와 소리를 질렀다. “민규는 틱을 참을 수 있다. 파이팅! 할 수 있다! 45kg화이팅! 등 몇 차례 반복을 하고 정상을 내려왔다. 내려 온 후 반드시 정상을 뒤돌아보게 하고 저 높은 곳을 민규의 힘으로 올라갔다고 자신감을 심어주기를 산을 오르고 내릴 때마다 아이에게 기억시켰다. 등산 도중 지나가던 사람들이 ‘어이구 그 놈 살 많이 쪘구나’라고 하면 아이와 나는 동시에 스트레스 받았고 한 번은 싸우기까지 하였다. 하루도 쉬지 않고 5일을 헬스와 등산을 하니 3kg가 빠졌고 아이는 몹시 기뻐 어쩔 줄 몰랐다. 그렇지만 헬스를 시작한 지 한 달 지나자 책임자가 조용히 불러 갔더니 회원들이 말이 많아 도저히 곤란하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자전기구를 타고 있던 아이 손을 잡고 멍한 걸음으로 그곳을 빠져나왔다. 창피한 건지, 세상이 미운건지, 이제 뭘 해야 할지 등 도대체 알 수 없는 생각들이 나를 너무 괴롭혔다. 그렇게 소리를 질러대던 아이의 소리마져도 들리지 않는 몇 분이 흘러갔다. 산으로 올랐다. 항상 엉덩이나 등을 밀어주며 등산을 했는데 그 날은 많은 생각에 머리는 땅만보고 그렇게 걸어가다 보니 아이가 뒤에서 울기 시작하였다. 자기를 버리는 줄 알고 같이 가자면서...
정상에서 아이와 또 다시 외쳤다. “민규는 틱을 참을 수 있다! 45kg화이팅! 백양산화이팅!”을 외치고 그런 화면을 휴대폰에 담아 두었다. 아이가 정상으로 된 이후 과거의 모습을 아이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그날도 정상을 뒤돌아보며 저렇게 높은 곳을 너가 너 힘으로 다녀왔다고. 민규 친구중에 저 높은 곳을 다녀 온 친구는 몇 명 되지 않을 것이라고 하는 등 아이에게 많은 자신감을 방법대로 심어주었다. 3kg 빠진 후 도무지 움직일 줄 모르던 차남의 체중이 조금씩 내려오기 시작했다. 학교를 가는 대신 등산을 가고 야채와 무공해해조류인 매생이를 비롯 해조류가 주를 이루는 식사 그리고 원예와 모래 장난을 취미로 하기 시작하면서 차남의 병증상도 조끔씩 호전의 기미를 보였다. 3일에 한 번씩 겨우 변을 보면 변비가 워낙 심해 얼굴이 시뻘게지면서 겨우 변을 보게 되면 고무장갑을 끼고 그것을 부셨다. 그렇지 않으면 변기가 막힐 정도로 심했던 변비도 식단조절과 운동으로 많이 호전되었다. 차남의 체중이 미세하나마 변화를 보이던 그날 저녁, 나는 현관문의 비밀번호를 바꿨다. 6155. 61킬로이던 체중을 55킬로로 만들겠다는 의미였다. 그 내용을 아이에게 설명을 해 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비밀 번호를 바꿨다. 5550으로. 아이에게 설명을 하도록 하였다. 55킬로를 50킬로로 살을 아빠가 빼 주겠다는, 정확하게 설명하였다. 두 달여 지나자 즐거운 비명을 지르며 다시 바꿔야 했다. 그렇게 해서 키 140센티에 45킬로의 몸무게를 갖게 된 차남은 대인기피증과 우울증 대신 자신감과 투지를 갖게 되었으며 우리는 그날 큰 잔치를 벌였다. 모처럼 우리 가족모두 기쁜 눈물의 웃음을 웃을 수 있었다.
아직 온전하지는 않지만 차남의 병 증상은 주위 사람이 볼 때 정상아로 볼 만큼 많이 좋아져 있다. 어둡고 고독한 투병의 터널을 아직 다 빠져나오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저 멀리 끝이 보이고 빛이 들어오고 있는 것이다. 정신지체 3급. 틱 초기에 아랫니와 윗니를 깨물어 앞니가 두 개 빠져 있지만 나는 차남이 자랑스럽다. 본인 스스로 틱장애를 고쳐보겠다는 단단한 각오! 혼자서라도 등산 다녀오겠다는 자신감! 하루도 쉬지 않는 운동! 강한 정신력을 이제 내가 차남에게 배우고 있다. 오늘 아침에도 우리 가족은 초록이 무성한 식탁 앞에 앉아 말했다. ‘자연이 살아야 인간도 산다.’ 어느 새 우리는 골수 깊이 환경론자가 되어 있었다. 마치 구호처럼 이 말을 외치면서 올 해 중학생이 된 차남은 행복한 식사를 했고 2km 정도 떨어진 학교까지 걸어가는 뒷모습을 보면 너무 대견스럽고 자랑스럽다.
민규야, 고맙고 사랑해! 그리고 이런 동생에게 더 없이 좋은 형의 모습을 보여준 큰 아들 문만이도 너무 사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