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계절에 맞춰 뭔가를 만든다는 건 매력있는 일입니다.
봄에는 노지 딸기로 딸기잼을 만들고, 여름에는 매실청을 만들고, 늦가을에는 모과차를 만들고, 겨울에는 그동안 만들었던 것들을 열심히 먹어치웁니다.
특히 모과차는 11월 말쯤 해서 넉넉하게 만들어두면 한 달 정도 숙성시켜서 연말에 여기저기 크리스마스 선물 하기에도 좋지요.
모과를 주문하면 그 향기가 너무 좋아서 거실 탁자에 올려두고 하루하루 미루다가 일주일 쯤 지나서야 아쉬움을 뒤고 하고 모과를 잡습니다.
모과 껍질까지 다 쓰기 때문에 베이킹소다 뿌려가며 뽀득뽀득 깨끗하게 닦아줍니다.
집집마다 모과 자르는 방법은 다 다른데, 저는 밑둥과 꼭지를 잘라 세워두고 세로로 길쭉하게 자르는 편을 선호합니다.
씨앗 부분에는 독성이 있으니 넉넉하게 잘라서 씨를 제거합니다. 모과가 꽤나 딱딱한 과일이라 손 조심하면서 손질해야 하지요.
길쭉하게 손질된 모과는 다시 얇게 썰어줍니다.
처음엔 푸드 프로세서에 돌려봤는데 단면이 거칠고 크기가 들쭉날쭉이라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어떻게든 좀 편하게 해보려고 만돌린을 써봤는데 이러다 또 손가락 다치겠다 싶어서 포기.
결국 초심으로 돌아와서 칼질을 합니다.
모과와 설탕을 1:1 비율로 겹겹이 쌓아 넣습니다.
설탕 많이 먹으면 건강에 해롭다고 설탕 비율을 낮춘 레시피도 많이 등장하는데,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그냥 설탕을 원래 비율대로 많이 넣고 나중에 모과차를 끓여 마실 때 모과청을 좀 덜 넣는게 훨씬 낫다는 생각입니다.
설탕 비율이 적으면 부패할 확률이 올라가거든요.
이렇게 꽉꽉 채워넣은 모과청은 하루나 이틀 정도 지나면 모과의 수분이 빠지면서 부피가 확 줄어듭니다.
아무리 힘들여서 꾹꾹 눌러담아도 거의 절반 가까이 공간이 비게 되지요.
그래서 큰 병 하나를 열어서 나눠 담으며 다시 채워넣습니다.
그러다보니 '아, 처음부터 그냥 큰 통에 담아서 한꺼번에 숙성시키고 나중에 작은병에 나눠 담으면 편했겠다.'라고 깨닫습니다.
머리가 나쁘면 몸이 고생해야죠, 뭐.
이렇게 만든 모과청은 서늘하고 그늘진 곳에 보관하면서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섞어서 가라앉은 설탕을 녹여줍니다.
한 달 정도 지나면 나름 먹을만하게 맛이 듭니다.
오늘 드디어 뜯어서 시음해보니 아주 좋네요.
비가 와서 날씨도 쌀쌀하고 주변에 감기 걸린 사람들도 많은데 따끈하게 데운 모과차를 한 잔 마시니 박용래 시인의 '모과차 '라는 시가 떠오릅니다.
앞산에 가을비
뒷산에 가을비
낯이 설은 마을에
가을 빗소리
이렇다 할 일 없고
기인 긴 밤
모과차를 마시면
가을 빗소리
- "모과차" 박용래 지음 / 박용래 시전집 (2022), 문학동네
가족과 떨어져 다른 지방에 단신부임하며 홀로 지낼 때 지은 시라고 하는데, 할 일도 없이 쓸쓸한 밤에 비까지 내리니 몸도 마음도 온기를 필요로 하는 그 심정이 절절하게 느껴집니다.
그런데 모과차를 마시면 그 달콤하고 따뜻함에 다시 여유가 생기고, 그래서인지 시 초반의 "가을 빗소리"가 왠지 춥고 외로운 느낌이라면 후반의 "가을 빗소리"는 가을의 정취를 느끼는 한적함이 담겨 있습니다.
겨울 빗소리를 들으며 모과차를 마시니 단순히 쓸쓸함을 달랠 뿐 아니라 주변에 콜록대는 사람도 많은데 예방약 먹은 것마냥 안심도 됩니다.
그래서 모과를 처음 본 사람은 네 번 놀란다는 말도 있습니다.
너무 못생겨서 한 번 놀라고, 외모와는 달리 향기가 좋아서 두 번 놀라고, 향기는 좋은데 막상 먹어보면 맛은 무미건조해서 세 번 놀라고, 그런데 차로 타서 마시면 약효가 너무 좋아서 네 번 놀란다고 하지요.
작은 병에 든 건 리본 묶고 봉투에 넣어 선물용으로 준비 완료. 큰 거 세 병은 집에 두고 한 잔씩 홀짝홀짝 마시면 좋습니다.
그리고 모과차가 바닥을 드러낼 때 쯤이면 이 추운 겨울도 다 지나고 봄이 돌아오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