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아..
선영은 최근 근무시간을 새벽으로 변경한 후, 아직도 시차적응을 하지 못한 상태로 아르바이트를 한 개를 더 하려고 한다. 밤 10시부터 아침 7시까지 근무하고, 아이들 등교 준비를 시키고, 출근을 하기 위해 화장대에 앉았지만, 너무 피곤함에 한숨만 나온다.
지인의 소개로 들어간 분양 사무실인데, 잘할 수 있을까..라는 걱정과 '내 인생이 언제부터 이렇게 흘러갔을까?'란 후회가 함께 든다.
너무 피곤해서 바로 침대에 눕고 싶지만, 그러기엔 당장 생활비가 너무 급하다. 느릿느릿 화장을 하고 나가려는데, 다시 울며 주저앉아 버렸다.
"왜 나한테만 이런 일이...!!"
아무도 듣지 못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 처절하게, 아이처럼 울었다. 큰애가 뱃속에 있을 때 돌아가신 친정 엄마가 너무 원망스러웠다. 엄마만이라도 살아있었더라면..
3개월 전, 매번 돈 때문에 싸웠고, 돈 때문에 서류상 이혼을 한 상태로 남보다 더 어색하게 지내고 있는 선영과 길현이었다.
큰 딸인 설유와 둘째 딸인 설하의 생일은 일주일 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다.
그렇다기보다 설유, 설하, 선영의 생일은 신기하게 전부 일주일씩 차이가 나서, 마지막 선영의 생일은 미역국이랑 케이크가 지겨워서 간단히 촛불만 끄고 지나갈 때가 훨씬 많았다.
그날은 설하의 생일이었다. 초등학교 2학년인 설하는 주말부부인 길현이 주말에 집에 오면 그 앞을 뱅글뱅글 돌면서 서울로 가지 말라고 매번 졸랐다. 안 가면 안 되는 걸 알면서 나름 부리는 애교였다.
아침부터 아빠무릎에 앉아 쫑알쫑알 말이 많다.
"아빠~ 나 오늘 돌봄 가지 말고 일찍 델리 오면 안돼? 나 생일인데?"
"당연하지~ 설하는 학교 몇 시에 끝나?"
선영과 길현은 사이가 좋지 않았지만, 그래도 부녀가 그러고 있는 모습이 나쁘지는 않다. 장난스레 눈을 흘기며, 엄마는 필요 없어?라고 장난스레 말하지만 빙그레 웃으면서 아빠 품에 폭 안긴다.
그날은 선영도 쉬는 날이라, 별생각 없이 최근 들어 아픈 허리의 물리치료를 받기 위해 병원으로 갔다. 그냥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평범한 하루였다.
병원에 갔다 집에 왔는데, 집에 길현이 없었다.
3년 동안 주말부부로 있어도, 애들 생일 때는 집에 있었는데 이상했다.
하지만 딱히 그런 걸로 전화를 하고 싶지 않았고, 어련히 일 보고 설하를 데리고 올까라는 마음에 딱히 찾지 않았다. 더군다나 요 몇 달 동안 이상하게 서울로 잘 가지 않고, 대구집에만 있다 보니, 안 그래도 안 좋은 사이가 더 안 좋아져서 말을 안 한 지 몇 달이라.. 전화를 할 수도 없었다.
설하의 하교시간이 되었는데 설하한테 전화가 왔다.
"엄마, 왜 안 데리러 와?"
"아빠가 데리러 간대매? 아빠한테 전화해봐~"
"아빠 전화기 꺼져있어.. 이상하지??"
뭐지? 하는 마음에 알았다고 하고 설하를 얼른 가서 데리고 왔다.
가는 동안 길현에게 전화를 했지만, 길현의 전화기는 계속 꺼져 있었다.
이상했다. 사업을 하는 사람이라 핸드폰을 절대 끄지 않는 사람이었다.
며칠 전 선영이 이렇게 살 거면 서류상으로도 이혼을 했으나 따로 살자는 말을 했을 때가 생각났다. 그때 길현은 어차피 곧 있으면 자기가 사라질 거라며, 소송 때문에 법원에 가야 하는데 변호사 비용 때문에 뭔가 잘못되었다는 얘기를 했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다고 생각해서 귀담아듣지 않았는데, 그때 그거 때문인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를 데리고 놀고 싶다고 했는데, 아빠랑 생일 파티를 해야 한다고 가기 싫어하는 설하를 데리고 꾸역꾸역 집으로 들어왔다.
아직도 불 꺼진 집을 보며, 속으로 촛불을 켜고 서프라이즈 생일파티를 한다고 나올 길현을 상상했다. 나름 속으로 간절히 원했다.
하지만 역시나 그런 일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여전히 핸드폰은 꺼져 있었다. 우는 설하를 달래며, 밥을 먹고.. 설하와 설유를 데리고 조금은 우울한 생일파티를 하고, 여전히 꺼진 핸드폰을 확인하고 하루가 지나갔다.
선영과 사이는 좋지 않았지만, 아이들에게는 끔찍한 아빠였기에.. 불길한 예감이 들었지만, 애써 머리를 흔들며, 잠에 들었다.
다음날이 되었다. 여전히 핸드폰은 꺼져있었고, 선영은 회사에 출근해야 했다.
다행히 재택근무를 하기 때문에 애들을 보내고 컴퓨터에 앉아 정리되지 않은 머릿속을 아닐 거야..라는 마음으로 달래며 일을 하고 있었다.
불현듯, 그때 소송 걸릴 때 같이 동업했던 허상훈이라는 이름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길현의 노트북 가방과 노트북을 미친 듯이 뒤졌다. 거기엔 2025년 8월 27일에 법원에 출석하라는 내용의 집행명령장이 있었고, 다행히 이런저런 서류 안에 허상훈의 전화번호가 있었다.
떨리는 마음으로 그 전화번호를 눌렀다. 손이 너무 떨려 전화번호를 몇 번을 지웠다 다시 눌렀는지 모르겠지만, 침착하라는 말을 되뇌며, 전화를 간신히 걸었다.
그도 역시 핸드폰이 꺼져있었다. 머릿속에 실 한가닥이 탁 하고 끊긴 느낌이었다.
그곳에 적힌 법원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아무리 걸어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하고 있던 일은 이미 안 한 지 오래되었다. 대구지방법원 대표번호로 전화를 걸어, 무작정 그 전화번호를 부르자 다른 번호를 알려주며, 이곳으로 전화를 하라는 안내를 받고 전화를 걸었는데, 나쁜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선영은 누구보다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전화를 끊고, 그대로 옆으로 쓰러졌다.
얼마나 지났을까.. 이미 일어났을 때는 노트북에 화면 보호기가 켜져 있는 상태였다.
아... 10분은 넘게 지났나 보다...
선영은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순간 눈물이 쏟아졌다. 그리고 짐승 같은 소리가 나오며, 가슴을 부여잡고 울기 시작했다. 바닥에 누워 몸부림을 치면서 울었다.
회사에 오늘 긴급으로 휴가를 쓴다고 말했다. 이왕 말하는 김에 다음날인 금요일까지 쓴다고 이야기를 했다.
다행히 매니저는 알았다고 흔쾌히 승낙을 해주었다. 그때부터 선영은 길현의 모든 짐과 서류를 뒤지기 시작했다.
사라지기 전날 선영에게 탁송업무를 하기로 했다고 건당 15만 원정도고 하루에 1건에서 2건 정도를 할 수 있다고 이제 일을 시작할 수 있다고 얘기를 했던 길현이었다. 5개월 동안 생활비를 못 갖다 줘서 매일 싸우고 있었는데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거짓이었다.
노트북 Chat GPT에는 탁송이 건당얼마인지, 하루에 몇 건 하는지 등을 물어본 내용이 있었다. 어이가 없었다. 속이다 속이다 못해 이런 것까지 속이는구나..
그 외에도 소송을 했던 자료를 올리면서 이런 건 어떻게 될 것 같아? 를 묻는 내용도 많았다. 서울에서 같이 사업을 한다고 했던 최만기와의 텔레그램이 마침 로그인이 되어있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거기로 메시지를 보냈다.
"만기 씨, 저 길현 씨의 와이프 선영이에요. 어제부터 길현 씨가 집에 안 들어온다는데 혹시 아시는 거 있으세요?"
"아시는 거 있으시면 제번호 010-XXXX-XXXX로 전화 주세요."
차마, 아는지 모르는지 모르는 사람한테 교도소 갔다는 말을 먼저 뱉기가 어려웠다.
바로 전화가 왔다. 모르는 번호인걸 보니 만기인 것 같았다. 심호흡을 하고, 눈물을 슥슥 닦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저.. 선영 씨.. 길현이가 어제 교도소에 갔어요. 재판 중에 잡혀 간 것 같더라고요. 진행 중이었던 변호사한테 물어보니까 변호사비 낼 돈이 없어서, 반 포기하고 간 거 같더라고요. 어떻게 괜찮으세요? 소송비용이 2천만 원이라는데, 제가 어떻게든 그 돈을 내서 길현이를 보석으로 빼내려고요. 선영 씨 돈 없는 거 뻔히 아는데, 제가 알아서 할게요. 다음 주에 접견도 잡아 놨는데, 가실래요?"
어이가 없었다. 다 알고 나만 모르고 있었구나.. 대충 얼렁뚱땅 대답하고 급히 전화를 끊었다. 더 이상 듣다가는 속이 뒤집어질 것 같았다. 이미 머릿속은 빙빙 돌고, 하늘이 무너진다는 게 이런 거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급하게 친정아빠한테 전화를 했다. 전화를 계속 받지 않는다. 아빠한테 얘기를 해서 어떻게든 처리를 해야 하는데..라는 생각만 들었다.
길현이가 선영 이름으로 사업을 하다가 진 빚이 5억이 넘었다. 개인회생을 해서 매달 180만원도 넘는 돈을 5년 동안 갚아야 하는데, 앞이 막막했다. 전부 갚아야 할 돈이 1억이 넘는데.. 그럼 이 돈을 나 혼자 갚아야 하나...
눈앞이 캄캄했다.
친정아빠가 계속 전화를 받지 않았고, 어쩔 수 없이 친정언니와 남동생한테 전화를 해서 사정얘기를 했다. 친정에서는 평소에도 길현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고, 서로 안 본 지 벌써 5년이 넘었다. 형부는 교정시설에서 근무 중에 있는데, 언니는 놀라지도 않아 했다. 이미 알고 있었다. 선영에게 말을 하고 싶었는데, 개인정보라 차마 먼저 말을 못 했다고 했다. 언니가 침착하게 얘기를 했다.
"선영아 놀라지 말고 들어. 형부가 보기엔 못 나올 것 같대. 적어도 2년은 살 것 같다네? 근데 사실 정확하진 않아. 근데 너 마음 단단히 잡고 있으라고, 혹시나 그 사람이 나올 거란 기대하지 말라고 미리 얘기해 주는 거야."
"뭐? 그.. 코인투자 어쩌고 했던 거 그거 때문인 거 같던데.. 미친 새끼 진짜 어쩌려고 저러는 거야?"
"나도 사실 잘 몰라. 너네 형부 잘 알잖아. 나한테도 불똥 떨어질까 봐 아무 말도 안 해. 근데 처제한테 혹시 먼저 전화 오면 나올 거란 기대는 접는 게 좋을 거라고 내용만 전해달래."
앞이 막막했다. 남동생은 계속 강아지.. 미친 새끼.. 그럴 줄 알았다. 계속 욕만 했다.
뒤늦게 아빠한테 전화가 왔다. 면목이 없었다. 매번 이런 일로 아빠한테 폐를 끼치는 게 너무 싫었다.
아빠도 껄끄러운 일로 사돈과 얘기를 하는 게 싫은가 보다. 계속 '가야 하나? 내가 가서 뭘...' 이란말을 반복해서 했다. 선영은 그러면 안 되는 걸 알면서 소리를 쳤다.
"그럼 다 같이 굶어 죽어? 내 월급에서 개인회생 빚이랑 월세랑 이래저래 나가면 남는 거 20만 원이라고!! 이것 갖고 세식구가 뭘 먹고 어떻게 살아!!! 나 좀 살려줘!!!!!! 아빠 제발!!!!!"
처절한 절규였다. 항상 이럴 때마다 엄마 같지 않게 뒤로 빼는 아빠의 성격 때문에 엄마도 속 터져했었다. 엄마가 없으면 고아라더니.. 옛말 틀린 거 하나도 없었다.
이럴때는 정말 큰애 임신때 돌아가신 친정엄마가 너무 원망스럽고 그리웠다.
아빠는 쭈뼛쭈뼛 '알았어...'라고 나지막히 얘기하고 몇시쯤 괜찮은지, 자신의 정형외과 방문시간이랑 겹치지 않게 해달라는 말을 뒤로 하고 전화를 끊었다.
앞이 막막했다.
선영은 아이처럼 '엄마...엄마...'하면서 울뿐 이었다.
머리를 쥐어뜯으며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형부가 먼저 아빠를 모시고 와준다 했다고 언니가 전한다.
이제는 괜찮은 척도 할 수 없는 목메인 목소리로 나오지도 않는 말을 억지로 한다.
"언니.. 형부한테 진짜 고맙다고 전해줘.. 내가... 뭘 사주지는 못하지만, 앞으로 잘 할게.."
"아냐, 난 너하나만 잘살면 됐어. 이럴때 엄마라도 있었으면..."
그말을 듣고 선영은 그동안 다른사람에게 들키지 않으려 노력했던 울음을 다시 터뜨렸다. 전화기 맞은편 지연도 선영의 울음소리를 듣고 훌쩍거린다. 회사여서 더이상 통화는 곤란하다는 말을 뒤로 전화를 끊고, 선영은 시댁과 통화를 했다. 통보 같은 대화였다.
"아버님, 길현 씨 교도소 갔어요."
"나보고 어쩌라고?"
"아버님 아들이 저한테 5억이 넘는 돈을 지우고, 갚지도 않고, 교도소에 갔다구요!!"
"니들끼리 살다가 그렇게 된 걸 나보고 어떡하라고!"
"애들하고 한 달에 먹고살 돈이 20만 원도 안돼요. 그럼 애들을 고아원에 갖다 버리기라도 해요?!"
"갖다 버려라! 내 새끼도 아닌데 뭐 어떠냐?"
너무 화가 나서 고성이 오가는 통화였다. 어쨌든 저녁 6시에 만나자는 약속을 하고 전화를 끊었다. 집에서 혼자 멍하니 천장을 쳐다봤다. 그래도 돈 나올 구멍은 시댁 밖에 없었다. 너무 싫었지만 그래도 가서 큰소리 내지 말고 빌어야 했다. 그나마 돈을 받을 정당성이나 구멍은 그곳밖에 없었다.
사실 길현과 시댁 때문에 우울증 진단받은 뒤로 가지 않은 시댁이었다. 안 간 지 3,4년은 넘은 것 같았다.
'차라리 죽을까? 그럼 애들은? 그럼 애들은 시댁에서 키우지 않을까? 시댁에서 말한 대로 애들을 고아원에 보내면? 난.... 쟤네를 안 보고 살 수 있을까? 쟤네를 내버려두고 죽을 수 있을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숨이 턱 막혀왔다. 부정적인 생각만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먹은 것도 없는데 화장실로 가서 구역질을 했다. 얼마 전부터 스트레스로 2주 가까이 지속되었던 하혈이 더 심해져서, 왈칵왈칵 나오면서 다리사이로 흘렀다.
아무리 생리대를 갈아도 서있으면 다리사이로 피가 계속 흘렀다. 사형선고인가? 나 벌 받는 건가? 수술할 돈도 없는데.. 내 40대는 이렇게 끝인 걸까...?
애들이 집에 들어오고 평소와 다른 엄마모습에 애들도 눈치를 살핀다. 느릿느릿 밥을 차려주었다.
"엄마, 할머니랑 할아버지 보러 갈 거야. 갔다가 늦게 올 것 같으니까 밥 먹고 집에 있어.."
"엄마~ 아빠는?? 아빠 왜 아직도 핸드폰 꺼져 있어?"
목이 메어왔다. 눈물을 삼키느라 목소리가 꺽꺽 나온다.
"아빠 어디 갔나 봐... 근데 설하 생일축하한다고 전해달라네..?"
설하는 막 운다. 원래 기질이 예민한 아이고, 길현이 예뻐하기도 엄청 예뻐했던 아이다. 아빠가 원망스럽고 걱정스러운지 "아빠 미워 아빠 어딨어" 하며 계속 운다. 선영은 목안에 뭔가 걸리듯 답답해졌다. 목이 멘다는 게 이런 거였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