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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10월 19일 목요일...

여태 무료했던 나의 삶에 그녀로 하여금 조금씩 작은 변화가 생겼습니다.
특히 목요일에 말입니다.
난 목요일마다 잠시라도 그녀의 모습을 보고자 정확히 12시 45분까지 학교 교양학관에 도착
했습니다.
그리고 양쪽에 강의실이 있는 복도와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사이에 멍하니 서있었습니다.
그러다 12시 48분이나 49분 정도가 되면 그 사람에게 선물 받았던 조그마한 손거울을 꺼내
어 그리 잘 나지도 않은 얼굴을 살피곤 다시 집어넣었습니다.
당연히 그녀는 나의 얼굴은 물론 존재조차 인식하지 못하지만 말입니다.
그리고 50분... 즉, 4교시 강의가 끝나면 그녀가 항상 나오는 강의실을 향해 시선을 집중했습
니다.
물론 그녀의 강의가 일찍 마치거나 늦게 마칠 경우, 내가 화장실을 잠시 다녀올 경우가 있
어 약간의 변수도 있었지만 매주 그녀를 바라보는 것에는 언제나 성공적이었습니다.
그렇게 그녀를 바라보는 것이 아주 잠시일지라도 내가 일주일 중에 유일하게 맛볼 수 있는
조그마한 행복이었습니다.
물론 그 사람한테는 미안하지만 말입니다.
아무튼 이렇게 그녀를 바라본지도 거의 한 달... 정확히 5주 째가 되었습니다.
오늘도 어김없이 그 시간에... 그 장소에 도착해선 손거울 꺼내어 역시나 그리 잘 나지 않은
얼굴을 비추며 그녀를 맞이할... 아니, 바라볼 준비를 했습니다.
때마침 12시 50분이 되어 강의가 마쳤다는 듯이 이곳저곳 강의실에서 학생들이 나오기 시작
했습니다.
행여나 그녀의 모습을 놓일세라 손거울 따윈 가방에 쑤셔 넣고는 나의 모든 신경을 집중했
습니다.
나의 이런 노력을 하늘도 탄복했는지 오늘도 여전히 아름다운 모습으로 친구들과 함께 있는
그녀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녀의 순수함에 걸맞은 하얀 니트 차림의 그녀는 서서히 내 앞으로 다가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점점 다가올수록 행여나 눈이라도 마주칠세라 나의 고개는 무의식적으로 아
래로 떨어졌습니다.
설사 그녀와 눈이 마주치더라도... 내가 일부러 그녀의 눈을 마주쳐도 그녀는 나의 존재를
모를 것입니다.
아니, 어찌 보면 일부러 라도 그녀와 마주쳐서 나의 존재를 인식시켜도 모자람에도 불구하
고 그러하지 않았습니다.
그럴 수 없었습니다.
아직은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녀는 또 그렇게 나를 스쳐 지나갈 뿐이었습니다.
그녀가 완전히 나를 스쳐 지나고서야 난 고개를 들 수 있었고 고개를 돌려 그녀의 뒷모습만
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때 언제부터인가 낯익은 얼굴이... 석재는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난 소스라치며 어떠한 미동도 하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더욱 당황한 것은 마침 석재, 자신을 향해서 걸어오는 그녀를 아주 노골적으로 쳐다
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녀가 완전히 자신을 지나쳐서야 내게 음흉한 웃음을 지으며 다가왔습니다.
내가 그녀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눈치라도 챘는지 그의 음흉한 웃음은 더해갔습니다.
"야, 박준우! 어쩐지 요즘 많이 수상하다고 생각했어."
"그...게... 무...슨... 말이야?"
당황한 나머지 나도 모르게 더듬었습니다.
"이것 봐, 더듬거리긴. 범인은 현장에 다시 한 번 나타난다고 하던데... 꼭 그 말이 맞는 걸."
"내가 무슨 나쁜 짓이라도 했어? 범인이라니?!"
"나쁜 짓 했지! 음탕하게 여자나 훔쳐보고!"
나의 순수한 의도를 짓밟는 그의 말에 나도 모르게 발끈했습니다.
그가 파놓은 함정임에도 모른 채 말입니다.
"음탕하다니?! 그냥 바라만..."
"딱 걸렸어, 박준우! 너, 매주 목요일에는 오후 늦게 수업이 있을 텐데 요즘 들어 목요일마
다 학교에 일찍 온다는 게 너무 이상했어."
"그건... 공부하려고 일찍 온 거야."
"공부?! 공부한다는 놈이 왜 여기에 있어?"
"그건... 지금 갈려고 그랬어. 원래 한 시부터 공부를 시작하거든."
난 허둥대며 손목에 걸친 시계를 보니 마침 1시를 가리켰습니다.
"어?! 벌써 한 시네. 공부하러 가야겠다!"
석재에게 등을 돌리곤 재빨리 걸음하고 싶었건만 이미 나의 팔은 석재에게 붙잡힌 상태였습
니다.
그리고 괜스레 주먹으로 나의 어깨를 가볍게 툭 치며 실실거렸습니다.
"가긴, 어딜 가! 짜식, 당황하긴."
"누가 당황했다는 거야?"
난 화제를 돌리는데 급급했습니다.
"그보다 무슨 일로 왔어?"
"말했잖아. 요즘 네 녀석이 좀 이상해서. 특히 목요일에 말이야. 그래서 오늘 학교도 빠지고
마음먹고 뒤쫓아왔지. 역시 내 감이 맞았어."
"참... 너도 할 일 정말 없다. 그래서 나의 우스운 꼴을 보니 좋든?"
"또 삐딱하게 받아들이기는. 아냐, 임마. 네가 다른 사람을 다시 좋아할 수 있게 되는 것 같
아서 보기 좋아."
"좋을 것도 많다."
"그런데 네가 말한 사람이 좀 전에 내가 봤던 흰색 니트 입었던 계집애가 맞지?"
난 석재의 '계집애'란 말이 거슬렸습니다.
"야, 계집애라니?!"
"짜식, 또 발끈하긴. 그래, 다시 말할게. 네가 전에 첫눈에 반한 여자가 있다고 했는데 그 여
자가 좀 전에 내가 봤던 흰색 니트 입은 공주님이 맞지?"
"그렇긴 한데... 공주님은 또 뭐야? 오늘따라 네가 날 자주 자극하네."
"또 삐딱하게 받아들인다. 그냥 이미지가 공주님이라서 그런 거야. 보아하니 집에서 곱게 자
랐겠어. 온실 속의 화초처럼..."
순간 어떻게 석재가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그녀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는지 의문이 생겼습
니다.
내가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 보았다한들 그녀 이외에도 그녀의 친구는 물론 다른 여자들도
지나갔는데 말입니다.
"근데 석재, 너 어떻게 내가 그 사람을 좋아하는지 알았니? 그 사람 이외에도 네 곁을 지나
가는 여자들은 많았었는데."
"그냥... 많이 닮아서..."
석재의 말에 의아해하며 반문했습니다.
"닮아? 그 사람이 누굴 닮았다는 거야?"
"너, 지금 모른 체 하는 거야, 아니면 정말 모르는 거야? 누구긴, 지은이 누나 말이야."
난 또 발끈했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그 사람이 어떻게 그 사람하고 닮았어?! 강석재, 오늘 네가 나한테 맞
을 말만 골라서 하는 것 같다?!"
"솔직히 재력(財力)이나 외모는 지은이 누나가 훨씬 낫지만, 글세... 뭐랄까?... 이미지?... 아
무튼 그렇게 느껴져. 게다가 너 말투를 봐. 넌 지은이 누나한테 사귈 때도 항상 그 사람이라
고 불렀어. 근데 너, 금방 그 여자에 대해 말할 때도 그 사람이라고 했어. 그 사람이라고..."
그러고 보니 나도 모르게 그런 것 같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느껴지지만, 부정하고 싶었습니다.
만약 석재의 말대로 그 사람과... 아니, 그녀와 그 사람이 닮았다면... 그래서 무의식적으로
그 닮은 이유로 그녀를 좋아하고 있다면 아직 그녀에 대한 마음은 순수하지 못하다는 것이
었습니다.
물론 그녀와 내가 사랑하는 사이가 될 가능성은 희박하겠지만 설사 그렇게 된다한들 순수하
지 못한 마음에 그 사람과 닮은 사랑을 하고 차마 닮은 이별까지 할까봐 두려웠습니다.
결국 지금은 그의 당치도 않는 말에 부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말도 되지 않는 소리하지마! 닮긴, 누가 닮았다는 거야?!"
"또 소심하게 군다. 그냥 내 느낌이 그렇다는 거야. 내 느낌이..."
석재의 그런 말은 내게 더욱 괜한 투정만 불러 일으켰습니다.
석재의 느낌은 거의 정확했기 때문입니다.
특히 남녀 관계에 대해서는 소름끼칠 정도였기 때문입니다.
"오늘따라 정말 네 녀석이 맘에 안 들어."
석재는 나의 투정에 그저 피식거리며 말했습니다.
"내가 네 녀석 맘에 들든지, 아니든지 간에 그래도 다행이야. 네가 다시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어서... 물론 당연한 현상이지만, 너는 좀 힘들 것 같았는데... 내 느낌이 틀릴 때도 있네."
"당연한 거잖아. 이별을 하면 그 당시에는 다시는 사랑을 하지 않겠다고 맹세하지만, 바보같
이 사랑의 감정에 넘어가 다시 누군가를 사랑하는 게 사람이잖아. 나도 사람이고 당연한 현
상이야. 다만... 헤어진 그 사람에게 미안할 뿐이지."
석재는 또 주먹으로 나의 어깨를 가볍게 툭 쳤습니다.
"내가 전에도 말했지만, 더 이상 네가 지은이 누나한테 미안할 필요는 없어. 그보다 그 공주
님이랑 잘해봐라. 너랑 잘 어울리는 것 같더라."
그의 당치도 않는 말에 절로 웃음이 나왔습니다.
"미친놈... 그 사람은 아직 내 존재조차 모르는 걸."
"또 그 사람이라고 하네?"
"됐어, 그만해. 그보다 너 점심은 먹었어?"
"내가 어떻게 먹었겠니? 아침부터 너 미행하느라 아침도 못 먹었다고."
"그럼 밥이나 먹으러 가자. 그렇지 않아도 오늘 아침을 조금밖에 먹지 않은데다 너 때문에
괜히 긴장하고 열 좀 냈더니 배고프다."
"그래, 내가 그 대가로 거하게 맛있는 걸로 사주지."
"이 근처에 맛있는 게 뭐가 있다고... 가자."
난 앞장서서 교양학관 정문을 빠져나갔습니다.
그리고 계단 몇 개를 밟고 내려갈 찰나였습니다.
"참...! 준우야..."
갑작스런 석재의 말에 잠시 걸음을 거두고 고개를 돌려 올려다보았습니다.
좀 전의 천진난만한 석재의 표정은 온데간데없고 오히려 비정한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았
습니다.
갑작스런 그의 표정에 나도 모르게 나직이 말했습니다.
"왜...?"
석재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내가 다시 계단 하나를 밟고 올라서자 그제야 입을 열었습니다.
"지현이 출산예정일이 1주일 정도밖에 남지 않았데..."
일순 석재의 표정처럼 나의 표정 또한 비정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 한 사람을 잊고 있었습니다.
나로 인해 불행해진 사람...
윤지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