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갈피

벙어리 삼순이 #21

독백 |2004.03.24 19:21
조회 466 |추천 0

벙어리 삼순이 # 21

 


12시가 되었다. 오늘은 12월 25일 크리스마스다. 그리고 윤주와 함께 있다.

 

"내 옆에만 있어..."
"...그럴게..."
"아무대도 가지마..."
"...으응..."

 

몇 년만의 화해... 아니 난 처음부터 윤주를 미워할 수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1월 1일이 되었다. 연희동 본가...

 

"하하하- 우리 신우가 나이 한 살을 더 먹더니 확실히 달라졌구나. 그래 너도 이제 스물 여덟이
다. 우리집안에 유일한 남자이기도 하지. 그래- 사업을 하겠니?"
"아직은 제가 한국에 대해서도 잘 모르고 사업에도 관심이 없으니 그건 일단 미뤄두죠. 하지만
언젠가는 할 겁니다."
"그래. 그래야지. 우리집안은 원래 사업을 하는 집안이다. 내가 비록 의원일을 하고 있지만 이
것도 사업의 일종이 아니겠느냐. 세상은 그런거다. 이익이 되지 않는 일은 하는게 아니야. 내가
이자리에 있을 동안은 내가 할 수 있는 한 도움을 주겠다. 그러니 니가 하고 싶은 일을 좀 더 구
체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네. 큰아버지."

 

오후가 되어 승민이가 집으로 온다기에 본가에서 나왔다.

 

"어디냐?"
"다와간다- 기다려라 좀"
"야, 난 집 앞..."
"왜 갑자기 꿀먹은 벙어리야?"
"그, 그게..."
"야, 한승민-"
"누, 누나가 있어..."
"윤주?"
"응?"
"윤주 벌써 와 있어?"
"황보신우, 무슨 소리하는 거야?"
"오후에 오기로 했거든. 윤주하고 먼저 들어가 있어. 나 다와가-"
"...그, 그래..."

 

난 곧 내 오피스텔에 도착했고, 안으로 들어가자 웃으며 윤주가 나를 반겼다. 그에 승민이 자식
은 놀란 눈을 하고 우릴 번갈아가며 쳐다 보았고, 난 웃음이 났다.

 

"뭘 보냐?"
"두, 둘이 왜 이래?"
"뭐가?"
"둘이 화해...했어?"
"화해? 언제 우리가 싸웠냐? 잠시 떨어져 있었을 뿐이지."
"......."
"세상이 다 그런거 아니겠어?"
"난 불안하다..."
"불안할꺼 없어 임마-"

 

승민이 자식의 어깨를 몇대 툭툭 두들겨 주었다. 짜식- 내말대로 세상은 다 그런거야.

 

그리고 난 재현이 녀석들과의 모임에도 윤주와 함께 나갔고, 내 여성기피증은 거짓말처럼 사라
지고 없었다. 게다가 윤주때문에 놓았던 붓이지만 다시 잡게 되었고, 좀 더 많은 세상을 보고
그리기 위해 주말이면 윤주와 함께 가까운 곳으로 나가 그림도 그리고 데이트도 즐겼다.

 

"신우 자식 진짜 많이 변했어-"
"나도 느꼈는데-"
"난 불안하다-"
"그래도 밝아진거 보니까 좋지 않냐? 강윤주가 대단하긴 한가봐?"
"난 모르겠다. 그냥 지금 상태가 오래가길 바래- 그 모습이 오래가길 바란다구-"

 

"걱정마라- 안그래도 오래오래 가실거다-"

 

오랜만에 재현이네 클럽에 들렀다. 일주일에 두번정도는 들러주었던 제우스였는데 이제는 윤주때문에 일주일에 한번을 들르기도 힘들어졌다.
내 걱정을 하고 있던 승민이와 재현이. 난 녀석들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사이로 파고 들어갔다.

 

"언제 왔냐?"
"언제는- 지금오셨지."
"바뿌시다며?"
"암- 바뿌시지."
"근데 여긴 어쩐일로 다 오셨대?"
"한승민 말투 봐라- 너 많이 컸다?"
"난 원래 크셨다-"
"하하하- 내가 기분이 좋으니 참지-"
"왜 기분이 좋으신대?"
"글세-?"
"이자식 말투봐라- 윤주누나가 약은 약인가보네. 무뚝뚝씨를 나긋나긋씨로 싹 바꿔 놓고?"
"나긋나긋? 하하하- 야 그게 뭐냐?"
"......."
"후훗- 농담이다. 짜식- 여진인가랑은 잘 지내냐?"
"당연한거 아니시겠어? 여진인 내 마지막 사랑이 될거야-"
"제발 그러시길 바라겠어-"

 

"이자식들. 만나기만 하면 말장난- 모르는 사람이 보면 싸우는 줄 아시겠다-"

 

"웃으면서 싸우는거 봤냐?"
"......."

 

승민이 녀석의 볼을 당겨 내 볼에 갖다 부볐다. 이런행동 예전엔 하지조차 않았었는데...

 

"전화다- 나 간다-"
"뭐야 벌써가?"
"어. sorry- 다음에 들를게-"
"그래- 잘가라-"
"OK-"

 

윤주의 전화였다. 오늘은 수술이 없었고, 오전 근무만이 있었기 때문에 집에서 윤주의 얼굴을
그려주기로 했다.

 

"들어와-"
"응"
"뭐 먹고 할까?"
"아니- 병원에서 계속 먹다가 왔어-"
"그래- 잘했어. 잘 먹어야지. 피곤하진 않아?"
"응."
"그래- 그럼 지금부터 시작할까?"
"응. 준비됐어-"

 

윤주가 의자에 앉았고, 나도 이젤을 마주하고 앉았다. 오랜만에 그리는 윤주의 얼굴이어서 그
런지 난 매우 흥분해 있었다. 그럼에도 내 손은 몇년이 지났는데도 윤주의 얼굴 선 하나하나를
기억하고 있는 거였는지 아주 익숙한 솜씨로 가뿐하게 움직여 주었다. 내가 그리고 싶었던 얼
굴...

 

"바보야 웃으면 어떻게-"
"쿡쿡- 자꾸만 웃음이 나오는데 어떡해?"
"그래도 처음 표정 그대로 유지해야 돼."
"알았어. 알았다구- 쿡쿡"
"뭐야-"
"자꾸만 후훗. 웃음이 나와-"
"한번만 더 웃으면 혼내켜 준다-"
"알았어. 안 웃을게-"

 

그리고 그날 저녁 승민이 녀석에게 전화가 왔다. 재현이네 클럽에 있다며 놀러 오라는 전화...
난 윤주의 얼굴 마무리를 남겨두곤 윤주를 데려다주고 녀석에게로 갔다.

 

"아까도 보고 이몸이 또 보고 싶어졌냐?"
"오버하지마- 너 보고 싶다고 한건 내가 아니고 진원이다-"

 

"무슨일인데?"
"무슨일은 무슨- 그게 아니고, 하도 니가 180도로 달라졌다길래 구경차 부른거다-"
"뭐?"
"나 일본 갔었잖냐. 그새 니가 전혀 딴 사람이 됐다길래 내가 믿을 수 없다고 했지. 그래서 직접
보기 위해 널 부른거 아니겠냐-"
"강진원 너 미친거 아니냐? 너 이자식 누굴 오라가라야?"
"야- 한승민! 바뀌긴 뭐가 바뀌어? 넌 잡히면 아작 날 줄 알어-"

 

"무슨 소리야?"
"야! 황보신우가 다른 사람이 됐다며? 개과 했다며? 똑같잖아!!!"
"그럴리가 있냐? 야. 너 뭐야?"

 

"너네 너무 많이 큰거 아니냐? 내가 아무리 요즘 기분이 좋기로 날 갖고 노냐?"
"신...우야-"
"푸흡- 농담이다 농담. 장난친거야- 짜식들 왜케 쫄고 난리야?"

 

"......."
"......."

 

"어차피 모였는데 오랜만에 거하게 한잔 해볼까? 재현아 술 좀 가져와라-"

 

그리고 승민이 재현이 진원이와 함께 얼마나 많은 양의 술을 마셨는지 병조차 셀 수 없을 정도
가 되었다.

 

"그러니까- 끅- 옛날 그 첫사랑이랑 지금 러브 i.n.g라고?"
"그렇다니까? 그래서 얘- 얘- 황보신우가 지금 기분이 very happy 한 상태라구-"

 

승민이 자식이 내 머리를 두어번 손가락으로 콕콕 찔렀다. 평소같았으면 승민이 자식은 내 주
먹에 바닥에서 나뒹굴고 있었을 텐데 오늘은 아니었다. 아니 지금은 아니었다.

 

"이야- 그 여자 대단한데? 끅- 윤주... 누나라고 했지? 난 얼굴... 끅- 한번 밖에... 못 봤는데-"
"안돼! 못 보여줘!"

 

"황보신우 혼자 무슨 얘기 하고 있냐?"

 

"우리 윤주 얼굴 닳아- 못 보여줘. 절대로."
"야- 누가 보여 달랬냐? 후우-"
"그러니까- 모, 못 보여준다구-!!"
"아...알았다 임마- 안봐- 안봐- 절대 안본다구-"
"그래... 그래야지..."

 

진원이도 재현이도 모두 취해 있었다. 그리고... 한참을 졸던 거였는지 고개를 숙인 채 말이 없
던 승민이가 입을 열었다.

 

"잊은...거냐?"
"뭐?"
"잊은 거냐구..."
"뭐가? 뭘-?"
"걘 잊은거냐구? 니 애물단지. 삼순이..."
"......."

 

갑자기 승민이의 입에서 나온 삼순이란 말때문에 내 몸의 신경이 모두 멈추는 듯 했다. 마치 시
내 한복판을 멋지게 달리던 자동차가 갑작스레 노란불에서 빨간불로 바뀌어버려 급브레이크를
밟아 버린 것처럼...

 

"정말 잊었냐?"
"훗- 걔 얘긴 왜 꺼내냐? 내 옆에서 못 떼놔서 안달하던 놈이-"
"그래도... 특별했잖아-"
"...특이 했겠지. 특별은... 아니었어."
"......."

 

승민이는 한동안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다시 잠든거냐? 이봐- 한승민-

 

"...삼순이 소식은 들었냐?"
"...뭐?"
"소식은 듣냐구?"
"소식은 들어서 뭐하게?"
"걱정... 안돼?"
"무슨 걱정? 선호 좋다고 따라가서 잘 살고 있을텐데 내가 왜 걔 걱정을 해?"
"...삼순이... 선호랑 같이 안 있어."
"......."

 


"삼순이 선호랑 같이 안 있어."
"선호랑 같이 안 있어."
"같이 안 있어."
"안 있어."
"삼순이 선호랑 같이 안 있어..."

 

내 귓가를 몇번이고 맴돌며 내 머릿속을 흔들어 놓는 승민이의 말.
근데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추천수0
반대수2

공감많은 뉴스 시사

더보기

뉴스 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