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치지 않는 비는 없다.
jude http://www.cyworld.com/jude_queen
꿈과 현실에 방황하는 이들에게.
억수 같이 퍼붓는 비. 세상의 색이 선명해졌다. 햇살의 힘은 없고, 먼지도 씻겨, 오직 자기만의 명암을 색을 드러냈다. 난타처럼 요란하게 바닥을 두드리는 빗방울.
비가 오는 날이면 사람들은 평소보다 감성적으로 변한다. 아름다운 사랑이야기가 더 감동적으로 다가오고, 모락모락 김이 피어 오르는 커피의 향은 더 진하게 느껴지고, 보라 빛의 와인, 청아한 소주, 달짝지근한 동동주의 맛도 깊어진다.
태양이 식어버린 듯 차가운 비가 내리면 이별의 아픔은 더 깊어지고, 홀로 있다는 외로움은 겨울의 앙상한 나뭇가지 같은 마음의 빈곤을 느끼게 한다.
이처럼 비는 세상의 명암을 명확히 해준다. 그래서 세상은 햇살을 그렇게도 원하는지도 모르겠다.
폐점시간이 지난 백화점의 텅 빈 야외 광장. 화창한 주말의 낮이라면 연인, 가족, 친구들로 북새통을 이룰 노란 벤치. 햇살을 받을 땐 레몬 빛으로 보이지만, 비에 젖은 벤치는 그 색을 분명히 했다. 짙은 노란색이었다.
그 텅 비어 있는 광장에 한 남자가 끝 쪽에 위치한 벤치에 앉아있다. 우산도 없이 고개를 숙인 채.
차가운 비에 젖은 옷 때문인지 그의 어깨는 땅이 끌어 당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쳐져 있고 무거워 보였다. 작은 떨림. 세차게 내리는 비는 남자의 이마를 타고 눈을 적시고 턱으로 흘러 내렸다.
저 남자는 왜 저렇게 있을까? 영화 속의 한 장면이라면 아름답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해피엔딩happy ending은 존재하지 않는 현실에선 그저 처량하기만 할 뿐이다.
사랑문제라면 이별의 고통일 것이고, 직장의 문제라면 해고, 사회의 냉혹함, 돈의 힘 앞에 무릎 꿇을 수 밖에 없는 안타까움일 수도 있겠다. 아무튼 그는 지금 상당히 괴로움의 시간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비는 그를 위로하려고 어깨를 다독이는 건지, 아니면 고통의 색을 확실히 보여 주려는 건지, 비는 계속해서 거리를, 남자를 적셨다.
남자는 힘겹게 일어섰다.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어디론가 향했다. 목적지가 적혀 있지 않은 지도만을 가진 듯.
자동차들은 헤드라이트를 켜고, 와이퍼가 쉴 새 없이 움직이며 비를 가르며 도로를 달렸다. 남자에겐 앞을 비춰줄 불빛도, 비를 닦아 줄 와이퍼도 없었다.
학원을 마친 학생 둘은 비틀거리는 남자를 빈틈없는 눈빛으로 경계하며 비켜 지나쳤다.
“술 취한 어른들이 젤 꼴불견이지 않냐? 난 절대 커서 저렇게 안돼야지.”
학생 중 한 명이 친구에게 한 말이다. 남자는 그 소리를 들었다. 취해 있지 않았었던, 술이라곤 입에도 되지 않았었던 남자는 편의점에서 소주를 샀다. 투명한 초록색 병을, 왼손은 가운데를 잡고, 오른손은 병뚜껑을 돌렸다. ‘찌그렁, 찌그렁.’ 소리가 나면서 열렸다. 남자는 편의점을 나서며 맑은 액체를 쏟아 내는 병 입구에 입을 데고 들이켰다. 병 안의 액체들이 빠르게 입구로 향했고 남자의 목은 그것들을 빠르게 넘기느라 ‘꿀떡꿀떡’ 소리를 냈다. 독한 술도 갈갈이 찢어진 그의 아픔을 소독하지 못했다. 그저 정신을 잃게 해 고통을 느끼지만, 알지 못하게 하는 마취제 역할을 할 뿐이다.
소주 한 병을 더 사 들고 다시 무작정 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비틀거리다 차에 받힐 뻔도 했다. 그때마다 운전자들은 비가 거세게 오는데도 불구하고 창문을 열고 남자에게 욕을 해댄 다음에야 만족했는지 갈 길을 갔다. 그게 자신의 임무라고 생각하는 듯.
“어이 형씨 비 오는데 우산도 없이 뭐해?”
지나가던 불량 청소년들이 담배를 깊게 빨아 들였다가 남자의 얼굴에 내뱉으며 말했다. 갑자기 남자는 그 청소년들을 보고는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는 담배를 피며 조롱하는 표정을 짓고 있는 소년의 어깨를 소주를 들지 않은 손으로 잡고 말했다.
“불쌍한 새끼들, 불쌍한, 불쌍한…...”
술을 먹어서인지, 감정이 복받쳐선지 계속 같은 단어만 중얼거리듯 말했다. 갑자기 울고, 불쌍하다고 말하는 그 남자의 손을 소년은 거칠게 뿌리쳤다. ‘아, 재수없네 신발.’하며 등돌려 걸어갔다.
남자는 휘청거리다 넘어졌다. 남자는 몸을 일으키려다 빗물이 만든 거울에 비치는 자신을 봤다. 비가 내려 파장이 일고, 검은 아스팔트 바닥이라 더 비참해 보였다.
“못난 놈.”
그렇게 거울에 비친 자신에게 말하곤 침을 뱉었다. 그리고 큰 소리로 웃었다. 웃음이 점점 작아지더니 이번엔 몸을 떨며 소리 죽여 울었다. 흐느낌.
비의 비아냥거림에 일어서 비틀 되는 다리를 옮겼다. 비에 의해 씻겨진 거리엔 그만이 외로이 있었다. 주황색의 가로등은 슬픔의 모노드라마의 유일한 조명, 잠든 도시는 어둠과 침묵으로 둘러 쌓인 관객석이었다. 이 연극의 유일한 목소리이자 고통을 겪는 주인공인 남자는 쥐고 있던 반쯤 남은 소주병을 머리 위로 들었다가 발 아래로 내던졌다. 비가 쏟아지는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곤 소리질렀다. 그 하찮은 소리는 곧 비에 씻겨 버렸고, 남자는 갑자기 깨진 병들을 신경질적으로 밟았다. 큰 조각, 작은 조각 그리고 부스러기들이 같은 모양으로 닮아 가고 있었다.
바닥엔 포도주의 매혹적이면서 선명한 색이 비를 따라 흘렀다. 남자는 아픔을 느끼지 못하는 듯 반듯하게 걸어갔다. 비틀거리며 걷던 전보다 오히려 잠재우지 못한 혼란이 엿보이는 듯 했다.
밑창이 찢어져, 유리조각에 찔려 그의 발엔 피가 나지만 그가 쉴 곳은 아직 보이지 않았다. 무감각한 듯 통증을 참고 그냥 무작정 어디론가 걷는 것이다. 계속 걸어야 했다. 아님 길가에 아무렇게나 주저 앉던지.
걷다 보니 아직 완전히 잠들지 않은 시내에 왔다.
한 우산 안에서 달콤한 사랑을 나누는 연인. 그 옆의 초라한 남자. 같은 공간이지만 너무나 다르다. 이 또한 비가 구별한 것 인가. 문득 밀턴의 말이 떠오른다. ‘마음은 그 놓인 자리를 낙원으로 만들 수도 있고 지옥으로 만들 수도 있다는 그 말.’
분명 이 곳에서 남자의 즐거운 시간은 존재했었을 것이고 저 연인들은 서로를 향해 잘못을 탓하던 때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남자의 행복한, 그 기억이라는 덩어리는 다리를 더 무겁게 잡아 끄는 중력일 뿐.
포근한 빗속에서 서로를 감싼 연인들은 행복에 겨워 가벼운 발걸음으로 상쾌한 낙원의 초원을 걷는다.
남자에겐 차디찬 비, 끝없이 펼쳐진 사막. 가파른 산.
우산이 없는 남자의 초라한 행세는 모세가 바다를 가르듯 사람들을 갈라 길을 냈다. 비틀거리는 걸음걸이, 홀딱 젖은 몸, 찢겨진 신발, 행인들은 취객을 불쌍히, 두렵게 보며 피했다.
땅에 입맞추는 비의 소리는 집요할 정도로 멈추지 않고 계속되었다. 남자의 메말라, 갈라진 마음의 대지를 메우려는 듯.
바람마저 불기 시작했다. 비는 사선으로 내렸다. 더 강하게.
비바람이 남자의 걸음을 더디게 했다. 옷이 바람에 날리고 그의 얼굴에 거센 비가 시야를 가렸다. 정말 거센 비바람.
남자는 팔을 눈까지 올려 힘겹게 한발씩 뗐다.
사람들이 쓰고 있던 우산들은 뒤집히고, 날아가고, 망가지고 모두들 갑작스럽게 처한 상황에 주위를 두리번거리곤 안전한 건물로 들어갔다. 건물 안에 모인 사람들은 옷을 털고 머리와 얼굴을 닦았다. 그리고 퍼붓는 비를 보며 의미 없는 투정을 해대다, 집이나 친구, 애인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이 처한 상황을 설명하고, 때론 아무 설명도 없이 해결해 주길 바라는 부탁을 했다. 때론 명령도 있었다.
남자는 건물 밖에서, 그저 멍하니 바라보다 고개를 숙이고 그 자릴 떠났다.
불이 꺼진 가게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찢어진 신발의 밑창을 불쌍히 쳐다봤다. 한참 동안이나.
문득 고개를 들어 고물이 다 된 신을 신고 있는 자신이 앉아 있는 곳이 신발가게라는 것을 알아차리곤 살짝 웃으며 힘없이 중얼거렸다.
“하하, 제대로 찾아 왔네. 제대로 찾아왔어...”
고독과 나란히 앉아 꿈을 꾸는 듯 눈은 허공을 응시했다.
비바람에 정신이 쏠린 사람들은 그를 보지 못했고, 그도 그럴 것이 관객석처럼 어둠이 깔려 있는 자리였다.
가로등과 가로등 사이가 지어내는 어둠의 간극이 점점 멀어 보였다.
비는 시간이 흐를수록 거세져만 갔다.
남자는 자신이 늘 타는 버스가 오는 것을 보자 반사적으로 일어났다. 막차, 잠시나마 비를 막아줄, 집으로 데려다 줄 단 하나의 버스였다. 그는 멈칫하더니 다시 앉았다.
“난 이미 끝인 걸......”
막차는 이미 그를 뒤로하고 가버렸다.
하염없이 내리는 비는 그의 감수성을 끝없이 자극했다. 아름다움은 느끼지 못하고 오직 자신의 고독한 감정에 충실한 감수성.
누군가 그랬다. 고독이란 뜻을 알기도 전에 느끼는 단어라고.
슬펐다. 눈물이 났다. 괴로웠다. 모든 걸 다 무시하려 몸을 웅크렸다.
한 동안 앉아 있던 남자는 뭔가를 결심했는지 벌떡 일어났다. 눈에선 불안감이 감돌고 있었다. 큰 빌딩을 아래에서 고개를 뒤로 젖히고 바라봤다. 너무 가까이 선 탓도 있지만 빌딩이 높아서 마치 하늘을 보는 것 같았다. 가만히 서있던 남자는 주먹을 떨릴 정도로 강하게 쥐고 건물로 향했다. 버튼을 누르자 엘리베이터가 열렸다. 남자의 정면에 열린 엘리베이터는, 남자의 모습을 비추고 있는 큰 거울이 있었다. 문이 닫힐 때까지 움직이지 않고 자신을 응시했다.
“못난 새끼.”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남자는 다시 버튼을 눌리려고 하다 손을 멈췄다. 다시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볼 용기가 없었다. 옆으로 시선을 돌려 계단으로 걸어갔다. 그리곤 계단을 하나씩 적셨다.
옥상의 문을 열자마자 건물이 막아주던 시련이 모습을 드러냈다. 남자는 숨이 가쁜데도 쉬지 않고 혹독한 세계로 나아갔다. 옥상의 난간까지 다가가 아래를 내려봤다. 비와 바람이 몰아치는 마천루.
이제 삶이라는 연극을 끝내기로 결심하고 마천루의 머리에 올라섰다. 관객을 조마조마하게 만드는 서커스의 외줄타기처럼 위태롭게 균형을 잡고 있는 남자. 아래로 향하고 있던 그의 시선은 천천히 검은 하늘로 향했다.
“고작 이렇게....... 이렇게 살려고….... 하하하하하하.”
중얼거리다 말고 크게 하늘을 향해 웃었다. 그러다 강한 바람에 남자의 몸이 밀렸다. 공중에 붕 뜬 몸.
다행히 뒤로 떨어졌기에 약간의 통증만으로 그쳤다. 남자는 대자로 손과 다리를 쭉 뻗고 눈을 떴다. 차가운 비가 눈에 떨어져서 반응하는 듯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뻗어 있던 오른손으로 두 눈을 가렸다.
“아저씨 뭐해요?”
한 소년이 우산 쓴 채 쪼그려 앉은 채 남자를 보며 말했다.
남자는 그 소리에 놀라 몸을 일으켰다. 차가운 비, 자살기도 실패, 울음, 그리고 지금 난데없이 나타난 소년 때문에 술 기운은 깨끗이 씻겨져 버렸다.
남자가 말이 없자 소년이 ‘누구세요? 여기서 뭐해요?’하고 물었다. 남자는 답하지 않고 소년을 살폈다. 하얀 모자, 동그란 눈, 동그란 얼굴을 한 15살 정도로 보이는 소년. 남자가 답을 앉아 소년은 일어서 남자가 올라섰었던 난간으로 갔다. 한 손으론 하얀 우산을 잡고 한 손은 난간에 걸치고, 팔에 턱을 묻고 남자가 봤을 도시를 내려다봤다.
남자는 일어서 소년의 옆으로 가 난간에 팔꿈치를 내려놓고 말없이 도시를 보는 소년을 바라봤다. 소년이 시선을 느꼈는지 도시를 보던 눈을 남자에게로 돌렸다.
“이 시간에 여기서 뭐 하는 거니?”
남자가 말했다.
“그럼 아저씨는 뭐해요?”
소년의 물음에 남자는 ‘밤은 위험해.’라고 말하려다가 삼켰다.
“집이 어디니?”
소년은 남자의 말에 답하지 않고 다시 물었다.
“아저씬 집이 어딘데요?”
남자 또한 답하지 않았다. 둘은 말없이 허공에 시선을 둔 채 가만히 서있었다. 빗줄기가 더 굵어져 시원한 소리를 내면서 쏟아졌다. 소년이 남자를 쳐다보고는 우산을 높이 들어 씌워주며 한 손으론 남자의 셔츠를 잡더니 어디론가 데려갔다. 소년이 걸음을 멈춰 손가락으로 위를 가리켰다. 그 곳은 지붕 같은 벽이 나온 어린 아이들의 비밀장소로 딱 알맞은 곳이었다. 남자가 멀뚱하게 서있자 소년이 먼저 들어가더니 우산을 접고 남자를 불렀다. 남자의 키보다 지붕의 높이가 약간 낮았기에 허리를 숙이고 들어갔다. 그리고 둘은 나란히 벽에 기대고 앉았다.
“아저씨 아까 죽으려고 했죠?”
소년의 갑작스럽게 던진 난감한 질문에 남자는 더듬거리면서 간신히 부정하며 말도 안 되는 변명을 했다. 소년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는 그런 소년의 침착한 태도가 자신의 거짓을 꿰뚫고 있는 것처럼 느껴 당황한 표정을 숨기지도 못한 채 ‘그런 소리는 함부로 하는 게 아니야.’하고 꾸짖든 말했다. 하지만 소년은 나이에 맞지 않게 흥분하지도 않고, 주눅들지도 않고 차분히 남자의 말에 ‘네.’하고 답했다.
남자가 진정하기 전에 소년은 담담히 놀라운 말을 했다.
“아저씨 전 곧 죽어요.”
“뭐....... 진짜?”
남자는 소년의 말에 알맞은 대답을 찾지 못하고 입에서 아무렇게나 튀어나와 의도하지 않은 어린아이 같은 확신을 요하는 질문을 했다. 남자는 실수를 만회하고자 소년의 눈을 보며‘어른을 놀리면 못써.’와 같은 더 유치한 표현을 하려는데, 모자를 벗은 소년의 모습을 보곤 침묵을 지켰다. 중학생 혹은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아이의 머리가 스포츠가 아니라 동자승처럼 푸른 빛이 돌 정도로 짧았기 때문에.
남자는 또 상황에 적당한 말을 생각지 못해 말없이 감정을 담은 눈으로 볼 뿐이었다. 소년은 그런 눈을 알아차렸는지 살짝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이제 익숙해져서.”
소년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이어진 침묵, 빗소리가 그들의 세계에 유일한 소리였다.
남자가 소년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둘은 한동안 말없이 허공을 바라봤지만, 마음은 서로를 향했다. 소년이 눈가를 살짝 훔치곤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전 행복해요.”
“그래?”
남자는 진심으로 그랬으면 좋겠다고 바랐지만, 절대 그럴 리가 없다고 믿었다. 동정 어린 눈으로 소년을 쳐다봤다. 소년은 자기가 한 이야기의 뜻을 정말 알고 있는지 궁금할 정도로 침착하고 밝았다. 그런 모습에 남자는 자신도 모르게 물어선 안 될 질문을 했다.
“곧 죽는데, 아무렇지 않아?”
소년은 직접적으로 답하는 대신 남자의 눈을 거울처럼 보며 ‘아저씨 제 이야기 들어 보실래요?’ 라고 말하곤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러니까 음...... 의사선생님이 낙담한 표정으로 제 앞에 서기 전에 전 알고 있었어요. 아니, 느끼고 있었어요. ‘내 몸은 지금 문제가 좀 있구나.’하구요. 그리고 일주일쯤 지난 뒤 우연히 화장실을 다녀오는데 의사 선생님 방으로 들어가는 저희 부모님을 보고 따라갔어요.”
거기까지 말한 소년은 잠시 멍하니 검은 밤하늘을 보다 말을 이어갔다.
“처음 들었죠. 믿을 수 없는 사실을요. 그리고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어요. 의사선생님의 입에서 나온 3개월이라는 숫자를. 그건 저만의 모래시계였어요. 오차가 거의 없는.”
남자는 소년이 분명 울 것이라고 생각하고 살며시 고개를 돌렸지만,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비와 어울리지 않는 밝은 빛의 표정이었다. 소년은 목을 쭉 빼고 남자의 얼굴에 가까이 가서 물었다.
“아저씨, 아까 궁금하다고 그랬죠? 아무렇지 않냐고, 죽는데.”
남자는 자신이 한 생각도 없는, 위로는커녕 아픔을 주는 전혀 적절치 않은 질문에 수치심을 느꼈고 무엇보다 소년이 너무 가여웠다. 그러나 정말 궁금했다. 소년은 그런 남자의 호기심을 읽었는지 명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순간부터 전 정말, 뭐랄까, 암튼 아저씨 엄청난 고통을 겪었어요. 이해 하실 수 있을려나? 음...... 예를 들면...... 아 맞다, 학교에서 주사 맞잖아요. 그걸 매일 하는 듯 했어요. 그 이후 상황은 더 악화되었어요. 약이 독해서 머리도 빠지고 밥 맛도 없었어요. 신경은 예민해져서 툭하면 짜증내고, 모래시계의 소리가 들릴 때마다 주위에 있는 던질 수 있는 건 다 내팽개쳤어요.”
그때가 떠올랐는지 아까와 느낌이 다른 쓴 웃음을 홀로 비가 떨어지는 땅을 보며 지었다. 남자는 소년이 더 측은하게 느껴졌다. 그걸 눈치 챘는지 약한 모습을 안 보여주겠다는 듯 개구쟁이 같은 표정을 짓고 힘있는 목소리로 이야기를 했다.
“그때 다른 의사선생님이 와서 절 응급실로 데리고 갔어요 갑자기 말이에요. 제가 아픈 것도 아닌데 데리고 가선 의자에 앉혀 놓았어요. 새벽이 되자 초를 다투는 환자들이 많이 들어왔어요. 전 무서워서 병실에 올라갔죠. 근데 다음 날 저녁에 또 오더니 절 데리고 가는 거예요. 전 속으로 어제 그렇게 많이 왔으니 오늘은 없겠거니 했어요. 죽는 사람이나 다치는 사람이 그렇게 많다고 생각지 않았거든요. 근데 어제보다 심한 부상을 입은 환자부터 엄청나게 오는 거예요. 전 다시 병실로 가려고 했는데 그 의사 선생님이 절 놓아주지 않았어요. 그래서 의자에 앉은 채 끔찍한 상황을 보고 있을 수 밖에 없었죠.”
여기까지 신나는 이야기인양 말한 소년은 이제 중요한 부분이라는 듯 눈을 크게 뜨고 남자를 바라보며 잘 들으라는 암시를 주었다.
“그때 의사선생님이 말했어요. ‘너 하고 싶은 게 뭐야.’라고. 제 상태를 이 의사선생님이 모르는 게 아닐까 생각이 들어 설명했지만 알고 있었어요. 그리고 다시 제게 물었죠. ‘하고 싶은 일이 뭐야?’ 그래서 전 없다고 말했는데 끈질기게 물어보는 거예요. 전 신경질을 부렸어요. 그런데도 물어보길래 ‘빨리 죽는 거요.’하고 큰 소리로 대답하니 의사선생님이 거칠게 제 멱살을 잡고 응급실 환자가 누워 있는 곳으로 들어갔어요. 거기엔 고통으로 너무나 괴로워하고 있었어요. 그 비명, 거친 숨소리, 검붉은 피, 아직도 기억에 생생해요.
전 의사선생님 손에 끌려 다니다 다시 의자로 돌아왔어요. 선생님이 절 보고 말했죠. 저 사람들 중에는 네가 가지고 있는 그 시간도 없고, 준비하지도 못하고 갑자기 죽은 사람들도 있어. 근데 뭐? 빨리 죽겠다고? 넌 저 사람들에 비하면 축복 받은 거야. 어차피 사람은 죽게 되어 있어. 넌 언제 죽을 지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더 정확하게 안다는 거지. 그러니까 넌 축복 받은 거야. 그리고 누구나 오늘이 인생에서 가장 젊은 날이고 확실한 날 인 거야. 누구도 내일을 사는 사람은 없어. 바로 오늘을 사는 거지. ”
의사선생님의 말투를 흉내 내며 말한 소년은 남자의 눈을 보더니 쑥스러웠는지 수줍게 웃었다. 비는 아직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남자는 소년의 어깨에 있던 손을 올려 머리를 쓰다듬었다. 소년은 기분이 좋은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저 정말 축복 받았죠?”
남자는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구나.”
“밤에 내리는 비랑 도시를 보러 왔어요.”
소년의 갑작스런 말에 남자는 ‘뭐?’하고 반문했다. 그러자 소년은 양 볼에 바름을 잔뜩 넣어 쳐다보다 말했다.
“아까 아저씨가 물어봤잖아요. 여기 왜 왔는지. 제가 하루하루 할 일들을 적은 목록이 있는데 그 중에 높은 곳에서 비 내리는 거 보기였어요.”
그제야 남자는 ‘아~’하고 소리를 내 이해했음을 알렸다.
“이제 집에 가야겠어요. 아저씬 여기 있을 거예요?”
“집이 어딘데? 데려다 줄게, 가자.”
소년이 우산을 든 손은 남자의 손을 잡고, 남자가 소년의 하얀 우산을 들고 옥상을 빠져나갔다.
두 사람을 태운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했다. 그때까지도 남자는 거울을 보지 않고, 행여나 보게 될까 재빨리 내렸다.
건물 입구에서 맹렬한 기세로 쏟아지는 비를 보며 남자가 말했다.
“그나저나 비가 그치질 않네.”
소년은 남자의 말을 듣곤 ‘아!’하고 감탄사를 내자 남자가 왜 그러냐고 물었다.
“아까 제가 말한 의사선생님 있잖아요.”
“응.”
남자가 짧게 답했다.
“그 선생님이 이런 말도 했어요. ‘그치지 않는 비는 없다.’라고.”
소년의 말을 들은 남자는 그 말을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그 모습을 눈치 챈 소년은 기쁜 미소를 그렸다.
막차를 놓쳤던 버스정류소를 보자 괴로웠던 시간이 떠올라 놀랐다. 고통이 살아나서 놀란 것이 아니라 옥상에 올라가기 전과 지금의 자신과 너무나 다른 상태였기 때문에. 삶을 끝내고 싶은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올라온 기분.
남자는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고맙다.”
소년은 말없이 예쁜 눈으로 남자를 봤다. 버스가 끊긴 정류소 앞에는 택시들이 줄지어 서있었다. 하얀 택시에 소년을 태워 주고 정류소에 앉았다. 비는 여전히 쏟아졌지만 아까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조금은 낭만적이라고 할까? 그치지 않는 비는 없다는 걸 알고 나서인가.
버스가 언제 오는 지 알려주는 화면의 전자시계가 3시 19분이란 숫자를 나타내고 4시 50분이 첫차가 오는 시간이라고 적혀있었다. 남자는 느긋하게 정류소의 의자에 앉아 느긋하게 비를 바라봤다. 그러자 소년의 말을 떠올랐다.
‘그치지 않는 비는 없다.’
남자는 자신이 너무 쉽게 포기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자칫 목숨을 잃을 뻔 했던 순간들이 아찔한 기억으로 스쳐 지나갔다. 젊은 날에 한 번은 겪어야 할 감기 같은 우울증에 잠시 콜록 되었을 뿐이라고 자신에게 말하자 힘차게 시작한 내일이 기대되고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을 받은 남자.
4시가 조금 지나자 확신했던 느낌에 현실적인 문제들이 끼어들기 시작했다. 돈, 능력, 그리고 시간 모든 것들이 불가능하다고, 포기하라고 말하고 있었다. 남자는 이성적으로 따져볼수록 어렵게만 보이는 내일이었다.
그때였다.
“젊은 날의 고뇌만큼 아름다운 것은 없다네.”
말을 건 낸 60대로 보이는 할아버지는 남자의 옆에 앉았다. 남자는 옥상의 소년처럼 할아버지가 친근하게 느껴졌다.
“안녕하세요.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미소로 답하고 남자에게 물었다.
“자네도 버스 기다리나?”
인자함이 베어 나오는 할아버지의 질문에 남자는 그렇다고 말했다.
“젊은이 무슨 고민 있나 보군.”
남자는 ‘아니에요.’라고 말했지만 할아버지의 눈을 보니 거짓말을 할 수 없어 진실을 말했다. 할아버지는 잠깐 일어서서 오른손을 비 내리는 밖으로 내밀었다.
“뭐하세요?”
“비가 참 많이 오지?”
남자의 질문에 답하지 않고 다른 질문을 던진 할아버지.
“네, 정말 비가 많이 오네요.”
할아버지는 손수건을 꺼내 비에 젖은 손을 닦으며 남자의 옆에 앉으며 말했다. 그 목소리가 얼마나 가슴에 와 닿던지 남자는 어린 시절에 느낀 든든한 아버지를 떠올렸다. 따뜻한 손으로 남자의 어깨를 토닥거려줬다.
“그래도 그치지 않는 비는 없다네.”
그 말을 듣자 남자의 속에 감추고 있던 뜨거움을 눈물로 토해냈다. 할아버지는 놀라지 않고 남자의 등을 쓰다듬었다. 손의 온기가 파도가 휘몰아치는 바다 같은 마음을 잔잔한 호수로 만들어 주는 것 같았다.
남자는 울먹이며 말했다.
“저는 이미 끝났어요. 저한테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아요. 가족도, 돈도, 미래도.”
할아버지는 손자의 어리광을 달래듯이 남자를 살며시 감싸 앉았다.
“아니야, 앞으로 네 앞에는 창창한 삶이 남아있단다. 결코 미래를 포기해서는 안돼, 미래를 회피하기 위해 변명을 늘어 놓지는 마.”
고개를 들어 할아버지를 보며 물었다.
“정말 그럴까요?”
“그럼 그렇고말고, 이 할아버지가 살아온 세월로 보증하지.”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지만 조금은 약해진 것 같았다. 남자도 조금 차분해져 할아버지에게 자신의 사정을 이야기했다. 꿈과 가족들의 바람 거기서 발생하는 희생은 자신의 것이라고. 그러다 보니 아무런 쓸모 없는 인생이 되었다고.
남자의 눈을 보며 주의 깊게 듣던 할아버지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의 말이 끝나자 할아버지는 뭔가를 생각하더니 남자의 차가운 손을 잡고 말했다.
“젊은이, 이 같은 고민은 젊은 날에 누구나 겪는 일이지. 아주 중요한 일. 요즘이나 옛날이나 이 시기에 많은 사람들이 여러 변명을 들먹여 자신을 위로하고 포기하지. 그러나 절대 그러면 안 된다네. 꿈을 포기하지 말게.”
할아버지는 한 층 힘을 더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계속했다.
“꿈을 죽일 때 나타나는 첫 번째 징후는 시간이 부족하다고 말하는 거지. 내가 살면서 알게 된 사람들 중 가장 바빠 보였던 사람조차 무엇이든 할 시간이 있었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들이 늘 피곤하다고 말하고 정작 자신들이 하는 게 거의 없음을 깨닫지 못하면서 하루가 너무 짧다고 끊임없이 불평하지.
계속 자신의 마음에게 변명을 하다 보면 두 번째 징후가 나타나게 된다네. 그건 삶이 안온한 일요일 한 낮이 되는 거라네. 우리는 자신이 대단한 무엇을 요구하지도, 우리가 줄 수 있는 것 이상을 구하지도 않게 되고는 우리는 자신이 성숙해졌다고 여기게 되지. 젊은 날의 환상을 내려 놓고 개인적이고 직업적인 성취를 이루었다고 생각한다는 말일세.
그래서 또래의 누군가 아직도 인생에서 이러저러한 것들을 원한다고 말하는 걸 들으면 놀라게 되지. 하지만 실상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잘 알고 있다네.”
할아버지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남자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남자는 할아버지의 말에 자신이 저지른 행동과 너무나 비슷해 놀랐고, 부끄러웠다. 그 표정을 읽었는지 할아버지는 중요한 순간이라고 판단을 내리고 말을 이었다.
“꿈을 포기하고 거짓 평화를 찾게 되면 얼마 동안은 평온함을 맛볼 수 있지. 죽은 꿈들이 우리 안에서 썩어가면서 우리의 존재 전체를 감염시키기 시작하고 우리는 주위 사람들에게 잔인해지지. 가족이나 친구, 애인에게 말이야. 마침내 그 잔인성은 자신에게 돌아오고 고통과 강박관념이 그 모습을 드러내. 싸움에서 만날까 봐 두려워 피했던 실망과 패배가 우리의 비겁함의 결과로 우리 앞에 나타나게 되는 거지. 그리고 어느 날 죽어서 썩어 버린 꿈들 때문에 더는 숨 쉴 수도 없게 된 우리는 죽음을 바라게 되는 거라네. 우리의 확신, 우리의 일, 그리고 일요일 한 낮은 끔찍한 평화로부터 벗어나 자유롭게 해줄 죽음을 말일세.”
할아버지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침묵이 흘렀다. 남자는 할아버지의 생명과도 같은 말을 곱씹으면서 반성하고, 생각하며 믿음을 되살리고 있었다. 할아버지도 그런 남자를 방해하지 않았다.
침묵을 깬 것은 버스정류장의 기계였다.
「1004번 버스가 7분 남았습니다.」
남자는 그 소리도 듣지 못한 모양이다. 계속해서 자신의 삶 그리고 밝은 미래를 떠올렸다. 자신에게 끊임없이 거짓말을 하고 배신을 일삼은 내면에 믿음을 갉아 먹고 살고 있던 유다를 죽이고 있었다. 빗줄기가 약해지는가 쉽더니 비가 그쳤다. 그리고 7분이 흘렀다.
버스가 할아버지 앞에서 멈췄다. 남자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버스로 향하고 있는 할아버지를 쳐다봤다. 할아버지는 버스에 오르기 전에 젊은이를 보며 미소 지었다. 그리고 하늘을 한 손으로 가리키며 젊은이에게 말했다.
“젊은이 보게, 그치지 않는 비는 없다네.”
남자는 할아버지가 버스에 오르자 우러러 나오는 존경에 감사의 인사를 계속해서 했다. 할아버지가 젊은이 근처의 의자에 앉고 창문을 열고 말했다.
“잊지 말게, 젊은이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희 마음이 있는 법이라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