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배 / 新秋聲賦
구양자의 추성부(秋聲賦)에 취하여 가을밤이 깊어가는 줄도 모르다가 문득 들리는 소리가 있어 고개 들었다. 요를 펴지도 않은 채 이불만 가슴까지 끌어올리고 잠자는 아내는 아랫목의 따듯함에 취했는가, 아니면 문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군불 타는 냄새에 취했는가, 가늘게 코를 골며 몸을 뒤척인다. 등잔의 심지를 높이고 자세히 내려다보니 너울대는 불빛에 아내의 귀밑머리가 하얀빛을 발한다.
오호라, 너울대는 등잔불은 세월에 취했도다.
백옥의 수줍음으로 고개 들지 못하고 나를 맞이했던 첫날밤, 주춤주춤 물러서며 옷고름 풀던 밤이 바로 귀뚜라미 울음소리가 시끄럽던 오늘 같은 가을밤이었는가, 천지의 색은 변함없건만 오로지 사람만 흘러간다. 유독 인간의 머리만 하얗게 만드는 무심함이니, 산천은 매년마다 그 얼굴을 또 다시 드러내지만 아내의 얼굴은 두 번 다시 어제의 모습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다섯 아이를 낳아서, 큰 계집아이는 세살 때에 질병으로 죽고, 넷째 사내아이는 장마철의 급류에 쓸려 내려가서 그 시신마저도 찾지 못하였다. 셋째 사내아이는 외삼촌을 따라서 병자년의 호란에 출정하였으니, 그 명이 짧음이라, 적장의 칼에 목숨을 잃었도다. 새끼들을 저 세상에 떠나보낸 어미의 가슴이 오죽했으랴, 아이 하나가 유명을 달리할 적마다 침식을 폐하여 드러누워 헛소리를 마구 질렀으니, 그 안타까움을 어찌 말로 다 할 수 있으랴,
다행히 둘째 사내아이가 총명하고 그 명이 탄탄했으며, 막내 계집아이의 천성이 밝고 싹싹했으니, 세 자식을 가슴에 묻은 어미를 많이 위로하여 그나마 모진 세월을 견디었도다.
둘째가 과거에 급제하여 환향하던 날,
어젯밤 꿈에 대붕이 훨훨 날았다며 아침부터 마음을 진정치 못하고 서성서성 집안을 돌아다니다가, 저녁나절에 멀리 산길을 돌아오는 울긋불긋한 행렬을 보고 질겁하여 까무러쳤으니, 신통하게도 아내의 꿈이 딱 들어맞았다. 사립문 밖에 엎드려 예를 올리는 둘째의 의관이 범상치 않았음이라. 자식에게 들인 공을 모두 나에게 돌리며 반짝이는 눈빛으로 말했으니, 아비를 닮아서 그토록 명석한 자식이라 하였노라.
제 어미를 똑 닮은 막내 계집아이는 막역한 내 친구가 일찍부터 며느릿감으로 탐을 내고 있던 바, 겨우 얼굴에 솜털이 빠진 이른 나이에 덥석 채 갔으니, 사윗감이 제 아비를 닮아서 너그러운 성품이라 마음은 놓인다. 시집이 오 백리나 떨어져 막내는 울며불며 집을 떠났지만, 자식을 시집보내고 난 어미의 밤만큼이나 서러웠겠는가, 붉게 물든 눈시울을 애써 감추며 막내를 떠나보낸 후, 아무도 없는 부엌으로 뛰어들어 아궁이 앞에 쭈그리고 앉아 흐느꼈으니, 궁상을 떤다고 나는 일부러 혀를 찼지만 자연스런 모정의 발로를 어찌하겠는가, 적이 가슴이 저려온다.
여자는 타고 태어난 팔자가 없다.
오직 지아비의 팔자가 반이요, 자식의 팔자가 반이니, 어찌 따로 타고난 운명을 논할 것인가, 하루에도 몇 번씩 하늘과 땅을 오르락내리락 거리며 이쪽이 울면 이쪽으로 뛰어가고, 저쪽이 아우성치면 저쪽으로 달려가니, 그 분주함이란 몸이 열개라도 모자랄 지경이다. 은근히 자식 하나라도 내가 챙기어 거들면 아내는 펄쩍 화를 낸 표정으로 질책하였다. 어찌하여 그토록 무른 마음인가? 무릇 선비가 손을 들어 책 대신에 물을 묻히면 공부의 끝을 못 보리라, 또한 처자식에게 냉혹해야만 그 뜻을 겨우 이룰 수 있지 않겠는가,
미관말직을 떠돌아 겨우 조상의 체통을 잃지 않는 가난한 선비지만, 아내가 나를 대하는 엄격함은 용상을 떠받드는 형상이요, 매일 가파른 산길을 올라 관세음보살 아래 엎드린 뭇 노파의 정성과 같다. 언젠가 아내가 병들어 누웠을 때에 곁에 앉아 근심하는 나를 보고 또 이렇게 말했다. 어찌 안색이 그렇듯 어지러운가, 근심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선비가 한 순간이라도 공부를 게을리 하면 머릿속에 바람이 들어 망상에 흔들릴 터인 즉, 청솔의 푸름은 계절을 가리지 않고, 비바람에 무심하여 그토록 청청한 것이라, 병중의 병은 심약한 그 마음이 병일 것이다.
실로 어리석은 자의 머리를 때리는 천둥소리 같아서 부끄러웠노라.
풍류를 따라 기루를 드나들 적에 내 눈이 멀어서 매영이라는 기생에게 혼이 나간 즉, 밤마다 어둠을 쫓아 화살처럼 기루로 달려갔으니, 어느 날 다소곳이 마주앉은 자리에서 아내는 뒤뜰에 별당을 지어서 매영이라는 기생을 들어앉히면 어떤가 물었다. 더듬거리며 이유를 물은 즉, 기루를 드나드는 뒷모습이 몹시 처연하고 안타깝다고 말했다. 또한 악(樂)이 넘치고 풍(風)이 강하여 예(禮)와 문(文)이 퇴색하니, 조화롭지 못하다 하였다.
쳐다보는 아내의 눈이 너무도 그윽하고 깊었으니 어찌 아녀자의 질투라고 보겠는가, 앞날을 예측하기 힘든 방종만이 그토록 염려스러웠을 뿐이고, 체통을 세우지 못한 저자거리의 잔반으로 떨어질까 근심이 앞섰을 것이라. 백보를 양보하여 아내의 가슴에 투기가 일었다고 하여도, 타이르는 목소리와 표정에 잔물결조차도 일지 않아 고요했음이니, 실로 깊고 깊은 마음이다.
착하도다. 아내는 참으로 착한 여자로다.
선비의 공부가 따로 있겠는가,
부끄러움을 부끄러움으로 깨달아 몸가짐을 바로 잡는 것이요, 곁에 있는 사람의 심성을 잘 헤아려서 평상심을 잃지 않게 하는 것이요, 어지러운 구석을 보면 얼른 나서서 깨끗하게 치우는 일이다. 실로 아내는 공부의 으뜸이라, 공자와 맹자의 가르침이 곁을 맴돌아 살아있도다. 부끄러움에 붉게 달아오르는 내 안색을 본 아내는 얼른 일어서서 나가더니 곡주와 안주를 차려와 나를 다독거렸음이라. 나는 참으로 복이 많은 선비로다.
바람이 소슬하다.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나는 아내의 가슴 아래로 내려온 이불을 끌어올려 목까지 덮어주었다. 부엌으로 통하는 쪽문을 살며시 열고 내려서서 부뚜막 귀퉁이에 다소곳이 놓여있는 단지를 찾았다. 뚜껑을 여니 곡주가 향긋한 기운으로 코끝을 감싼다. 바가지에 곡주를 따라들고 밖으로 나오니 두꺼비가 엉금엉금 마당을 기어간다.
오호라, 참으로 향기롭다. 곡주의 향은 아내의 첫날밤처럼 상큼하다.
낙엽이 깔린 오솔길을 따라 걷는다. 강변을 향하여 휘적휘적 걸음을 옮긴다.
바삭바삭 달빛 밟는 소리, 두견새의 울음소리, 나는 가을기운에 취하고, 아내는 따듯한 아랫목에 취했다. 등잔불은 너울거리는 세월에 취했다. 노송아래를 돌아 지나자 바위 밑으로 흐르는 강물이 눈에 들어온다. 엉거주춤 몸을 구부려 샛길을 내려서니, 배 한척이 강물에 일렁이고 있다. 사방에 가득한 풀벌레들의 울음소리와 잔물결, 그리고 그 가운데서 일렁이는...... 빈 배,
아내는 빈 배였음이라.
(옛 선비의 자세로 도시 가운데 앉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