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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월곡

청산 |2009.02.15 21:32
조회 342 |추천 0
'양들의 침묵' Vs. '공자의 침묵'


목차

- I. 들어가며
- II. '양들의 침묵'
- III. 침묵과 소통
- IV. <공자의 유언…침묵으로 말한 7일>, 그리고 커뮤니케이션
- V. 공자의 삶과 가르침
- VI. 침묵의 소리 (the Sounds of Silence)
- VII. 나오며
- 포스트스크립트



- I. 들어가며


'침묵'에 대하여,
공자(孔子)에 대하여,
용산 참사와 관련하여,
또 삶의 방식과 관련하여,
그리고 경영과 리더쉽에 대하여......
침묵(沈默)과 정적(靜寂)을 깨고
여기저기 안팍에서
이런저런 말들이
적지 않다.



- II. '양들의 침묵'


"정의 없는 평화는 '양들의 침묵'일 뿐이다."


지난 2월 2일 오후 7시 청계광장에서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사제단이
용산 참사로 희생된 고인들을 추모하고,
이명박 정권의 교만을 꾸짖는
‘용산참극과 희생자들을 기억하는 시국미사’를 봉헌하면서,
발표한 <재앙과 파국의 대한민국>이라는
대정부 시국 선언문 내용 중에 나오는 말이다.

정의구현 사제단은
'퀴에티즘', 즉 침묵과 정적을 깨고 분연히 일어났다.

왜?


*) 퀴에티즘 : 불어 quietisme, 침묵주의, 정관(靜觀)주의, 혹은 정적(靜寂)주의.
인간의 능동적인 의지를 최대로 억제하고
권인적인 신의 힘에 전적으로 의지하려는 수동적 사상.
좁은 의미로는, 17세기 에스파냐의 몰리노스(M. Molinos) 등이 주창한
가톨릭(천주교) 내의 한 사조를 이른다.



시국 선언문에서 언급된 '양들의 침묵'은
아마도 신약의 마가복음(Mark)을 (재)해석, 인용한 것이겠지만,
그러나 짐짓 눈 감고,
보다 편하고 대중적인 영화 얘기로 글을 시작한다.


영화 <양들의 침묵 (The Silence of the Lambs, 1991)>의 원작은
같은 제목으로 토마스 해리스(Thomas Harris)의 소설이다.


어려서 폭력배의 총탄에 아버지를 잃은 클라리스는
목장을 하는 외친척의 집으로 보내진다.

그러나 그곳은 목장이 아닌 도살장이었고,
도살당하는 양들의 비명을 듣고 잠에서 깬 클라리스는 달려가
양들이 도망치라고 문을 열어주지만,
어리둥절한 양들은 도망조차 치지 못한다.

단 한 마리의 양이라도 구하기 위해 새끼 양을 업고 뛰어보았으나...

하지만 곧 양은 죽임을 당했고,
결국 미움을 산 클라리스는 그곳을 떠나 고아원에 보내진다.

그때부터 양들의 울음소리는 죄책감이 되어 클라리스를 괴롭힌다.

그러므로 이 영화(소설)에서는
'양들의 침묵'이 클라리스에게 있어 곧 구원인 셈이다.


그러나, 정의구현 사제단에 따르면,

'양들의 침묵'은 "정의 없는 평화"일 뿐이다.



- III. 침묵과 소통


설 연휴경에 한 번 얘기했던,
영화 <쇼생크 탈출 (The Shawshank Redemption, 1994)>에서
주인공 앤디는
교도소에 도서관을 꾸미기 위한 지원금을 요청하는 편지를
한 주도 빠지지 않고 주 정부에 한 통씩 보내는
'튀는 행동'을 한다.

그러나 주 정부(담당직원)은 '침묵'한다.

그러던 중,
'제발 편지 좀 그만 보내라'는 답장(!)을 받은 그는
그때부터 편지를 두 통으로 늘린다.
따블로 '튀는 행동'이다. ㅡ.ㅡ;

마침내 주 정부는 백기를 들었다.

'침묵'을 넘어 드디어 '소통'한 것이다.

'침묵' 끝에 얻어낸 도서관 지원금은
'소통'의 상징이고,
그 소통은 '모난 돌'처럼 '튀는 행동' 끝에 이루어졌다.


그런데 한국에 살면서 가장 많이 듣는 이야기 중의 하나가
'모난 돌이 정 맞는다', '튀지 마라!'일 것이다.

'모나다'라는 단어에는
'유용한 구석이 있다'는 긍정적인 의미도 있으나,
대개 부정적인 의미로만 쓰이곤 한다.

아무튼, '유별나게 튀어 성공하는 성공담'은
단지, 책 속에서나 가능한 이야기일 뿐이라며,
묵묵히 자신의 의견을 참고 견디며
'침묵'하는 것이
최고의 처세술이라는 것이다.


물론, 한국만이 아니다.
중국도, 일본도 마찬가지...

중국에는
'머리를 내미는 새가 총 맞는다 (枪打出头鸟)'
는 속담이 있고,

일본에는
'튀어나온 말뚝이 두드려 맞는다 (出る杭は打たれる)'
는 뭐 그런 속담도 있다.

서양에서는 그런 말이 거의 쓰이지 않는 것 같은데,
굳이 얘기하자면,
Forwardness may/will cause trouble... 쯤?


사회 문화적으로 보면,
그런 경향은 일본이 조금 더 심한 것 같기도 하지만,
'도 긴 개 긴', 오십보 백보다.

*) 흔히 오십보 백보(五十步 百步), 즉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다는 의미로
'도찐 개찐', '도낀 개낀' 등을 쓰는데,
둘 다 바른 말이 아니고,
'도 긴 개 긴'이 바른 말이라고 한다.
여기서 '긴'은 윷놀이 판에서
'자기 말로 남의 말을 쫓아 잡을 수 있는 거리'를 말한다고...


일본의 작가로서 그야말로 '튀어나온 말뚝'처럼 특출한 존재의 하나인
엔도 슈사쿠(遠藤周作)의 작품 중에도
<침묵(沈默)>이라는 소설이 있는데...

관헌에 잡혀 끌려온 로드리고 신부는
'하느님은 거미줄에 걸린 나비'라면서 신앙을 저버리고 배교한 선배 로마 가톨릭 신부와
고문당하는 교우들의 목숨을 걸고,
떼죽음이냐, 배교를 해야 하느냐를 결정해야 할 상황에 처해 고뇌하게 된다.

이때까지 '침묵'하던 예수의 목소리가 로드리고 신부의 영혼을 울린다.

"네 마음 내가 안다... 나를 밟아라. 나는 밟히기 위해서 세상에 왔다."

로드리고 신부는 흙발로 예수상 위를 걸어 짓밟고
배교 아닌 배교를 행한다.

역시,
'침묵' 끝에 '소통'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경지의 가르침과 배움은
결코 평범한 이들이 할 수 있는 경험이 아니다.



- IV. <공자의 유언…침묵으로 말한 7일>, 그리고 커뮤니케이션


공자는 정말 말을 잘했던 것 같다.
그 말 잘하시는 공자의 한 말씀...

“말 잘하는 놈치고 어진 놈 못 봤다.” ㅡ.ㅡ;
(有言者 不必有德)


유사이래 가장 말 잘하는 사람 중 하나인 공자의 이 말은,
그 자체만으로 볼 때
양가적(兩價的, ambivalent)이며,
논리적으로도 참이 아닐 뿐더러,
변증법적으로는 곧 자기부정(自己否定)이다.

*) ambivalent 를 어원으로 보면,
양쪽, 둘레 등의 의미를 가진 ambi 와, 가치를 뜻하는 valent 로 보인다.
양면적 가치, 즉 상호 모순의 의미.


물론 그 부분에 대한 공자의 부연설명, 역시 없지 않다.

"덕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훌륭한 말을 하지만,
훌륭한 말을 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반드시 덕이 있는 건 아니다.
어진 사람은 반드시 용기가 있지만,
용기가 있는 사람이라고 해서 반드시 어진 사람인 것은 아니다."
(有德者必有言, 有言者不必有德. 仁者必有勇, 勇者不必有仁)


이런 논리 형식을 partial negation, 부분부정이라고 하던가?

역시, 다시 한 번,
공자는 말을 참 잘한다.
그 시대에 남긴 가르침의 내용도 내용이지만,
'말'에 대한 그의 생각부터 결코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결국,
엊그제 12일 중앙일보 기사 <공자의 유언…침묵으로 말한 7일>에 나온 것처럼,
공자에게 있어 "침묵"은
그저 '침묵'이 아니라,
'침묵'까지도
커뮤니케이션, 즉 표현의 도구나 소통의 수단으로 삼았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 V. 공자의 삶과 가르침


공자 말씀 스타일을 조금 변형해 보자.


공부를 깊이, 그리고 완벽하게(?) 한다면 시험 성적이 좋을 수 있지만,
시험 성적이 좋다고 해서 꼭 공부를 완벽하게(?) 했다는 것은 아니다.

그런 맥락에서 보면,
실력이 좋다고 해서 수험생들을 잘 가르친다는 것이 아니며,
수험생들을 잘 가르친다고 해서 무조건 실력이 좋은 것은 아니다.

내가 대학, 대학원 시절
과외 알바며 가정교사며... 해서 가르쳐 본 경험으로 보더라도,
(과외는 한쿡 아이들만 하는 게 아니다. 미쿡 아이들도 과외를 한다. ^^)
암튼, 가르치는 사람의 역할은 언제 어디서나 한결같을 수는 없다.

시험을 잘 치르기 위해서는
지식의 전달 요령에 더해 문제 풀이 요령이 중요할 것이고,
시험 따위가 아닌 깊이를 위한 학문의 경우에는 또 다르다.


이러한 사제(?)간의 만남은 선택이 아니라
상황과 제도에 의하여 주어지며
서로의 이해와 필요를 바탕으로 한다.

그러나 '삶의 가치와 인생의 행로'로 묶이면 사정이 다르다.

바로 이때 진정한 인간관계, 혹은 사제관계가 성립한다.

그리고,
스승과 제자는 서로 배움이 있어야 하며,
특히,
잘못을 바로 잡고
덕목을 실천함에는, 설령 사제간에도,
양보가 있을 수 없다.


이는 내가 하는 말이 아니라,
바로, 공자가 한 말이다 :

"세 사람이 가면 스승이 있고",
(三人行 必有我師)

"인을 실천함에 있어서는 스승에게도 양보하지 않는다."
(當仁 不讓於師)

또, "진정한 스승과 제자라면 서로 숨김이 없어야 한다."
(二三子 以我爲隱乎 吾無隱乎爾, 吾無行而不與二三子者 是丘也)


말 잘하는 공자가 말로만, 립서비스로만 그렇게 떠든 것이 아니었다.


공자가 제자인 자로, 자공, 안회 등과 함께
13년간 주유천하(周遊天下)하고 간난신고(艱難辛苦) 끝에 귀국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천하 유력(游歷)의 길, 그 와중에 위나라에서의 일이다.

위영공(衛靈公)의 부인으로,
근친상간의 소문이 있고 정치적 음모를 꾸미는 등
평판이 좋지 않던 남자(南子)의 요청으로
공자가 그녀를 만났을 때다.

공자의 제자 중 용맹하나 온화하고 남이 단점을 말하면 즐거워했다는,
그러나 성격이 다소 급한 자로(子路)는
스승인 공자에게 불편한 기색을 조금도 숨기지 않았다.

결국 공자도 맹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잘못된 일을 하였다면, 하늘이 나를 버리시리라! 하늘이 나를 버리시리라!"
(予所否者, 天厭之! 天厭之!)


공자 또한 제자를 서슴없이 비판하였다.

능란하고 눈치 빠르게 흐름과 유행(?)을 잘 탔던 염구(冉求)가
백성에게 세금을 스스럼없이 걷어대자
"그는 우리의 무리가 아니다. 아이들아, 북을 울려 그를 공격하라"고 분노하였으며,

말을 잘 하지만 게으르고 조금은 반항적인 재여(宰予)가
낮잠을 자고 있자
"썩은 나무로는 조각할 수 없고, 거름흙 담장은 흙손질을 할 수 없다"며 넌더리를 쳤다.


이같은 공자의 일관된 언/행을 미루어 볼 때,
2월 12일자 중앙일보의 <공자의 유언…침묵으로 말한 7일> 기사에서
언급한 공자의 "유언" 혹은 "침묵"은
공자의 삶과 가르침 전체를 보지 못하고
'유언의 유무'라는 하나의 에피소드만을 보고 가볍게하는 얘기로 판단된다.

즉, 여전히... 한 면만을 보고 있는 것이다.


다시 한 번, 공자의 말씀을 강조하나니,

"설사 사제간이라고 하더라도,
잘못을 바로 잡고
덕목을 실천함에는 양보가 있을 수 없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결코 "침묵"이 문제 해결의 답일 수 없다.

이게 바로
공자의 삶이며, 가르침이다.



- VI. 침묵의 소리 (the Sounds of Silence)


정의 없는 평화가 '양들의 침묵'일 뿐이라는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사제단의 선언에 대해
공자 말씀 스타일로 부언하자면,

평화가 없는 정의는 정의가 아니고,
정의가 없는 평화는 평화가 아니다.

평화가 없는 정의는 보복에 지나지 않고,
정의가 없는 평화는 억압에 불과하다.


마찬가지로
침묵하는 한 대화는 없고,
대화 없이는
발전도, 성숙도 없다.

결국 "침묵"은
전체주의적이며 가부장적이며 획일적이며,

거창하게 "정의"와 "평화"와 "보복"과 "억압"까지 안 가더라도,

이것저것 다 해보고 이제 마지막 남은 대한민국의 희망인,
그나마 아직도 아쉬운,
'창조성의 싹'을 짓밟는 일이다.


그래서 지난 세기 최고의 듀엣이라는
사이먼과 가펑클(Paul Simon and Art Garfunkel)은
영화 <졸업 (The Graduate, 1967)>에 쓰였던
그야말로 오묘한 제목(!)의 노래,
'침묵의 소리(the Sounds of Silence)' 에서,

And the people bowed and prayed
To the neon god they made.
And the sign flashed out its warning,
In the words that it was forming.
And the sign said,
"The words of the prophets
are written on the subway walls
And tenement halls."
And whisper'd
in the sounds of silence.

사람들은 자신들이 만든 네온(간판) 神에게
허리 굽혀 기도했다네
그러자 네온은 조립된 문장으로
경고하듯 번쩍이면서
이렇게 말했어
'대변자'들의 말은 지하철의 벽이나
싸구려 아파트 현관에나 적혀있다고,
침묵의 소리로
그렇게 속삭이더군...

...하고 이미 40년 전부터 차갑게 웃고(冷笑)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글쎄...

그래도
여전히,
언제나,
무조건
침묵은 금일까?


Nope! I don't think so!

Anything goes, except for the silence!



- VII. 나가며


'양들의 침묵'이
단편적으로는
클라리스에게 있어 하나의 구원이었을지 모르겠으나,
<양들의 침묵(The Silence of the Lambs)>에서 아주 인상적이었던 부분...


식인 정신과 의사 Hanibal the Canibal 렉터(Lecter) 박사의
마지막 편지 (영화에서는 전화) :

클라리스,
양들은 울음을 그쳤는가?

그대는 내게 정보를 빚지고 있네만, 일없네.
내가 좋아서 준 것이니까...

......

그러나 클라리스,
그대의 지하 감옥은 끝난 것이 아니라네... (이하생략)




P.S.
렉터 박사의 진지한(?) 마지막 말을
프로덕션 매니저이자 크게 유명하지 않은 배우이기도 했던
제임스 덴트(James Dent)라는 사람의 버전으로
코믹(?)하게 바꾸어보면,
결국 이 얘기다 :

"인생이란 고등학교 수학 시간과 같다.
한 문제를 풀고 나면 선생님은 곧 다른 문제를 내준다."



한 문제(?) 풀었으니 이제 전 이만,
다른 문제 풀러... ㅡ.ㅡ;;;

해야 하는 숙제가 넘넘 많아욤. ㅜ.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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