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슬픔 꿈... 그리고 현실
윙~윙~
지금은 청소기 돌리는 중.
아침 일찍같이 강혁이 놈이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 마냥 눈 꼽도 덜 땐 눈으로 매니저에게 끌려갔고 1시간쯤 후 아침을 먹은 영원일당들도 모두 집을 비운 상태였다.
요즘은 이 집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바쁘다.
그래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사람이라곤 코빼기도 볼 수가 없다.
아~ 적적하여라.
' 히히, 근데 사실은 좋다. 남들 눈치 안 보고 내가 하고 싶을 때 일하면 되니까. '
이건 아마 모든 가정부들의 공통적인 직업관?이 아닐까?
그래서 한 잠 늘어지게 퍼 자고는 점심때가 지나서야 일어났다.
윙~윙~
" 깨갱~ "
" 저리 비켜~ "
" 으르릉~ "
" 어디 한 판 붙어 볼 테야. "
이 놈의 볼상 사나운 개가 이젠 안 무섭냐 구요?
' 아이구, 무서버 죽겠어요. 근데요. 이 놈 성격이 지 주인을 닮아서 그런지 좀 강하게 나오는 사람한텐 금방 꼬리를 내린 다니까요. '
' 보세요. 지금도 금방 꼬리를 내리고는 저 쪽 구석에 누웠잖아요. '
윙~윙~
" 저리 비켜 "
" 으르릉~ "
" 덤벼~ "
" 깨갱... "
불쌍한 놈...
청소기는 끝!
이젠 걸레질 시작!
이 집 가구들은 하나 같이 앤틱 풍이다.
은근하게 어두운 붉은 보랏빛이 도는 가구... 닦고는 일어서서 한 번 둘러보았다.
내가 이 집의 근사한 안 주인이 된 듯한 상상을 잠시 해본다.
" 이건 뭐야? "
쇼파에 앉아 탁자를 닦으려던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 벌떡 일어났다.
그 놈이 누워 있어서 엉덩이를 걷어차고는 앉았는데...
이 따스한 느낌... 질퍽한 포근함... 코를 자극하는 지릿한 냄새...
뜨끈한 액체가 내 엉덩이를 가득 감싼다.
흐억~
" 이~ 놈~ 이~~~ "
" 너~ 이~리~와~~~ "
내가 소리소리 지르는 것이 겁이 났는지 납작 엎드려서는 장식장 밑으로 숨어 들어갔다.
" 퉤퉤. 너 어디 두고보자. "
내 최고의 필살기 청소기!
초강력 흡입상태!
지축을 울리는 굉음!
일단 그 놈의 눈빛이 비열하리만큼 불쌍하다.
진입!
" 깨갱, 깨갱... "
그는 밖으로 내 뺏다.
' 너 들어만 와 봐. '
그는 그렇게 해가 져도 들어올 줄을 몰랐다.
' 아침도 안 줬는 데 ... 그래 하루 종일 한 번 굶어봐라. '
이 집 식구들은 밤늦게나 아니면 새벽에 들어올 것이다.
난 쓰레기 봉투를 버리기 위해 늦은 저녁에 밖으로 나갔다.
' 저 시커먼 건 뭐야? 그 놈 아냐? '
그 놈이 배가 많이 고팠는지 쓰레기 봉투에 머리를 쳐 박고는 봉투를 다 뜯어서 먹고 있다.
' 우리 개는 족보 있는 개라구.'
전에 나영이 했던 말이 떠올라 피식 웃음이 났다.
' 족보는 무슨... 그냥 주인 없는 동네 똥개보다도 못 하구만... '
난 시덥잖게 쳐다보고는 안으로 들어오려는데...
" 이 집에 사나보네."
" 누구? "
돌아보던 나는 온몸이 굳어졌다.
" 아니 뭐 그렇게 겁먹을 건 없잖아. 내가 뭐 어떻게 하려 구 온 건 아니 구. 그 때 보상이 많이 미흡했던 건 알고 있지? "
" 미흡이라뇨? 병원에서 합의 된 만큼은 다 드리지 않았나요? "
" 합의? 그게 합의가 제대로 된 게 아니었지? 뭐 그건 차차 얘기하기로 하구... 어떻게, 여기서 일하는 건 마음에 드나봐..."
" ... "
" 어! 뭐 내 신경은 쓰지마. 내가 뭐 당신 해꼬지나 할 사람은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말라 구."
" 근데... 묘한 인연이네... 우리 어머님이 여기서 일했잖아. 늙어빠지도록 자기 몸 돌보지 않고 일해서 여기서 병을 얻어 그만 뒀으면 산재처리가 되야 하는데... 단물 쓴물 다 빨아먹고 다 늙었다고 그냥 일방적으로 해고를 해 버렸어. 이 집사람들 무서워. 당신도 조심 하라구. 안 됐다. 쯧쯧... 순간의 실수로 그만...잘 나가던 여의사가 가정부라... 하긴 앞길이 구만리 같은 우리 똘이 인생에 비하면 훨씬 나은 거지만... 이 집사람들 안에 없지? "
" 네. "
" 그럴 거야. 요즘들 잘 나가는 것 같더라고. 그럼 수고. "
집을 한 번 둘러보고 우체통도 한번 열어보며
" 편지 왔나보네 "
하면서 기웃대더니 저만치 가버렸다.
난 다리에 힘이 풀려서 한 동안 쓰레기 봉투를 들고는 주저앉아 있었다.
" 왜 그래요? 어디 아파요? "
난 고개를 들었다.
영원이다.
내가 빙긋이 웃자 그가 안심한 표정이다.
그리고는 내 손에 있던 쓰레기 봉투를 받아서 쓰레기 더미 위에 가지런히 갖다 놓는다.
해피놈은 다른데로 가고 없다.
" 저 근데 아까 여기 왔던 그 남자 누구예요? "
" 네? 네... 저 그냥 길을 잃어버렸다고 "
" 그래요. 다행이네요. "
' 다행? 무슨 뜻이지? '
" 근데 어떻게 혼자 오세요. "
" 네, 서경 씨랑은 의상 구입하러 갔어요. "
" 네. "
" 식사 안 하셨죠? "
" 밥 있어요? "
" 당연하죠. "
난 그를 위해 밥을 차리기 시작했다.
가지런히 수저를 놓고 젓가락을 놓고 밥을 그의 앞에 놓고 국을 놓고...
늘 차리는 상이지만 이상한 기분이 드는 것은 왜지?
" 같이 드세요 "
" 아니요, 전 있다가 먹을 께요? "
" 그러지 말고 같이 드세요. 저희 둘밖에 없는 데 이따가 다시 차리려면 번거롭잖아요."
" 그래도 될까요?"
" 네, 얼른 국하고 밥 가져오세요. "
' 왜 이렇게 진정이 안 되냐? 나도 어느새 그의 팬이 된 건가? '
학창시절 연애인 쫒아 다니며 소리지르는 애들 정말 이해가 안되더니 이제 좀 이해가 된다.
얼마 전부터 계속 그의 뮤직비디오만 보고...
음악에 매료되고 ...목소리에 매료되고... 그의 슬픈 모습에 매료되어 버렸나보다.
TV란 중독성을 전파하는 매체인가?
난 그에게 중독 됐는가?
그렇게 떨리는 마음으로 그의 앞에서 밥을 먹었다.
반찬 집으러 가기도 불편하고 국 삼키기도 무안하네.
순간 사춘기의 소녀같이, 수줍음이 많아진 나를 발견했다.
" 뭐야? 그렇게 둘이 앉아 먹으니까 꼭 부부 같다. "
강혁이 등장했다.
그의 비꼬는 말투 뒤로 나영이 들어오다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역시나 곱지 않은 시선...
난 벌떡 일어났고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모르겠는데 그는 아랑곳 않고 먹고 있다.
" 식사들 안 하셨죠? "
" 얼른 밥이나 줘."
나영이 피곤하다는 듯이 내가 앉아 먹던 자리에 털썩 주저앉으면서 얘기한다.
그리곤 내가 먹던 밥들을 옆으로 밀어버리고는 물을 따라 마신다.
영원과 혁은 밥을 다 먹고는 일어나 이층으로 올라갔다.
그 즈음에 서경이 들어왔고 그녀도 역시 주린 배를 욺켜 쥐며 밥 타령을 해댔다.
" 아이구, 요즘 같아서는 과로사 하겠다. 오늘도 겨우 한 끼 먹고 돌아다닌 것 같은데. "
" 그러게 다리도 아프고 내일도 일찍 나가야 하는 데... "
" 나영아 넌 어떻게 잘 했어? "
" ... 뭘? "
" 뭐 별 문제 없었어? "
서경 궁금하다는 듯이 그녀를 향해 얼굴을 모으며 대답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그녀는 시큰둥하게 국을 떠먹으며 한마디한다.
" 무슨 일? 왜 한바탕 싸웠을 까봐. "
" 가자 마자 촬영 시작했고 비련의 주인공이라 우수어리게 머리 좀 내려주려고 했는데 굳이 무스 바르고 하겠다고 해서 무스 바르고 옷도 자기스타일이 아니라고 안 입겠다고 뻐땡겼고 그래서 난 삐졌고... 그냥 자기 입던 옷 입고 촬영했지 뭐"
" 그래서 ?"
" 그래서? "
" 연기는 어떻게 잘 해 ? 감독 말은 잘 듣고 ? 궁금하다. 그런 역할을 잘 할지...상상이 안가. 안그래. "
" 연기? 연기는 무슨 개뿔이. 감독이 연기 연습 좀 더 하고 오라고 했어. 그리구 느낌이 안 좋다고 계속 다시 찍자니까 지가 성질을 내면서 소품을 걷어차고 난동을 부렸지 뭐. 하여튼 후레자식이라니까. 감독님조차도 무서워서 절절 맨다 구. "
서경은 들을 만한 얘기를 들었다는 시원한 표정이다.
그렇게 식사들을 마치고 이층으로 올라갔다.
" 해피야~ 해피야~ 해피 어딨니? "
내가 설거지를 하고 있을 때 나영이 해피를 찾아 내려왔다.
' 참 이 녀석 아까부터 안 보이네... 너무 굶겼나? '
" 아니 해피야? 여기 있었구나! "
' 뭐야? 그 드러운 꼬락서니를 해 가지고는 버젓이 쇼파에 누워있나 보다. '
" 아니 근데. 우리 해피가 왜 그러지? 해피야? 왜 그래... 어디 아파? 다들 좀 내려와 보세요? 해피가 이상해요."
잠시 후 그들이 내려왔고 한 동안 어수선 하니 소란을 피우더니 나영이 날 부른다.
" 야, 오늘 우리 해피한테 뭘 먹인 거야? "
" 사료 먹였는데요... "
" 밥은 식사 때 맞춰서 잘 준거야? "
" 그 그럼요... "
' 찔리네.'
" 안되겠어요. 병원에 가야할 것 같아요."
' 내가 봐도 몸이 축 쳐진 게 무슨 병에 걸리긴 걸린 모양이다. '
" 이 늦은 시간에 문연대가 있을 라나? "
" 그래도 한 번 가보죠? 문을 두드려서라도 깨워야죠? "
영원이 천사 같은 말을 한다.
' 정말 천사일지도 모르겠다. '
그는 이상하게 이세상 사람이 아닌 것 같단 말야...
그래서 그들은 내일 일찍 나가야 해서 피곤할 텐데도 강아지를 데리고 병원으로 향했다.
' 뭘 잘못 먹어서 그런가? 아님 식사를 제때 못해서... 혹시 쓰레기 뒤져먹다가 뭐 상한 거라도 먹었나.
에라 모르겠다. 히히 근데 왜 이렇게 기분이 좋으냐? '
" 너 왜 그렇게 히죽거리냐? 뭐 나쁜 짓이라도 한 거야? "
순간 난 움찔하여 설거지하던 그릇을 놓칠 뻔했다.
" 근데 다들 어디 간 거야? "
" 해피가 아파서 병원에 간 것 같던데... "
" 해피?... 으 그 재수 없는 놈... 잘됐네. 그 년 닮아서 싸가지가 없단 말야. 이 기회에 확 그냥 죽어버렸음 좋겠다. "
' 으, 정떨어지는 놈... 어쩜 그렇게 다르냐?... 하긴 뭐 나도 같은 생각이긴 하지만 말야 '
그들이 들어온 것은 모든 일을 마치고 침대에 누워서 잠을 청할 때였다.
" 야, 나와! 빨리 안나와 "
처음엔 문을 두드리더니 아예 문을 벌컥 열고는 나영이 노발대발을 한다.
" 무슨 일이예요? "
난 불빛에 적응 안 된 눈을 해 가지고는 밖으로 나왔다.
그들 일당이 내 턱밑에다 고개를 들이밀고 따지듯 서있다.
" 무슨 일? "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내 얼굴에서 불이 번쩍 났다.
나영이 다짜고짜 내 뺨을 후려쳤다.
" 와아~ "
이 말은 저 쪽 쇼파에 앉아있던 혁이 재밌다는 듯이 내 뱉은 말이고 다른 사람들의 얼굴에선 당황한 빛이 역력했다.
" 이게 진짜 보자보자 하니까. "
" 무슨 말씀이신 지? "
" 무슨 말? 너 한 대 더 맞아야 정신을 차리겠어. "
그러면서 나에게 한번 더 손을 날린다.
그 날아오던 손을 영원이 잡았다.
' 오! 멋진 남자...'
" 야, 너 오늘 우리 해피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
" 무슨 짓이요? "
" 아쭈 이게 시치미 뚝 떼는 것 좀 봐? 오늘 뭐 먹였어? "
" 뭘 먹여요. 사료를 "
" 이게 그래도 거짓말이네... 언니 네가 뭐 랬어요. 이거 완전 사기꾼처럼 생겼잖아요. 거짓말을 밥먹듯이 한다니까요? 니가 사료를 먹였어? "
" 네... "
" 사료를?... 웃기구 있어. 병원에서 지금 다 확인하고 오는 길이야? 닭 뼈다귀를 먹어대서 장이 파열됐대 그래서 죽는다 잖아. 네가 일부러 먹인 거지? 그지? 언니 예 좀 어떻게 해 줘요. 난 우리해피 없으면 못산단 말이예요. "
" 혜인씨, 정말로 닭 뼈다귀를 먹였어요? "
" 아니요. 그게 저... "
" 아니긴 뭐가 아냐? 저 거짓말쟁이... 아이구 해피야 "
그녀가 바닥에 주저앉아 울기 시작한다.
" 아까 보니까 쓰레기를 뒤지던데 거기서 먹었나봐요? "
' 아~ 나의 천사 영원씨! '
" 그러니까 쓰레기통을 왜 뒤지냐구요? 굶겼으니까 뒤진 거잖아요. 미안하다 해피야. 주인 잘못 만나서 네가 이렇게 험한 꼴을 보는 구나. "
" 쇼하고 있네. 그깟 개새끼 죽으면 다른 거 한 마리 사면되지? "
" 뭐야? "
나영인 더 화가 나서 징징거리고 혁은 시덥잖게 시끄럽다는 듯 한마디 내뱉고는 이층으로 올라가 버린다.
" 나영씨, 그만 하고 일어나요. 어쩌겠어요. 이미 이렇게 된 거... "
그의 위로에 그녀가 차분해 졌다.
그리고 그가 그녀를 안아 일으켜 데리고 올라갔다.
' 너무나 멋있고 착한 그... '
" 너 두고봐... "
그녀가 뒤돌아보면서 내뱉은 한마디다.
그렇게 그 놈은 그 다음날 커다란 상자에 담겨 집으로 다시 돌아왔고 양지 바른 마당 한 켠에 묻어주었다.
내 탓인 것 같아 미안하기도 하면서 일면 숙적을 없앤 듯 기분이 좋기도 하다.
한편으론 마당에서 저승으로 가지 못하고 구천을 떠돌며 날 괴롭히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도 든다.
어쨌든 야호!
쾌적한 환경이 된 건 사실이다,
화창하고 나른한 오후!
이층계단을 오르다가 계단에 놓인 화분에 눈이 간다.
' 그래 이 화분... 누가 가꾸는 걸까? '
늘 신선하다! 물주는 것을 한 번도 본적이 없는데...
전과 다른 꽃으로 채워져 있다.
' 누굴까? '
" 그 꽃 마음에 드세요? "
난 화분을 들고 쭈그리고 앉아 있다가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아! 영원이 햇빛 속에서 슬픈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다.
" 이 꽃... 영원 씨가 키우는 건가요? "
" 네! "
' 어쩐지! 어쩜 이렇게 멋있냐? '
" 누군가 궁금했어요 "
내가 얘기하자
" 그래요? "
그가 슬프게 웃으며 대답한다.
" 제가 화분하나 만들어 드릴까요? "
" 정말요? "
" 잠깐만요. "
그는 잠시 방으로 들어가더니 꽃삽과 작은 화분 두 개를 들고 나왔다.
그렇게 그와 나는 호수로 향했다.
" 호숫가에 보면 특이한 야생화들이 많이 있어요. "
" 그래요? 근데 그 야생화들은 다 이름이 있나요? "
" 있겠죠? 근데 사실 전 이름은 다 몰라요. "
" 아 네? "
" 실망하셨나요? "
" 아니요. "
" 저기 보세요. 노란색 꽃이 피었네요. "
그가 다가가서 조심스럽게 캐내기 시작한다.
" 야생화들은 화려하지 않아요. 향도 그다지 좋지 않죠. 그래도 소박한 아름다움이 좋은 것 같아요. 꾸미지 않은 질리지 않는 아름다움 같은 것... 늘 옆에 있어서, 화려하지 않아서 느껴지지 않지만 문득 그 존재가 느껴질 때의 그 느낌 같은 거 아세요? "
" 네, 알것 같아요. 저도 그런 사람이 었으면 좋겠네요. "
" 사람이요? 그죠... 사람도 그런 사람이 있죠. 볼 때마다 슬퍼 보이는 사람이 있고 ... 그 사람이 기억 속이 궁금한 사람이 있고... 혜인 씨는 볼 때마다 슬퍼 보여요."
" 제가요? 전 씩씩한데... "
하면서 일부러 코믹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 꼭 이세상 사람이 아닌 것 같아요. "
" 무슨 뜻 이예요? "
" 그냥 느낌이 다르죠. 뭔가 알 수 없는 겉도는 느낌... "
' 겉도는 느낌... 그런가? ... '
그냥 그냥 지낼 땐 모르다가 문득문득 나도 모르게 슬퍼지는 날 발견한다.
" 제가 좀 슬픔이 있어요. "
" 어떤? "
" 그냥 이 현실이요. "
" 현실이요?... "
" 저는 항상 슬픈 꿈을 꾸죠... 그래서 꿈속에서 늘 슬픈 것 같아요. "
" 무슨 꿈이요? "
" 늘 같은 꿈을 꿔요. "
" 같은 꿈이요? ... 꿈은 현실의 반영 이예요. "
" 그럴지도 모르죠? 그러면 제 과거의 실제가 슬펐나봐요. "
" 진짜로 과거가 기억나지 않으시나요? "
" 네, 그런데 요즘은 과거를 알게 될까봐 두려워요... 그 꿈이 제 과거 일까봐... 그런 거 있잖아요. 처음엔 제가 기억하지 못하는 일이 있다는 것이 두렵고 힘들었는데... 이제는 제 기억이 되살아 날까봐 두렵고 힘들어요. 제 기분 이해할 수 있나요? "
" 네... 조금은... 저도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가 있거든요.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 예요. 그냥 인간이라서 잊어버렸다고 생각하고 과거는 생각하지 마세요. 지금 현실이 중요하잖아요. "
" 그렇겠죠? "
그가 입가에 살짝 미소를 머금고는 다시 조심스럽게 흙을 파내고 잔뿌리들을 잘 발라내어 작은 화분에 담는다.
그리곤 꽃을 살짝 들고는 그 주위로 흙을 담기 시작했다.
'현실이 중요한데... 난 ... 현실이 슬프지...'
" 자요. 이거 가지세요. 물은 적당히 주세요. 너무 사랑하면 죽게 되요. 적당히 사랑하세요. "
' 너무 사랑하면 죽게된다... 그렇구나... 칩착.... 사람들이 그렇지... 너무 사랑해서 서로를 힘들게 할 수 있지...'
그가 옆에 있는 꽃을 다시 캐내어 화분을 두 개 만들고는 하나는 자신이 들고 일어섰다.
그와 나란히 호수로 난 길을 걸어 돌아왔다.
" 근데요. "
그가 나를 의미 있게 내려다본다.
" ... "
" 제 꿈 얘기해드릴까요? "
" 아니요... 기억하기 싫은 슬픈 꿈이라면서요. "
" 그렇긴 한데... 그 꿈에 늘 나오는 슬픈 얼굴의 여자가 있어요. 근데... 그 여자가 혜인 씨랑 너무 똑같아서요. "
" 저 랑요?... "
" 혹시 전에 절 보신 적이 있나요? "
" 아니요... "
" 꿈에서 깨어나서 혜인 씨를 보면 이상한 기분이 들어요. "
" 어떤 기분이요? "
" 슬픔... 아련함... 가슴 한편에 찬바람이 들어오는 느낌... "
" ... "
" 그래서 절 볼 때마다 슬퍼지시는 건가요. 그럼 어쩌죠? "
"... "
그렇게 그와 집에 도착했을 때 전화가 울렸다.
" 야, 넌 어딜 그렇게 쏘다니는 거야. 도대체. "
나영이다.
전화기를 들자마자 독살스럽게 쏘아붙이는 폼이 여러 번 전화를 했었던 듯 하다.
" 저기 오늘 내가 깜박 있고 소품 준비를 덜 해 가지고 왔는데... 내 방에 가서 서랍에 보면 ....
체인으로 된 목걸이하고 썬글라스 있거든 그것 좀 가져와, 참 시계도 빨리 "
바쁘다는 듯 위치를 대충 가르쳐 주더니 끊는다.
' 뭐야, 시이. 가까운 곳도 아닌데 무슨 수로 빨리 오라는 거야. '
그녀의 방으로 올라갔다.
전에는 그녀의 방문을 열 때마다 그 놈이 어디서 튀어나올까 걱정 했엇는 데 이젠 그럴 정이 사라졌다.
그러나 한 편 어딘지 허전한 마음이 들었다.
' 미운 정도 무섭다더니... '
그녀의 서랍 속에는 여러 가지 악세사리가 많았다.
' 와~ 코디들은 이런 거 까지 다 준비해 놓고 있구나... 신기하다. '
한번도 가까이 해보지 못한 직업이라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참 다양한 삶의 방식이 있구나...
그녀가 불러준 대로 목걸이, 시계, 썬글라스까지 챙기고는 집을 나섰다.
일단 자전거를 타고 읍내로 가서 시외버스를 타면 한 번에 갈 것 같았다.
춘천 어디쯤이라는 데... 다행히 여기서 시외버스가 있는 것 같았는데...
오랜만에 자전거 타고 읍내로 나가나 보다.
똘이... 그래도 똘이 아빠를 보고 나서는 두려움이 많이 사라졌다.
어쩌면 한 번 부딪힐 일 잘된 건지도 몰라.
그래도 이왕이면 얼굴은 좀 안 마주쳤으면 싶어 조심스럽게 읍에 입성했다.
시외버스터미널 입구 슈퍼 앞에 자전거를 맡기고 춘천행 버스를 탔다.
이제 곧 겨울이 다가오려는지 제법 쌀쌀한 바람이 옷깃을 스쳤다.
그렇게 두시간여를 달려 춘천시에 도착했다.
촬영장은 시내가 아니고 ** 휴양림 내에 있다던데...
택시를 타고 다시 ** 휴양림을 찾아갔다.
그리곤 또 걸어서 한참... 이제 얼마 안 있으면 해가 져가겠다.
저기다.
" 나영씨, 여기 소품 가져왔어요. "
" 어디 이리 줘봐요. "
으 여기까지 왔는 데 여전히 냉냉하고 정떨어지는 저 눈초리...
" 생각보다 잘 챙겨왔네요. "
' 생각보다 날 뭘로 보는 거야. 겨우 몇 가지 챙기는 건데. '
" 됐어요. 가봐요. "
" 저기 이렇게 멀리 까지 왔는데 저 영화촬영 하는 것 좀 보고 가면 안돼요? "
" 어, 혜인씨 아냐? 여기까지 웬일이야? "
사람 좋은 천기대 매니저다.
" 네. 저 소.... "
" 제가 잊고 온 것이 있어서 가지고 왔어요. "
말을 가로채서는 쌀쌀하게 한마디 날린다.
" 저 강혁 씨는 어디 있어요.? "
" 강혁씨, 네가 왜? 진짜 웃겨~ 가정부 주제에 어디 영화배우를 넘봐. "
' 저게 왜 또 오버야. 영화 촬영하는 거 한번 그냥 보려 구 그러는 데. '
' 그 망나니가 어떻게 영화를 찍는지는 나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다 보고 싶어할 걸요. '
" 어, 혁이 놈 저기서 영화 찍고 있지... 지금 찍었던 거 다섯 번째 다시 찍고 다음 씬 촬영해야돼. 아주 죽을 려구 하지. "
" 자자, 다음 씬 촬영합시다. "
" 어 너 여기 어쩐 일이냐? "
강혁 이다.
" 뭐 좀 갖다줄게 있어서. "
" 아니, 도대체 언제부터 혁씨 한테 말을 탁탁 놓는 거야. 나 참 기가 막혀서... 원. "
나영이 혁에게 목걸이를 걸어주면서 한마디한다.
" 에이씨 거추장스럽게 이건 또 뭐야. "
걸어주자마자 한 손으로 목에서 뜯어내다시피 떼 내고는 던져버린다.
" 혁씨, 지금 혁씨 컨셉엔 이걸 해 줘야, 영화에서 멋있게 잘 보인다고요. "
" 이깟 목걸이 하나가 무슨 내 얼굴을 살려. 난 워낙 잘생겨서 내 얼굴 하나면 돼. "
피식~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으나 그녀의 얼굴을 보고는 금방 웃음을 거둬 버렸다.
그가 촬영을 위해 저쪽으로 갔고 나영의 표정이 험하게 일그러졌다.
" 에이 진짜 승질 나서 못해먹겠네. "
" 자, 카메라 여기서 촬영하고 조명 좀 강하게 해야지. 역광이잖아. "
감독이 여기저기 바쁘게 지시한다.
" 자, 레디 엑션."
다들 숨죽이고 촬영장면을 지켜본다.
' 어머! 키스신인가보다. '
지는 해를 배경으로 우울한 분위기... 혁과 여자 주인공이 마지막 감미로운 키스를 한다.
그러면서 아쉽게 사라져 가는 여자.
그녀를 바라보며 우는 혁...
' 어째 좀 그와 어울리지 않는 다른 분위기. 좀 놀랐다. 그에게도 저런 면이 있었구나.
그리고 연기가 제법인데... '
감정이입이 굉장히 잘 된 것 같았다.
감독도 만족했는지. 오케이를 외치며 밝은 웃음을 짓는다.
" 자식, 웬일이야, 진작 좀 그렇게 하지. 그렇게 그 역할의 주인공이 된 듯 감정을 몰입해야 좋은 작품이 나오는 거야. "
" 우아, 혁시 대단해요. 감동 이예요. "
나영이 답지 않게 오버하며 칭찬하면서 그의 얼굴의 메이크업을 고쳐 주려한다.
" 저리 비켜. 귀찮게... "
그녀의 손을 매몰차게 치워버리고는 간다.
" 건방진데도 그런 게 멋있단 말야. 은근한 매력이 있어. 두고봐 넌 내가 찍었어. "
나영이 자신감 있는 말투로 나에게 애기하 듯 내뱉는다.
' 뭐야! '
그는 그렇게 일을 마치더니 오토바이를 타고는 사라졌다.
' 정말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는 반항아랄까? '
문득 그의 과거가 궁금해 졌다.
그는 왜 저런 성격의 소유자가 됐을 까?
전혀 남을 의식하지 않는 제 멋대로의 행동.
사람의 행동에는 그의 성장 배경과 무관하지 않은 무언가가 있다는 보고서를 읽은 적이 있는 것 같았다.
난 그래서 영화촬영도 처음 보고 나영 이와 같이 매니저 차로 집으로 향했다.
" 야, 근데 너 밥은 해 놓고 여기 온 거야. "
" 아뇨, 급하게 오느라고 못했는데... "
" 뭐야? 배고파 죽겠는 데... 넌 도대체 가정부 맞냐? "
' 뭐야, 급하게 일 시킬 땐 언제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