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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임게이(i'm gay) - #2-1

夜記(야기) |2004.04.11 13:59
조회 514 |추천 0

**까미유 님의 말씀대로 글자체를 바꾸니 훨씬 보기가 편해졌습니다. 감사합니다 ^^

 

 

 

- 아임게이(i'm gay) - #2-1

 

 

CHAPTER 2. 첫사랑을 집에서 만나다.

 

 

평소 하던대로 마루에 배를 깔고 뒹굴거리던 어느날이었다. 아침 햇살을 받으며 하품을 하다가 야기는 문득 밖에 나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핸드폰은 이미 오래전에 죽어 있었다. 마땅히 전화할 곳이 없어서 충전시키는 것도 잊고 있었다. 충전기가 어디 있는지 생각하다가 귀찮아져서 그냥 소파 테이블에 놓인 TV 리모콘을 집어 들었다.  TV를 켠 야기는 그야말로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났다. 시간이 안 간다고 생각했는데 왠걸, 빈둥거리는 동안에도 시간은 착실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5월 16일, 수요일 아침뉴스입니다.

 

혹시 잘못 들었나 싶어 귀를 후볐다.

그리고는 깜짝 놀라서 TV위에 세워진 달력을 잡아챘다. 5월 16일이라고?

무려 두장이나 넘어가는 달력을 믿기 힘든 시선으로 노려보던 그는, 다시 한번 채널을 돌려 날자를 확인하고서야 망연자실 주저앉았다.

아무리 넋을 빼놓고 있었다지만 두 달이 지나도록 집안에서 뭘 했단 말이지? 야기는 놀라서 집안을 한번 둘러보았다. 어제와 전혀 다르지 않은 집안 풍경이 두 달이라는 세월이 흘러버렸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낯설게 느껴졌다.

 

“하아~ 대체 나, 뭘 하고 있었던 거지?”

 

바로 그때였다. 딩동 하는 초인종 소리가 들려왔다. 야기는 조금 의아한 얼굴로 인터폰에 비친 사람을 확인했다가 헉 숨을 들이키며 달려나가 현관문을 열었다. 

 

“하, 할아버지?”

“고얀 놈.”

 

밀고 들어오는 할아버지의 서슬이 퍼래서 야기는 주춤 뒤로 물러났다. 이씨 문중의 종손으로 태어나서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것을 꼽으라고 하면 당연히 할아버지다! 어릴 때부터 종손으로서의 몸가짐이 어쩌고 하며 근엄한 훈계를 하셨다 하면 두 시간이 기본. 잔뜩 섞여 나오는 한자들과 예리하게 저려오는 다리에 눈물을 찔끔하면서도 한번도 내색하지 못하고 살았던 야기다.

대학 입학과 동시, 서울로 올라오게 되면서 야기가 얼마나 환호성을 질렀던가. 자유의 향기란 달콤하고도 행복한 것이었다. 다행히 야기가 예상외의 상위 대학에 합격하자 집안의 경사라면서 할아버지는 무조건 야기의 서울행을 지지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떡 하니 제법 큰 평수의 아파트와 차까지 안겨주셨다. 이제 와서 무슨 일이지, 생각하던 야기는 자신이 두 달 동안 집에 연락도 하지 않았고 당연히 문안인사조차 빼먹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사색이 되었다.

패닉으로 굳어가는 머리로도 방석을 찾아 할아버지께 깔아드린 것은 기적중의 기적이었다. 소파를 좋아하지 않는 양반이시다. 만일 앉을 곳을 찾지 못해 소파에 앉으셨다가는 불편한 심기에 당장 그 잔소리가 두 배로 느리라는 것은 불 보듯 뻔했다.

 

“절 받으십시오.”

 

머리는 굳었어도 몸에 밴 종손으로서의 교육이 착실히 발휘되는 순간이었다. 근 20년간의 반복학습에 의해 자동적으로 척척 어른을 뵙는 예를 드리는 자신에게 야기는 속으로 기쁨과 한탄이 반씩 섞인 눈물을 흘렸다. 기쁨은 책잡히지 않았으니 살았다는 것이고… 한탄은 저절로 움직이는 몸에 대한 씁쓸함이었다.

 

“오냐, 앉거라.”

 

절을 마치고 할아버지의 앞에 공손히 무릎꿇은 야기는 뒤늦게 할아버지의 안색을 살폈다. 처음부터 고얀 녀석이라고 하신 것에 비하면 그래도 조금 풀어져 보이는 할아버지의 표정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할아버지가 종손인 자신을 얼마나 끔찍하게 여기는지는 잘 알고 있었다. 어려서부터 자신의 앞에서는 큰소리조차 못내게 하실 정도로 각별한 손자사랑이셨다. 그러나 야기는 할아버지가 어려웠다. 늘 단정하게 갓과 도포를 차려입은 모습을 멀리서라도 발견하면 금세 주눅이 들었다. 말씀하시는 한마디 한마디가 모두 성현의 가르침이라 야기로서는 그저 머리를 조아리는 수밖에 없었다. 어렸을 때는 자신과 피를 이은 이가 아니라 먼 세상에 살고 있는 존재처럼 할아버지에게 거리감을 느꼈었다. 지금이야 그때보다는 덜하지만 그래도 살갑게 여겨지지는 않았다. 아직도 야기에게 있어 할아버지는 멀고도 높은 아득한 분이었다.

 

“어찌 된 게냐?”

 

무슨 말씀이실까 하고 머리를 굴리던 야기는 그것이 두달 동안 문안인사를 빼먹은 데 대한 질책임을 깨닫고 송구스러움에 고개를 숙였다.

 

“잘못했습니다, 할아버지. 손의 몸으로 마땅히 드려야 할 문안을 오랫동안 드리지 못했으니 제 잘못이 큽니다.”

“무얼 하느라 그리 된 게야? 아니, 이제보니 네 안색이 왜 그러냐? 어디가 아팠던 게야?”

 

할어버지의 근엄한 얼굴에 살짝 걱정스러워 하는 빛이 감돌자 야기는 더욱 죄송함에 고개를 들지 못했다.

 

“아닙니다. 조금 심란한 일이 있어… 염려 놓으십시오. 아주 건강합니다.”

“무어가 그리도 심란하다는 게야? 두달이나 아무 연락이 없고 핸드폰은 꺼져있고… 그러게 집에 전화라도 놓으라 했었던 것을… 쯧쯧.”

 

할아버지께서 직접 행차하실 정도라면 지금쯤 집은 얼마나 난리인지 안 봐도 비디오였다. 야기는 잠시, 집에 내려가면 닥칠 할머니와 어머니의 닥달을 상상하고 속으로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 어른 앞에서는 한숨도 쉬어선 안 되는 법이다.

 

“무슨 일이냐? 말해 보아라.”

 

스스로에 대한 환멸 때문이라고 말할 수는 없잖아요. 골치가 지끈지끈 아파 오는 것을 내색하지 않으려 애쓰며 야기는 최대한 나은 변명을 마련해 보려고 빙글빙글 머리를 굴렸다. 다행히 그것이 급조된 변명임을 들키기 전에 입에서 제법 괜찮은 대꾸가 불쑥 튀어나왔다.

 

“휴학을 할까 하고…”

 

할어버지의 이마가 슥 하고 치켜 올라갔다. 야기는 점점 선명해지는 핏줄을 두려운 마음으로 지켜보았다.

 

“휴학을 해? 입학한지 얼마나 되었다고 휴학을 한단 말이냐?”

 

아차 잘못 선택했다는 후회가 들었지만 여기서 밀렸다가는 더 깨진다. 야기는 시침을 떼고 생각나는 것을 열심히 주절대기 시작했다.

 

“제 적성이랑은 아무래도 맞지 않는듯 하고…”

“겨우 두어달 공부해 보고 무슨 그런 소리가 나와?”

 

날카로운 질문에도 흔들려선 안 된다. 여기서 흔들리면 말짱 도루묵이다. 야기는 막연하게 꺼낸 휴학이 정말 자신의 최대 고민이라도 되는 양 비장한 얼굴로 할아버지에게 호소했다.

 

“그러니까입니다. 한두달 가지고도 벌써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데… 더 이상 계속해야 소용없을 것 같습니다.”

 

할아버지는 날카로운 눈으로 푸석푸석한 야기의 얼굴이나 그 동안 말라버린 팔다리를 살폈다. 뭐라고 말하고 싶은 것은 잔뜩 있었지만 어딘지 지쳐보이는 모습에 그저 입을 꾹 다물고 말았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픈 손자가 움찔거리며 눈치를 살피는데 속상하지 않다면 그것이 거짓말이었다. 살다보면 시간이 필요한 일도 있고 스스로가 납득해야만 하는 일도 있다. 무엇보다 야기녀석이 너무 힘들어 보여서 그저 묵묵히 보아주자는 생각이 들었다.

 

“네 공부에 관한 일이니 네가 정히 그렇다면야 나도 말릴 생각은 없다.”

 

너무 순순히 나오는 허락에 야기는 불안감마저 느꼈다. 꼬장꼬장하신 분이 이렇게 쉽게 넘어갈 리가 없는데? 어리둥절해 하는 야기의 귀에 할아버지의 다음 말이 들렸다.

 

“하지만 사지 멀쩡한 사내녀석이 날마다 집에 틀어박혀 있는 것도 못 쓴다. 학교에 다니기 싫다면 다른 일을 하려무나.”

“일…이요?”

“그래. 안 그래도 근처에 네 당숙이 가게를 하나 낸다더라. 맡길만한 마땅한 사람이 없다고 곤란해 하니 집안일을 돌본다 생각하고 네가 맡아봐.”

“당숙이라면…?”

“현호말이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야기는 현호라는 이름을 열심히 기억 속에서 뒤지다가 마침내 한 사람을 찾아냈다. 막내 할아버지의 아들, 그러니까 야기가 어렸을 때는 현호삼촌으로 불렀던 그 사람이었다. 당숙이라고는 하지만 나이가 큰형뻘이라 친하게 지냈던 걸로 기억한다. 그리고 그 삼촌이 ‘부르고뉴’ 라는 정통 프랑스 레스토랑 체인 사업을 한다는 사실도 기억났다. 엄청 큰 사업인 모양인지 TV와 잡지에도 여러 차례 소개된 적이 있었다.

패밀리 레스토랑과 패스트푸드점이 판을 치는 요즘을 생각하면 의구심이 들지만 어쨌건 ‘부르고뉴’ 는 외식사업부문에서 급성장을 기록하고 있었다.

 

“하지만 전 아직 나이도 어리고…”

“사업에는 믿을만한 사람이 가장 필요하다고 하더라. 경험자들을 주로 쓴다고 하니 일이야 차츰 배우면 되는 것이고.”

 

할아버지의 말씀에 야기는 또다시 속으로 깊게 한숨을 쉬었다. 이것마저 거절하면 할아버지는 정말로 야기에게 무슨 일이 있다고 생각 하실게 틀림없다. 더구나 야기 자신조차도 무언가 할 일이 필요하다는 생각은 하던 참이었다. 오늘 아침의 날자 이동에 대한 충격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건지도 모른다. 휴학을 하고 방안에만 퍼질러 앉아 있는 것도 생각하면 끔찍하고… 무엇보다도 현호 삼촌이 아직 어린 자신을 미덥지 않아 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괜히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스스로를 달랜 야기는 그럼, 하고 할아버지에게 승락의 뜻을 비췄다.

 

“하지만 당숙께서 조금이라도 저어하는 기색을 보이시면 알려주세요. 당숙께 일부러 짐이 되고 싶지는 않습니다.”

“염려마라. 그 녀석은 아마 아주 좋아 할게다.”

 

자신만만하게 말씀하시는 할아버지를 보며 야기는 속으로 그럴 리가 없다구요, 라고 외쳤다. 생각해보면 간단한 일이다. 누가 아직 스물밖에 되지 않은 애송이에게 그런 큰 사업을 맡기겠는가. ‘부르고뉴’를 가게라고 부르시는 할아버지가 너무 위대한 것이다. 그건 가게라는 귀여운 말로 수식될 정도의 것이 아니었다. ‘부르고뉴’ 하나에 딸린 고용인의 수만 해도 어림잡아 30명에 가깝다. 정사원만 그 정도고 계약직이나 파트타임까지 합치면 족히 5,60명은 될 것이다. 야기는 자신이 그 많은 사람들을 거느릴 거라는 생각만으로도 현기증이 나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거기에 투자되는 돈을 대충 추산하고는 숨이 턱 막혔다. 그런 엄청난 일을 맡기에는 자신은 아직 너무 어린 것 같았다.

 

“그럼, 그리 알고 이만 가보마. 온 김에 어르신들도 한번 뵈어야 하고…”

“벌써 가시게요? 점심이라도 하시고 가셔야죠.”

“됐다. 점심은 벌써 선약이 있으니 나올 것 없다. 조만간 결정되는 대로 알려줄 테니 너도 미리 현호에게 이야기 정도는 들어 두거라.”

 

예, 하고 대답하면서도 야기는 절대로 자신이 그걸 맡을 리는 없다고 자신했다. 어떤 미친 사람이 그만큼의 돈을 쏟아 부은 사업체를 어린애한테 맡기겠는가.

 

“그럼 살펴가십시오, 할아버지.”

“오냐. 집에 전화는 한 통 넣어두거라. 에미가 몹시 걱정하더구나.”

“예, 명심하겠습니다.”:

 

할아버지의 차가 멀어지는 것을 보며 야기는 끄응 하고 허리를 폈다. 휴학하면 시간이 남아 돌텐데 뭘 하면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 아르바이트자리라도 찾아볼까. 한가한 상념으로 야기는 눈부신 햇살을 피하려 손으로 눈가를 가렸다. 모르는 새 햇살이 이렇게 따가와져 있었다니… 역시 정해진 시간 동안은 밖으로 나와야 한다.

 

“역시 아르바이트라도 해야 할까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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