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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엽의 언덕 -4-

화니 |2009.03.22 18:33
조회 132 |추천 0
한여름의 무더위가 한층 가시고

잠자리가 하나둘 보일 때쯤..

간간히 부는 바람이 살갖에 닿으면

수분이 마르며 생기는 청량감에 기분이 좋아진다.



연진은 집안일을 대충 끝내 놓고

집안 테라스에 앉아

커피 한잔을 마시며 바다경치를 구경하고 있었다.


그때 뒤에서 문을 열며 들리는 마찰음이 들렸다.

진우의 서재 문이 열리며 진우가 나오는 것이었다.

진우는 부엌이나 거실로 향하지 않고

현관문을 향해 걸었다.


연진의 얼굴에 조그만 놀라움의 기색이 떠올랐다.

항상 집에 틀혀박혀

가끔 나올때면 물을 마시러 나오거나

거실에서 따뜻한 햇살을 쬐며 책을 읽는 게 일상의 전부였던 진우가

밖으로 나가다니..


연진은 마시던 커피를 테이블에 내려놓고

진우의 뒤를 따랐다.



"진우씨! 어디가요?"

"..."


역시나 진우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었다.

연진역시 처음에 한번 물어보고는

그저 진우의 뒤를 따라갈 뿐이었다.



해변가를 따라 난 가로수길..

8월의 마지막을 섭섭해하는 듯

나무들은 더더욱 울창하게 길을 향해 뻗어있었다.

간간히 불어오는 바닷바람과

부딪치는 파도소리는

그 길을 걷는 사람의 기분을 차분하고 감상적으로 만들었다.



진우의 뒤를 걷고 있던 연진은

어느새 진우의 옆에서 걷고 있었다.


"진우씨. 참 좋네요."

"..."

"팔짱.. 껴도 되나요?"


조금은 당돌한 한 마디.


역시나 진우는 조금 얇다싶은 입술을 다물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연진은 자신의 왼팔을

주머니에 아무렇게나 찔러 넣은 진우의 오른팔에 끼워 넣었다.


긴생머리의 연진이

조금은 큰키에 마른 진우와 팔짱을 끼우고 걸으니

누가 보아도 참 잘어울리는 연인처럼

가로수 길을 걷고 있었다.




한참을 걸었다.

진우가 도착한 곳은

큰 은행나무가 멋들어지게 하늘을 향해 뻗어 있었고,

주위에는 이름모를 분홍색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동산이라고 하기엔 조금 작은 곳이었다.

그래 언덕이라고 하자.




참 아름다운 공간이었다.

가을에 있을 낙엽을 준비하듯

은행나무의 머리에는 은행잎들이 수없이 매달려 있었고,

한창 붉게 물든 분홍색 꽃들은

연진의 얼굴에 절로 미소를 짓게 하였다.



연진은 저도 모르게 분홍색 꽃을향해 손을 뻗었다.

분홍색 꽃에 취해 정신없이 꽃을 보고 있는 연진..

누군가 보고 있었으면

사진이라도 찍고 싶었을 만큼 아름다웠다.

마치 천상에서 천사가 내려와 꽃을 희롱하는 듯

연진과 꽃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진우는 은행나무밑에 걸터 앉아

연진을 한번 보고는

머나먼 수평선을 바라보고 있었다.


연진이 꽃을 몇개 꺾어와

진우의 곁에 걸터 앉았다.

진우와 연진이 함께 앉아있는 그곳은 경치가 참 좋았다.

푸른 바다와 하얀 백사장, 그리고 근처에 조그맣게 자리잡은

진우의 집이 모두 보였다.


"정말 예쁜곳이네요.. 이 꽃 이름이 뭐죠?"

"엘리카."

"엘리카요? 와.. 정말 이쁘다.."

"..."


진우는 짧은 대답을 마치고 다시금 수평선을 멀리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진우를 연진은 올려다 보고 말했다.


"여긴 어떻게 알았어요? 이런데 자주 와요? 웬일로 집을 나왔나 했더니.."

"그냥.. 가끔 오지."

"그렇구나.."


진우도 연진도 말이 없었다.

파도소리와 푸른 바다를 감상하며

한동안 둘은 말이 없었다.



시간이 흘러

하늘이 점점 붉게 물들어갔다.


진우의 어깨에 뭔가 중량감이 느껴졌다.

연진이 진우의 어깨에 기대어

새근새근 잠을 자고 있었다.


진우는 자신의 어깨에 기대어 자고 있는 연진을 한번 보고

다시 앞을 보았다.

수평선으로 지는 태양은 참 멋지게도 사라지고 있었다.

붉게물든 하늘은 점점 검게 물들어갔고

빛나는 별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 때까지도 진우는 우두커니 앉아있었다.




"응? 잤네... 핫! 깜깜해!!"

"일어났나?"

"이런.. 밥먹어야죠!! 배 안고파요? 왜 안가고 있었어요~"

"네가 어깨에 기대고 있었잖아."

"그럼 깨우지 그랬어요.."

"... 가자"


진우와 연진은 언덕을 내려와

걸어온 길을 걸어갔다.

이번에도 연진의 팔은 진우의 오른팔에 끼워져 있었다.



"진우씨. 우리 아까 거기 자주가요~ 너무 멋지다.."

"내가 가고싶을 때 간다."

"치이.. 너무해.."


















온세상의 모든 생명들이

곤히 잠자고 있을 깊은 새벽

대지를 은은하게 비추고 있던 달을

한떼의 먹구름들이 가려버렸다.


먹구름들은 한방울 두방울 비를 내리더니

나중에는 장대비를 쏟아 붓기 시작했다.

폭풍이었다.


파도가 거세지고

땅에 심어진 나무들은 연신 머리를 흔들어댔다.



"꽈르릉!!!"


마침내 천둥번개가 치고

폭풍의 몸부림은 절정을 향했다.



연진은 곤히 잠을 자고 있었다.

그날 하루의 아름다움을 고이 간직하는 듯이

입가에 조금의 미소를 머금고

곤히 잠들어 있었다.



그 때였다.


잠을자고 있던 연진의 귓가에

무언가 이질적인 소리가 들려왔다.


"우으으...."


희미하게 들리는 이상한 소리

연진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귀를 귀울여 봤지만,

아무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무언갈 잘못들었나 생각하고 누우려는 찰나

이상한 소리가 조금 더 또렷하게 들려왔다.



"우아아아...."


비명소리였다.

그것도 집 안에서 들리는 비명소리.

놀란 연진은 방을 뛰쳐 나왔다.



진우의 집에서 사는 사람은 둘 뿐...

연진과 진우..

연진이 지른게 아니라면 진우의 비명소리일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연진은 진우의 침실로 달려가 문을 벌컥 열었다.



진우의 침실 한면에 자리한 창문엔 커튼이 쳐져 있었고

깜깜한 진우의 방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진우의 신음소리가 자꾸만 들려왔다.



"진우씨 괜찮아요?"

"으아아아아!!!!"

"불 켤께요!! 어딨어요?"

"불 켜지마!!!! 불 켜지 말라구!!!"


진우의 다급한 비명소리...

당황스러웠다.

한번도 높은톤으로 말하는 것 조차 용납하지 않았던 진우..

그런 진우가 비명을 지르고 신음소리를 내고 있었다.

연진은 진우의 침실에서 불을 켜는것을 포기하고

작은 스탠드를 켰다.


침대를 보았지만 그 위에 진우는 없었다.

희미하게 보이는 불빛 사이로

방 한구석에서 머리를 잡고 웅크려 있는 한 인영이 보였다.

연진은 그 인영에 다가섰다.



"지, 진우씨.. 괜찮아요?"


연진이 진우의 어깨를 잡으며 말을 걸었다.

연진이 진우의 어깨에 손을 대는순간...

연진은 느낄 수 있었다.


진우의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리고 있음을...



"왜그래요? 어디 아파요?"


"아니야.. 그런거 아냐... 그냥 날 내버려 둬라..

으아아아아아아!!!!"


실성한 사람처럼 비명을 질러대는 진우..

그런 진우가 불쌍해 보였다.

무섭다기보단 가엾어보였다.


버림받은 강아지가 떨고 있는 것처럼..

연진의 눈에 보이는 진우는

가엾은 한 어린 아이였다.



연진은 진우의 등 뒤로 다가가 무릎을 땅에 대며 앉았다.

그리고 진우의 목을 팔로 감쌌다.


연진이 뒤에서 가만히 안고 있을때도

진우는 계속 떨고 있었다.


연진은 가만히 안고 있었다.

바들바들 떨고 있는 진우를 안고 있었다.


그러자 서서히 진우의 몸이 돌아섰다.


그리고 마침내 진우의 머리가 연진의 품 속으로 들어왔다.


진우의 떨림은 서서히 멎어갔고

한참 후에는 쌕쌕거리는 숨소리가 들려왔다.



진우는 연진의 품속에서 잠이들었다.

연진은 진우를 안고..

그렇게 폭풍치던 그날 밤은

아침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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