⑴ 왜(倭)가 송(宋)으로부터 조선의 지배권을 인정받았다고 왜곡.
각급 사회과(역사 분야) 교과서마다 임나(任那)에 관한 내용이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로 표기되었으나 오늘날에는 ‘임나’로 표기하고 있다. 임나일본부란 일본 제국주의 세력의 조선 식민통치 시기에 야마토[大和] 왜국(倭國)이 4세기 후반부터 김해 지방을 장악하여 군정(軍政)기관을 설치하여 7세기까지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일본 역사학자들의 주장에서 나온 것이다. 요즘 일본의 역사 교과서에는 ‘임나’로 표기하지만 본질적인 의미가 달라진 것은 아니다.
한국 침략의 정당성을 위해 허황되게 날조한 대표적인 케이스로 일본인 학자들 가운데 일부도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이야말로 일본 군국주의 실권자들의 ‘마귀놀음’이었다면서 비판하고 있다.
야마가와 출판『중학사회』(역사적 분야) 42쪽은 ‘야마토 정권과 동아시아’라는 단원이다. 한국 지도를 싣고는 고구려·백제·신라 3국의 표시와 경상도·전라도 일대를 ‘가야(伽倻)’로 표시해 놓았다.
그리고 ‘조선·중국과 야마토 정권’이라는 항목으로 이어지면서 “4세기의 조선에는 고구려가 북방에서 진출해 온 중국의 낙랑군(樂浪郡)을 멸망시켰고, 남부에는 백제, 신라 두 나라가 건국되어 3국이 대립하게 되었다. 5세기 왜(倭)의 대왕(大王)은 송(宋) 순제(順帝)에게 사신을 보내, 왜왕(倭王)으로서의 지위와 조선반도의 남부를 장군(將軍)으로서지배하는 지위를 인정받기 위해 노력했다. 무(武)라는 대왕은 중국의 황제에게 편지를 보내 원하는 지위를 인정받았다.”라고 설명하였다.
여기서 특히 주목할 부문은 ‘5세기 왜(倭)의 대왕’이라는 구절과 송황(宋皇)으로부터 ‘왜왕(倭王)의 지위와 조선반도 남부의 지배권을 인정받았다’는 부분이다.
왜국은 국세가 강력하여 ‘대왕(大王)’이라는 호칭으로 불리워진 전제군주가 존재하였으며, 조선의 지배권을 인정받았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사실무근(事實無根)이다. 우선 대왕이라는 호칭은 일본인들이 변조한 내용이다. 왜왕(倭王) 무(武)라는 인물은 웅략왕(雄略王)이라고 하는데, 그는 백제계(百濟系)가 분명하다. 하야시 세이고[林靑梧]는 자신의 저서「일본서기의 암호」에서 "백제는 백제군(百濟君)의 지위에 있던 여풍장(余豊璋)을 왜국에 보냈다. 여풍장은 숙모인 왜국의 황극왕(皇極王)이 폐위된 뒤 왜(倭) 조정을 다시 부활시켰다. 황극왕은 제명왕(齊明王)이라는 이름으로 복귀하여 정권을 장악하여 즉위하도록 했다. 이 때는 신라계(新羅系) 조정과 백제계가 정권 쟁탈의 정변을 벌여 마침 백제계가 승리하여 장악하게 된 것이다. 왜국 안의 정권을 신라인들과 백제인들이 지배하면서 암투를 벌인 것이다. 이러한 갈등 과정에서 신라인과 백제인은 타협하여 혼인을 하면서 야마토[大和] 정권을 형성하였고 오늘의 일본 정권의 원류가 된 것이다."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에서 보는 바와 같이『고사기(古事記)』와『일본서기(日本書紀)』가 ‘야마토 정권’의 정체와 고대 한국간의 관계에 대해 얼마나 변조했는가를 알 수 있다. 웅략왕(雄略王)은 성격이 난폭하고 무자비했다. 백제인 목씨(木氏)인 습진언(襲津彦)의 손자에 해당하는 원대신(圓大臣)을 죽이려 하자 원대신이 딸 한원(韓媛)을 바쳐 왕비로 삼게 했으며, 463년에는 신라계 전협(田狹)을 임나국사(任那國使)로 보내 전협이 없는 틈을 타 미모의 부인 치원(稚媛)을 가로챘다. 삼촌뻘 되는 네명의 왕자가 대신을 사냥한답시고 참살하기도 했다.(『일본서기(日本書紀)』「웅략왕기(雄略王紀)」)
『송서(宋書)』등 중국의 역사서에 따르면 웅략왕은 백제의 국조(國祖)인 온조왕(溫祚王)을 종묘(宗廟)에 모시고 숭앙했다고 한다. 조상신으로 섬긴 것이다. 이 무렵에는 쓰시마와 북규슈 지역에서는 백제의 분국(分國)과 신라의 분국간에 경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당초에는 가야 세력 기반이었으나 백제 세력이 진출하여 우세하였고, 뒤이어 신라 세력이 진출함에 따라 신라 판도로 급변, 이를 만회하기 위한 백제계의 반격으로 치열한 장기전이 계속되고 있었다. 마침 고구려가 신라를 지원하여 합세함으로써 이 지역의 백제 세력은 파멸지경에 이르렀고, 이런 와중에 웅략왕(雄略王)은 송(宋) 순제(順帝)에게 ‘도요백제(道遙百濟)’라는 제목의 상소문을 올려 고구려의 공략을 피해 자신이 송나라로 귀순하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웅략왕(雄略王)은 교토 마이츠루(동해 건너)에서 수천리 떨어진 북규슈까지 달려가 전투를 지휘하다가 오늘의 시모노세키에서 전사했다. 한국의 재야사학자들은 이러한 정황을 감안하여 웅략왕은 백제계로서 백제를 지원하다가 신라군에게 살해당한 것이라고 분석했다.『일본서기』에는 그가 시모노세키까지 달려간 이유를 애매하게 얼버무려 놓고는 전사를 은폐하여 ‘대전(大殿)에서 사망했다’고 기록해 놓았다. 그리고 오늘날의 역사 교과서에는 “웅략왕이 천하를 통치하고 야마토 정권을 정비했다.”고 수식하여 야마토 왜국의 기반이 강했던 것으로 위장해 놓았다.
그러므로 이 교재에서 ‘사신을 보내’, ‘인정받기 위해 노력했다’, ‘원하는 지위를 인정받았다’는 따위의 설명은 한국 침략을 합리화시키기 위한 치졸한 포석에 불과하다. 이 단원 밑에 “야마토[大和] 정권은 어떠한 구조로 정치를 펼쳤는가?”라는 질문을 붙였는데, 학생들이 야마토 정권의 존재를 확신하도록 유도하기 위한 장치이다. 근거없는 일화를 실제의 사실로 인식시키기 위해 2중·3중의 장치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 교과서의 내용은 4세기 이전 한국의 역사적 과정을 배제해 버렸다. 4세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한반도에 삼국이 시작된 것처럼 오인하게 하는 문맥으로 삼국의 기반인 진한(辰韓)과 마한(馬韓)을 국체(國體)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의미를 비치고 있다. 그러나 당시 삼한(三韓)사회는 왜국에 비해 선진문물을 누린 체제였다.
이 교과서는 기원전 4·3세기부터 야요이[彌生]시대에 한반도의 사람들이 벼농사와 철제 무기 등의 선진문화를 가지고 들어간 사실을 부정하고 한국을 경멸하는 역사관을 주입시키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 일본의 권위있는 역사학자 하야시 세이고[林靑梧]가 “왜국의 야마토라는 국호는 서기 645년에 신라의 김춘추(金春秋)가 작명해 주었고, 이것이 야마토 정권의 탄생이었다”고 설파한 바를 상기하면 왜국의 건국 연대를 약 3백년이나 앞당겨 변조해 놓은 것이다. 일본 역사의 우월감을 부풀게 하기 위한 작문이다.
⑵ 기본 상식을 완전히 무시한 서술
경악스러운 일은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를 기정사실로 적극적으로 주입시키는 참고서이다. 특히 고교생의 대학입시용 참고서는 가장 왕성한 사고력을 발휘하는 시기에 입시지옥의 현실에서 결사적으로 암기해야 하는 학습서로 평생의 지식 형성에 뿌리가 되기도 한다. 일본 정부가 ‘임나일본부’ 교육에 집착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고교생의 입시용 참고서인 신신토 출판『일본사 연대 기억법』을 예로 들어보자.
‘512년 오토모노 가네무라[大伴今村]가 임나사현(任那四縣)을 할양받았다’는 제목을 달고는, “오무라지[大連]인 오토모노 가네무라가 백제의 요구로 가라(加羅)의 4국(四國)을 할양받았다. 그런데 뇌물을 받았다고 비난을 사게 되어 후일 실직했다. 오무라지에 관한 응답항목의 <>안에는 ‘백제의 요구로 임나사현을 할양받았다’는 것이 정답이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이에 부연하여 “쉽게 암기하려면, 가네무라가 동전 두 장으로 할양받았다고 외우는 것이 좋다”는 설명까지 덧붙였다. 아무리 암기식 교육이라고 해도 이러한 극단적인 왜곡과 한국을 경멸하는 내용으로 암기시킬 수 있을까? 정상적인 사고방식을 잃어버린 교육이다. 한·중·일 삼국의 어느 고대사를 들추어보아도 임나사현을 화폐 두 푼 주고 할당받았다는 내용은 없다. 당시는 화폐제도가 없었다는 것이 상식인데도 왜국만은 현금거래를 했다는 교육이다. 교토대학은 일본에서 권위를 자랑하는 학문의 전당으로 알려져 있는데 더구나 교육대학교수가 이러한 왜곡 선동교육에 주력하고 있다는 것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이러한 사례를 보면 한국인들이 모르는 일본 사회의 밑바탕에는 교과서 이외의 교육자료를 날조하여 한국을 경멸하게 만드는 교육이 얼마나 많이 저질러지고 있는가를 짐작할 만하다.
⑶ 임나(任那)는 쓰시마[對馬島]에 있었다.
임나(任那)라는 단어에서 ‘임(任)’이란 글자는 ‘임금님’ 등의 경칭이다. ‘나(那)’는 나라, 도읍이 크다, 편안하다는 의미의 글자이다. 따라서 임나는 ‘우리 임금님이 계시는 모국(母國)’이라는 뜻의 보통명사이다.
이병선(李倂宣) 부산대학교 명예교수와 백당(柏堂) 문정창(文定昌) 선생이 이미 “임나는 쓰시마에 있었다”는 사실을 검증한 바 있다. 쓰시마나 규슈 지방에 정착한 고대 한국인들이 “저 바다 건너의 나라가 우리 임금님이 계시는 나라”라는 의미로 부르기 시작한 것이라는 학설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사료는 얼마든지 있다.
『일본서기』에 신공왕후(神功王后) 섭정기에 ‘사비신라(紗比新羅)’라는 지명과 ‘시소위지(是所謂之) 삼한야(三韓也)’라는 구절이 있다. ‘사비신라’는 쓰시마의 상·하 두 섬 중의 상도, 오늘날의 사코 지방의 옛 지명이었다. 신라 본국 안에 ‘신라’라는 단어가 들어가는 지명이 있을리 만무함으로 쓰시마에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신라 본국의 ‘사비’ 고을 출신이 쓰시마에 건너가 정착하여 마을 이름으로 불렀던 것이다. 일본인들이 요즘도 자기의 시골 고향을 ‘구니[國]’이라고 호칭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시소위지 삼한야’는 ‘이곳은 이른바 삼한의 땅이다’는 말이며, ‘삼한’은 진한·변한·마한을 말하기도 하지만 그를 기초로 하여 강성해진 신라·백제·고구려 등 한삼국(韓三國)의 통칭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 구절은 ‘쓰시마는 한삼국의 땅’이라는 말인 것이다.
백제 출신 사학자 오오노 야스마로[太安萬呂]가 도네리친왕[舍人親王]과 함께 최초의 일본 역사서『고사기』·『일본서기』를 편저하면서 ‘시소위지(是所謂之) 삼한야(三韓也)’라는 구절을 삽입하여 “누가 뭐래도 쓰시마는 한삼국의 땅이다”라고 간접적으로 웅변하려 했던 것이 아닐까?
『일본서기』에는 임나는 종합적인 호칭이고 별도로 말하자면 모두 10개의 소국들이 있었다는 해설이 있다. 이들 소국들은 한국 땅에는 없고 쓰시마와 잇끼 섬, 규슈 지방에 있었다. 중애왕(仲哀王) 재위 8년조의 기록에는 고금신라(拷衾新羅)라는 지명이 나온다. 이 지명 역시 신라 본국 안에 ‘고금신라’라는 지명이 있을 수 없다. 북규슈[北九州] 지방에 있었던 지명이다. 신라의 고금 고울 출신의 정착지였던 것이다.
쓰시마 부근의 잇끼 섬에는 ‘부리’라는 지명이 많다. 오늘날에도 ‘히가시부리, 나카부리, 사카부리, 구보부리, 모로츠부리’ 등 대충 보이는 것만 모아도 44개 지방이나 된다. ‘부리’는 한국 고어이며 ‘집단으로 거주하는 평탄한 곳’을 말한다. 백제국의 지명에 많이 나타나는 지명이다. 백제가 선점했던 모양이다. 규슈 일대에는 ‘기라, 기야’ 등의 지명이 수없이 전해지고 있다. 이와 같은 지명만 추적해 보아도 규슈, 쓰시마, 잇끼 섬 일대는 고대 시기에 우리 삼한의 선인들이 정착했던 곳임을 알 수 있다.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는 김해 지방에 있었다는 임나일본부의 근거를 찾기 위해 일본 역사학자와 관헌들을 총동원하여 김해 등 옛 가야 전역의 유적을 파헤쳤다. 그러나 티끌 만한 근거도 발견하지 못했다. 그래도 임나일본부설을 침략 합리화의 구실로 삼기 위한 공작은 그치지 않았다. 혹시 김해(金海) 김씨(金氏) 족보기록에서 왜곡사실이 들통날지 모른다는 의구심이 일었던지. 마침내 1915년 6월 29일 조선총독부는 극비리에 "김해를 본관으로 하는 김씨 가문 족보의 발행을 엄금 조치한다"는 경무령(警務令)을 발동하기도 했다. ‘임나일본부설’ 날조공작에 얼마나 혈안이 되었던가를 짐작하고도 남는다. 한국의 민족사를 말살하기 위한 천인공노할 작태를 서슴지 않았던 것이다.
이제 임나일본부는 없었다라고 결론을 내릴 만도 한데 일본의 미래를 짊어지고 나갈 후세 교육에 다시 도입하고 있으니, 이는 제국주의 시대의 침략사상을 전수하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일까?
▶ 출처; 최성규(崔性圭) 著『일본의 역사는 없다.』아시아문화사編(2000년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