⑴ 귀중한 역사적 기록을 변조한 일본 군부
고구려 제19대 국왕인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은 4세기 후반에서 5세기 초에 강력한 군사력으로 거란족(契丹族)을 굴복시키고 후연(後燕)을 정벌하는 등 중국 동북지역을 점령하여 국토를 광대하게 확장시킨 군주이다. 그래서 아들 장수태왕(長壽太王)이 414년 9월, 고구려의 옛 도읍지인 집안현(集安縣) 통구(通溝)에 거대한 화강암 원석으로 선왕의 혁혁한 업적을 기록한「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 훈적비(勳積碑)」를 세웠다. 비문에는 태왕의 일생사업을 기리고 고구려의 북벌(北伐)과 신라를 침입한 왜군을 무찌른 사실 등이 기록되어 있다. 건립한 지 1천 4백여년 후인 1875년에 발견되어 세계 최대의 크기와 명문장(名文章), 수려한 형태미와 전한(前漢)시대 예서체(隸書體) 등으로 귀중한 문화유산으로서 세인을 경탄케 했다.
일본은 중국과 한국 침탈야욕에 혈안이 되어 있던 1880년, 군부의 첩자 사코 게이신[酒內景信]이 비문을 교묘하게 변조하여 한국 침략의 명분을 만드는 목적에 이용하였다. 일본은 비문 글자의 개작을 부인하고 있으나, 106자를 쪼아 없었던 것으로 꾸민 것만은 분명하다는 학설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그런데 요즘의 일본 역사 교과서에 ‘호태왕비(好太王碑)’를 내세워 엉뚱한 비문해석으로 침략사관을 교육시키고 있다.
야마가와 출판『고교일본사B』18쪽, “광개토왕(廣開土王) 일대(一代)의 사업을 표기한 석비로 높이는 6.34미터이며, 당시 고구려의 도읍이었던 환도(丸都)에 있다. 비문의 문자는 오랜 세월의 풍우로 선명하지 않으나, 당시의 조선반도 정세를 일려주는 귀중한 사료이다. 그 안에 ‘백잔(百殘)과 신라는 옛날부터 속민(屬民)으로 유래조공(由來朝貢)하다. 따라서 왜(倭)가 신묘년(辛卯年)에 백잔과 신라를 격파하고 신민(臣民)으로 삼았다’고 되어 있어, 왜가 바다를 건너 조선반도에 간 것을 전하고 있다”는 내용이다.
일본서적 출판『신판고교일본사』22쪽에는 “고구려·백제·신라의 삼국은 세력다툼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반도 남부의 가야 지역만은 소국이 분립상태를 계속했다. 야마토[大和] 정권은 이 지역을 침입하여 백제와 결속하여 신라를 누르고 고구려와 전쟁을 벌였다. 이 사실은 광개토왕비(廣開土王碑)에 기록되어 있다.”는 내용이다. 주석란에도 ‘고구려와 왜가 전쟁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면서 이중으로 강조했다.
23쪽에는 ‘대왕(大王)과 호족(豪族)’이라는 단원을 설정하여 “왜(倭)의 대왕이 중국 남조(南朝)의 송나라에 잇달아 사신을 보내 조선남부에 대한 군사·행정권을 승인받았다”는 내용으로 연결해 놓았다. 왜국은 대왕(大王)인데 고구려는 왕(王)이라면서 우열을 비교하기에 무척 신경을 쓴 모양이다.
이렇게 연결해 놓음으로써 “광개토왕비문(廣開土王碑文)처럼 대왕의 시대에 왜군이 고구려를 상대로 전쟁을 벌였다”라고 과시하려는 것이다. ‘왜왕(倭王)의 대왕설(大王說)’이나 “신라를 누르고 고구려와 전쟁했다”는 구절이 얼마나 허황하고 어이없는 망발이며 역사날조인가는 다시 상술하겠다.
짓교 출판『일본사B』22쪽에도 ‘야마토 정권과 조선·중국’이라는 단원에서 “왜(倭)가 조선을 침입하여 백제와 다른 나라를 지배한 것으로 풀이하는 부분이 있다. 왜를 야마토로 보는 의견이 유력하다”는 설명이다. 이 설명 중 ‘왜를 야마토로 보는 의견이 유력하다’는 대목은 확정설이 아니며 측정설이다. 국수주의 학자들끼리 ‘유력설을 거듭 주장하면 진실이 된다’면서 협잡한 논지인 것 같다.
왜국은 백제의 후국(侯國)관계, 야마토 정권은 신라의 신국(臣國)관계였다고 이미 지적한 것처럼 왜국과 야마토는 전혀 다른 체제이다. 왜국과 야마토 정권을 한 줄기로 꾸미기 위한 왜곡이다. 이는「광개토호태왕 훈적비」를 증거물로 끌어들여 ‘왜가 고구려까지 진출했다’고 확신시키기 위한 교활한 유도논법이다.
⑵ 천자문(千字文)도 모르면서 인감(印鑑)을 위조
『일본서기(日本書紀)』《응신왕기(應神王紀)》28년조 기사에 “고구려왕(高句麗王)이 왜왕(倭王)에게 사신을 파견하여 상표(上表)하고 조공을 바치겠다고 했으며, 고구려왕은 그 상표문에 일본국(日本國)이라 호칭했다”는 내용이 있다. ‘일본국’이라는 국호를 처음으로 쓴 것은 670년으로 왜국의 천지왕(天智王) 재위 9년에 해당한다. 구당서(舊唐書)에 ‘일본은 왜국의 별칭이다’는 문헌이 있으며『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670년 12월에 왜국이 일본이라는 국호로 바꾸었다”고 적혀 있는 것으로도 입증된다.
이 교과서는 373년간을 앞당겨 왜곡해 놓은 것이다. 일본의 건국 역사가 한국보다 오래되었다면서 우월감과 침략적 역량이 강했다는 것을 철근처럼 구축하기 위해 이 같은 거짓말 교육을 하고 있다. 학생들이 올바른 판단력을 가지게 하는 교육이 아니라 한국을 폄하하는 사상을 철저히 주입시키기 위해 거짓말 교육에 혈안이 되어 있는 일면이다.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 훈적비(勳積碑)」가 건립될 시기의 고구려는 중국 세력을 위협할 만큼 강대국이었다. 따라서 만일 선주민 왜인들이 조공·상표를 요구했다면 고구려군의 일격에 박살났을 것이며 비문에 대서특기(大書特記)되었을 것이다. 고구려의 역사를 보면 어느 외국에게도 조공하거나 상표를 올릴 만큼 무기력하지 않았다. 일본의 교과서에 나오는 조공이나 상표 따위의 내용은 후일 왜인들의 조작임이 분명하다.
『삼국사기』「신라본기(新羅本紀)」에는 “백제는 교활하여 왜인들과 손을 잡고 신라를 괴롭혔다”는 내용이 있다. 왜인이란 일본 열도에 군림해 있는 백제분국(百濟分國)의 세력으로 백제본국(百濟本國)의 군사 활동에 보조적인 역할을 하였다. 왜국은 당시 백제의 후국(侯國)이었기 때문이다. 이같은 연고로 백제가 고구려와 분쟁을 벌일 때에 백제의 군사들 속에 왜인들이 더러 끼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광개토호태왕 훈적비」에 백제를 제압한 내용에 이어 “백제와 신라는 오래 전부터 고구려에 예속된 백성으로 계속 조공을 바쳐왔는데, 왜국이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 침범했으므로 고구려의 군사가 바다를 건너 격파했다”라는 구절을 광개토호태왕의 업적의 하나로 기재한 것으로 보여진다. 백잔(百殘)은 고구려인들이 백제를 멸시하여 쓴 단어인 것이다. 백제와 신라를 속민(屬民)으로 삼았다고 과장된 문구를 비문 첫머리에 장식한 것은 그만큼 위세가 당당했음을 웅변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일본인들은 ‘왜이신묘년래도해파(倭以辛卯年來渡海波)’라는 구절을 “왜(倭)가 신묘년(辛卯年)에 바다를 건너가 고구려군을 격파했다”고 정반대로 해석한다. 고구려의 군대가 바다를 건너 왜군을 추격해 격파했다고 해석해야 할 문장을 왜국이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처럼 왜곡하여 해석한 것이다. 한문(漢文)의 문장을 구분할 줄도 모르는 소치이다. 이 문장은 ‘래(來)‘자와 ‘도(渡)’자를 떼어 앞 구절은 “왜가 신묘년에 왔으므로 고구려군이 바다를 건너가 격파했다”고 읽어야 한다.
『삼국사기』《박제상열전(朴提上列傳)》에는 “고구려 수군이 바다를 건너 왜군을 전멸시킨 곳은 신라 국경 밖의 해상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만일 왜군이 고구려까지 가서 고구려군을 격파했다고 가정한다면 어디로 가서 격파했다는 말인가? 중국으로, 아니면 바다 속으로 가서 격파했다는 말인가? 어느 성채를 공격했다면 그 근거가 한·일·중 삼국의 역사서 한 모퉁이라도 기록되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아마도 이 교과서를 집필한 학자는 희대의 위서(僞書)인『남연서(南淵書)』를 신봉하는 사람으로 한국침략사상 선무공작의 전위병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광개토호태왕 훈적비」연구에 있어서 1인자로 정평이 나 있는 고(故) 김석형(金錫亨) 전(前) 북한 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장은 일본인들의 비문 해석이 너무도 얼토당토 않고 치졸의 극치여서 “천자문도 모르면서 인감을 위조하는 짓”이라며 일갈했다.
⑶ 사기(詐欺)에 동원된 고승(高僧)
『남연서(南淵書)』라는 책은 일본 역사학계에서 고명한 학자의 이름을 도용한 가장 추악한 위서(僞書)로 이름이 높다. 미나미부치[南淵請安]가 640년경 압록강을 건너 집안(集安)으로 가서「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 훈적비문(勳積碑文)」을 필사했다는 책자이다.
미나미부치는 608년 수(隨)로 유학가서 640년 왜국으로 돌아간 고명한 학승이다. 그의 명성을 도용하여 한국침략용 위서를 꾸민 것이었다. 이 책자는 상·중·하 3권, 50장(章)을 문답식으로 엮은 역사서로서 4분의 1은 왜국의 군주에 대한 신앙제도와 황제 통치 성립에 관한 내용이다. 특히 34장은 ‘태고 이래로 왜국은 모든 동아시아 제국(諸國)을 예속했으며, 당연히 예속시켜야 한다’는 내용이 주요 골자이고, “호태왕비(好太王碑)를 직접 살펴보니 새긴 글씨에 이끼가 무성하여 판독이 어려웠으나 신해년(辛解年)에 왜국이 백제와 신라·고구려를 차례로 정복하여 신민(臣民)으로 삼았다는 구절이 있었다”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요즘 일본의 교과서들과 꼭 같은 내용이다.
그런데 1922년에 일본 정부는 “7세기 초 황제의 스승이었던 당시 뛰어난 석학인 미나미부치가 쓴『남연서』가 여기에 있다”면서 이 책을 일본의 사회지도층에게 배포했다.
미나미부치의 명성이 높아 그의 학설을 연구하던 학자들은『남연서』라는 금시초문의 책자가 느닷없이 나타났다고 하니 당연히 관심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어쩌다 구해 읽은 학자들은 “일본 국민을 속이는 전대미문의 고서위조(古書僞造)”라고들 수군거렸다. 반론을 제기하는 학자들은 관권의 탄압으로 입을 다물고 속앓이만 했다.
그러던 가운데 1933년 2월 11일 한 역사학자에 의해 날조사실이 천하에 폭로되었다. 당시 일본을 대표하는 역사학자인 구로이타 가쓰미[黑板勝美] 도쿄대학 교수가 폭로의 주인공. 도쿄 일일신문이 “『남연서』는 확실한 검증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신용할 수 없다”는 구로이타 교수의 주장을 대서특필로 보도하여 역사학계는 물론 온 일본 사회를 들끓게 했다. ‘곤도[權藤]씨 등이 저술했다는『남연서』, 학계에 일대 파문’, ‘그 남연서란 군민공치(軍民共治)를 고조시키기 위한 것’이라는 큼직한 제목이 붙여진 이 기사를 객관성을 위해 요약해서 인용하겠다.
"숨어있는 제도학자(制度學者) 곤도 세이고[權藤成鄕]와 다른 한명이 9년간에 걸쳐 꾸며, 다이쇼[大正] 11년 당시 섭정(攝政)이었던 히로히토[裕仁]에게 바쳤고 이듬해에 처음으로 세상에 내놓은『남연서』3권에 대해, 도쿄대학 역사학과 수업시간에 한 학생이 구로이타 박사에게 ‘영락왕(永樂王)의 비문을 일본에서 해석하는 대로 신용할 수 있느냐?’는 질문을 하니 구로이타 박사는 ‘신용할 수 없다’고 단언했다."
주목할 것은 히로히토 황제가 섭정 때『남연서』를 받아 이듬해에 세상에 내놓았다는 대목이다. 즉 히로히토 황제가 황태자일때 약 1년간이나 위서인『남연서』를 쥐고 있었다는 것은 역사를 날조하는 공작에 일본 황실이 직접 참여했다는 증거이다.
이 신문은 또 구로이타 박사와 인터뷰를 했는데, 여기서도 그는 “미나미부치가 지나(支那)에서 귀국할 때 고구려를 방문하여 압록강 상류의 집안에 들렸다고 하지만 당시의 교통로나 여러가지 사정을 고려할 때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또 미나미부치가 관문(寬文) 5년에 집안에 갔다고 하나, 미나미부치는 7세기 사람이므로 그의 생존연대와는 1천여년의 격차가 있다.『남연서』에 있는 영락왕의 비문은 현재까지 학계의 연구에 의하면 신용할 수 있다고 단언할 수 없다”고 거듭 갈파했다. 구로이타 박사는 왜국시대의 대외관계에 비추어, 왜국은 고구려에 자유롭게 내왕할만큼 친선관계가 아니었고, 기껏 황해와 남해를 둘러 수나라나 당나라에 갈 수 있었으므로, 미나미부치가 고구려의 집안까지 가기는 불가능한 시기였다는 역사적 배경까지 들었다.
한편,『남연서』를 위작한 곤도 세이고는 “『남연서』를 다시 쓰면서 귀족가문에 비장하여 전해 온 원본을 참고했다”고 변명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원본은 약 1천 2백여년이 지났는데도 좀도 쓸지 않았고 구김살조차 없는 새책이었다고 한다. 다라서 이『남연서』는 원본을 1차로 조작한 다음, 다시 2차로 날조한 역사서인 셈이다.
그런데도 곤도 세이고는 “미나미부치 자신이 직접 쓴 것인지, 혹은 그의 제자가 쓴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아무튼『남연서』는 일본 국가의 고래로부터의 정치의 근본이며, 우리나라의 역사를 가장 명확하게 한 책이다. 위서(僞書)라고 주장하려면 어째서 위서인지 그 증거를 내놓아라”면서 궁색한 변명에 급급했다.
「광개토호태왕 훈적비」는 4면의 비면에 정확히 1천8백2자가 새겨져 있다. 그러나『남연서』에는 “능비의 글자 수는 판독 불가능한 글자까지 총 1천7백59자가 새겨져 있다”고 기술해 놓았다. 역사학 전문가인 미나미부치가 천신만고 끝에 오로지「광개토호태왕 훈적비」를 연구하기 위해 중국 땅 집안까지 찾아가 비문을 한자씩 필사했다면서 글자수도 제대로 확인하지 않았다는 것은 언어도단(言語道斷)이다. 비문의 글자 크기는 12제곱센티미터이며 2~3센티미터 깊이의 음각이다. 위조한『남연서』에는 미나미부치가 660년에 비문을 보았다고 했는데 비를 건립한 2백여년 후의 일이다. 견고한 응회석질의 비면에 이끼가 무성하고 마멸된 글자가 많아 판독이 어려웠다고 기술한 내용은 능비의 실물을 보지도 않았다는 것을 말한다. 일본의 역사학자들은 “『남연서』위조 사건은 일본 역사상 가장 추한 일대 변사(變事)로 일고의 가치도 없다”고 하면서 고개를 젓는다.
그런데 오늘날의 일본 교육정책은 어떤 의도인지 1997년부터 사용하는 중·고교 역사 교과서에 “고대에 일본이 백제·신라·고구려를 정복하여 신민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호태왕비에도 있다”면서 일본 제국주의 정권의 침략적 음모로 날조된『남연서』 의 내용을 그대로 인용하여 진실인양 교육하고 있다.
▶ 출처; 최성규(崔性圭) 著『일본의 역사는 없다.』아시아문화사編(2000년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