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원은 이제 모든 일이 제대로 자리를 잡았다고 다시 한 번
자신에게 일깨웠다.
스타킹이 찢어져서 지원은 다시 여분의 스타킹을 가지고 화장실로 갔다.
화장실에서 스타킹을 갈아신는데 이상하게 명민과 올 나간 스타킹을 매개로
마주쳤던 기억이 스쳐갔다.
'정말 최악의 기억이야...'
사실 지금 생각해도 자랑스러운 일은 결코 아니다.
'제발 그 인간과 연관된 모든 기억을 털어버리자...
모두 최악일 뿐이니까..'
지원은 짜증스럽게 스타킹을 갈아신고 손을 씻었다.
거울에 비친 얼굴을 보는데 화난 여자가 거울안에 있었다.
'왜 기뻐하지 않는 거지?
왜 신나게 웃지 않는 걸까? '
지원은 스스로 의아했다.
왜 개운하기는커녕 가슴이 답답한 걸까?
지원은 일부러 붉은 색 립스틱을 꺼내 발랐다.
가끔은 기분 전환이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울해보이지 않는다.
지원은 자신의 자리로 돌아와서 평소보다 몇배는 열심히
일을 하고 있었다.
명민은 그 이후에 거의 사무실에서 나오지 않고 있었다.
'이런...신경쓰고 있었던 걸까? 계속...'
갑자기 사는 게 훨씬 더 재미없어졌다.
명민 때문이 아니라 이상해진 자신 때문이다.
'머리 속에서 아니 가슴 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자신도 모르게 말이다...'
명민과는 퇴근 무렵 얼굴을 다시 볼 수 있었다.
마치 언제 알았었냐는 듯 명민은 완벽하게 지원을
모르는 척하고 있었다.
아니 마치 진짜 모르는 게 아닌가하는 착각이 들기도 했다.
'왜 이렇게 신경이 쓰이는 거지?
저 인간이 날 무시하는 게 왜 엄청 에너지를 소비하게
만드는 걸까?'
지원은 답답한 마음으로 퇴근을 했다.
옆에서 미숙이 조잘거리는데도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우습게도 혹시 그의 차가 지나가지 않을까하고 찾고 있었던
것이다.
'어이가 없어. 이게 바로 나라니...믿을수가 없어.'
지원은 정말 당황스러웠다.
너무나 낯선 모습이다.
'이건 나일 수가 없어.이건 내가 아니야...절대로.'
지원은 순간 걸음을 멈추었다.
미숙이 의아한듯 지원을 쳐다봤다.
"언니 왜 그래?"
"아니..그냥 갑자기 어지러워서.."
"빈혈이야?"
"아니..그냥 잠시 그랬어."
"요즘 언니 이상해..뭔가 불안해보여.
무슨 일 있었어?"
"그런 거 없어. 그냥 봄 타나봐."
"하긴 처녀들 바람난다는 계절이구나..하지만 바로 곧 여름이
되겠지?"
"그렇겠지?"
지원은 그렇게 대답했다.
'여름이 오면 괜찮아지려나?'
지원은 미숙과 헤어져 자신의 버스에 올라탔다.
지원은 정말 피곤했다.
아무래도 집에 들어가서 뭘 해먹기는 정말 싫었다.
이상하게 그때 <만리성>이 눈에 들어왔다.
명민과 자장면을 먹었던 곳이다.
지원은 우습게도 자장면 집에 들어섰다.
'왜 하필이면 이곳에 왔을까?'
지원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자장면을 시켰다.
그때 중국집에서는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고 마음아파하는 사람의 마음을 그린 노래였다.
어이없게도 잘 스며들지 못했었는데 자신도 모르게
노랫말을 가슴 속으로 따라가고 있었다.
'왜 이렇게 가슴이 아픈 거지?
이런 거 다 남의 일처럼 생각했었는데..
노랫말을 만들려고 그렇게 노력할 때 왜 노랫말에 스며들지
못하냐는 비난을 얼마나 많이 들었던가?
억지로 만들어내려고 하니까..힘든 거라고..사람들은 그렇게 말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가슴이 아프다.
왜 이런 거지?'
지원은 넋이 빠진듯 그렇게 앉아 음악을 들었다.
우습게도 눈물이 났다.
눈물 같은 건 거의 흘린 적이 없었다.
노랫말 듣고는 더더욱 그랬었다.
그런데 왜 지금은 눈물이 나는 걸까?
지원은 어이가 없었다.
'이유없이 가슴이 아파....'
사람들이 말하는 게 이거였을까?
가슴으로 음미하라고..억지로 만들어내지 말고...
자장면을 거의 남긴채 지원은 식당을 나왔다.
주인이 이상하게 지원을 쳐다보고 있었다.
터벅터벅 집으로 오는데 지원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조심스럽게 눈을 들어 현관에 눈길을 줬다.
하지만 곧 실망스런 눈길로 변했다.
'뭘 기대한 거지?'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지원은 현관에 서 있을 명민을 고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평소처럼 능청스럽게 그가 다시 내기를 시작하자고
한바탕 시비 걸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지친 몸으로 문을 열고 들어서는데 집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갑자기 참을 수 없는 오열이 나왔다.
'이상하다.
마치 평생을 참아오던 어떤 것이 갑자기 몸밖으로 튀어나오는
것 같지 않은가?
이게 뭐지? '
한참을 울고 났더니 이상하게 그제서야 배가 고팠다.
그리고 묘하게도 뭔가 가슴 속에서 후련해진 감도 있었다.
'뭐였을까? 방금 전에 그것은?'
지원은 해답을 찾아낼 수가 없었다.
그리고는 김치와 있는 반찬을 넣고 고추장을 넣어 밥을 비볐다.
'그렇게 귀찮을 거다 싶었는데 결국 밥은 차려먹게 되는군...
아까 그 노래가 뭐였더라? 왁스의 노래였는데...'
지원은 다시 아까 들었던 노래를 생각해 냈다.
한 번 다시 제대로 들어봐야겠다...
하지만 너무 지쳐 컴퓨터를 켤 힘도 없어 지원은 음악을 찾아듣는
일은 포기했다.
그날 울어서 지쳤던 것일까 지원은 의외로 쉽게 잠이 들었다.
다음날 눈을 떴을 때 지원은 어이가 없었다.
시간이 벌써 8시 30분이 넘어 있었다.
'이런 일은 여태껏 없었는데?'
한바탕 한 소릴 들을 걱정을 하니 눈 앞이 핑 돈다.
예전 같으면 바로 윗상사가 있어 그럴 필요가 없음에도 실장에게 한마디 들었을 것이다.
바로 윗상관한테 한마디 들어도 될 일인데 꼭 명민이
한바탕 지원을 톡톡 건드리곤 했던 것이다.
하지만 아무래도 이젠 철저히 무시하기로 작정한 것 같으니
모른척 넘어갈지도 모른다.
지원은 마음착한 상사에게 걸리길 바라고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설 때 지원은 잔뜩 긴장해 있었다.
안을 살피며 들어서는데 미숙이 안타깝게 쳐다보고 있다.
지원은 바로 윗상사가 자리를 비운 걸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미숙에게 웃어보였다.
하지만 이상하게 미숙의 표정은 밝지가 않았다.
이상하다 싶어 뒤를 돌아보니 다름아닌 명민이 서 있었다.
그러면서 일부러 오버해서 시계를 보는 것이다.
'잘못 걸렸다'
하지만 왠지 그가 무시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조금은 기대를
가져보았다.
"이지원 씨 내 사무실로 와요..."
명민은 그렇게 말하고 자신의 사무실로 들어가버렸다.
지원은 잘못 기대했구나 속으로 한숨을 내쉬면서 실장실로 들어섰다.
명민은 자신의 의자에 앉아있었다.
"죄송합니다..."
"왜 늦었어요? 무슨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엄청 사무적이다.
"죄송해요. 늦잠을 잤어요."
"늦잠...날 상사로 생각하는 건 맞습니까?"
"네?"
"다른 핑계라도 대야지 어떻게 그렇게 쉽게 늦잠을 자서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건 날 엄청 무시하는 투로 들리는데요."
"전 그냥 사실대로 말한 것 뿐입니다. 그런 식으로 받아들이실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지원은 기분이 엄청 상했다.
'정말 희한하게도 걸고 넘어지는군.'
"지금 얼굴을 보니까 미안한단 생각은 전혀 없는 것 같은데요?
네가 뭔데 지금 나한테 이런 식으로 떠드냐..뭐 그런 표정인데요?"
"뭐라고요?"
지원은 참자했는데 순간 발끈했다.
'역시 3분이 한계야...'
"뭐라고 할 말 있나본데 해보지 그래요?
다 들어줄 테니까..."
"지금 뭐하자는 거예요? 실장님이 그렇게 말하면 내가 말
못할 줄 알았나요?"
"결코 말 못할 거라고 생각 안했는데요.
그건 이지희 씨가 완벽하게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겁니다.
사람이 하루만에 달라질리는 없으니까... 어제 밤늦게까지
뭘 했길래 지금까지 늦잠을 잔 겁니까?"
"40분 늦었어요..정말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하지만 40분이 어제 밤과 왜 연결이 되야하는지 모르겠네요."
"당신이란 여자가 원래 그렇잖아.."
명민은 또 무시하듯 말을 놓았다.
빈정거리고 있다는 것을 여실히 알 수가 있었다.
"내가 뭘 원래 그렇다는 거예요?"
"회사에서 한바탕 하고 싶어?"
"정말 당신같은 최악의 인간은 처음이야."
"날 최악으로 만드는 건 바로 당신이야.
난 사람에 맞춰서 행동하는 것 뿐이니까."
지원은 이를 갈았다.
그 모습을 보며 명민이 약간은 비열해보이게 웃었다.
속이 터질 것 같다.
'어떻게 해야할까?
생각같아선 달려들어서 한바탕 할퀴어버렸으면 좋겠다!'
"그만 나가봐..당신 얼굴 보고 있음 하루가 엉망이 될 것 같아서
말이야..."
지원은 잠시 서서 명민을 노려보다가 실장실을 나왔다.
미숙이 얼른 지원에게 다가왔다.
"언니 왜 그래? 엄청 혼났어? 얼굴이 빨개..
실장님이 뭐라고 했는데? "
"아니..괜찮아...저 인간 저러는 거 하루이틀 아니잖아.."
하는데 그 모습을 재미있게 보고 있는 민희와 얼굴이 마주쳤다.
고소하단 표정이 역력하다.
'아, 정말이지 어디 가서 소리라도 질렀으면 좋겠다..'
지원은 이러다 자신이 폭발해버리는 건 아닐까하는 생각마저들었다.
'아, 저 인간을 어떻게 해버렸으면 좋겠어..."
어제 들었던 그 감상적인 기분은 어느새 감쪽같이 사라졌다.
그때 명민이 사무실을 나왔다.
명민은 서있는 지원을 배려하지 않고 밀치듯 옆을 지나갔다.
지원은 이러다간 자신이 그대로 홧병으로 어떻게 되는 게 아닐까
하는 두려움마저 느꼈다.
'정말이지 저 인간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지원은 명민의 뒷모습을 노려보았다.
*******잼있게 읽어주세요...오늘은 그나마 진도가 잘 나가네요.
모두 건강조심하시고 즐겁게 시간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