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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당(友堂) 이회영(李會榮), 애국의 길을 묻다!

개마기사단 |2009.04.13 20:55
조회 1,741 |추천 1

 

 

“1백년전 나는 한 남자의 아내가 되었습니다. 시댁은 당대 최고의 명문가였습니다. 시아버지는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지냈고 종숙 어른은 영의정(領議政)이었습니다. 나라가 망하자 우리는 모든 것을 버리고 만주로 떠났습니다. 남편과 그 형제들은 그곳에서 독립을 위해 싸웠습니다. 그러나 해방 후 살아 돌아온 사람은 시동생 한분뿐이었습니다. 임시정부의 국무위원이자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이었던 이시영(李始榮). 그가 나의 시동생입니다. 형제들의 독립투쟁을 주도한 사람은 남편 이회영(李會榮)이었습니다. 이 기록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이회영과 그 가족의 독립을 향한 여정입니다.”

 

1910년 12월 30일, 얼어붙은 압록강을 걸어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조국을 등지고 망명하는 길, 그러나 여느 망명객들과는 그 규모가 달랐다. 국경을 넘어가는 사람들은 모두 50여명, 그 가운데에는 어린 아이들과 십여대의 마차를 끄는 열세명의 하인들도 있었다. 그들 일행은 서울에서 출발한 한 양반 가문이었다.

 

목적지까지는 수백 킬로미터를 더 가야 했다. 영하 30도의 추위를 견디며 그들은 길을 재촉했다.

 

“지독한 추위를 무릅쓰고 돌 전 유아를 안고 종일 좁은 차 속에서 고생하던 일을 어찌 다 적으리요? 종일 백여리를 가도 큰 여관을 못 만나면 백여필의 말을 둘 수 없으니 밤을 새며 가는 때도 있었다.”

 

한 겨울에 수십대의 마차를 끌고 국경을 넘은 조선인들, 그들은 과연 누구일까? 그들은 왜 만주로 가는 것일까?

 

백년전 압록강을 넘은 조선인 일가족의 행적을 담은 문서가 중국 현지에서 발견됐다. 중국 랴오닝성의 한 역사 연구자가 그 기록을 소장하고 있다.

 

그것은 동북삼성(東北三省) 총독에게 보낸 한 장의 청원서, 한국인들은 총독에게 현지에서 땅을 구입할 수 있게 허락해달라고 요청했다. 청원서를 작성한 한국인 대표는 이회영이란 사람이다.

 

차오원치 중국 푸순시 전 사회과학원 연구소장 “중화민국이 성립한 뒤 중국인들은 한국인이 중국의 토지를 사지 못하도록 했다. 왜냐하면 그들이 중국의 토지를 사거나 하면 이곳을 침략할까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땅을 구입할 길이 막히자 이회영은 당시 중국 최고 권력자인 위안스카이[袁世凱]를 찾아가 담판을 지었다.  

 

차오 소장 “위안스카이는 당시 중화민국의 대총통으로 아무나 쉽게 만날 수 없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회영은 예전에 맺었던 인연으로 위안스카이를 쉽게 만날 수 있었다.”

 

위안스카이는 동북삼성 총독에게 각별한 협조를 당부했다. 총독은 입적허가서를 내주고 땅 구입을 허락했다. 중국 최고 권력자를 대면할 수 있었던 조선인 이회영, 그는 어떤 사람일까?

 

이회영의 집안은 경주(慶州) 이씨(李氏) 상서공파(尙書公派)로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이래 열명의 정승을 배출한 명문가다.

 

이 집안에는 상신록(上臣錄)이란 문집이 있는데 이것은 재상을 지낸 선조들의 행장(行狀)을 모은 책이다. 상신록은 한 가문에서 재상이 열명 이상 나와야 만들 수 있다.

 

이회영의 막내아들 이규동 “높은 관직을 지낸 분들은 돌아가셔도 나라에서 성은을 내리잖은가? 그런 분들을 모은 것이다. 보통 사대부(士大夫)는 많이 있지만 이런 상신록을 만드는 경우는 드물다. 아마 없을 게다.”

 

이회영의 아버지 이유승(李裕承)은 고종(高宗) 재위초기 이조판서를 지냈고 구촌 종숙 이유원(李裕元)은 영의정이었다. 이유승은 모두 6형제를 두었는데 그 중 넷째 아들이 이회영이다. 동생 이시영은 평안남도 관찰사, 한성재판소장을 역임했다.

 

이렇듯 당대 최고위층이었던 이회영은 왜 전 가족을 이끌고 만주로 떠난 것일까?

 

그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결정적 계기는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 체결이었다. 이회영은 상동교회를 거점으로 동지들을 규합하고 국권회복운동(國權恢復運動)에 나섰다. 그는 이곳에 청년 학교를 열고 애국계몽운동(愛國啓蒙運動)을 펼치는 한편, 안창호(安昌浩)·양기탁(梁起鐸)·유동열(柳東說) 등을 도와 비밀결사조직 신민회(新民會)를 창건했다.

 

서중석 성균관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이회영은 전덕기(全德基)와 함께 상동학원을 운영했는데, 이것은 신민회의 산실이라고 볼 수 있다. 겉으로는 계몽교육(啓蒙敎育)을 표방했지만 실제로는 독립운동(獨立運動)을 목표로 하는 그런 활동을 맹렬히 해 나갔다.”

 

상동교회의 전덕기 감리교 목사와 함께 이회영은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리는 거사(擧事)를 계획하고 은밀하게 진행하였다. 그것이 바로 헤이그 밀사사건(密使事件)이다. 고종이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은밀히 특사(이상설(李相卨)·이준(李儁)·이위종(李瑋鍾))를 파견했다. 일본의 만행을 알리도록 한 일이었다.

 

일제(日帝)의 삼엄한 감시망을 뚫고 고종과 접촉하기 위해 이회영은 명문세가의 인맥을 동원했다. 고종의 조카이자 시종이었던 조남익을 통해 황제에게 특사파견을 제안했다. 마침내 이회영은 을사늑약이 불법이며 무효임을 폭로하라는 고종의 재가를 얻어냈다.

 

특사들은 황제의 위임을 받고 헤이그로 떠났다.

 

신주백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HK 연구교수 “1907년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대해서 조선이 어떻게 대응해야 되는가를 고종과 조정에 있는 여러 고관들은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조선의 입장에서 일본이 러·일전쟁 이후에 조선에 통감부를 설치하고 그들의 지배하에 들어간 이 상황에서 일본의 불법성을 세계에 호소하는 가장 중요한 기회로써 활용할 필요가 있다는 부분을 정세판단 속에서 제일 먼저 알아챈 사람, 추진하고 제안했던 사람이 이회영이라고 보면 된다.”

 

명동성당의 주임신부였던 뮈텔 주교의 일기에는 사건 직후 긴박했던 정황이 생생하게 기록돼 있다.

 

‘고종이 자신들 몰래 특사를 파견한 사실을 뒤늦게 파악한 총독부는 단단히 화가 났다.’

 

헤이그의 거사는 일본의 방해로 실패하고 특사들은 현지에서 죽거나 망명했다. 이 사건으로 고종은 일제에 의해 강제 폐위됐고, 다음날 대한제국의 군대는 해산됐다. 군권마저 박탈되자 새로운 구국의 전력이 필요했다. 그것은 바로 해외에 독립군 기지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이덕일 한가람 역사문화 연구소장 “나라의 독립은 무장력을 통한 전쟁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해외에 독립운동 근거지를 만드는 가장 큰 핵심은 결국에는 무관학교(武官學校)가 되는 거다. 이 무관학교를 꾸준히 양성해서 결정적인 시기에 대규모의 독립군을 조직해서 국내 진공작전을 펼쳐서 일본을 구축(驅逐)하려고 했던 것이 당시 해외에 독립운동 근거지를 만들려고 했던 핵심 이유다.”

 

해외에서 독립군을 양성해 빼앗긴 국권을 되찾겠다는 전략, 그것이 신민회가 생각한 독립의 방안이었다. 이회영은 즉각 기지 물색을 위해 만주로 떠났다. 그 사이에 조국에서는 경술병탄늑약(庚戌倂呑勒約)이 이뤄졌다. 국권의 완전한 상실,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만주에서 돌아온 이회영은 형제들을 불러 모았다. 그 자리에서 충격적인 제안을 한다.

 

“슬픈 일이외다. 이제 병합의 괴변을 당하여 나라가 왜적(倭敵)의 땅에 속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형제가 명문가의 자손으로서 대의를 위해 죽을지언정 왜적 치하에서 생명을 구도한다면 어찌 짐승과 다르리요?”

 

온 가족이 해외로 망명해 독립운동에 헌신하자는 이회영의 제안에 형제들은 흔쾌히 동의했다.

 

서 교수 “이회영의 둘째 형 이석영은 일제가 주는 재산은 쌀 한톨도 받을 수 없고 망국의 노예는 이 땅에서는 살 수가 없는 것이다는 백이숙제(伯夷叔齊)와 같은 생각을 강하게 가졌던 분이고 다른 형제들도 우리가 그동안 그렇게 국가로부터 많은 녹을 받아먹은 명문세족이면 거기에 마땅한 행동을 보이는 것이 맞다는 이회영의 주장에 모두 동조하게 된 것이다.”

 

박한용 민족문제연구소장 “조정에서 높은 벼슬을 했던 사람들이다. 그런데도 마땅히 나라의 위기에 대해서는 공직자였던 경험이 있기 때문에 백성이기도 하지만 공직자로서의 책임이 있다고 본 것이다. 또 사회 지도층이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이 문제에 대해 먼저 인식하고 모범적으로 나가야 된다, 누구보다 앞서 나가야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위대한 결단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 지도층에게 이회영 형제와 같은 결단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일제는 조선의 고위 관료들을 포섭하기 위해 회유책을 제시했다. 병합과 동시에 ‘조선귀족령(朝鮮貴族令·일본 황실령 제14호)’을 선포하여 양반 관리들에게 작위를 수여하고 총독부의 자문기관인 중추원에 참여시킨다. 일제가 작위를 내린 관료는 76명, 이들 중 거부한 사람은 예닐곱명에 불과했다.

 

박 소장 “조선총독부는 한국병합에 공로가 있다고 해서 조선의 고위 관료들에게 은사금을 발행한다. 쉽게 얘기해서 돈을 주는 거다. 예를 들어서 이완용(李完用) 같은 경우는 은사금을 받았는데 원금이 아니라 1년에 5% 이자를 받았다. 이 5% 이자가 지금으로 따지면 아파트 한채 값이다.”

 

친일 관료들은 부부동반으로 일본 관광을 다녀오기도 했다. 그들은 친일의 대가로 재산과 기득권을 보호받았다. 이회영 일가는 이 모든 기득권을 버리고 망명의 길을 선택했다. 재산은 물론이고 목숨까지도 내놓아야 하는 고난의 길이었다.

 

“8월초에 형제분이 모두 만주로 갈 준비를 하였다. 비밀리에 전답과 가옥을 방매하는데 여러 집이 일시에 파느라 얼마나 극난하리요?”

 

만주로 가기 전 이회영의 형제들은 급히 재산을 처분해야 했다. 당시 이들의 재산은 얼마나 됐을까?

 

임병규 전 남양주시문화원 향토관장 “이쪽으로는 전부 다 집터고, 평수로는 잘 모르겠지만 상당히 크고 넓다. 그 다음에 도로 바깥쪽으로는 전부 다 그 분(이석영) 전장이었다. 조선에서는 가장 부자였다, 이렇게 평가가 되고 있다.”

 

재산이 가장 많은 사람은 이회영의 둘째 형인 이석영(李石榮)이었다. 그는 구촌 종숙인 이유원에게 양자로 갔는데, 이유원은 양주에 99칸짜리 별장과 개인 소유의 절까지 갖고 있던 대부호였다. 그의 엄청난 재산은 모두 이석영이 물려받았다.

 

이창수 남양주시문화원장 “지금 현재 우리의 기록으로 나와 있는게 쌀 6천석을 지을 수 있는 땅이라면 여의도의 약 1.5배 정도 되는 땅이다. 여기는 한 마지기를 2백평으로 치면 약 120만평(360만 제곱미터) 정도 된다.”

 

이들이 만주로 가져간 돈은 현재 가치로 최소 6백억원대, 그나마도 몰래 처분하느라 헐값에 넘겨받은 것이었다.

 

이회영은 서울 명동 한복판에 있던 집은 미처 팔지도 못하고 서둘러 간 것으로 추정된다. 등기부에 소유주가 조선총독부인 것으로 보아 이회영이 떠난 뒤 총독부가 접수한 것으로 짐작된다.

 

박 소장 “한 사회에서 존경받는 만큼 자기 책임을 지고 모든 것을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 내놓을 수 있는 그러한 전통들이 이 시기에 다시금 본격화되었다, 친일파와 정반대의 모습으로 한국 사회에 등장했다고 볼 수 있다.” 

 

만주로 간 이회영 형제가 정착한 곳은 어디일까? 그들은 이곳에서 무엇을 했을까?

 

이회영 형제가 제일 먼저 도착한 곳은 중국 랴오닝성 리우허현, 그곳에서도 가장 구석진 마을인 추씨 집성촌에서 짐을 풀었다. 함께 간 한국인들은 마을 앞 백오산에 모여 독립운동을 결의하는 민중대회를 열었다. 아직도 이곳에는 그 시절 흔적이 남아 있다. 눈 덮인 밭에서 당시의 멧돌을 찾았다.

 

조선족 주민 권중보 “이씨네 할아버지들이 쓰던 멧돌이다. 저것은 그 당시 물을 퍼낼 때 사용하던 우물인데 지금은 다 메워져가지고.....”

 

우물을 파고 마을을 형성했던 조선의 망명가들, 그들은 이곳을 거점으로 본격적인 독립군 기지 건설에 착수했다. 우선 안정적으로 식량과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이회영과 한국인들은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했다. 함께 망명한 이상룡(李相龍)의 문집에 따르면 경학사는 말 그대로 밭 갈고 공부하는 단체, 농업과 교육을 목적으로 설립한 주민자치기구다.

 

경학사에는 부설학교로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도 설치됐는데, 이것이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의 전신이다.

 

신 교수 “남의 나라 땅에서 돈도 없고 땅도 없고 사람도 없는데 식민지가 된 직후에 가장 먼저 할 수 있는 일은 독립운동의 기초를 닦는 것이었다. 그랬을 때 당시 이회영은 이미 1910년 이전부터 우선 필요한 것은 교육이고 산업의 진흥이다, 교육은 독립군 양성에 가장 필요하다는 이런 부분을 주변의 동료들과 더불어 미리 판단하고 준비했다는 측면이 있는 것이다.”

 

1년 후 이회영은 좀 더 안전한 기지를 찾아 나섰다. 추씨 마을에서 4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퉁화현 하니허, 작은 강을 끼고 있는 깊은 산골이었다. 언덕을 오르면 조선인들이 살았던 마을이 있다고 했다. 이 마을에는 아직도 조선인들이 살던 집들이 그대로 남아 있다. 이회영의 형제들도 이 마을에서 집을 짓고 살았다고 한다.

 

조선족 주민 권중보 “이곳에는 조선족이 많았다. 이 논판 다 우리 조선족이 개척한 것이다. 옛날에는 다 여기 수목이 많고 논판이 많았다. 이거 다 우리 조선족이 개척한 것이다.”

 

마을이 있는 언덕 아래쪽은 뜻밖에도 넓은 분지가 자리잡고 있었다. 밖에서는 보이지 않는 천혜의 요새, 이곳에 신흥무관학교가 있었다.

 

이재성 조선족 재야사학자 “이쪽이 깊은 산골이고 그때는 나무가 많았고 벌판이고 교통도 좋지 않았으니까 일본인들한테 발견되기가 쉽지 않은 곳이다. 그러니까 이쪽에 와서 개간하고 저쪽에 훈련장을 만들고..... 이것이 하니허 강입니다.”

 

앞으로는 강이 흐르고, 뒤로는 병풍처럼 산이 둘러싼 넓은 분지. 1백년전 이 땅에 세워진 신흥무관학교는 어떤 형태였을까? 그 규모는 어느 정도였을까?

 

신흥무관학교 최연소 졸업생이었던 소설 ‘아리랑’의 주인공 김산(金山)이 묘사한 것을 보면 당시 학교의 모습을 대략이나마 추정할 수 있다. 신흥무관학교는 18개의 교실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학교 건물들은 눈에 띄지 않게 산 허리를 따라 나란히 줄지어져 있었다고 한다. 산 아래 넓은 들은 생도들이 훈련하는 연병장으로 사용했다.

 

그렇다면 당시 생도들은 무엇을 배웠을까? 일본 경찰대가 국경 일대의 조선인들을 정찰한 보고서는 신흥무관학교에 대해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일제가 입수한 정보에는 학교의 소재지와 교사 명단, 학생 수와 입학 자격, 그리고 교과목까지 상세히 들어 있었다.

 

서 교수 “신흥무관학교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뉘어서 생각할 수 있다. 하나는 군사교육이고, 또 하나는 일반 중학교 교육이다. 일반 중학교 교육은 그 당시 국내에서 진행됐던 교육과 비슷하지만 애국정신이라든가 민족정신을 고취시켜야 되니까 역사라든가 지리라든가 우리 언어 이런 걸 가르치는데 훨씬 더 중점을 두었다고 볼 수 있다.”

 

신흥무관학교 교재는 우리 말과 역사 등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대목이 많아 대부분 일제에 의해 금서목록에 올라 있었다. 생도들은 실전에 대비해 지리를 익히는 수업도 병행했다. 이 학교 생도대장이었던 원병상은 학비와 숙식비가 모두 무료였고 그 비용은 이회영 일가가 부담했다고 회고했다.

 

신 교수 “당시에 급하게 처분한 재산을 당시 소 가격으로 환산해보니까 1만 3천마리 정도가 되는데 사실은 신흥학교 1911년에서 19년까지 졸업생이 500명~800명이다. 20대의 젊은 청장년들을 먹여 살리는데다가 교관, 그들의 가족까지 먹여 살렸다고 한다면 그 재산이 상당한 것이다.”

 

이회영의 며느리 정문경 “한국에서 네번째로 재산이 많은 대부호였는데 그 돈을 다 갖다가 신흥무관학교를 세운다는 건 그 학생들을 다 무료로 가르치니 그 돈이 어마어마하게 들었을 것 아니에요?”

 

이회영 일가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학교는 비교적 안정되게 운영됐다. 신흥무관학교는 일제에 의해 폐교될때까지 약 10년간 3500여명의 생도들을 배출했고, 그들은 각종 항일독립전쟁(抗日獨立戰爭)에서 혁혁한 전공(戰功)을 세웠다.

 

독립운동사(獨立運動史)에서 길이 빛나는 봉오동전투(鳳梧洞戰鬪)와 청산리대첩(靑山里大捷), 의열단(義烈團)의 의열투쟁(義烈鬪爭), 해방 직전 광복군(光復軍) 활동에 이르기까지 신흥무관학교 출신의 독립투사들은 항일투쟁(抗日鬪爭)의 핵심적인 인력으로 활약, 그야말로 한국 독립운동의 뿌리와 같은 곳이었다.

 

서 교수 “수많은 독립운동 단체, 예컨대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라든가 정의부(正義府)라든가 참의부(參議府)라든가 이런 데서도 신흥무관학교 출신 인사들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을 볼 수가 있다. 그러니까 만주 혹은 중국 관내에서는 한국의 독립운동에 대해서 신흥무관학교 출신 인사들이 참여하지 않은 곳이 없다고 얘기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이회영이 세운 학교는 신흥무관학교뿐만이 아니었다. 중국 랴오닝성 환런현에 있는 이 비석은 노학당(老學黨) 기념비로 이 학교 설립자 명단에도 이회영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만주로 망명한 조선인 후손들에게 독립의 정신을 심어주기 위해 학교를 설립했던 이회영, 그가 세운 학교에 재직한 교사들은 독립운동의 최전선에서 활동했다. 이회영이 남만주 일대에 세운 학교만 해도 20여곳, 그는 왜 이렇게 많은 학교를 세운 걸까?

 

배재수 조선족 재야사학자 “반드시 무장투쟁을 해야 한다. 그래서 신흥무관학교를 세우고 신흥무관학교의 학생은 어디서 오겠는가? 그래서 이런 학교들을 세우고 필요한 학생들이 신흥무관학교로 공급될 수가 있다 이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신흥무관학교의 학생을 배양하는데 후원을 위해서 이런 학교들을 세운 것이다.”

 

중국 지린성 메이허커우시에 있는 혁명열사관은 이 일대에서 항일투쟁을 펼쳤던 열사들을 기리는 곳이다. 항일투쟁에 진력한 중국인들의 사진과 업적이 전시된 가운데 조선인 열사들의 이름도 찾을 수 있다.

 

중국 정부는 이회영의 항일투쟁 공로를 인정해 혁명열사증을 수여했다. 조선인으로서는 드문 일이다.

 

배재수 “이곳의 중국인들 가운데 항일의 역사를 공부한 사람들은 (이회영의 이름을) 다 똑똑히 알고 그 외는 서책을 통해서 일반적으로 다 알고 있다.”

 

랴오닝성의 대표적인 항일투사 노광적은 이회영을 교양이 높은 한국의 지도자라고 평가했다. 이회영은 현지 중국인들에게도 존경받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만주로 망명한 지 3년만에 이회영은 비밀리에 서울로 돌아왔다. 가족을 만주에 두고 홀로 잠입한 그가 서울에서 한 일은 무엇이었을까?

 

이 시기에 그는 일본 경찰에 체포돼 구금된 적이 있었다. 1915년 여름에 일어난 일이었다. 만주의 아내는 편지로 이 사실을 전해들었다.

 

“둘째 댁 영감께서 오늘 봉천에서 온 편지를 보니 남편이 8월 20일경 봉변을 당했다 하여 그 시름으로 자리에 누우셔서 비감해하시니 뵙기 절박하여 집안이 난리였다.”

 

그 시기에 일제는 조선보안법 위반사건으로 골치를 앓고 있었다. 이상설이 국내로 성낙형이란 사람을 보내어 고종을 해외로 탈출시키려다 발각된 사건이었다. 이상설은 8년전 헤이그에 특사로 파견됐다가 블라디보스토크에 망명해 있었다.  

 

이상설이 바로 고종의 망명을 위해 접촉한 사람이 이회영이었다. 이회영은 경찰관들에게 이상설과의 관계를 집중 추궁당했지만 3주만에 석방됐다.

 

이덕일 박사 “우당 선생은 워낙 보안에 철저한 인물이라 체포되기 전날에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상설이 보낸 사람이 왔는데 사람이 오면 절대 자신의 집에서 재우지 않고 기록에는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날이라 할지라도 반드시 다른 데서 자게 했다고 할 정도로 보안에 철저했기 때문에 일제는 우당 선생이 직접 연관되어 있다는 혐의점은 찾지 못했다.”

 

이상설과 이회영은 왜 고종을 망명시키려 했을까? 그들은 어떤 효과를 노린 것일까?

 

서중석 교수 “고종은 40년 동안 한국을 통치한 분이고 절대적인 군주였다. 그 당시 한국인들은 모두 고종(高宗)의 신민(臣民)이었다. 그래서 나라를 뺏겼을때도 고종에 대한 충성심 같은 것은 여전히 남아있을 수가 있었다. 그리고 고종은 나라를 빼앗긴 억울한 군주로서의 상징적인 면이 상당히 컸다. 그래서 고종이 해외로 망명하면 그만큼 독립운동은 상당히 치열해질 수밖에 없는 분위기가 상당히 컸다.”

 

고종 망명 계획은 그것으로 끝난 게 아니었다. 이회영은 또 다시 거사를 시도했다. 이번에는 장남의 혼인을 활용했다. 이규학은 고종의 조카딸과 결혼했는데 이들의 예식을 의논한다는 명분으로 궁궐을 드나들며 거사를 추진했다.

 

이회영의 며느리 정문경 “황제의 조카따님 아니에요? 누님의 딸, 참 궁궐에서 애지중지하며 자라신 분인데 그 분을 우리 시아버님께 며느리로 주실 때야 보통 사이가 아니었을 것 아니에요?”

 

고종은 이회영의 망명 제안에 선뜻 동의했다. 일제가 불모로 데려간 영친왕(英親王)을 일본 황족인 이방자(李方子)와 강제로 결혼시키려 한 것도 고종을 자극한 이유였다.

 

서 교수 “이회영은 고종을 해외로 모셔가지고 행궁까지 거처를 마련하고 그러기 위한 자금으로 민씨 척족 중 민영달(閔泳達)이란 사람에게 5만원을 받은 걸로 나와 있습니다.”

 

망명 자금으로 베이징에 행궁까지 구입하고 거사의 날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아무도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고종이 사망한 것이다.

 

고종의 갑작스런 죽음은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순종실록(純宗實錄) 부록에는 고종에게 병이 있다는 기록이 사망하기 하루 전인 1월 20일에야 처음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다음날 새벽 6시 덕수궁(德壽宮) 함녕전(咸寧殿)에서 고종은 승하하고 만다.

 

과연 고종은 병으로 죽은 것일까? 고종이 승하하던 날 당직을 선 인물이 친일파 이완용(李完用)과 이지용(李址鎔)이었다는 사실은 고종의 죽음을 둘러싼 의혹을 더욱 증폭시킨다.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관보는 사망 1주일이 지나서야 호외를 발행해 고종의 죽음을 알리고 3일간 가무와 음곡을 중지한다는 칙령을 발표했다.

 

이 박사 “독립운동가들은 고종이 독살당했다는 걸 기정사실로 알고 있었고 그 당시 고종 독살에 깊숙이 관여한 어의 중에 한상학이라든지 그런 인물들의 구체적인 이름까지 거론되는 상황이었습니다.”

 

고종의 급서로 나흘 앞으로 다가온 결혼을 연기해야 했던 영친왕비 이방자도 고종의 죽음을 둘러싼 의혹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당시 장안에 파다했던 소문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이태왕(李泰王)께서는 뇌일혈로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 그 진상은 독살이었다는 것입니다.’

 

유폐된 황제의 갑작스런 부고는 식민지 백성들을 충격에 빠뜨렸다. 백성들의 울분은 3·1운동으로 촉발됐다. 전국이 만세 소리로 들썩이던 그때, 이회영은 중국으로 두번째 망명을 떠났다.

 

“무오년 12월 19일에 우리 황제께서 승하하시니 삼천만 우리 백성이 어찌 서러워 아니하리오? 남편은 33인과 같이 독립선언서를 지으시고 북경으로 떠나셨다.”

 

3·1‘만세’운동은 해외의 망명인사들을 고무시켰다. 각 지역에 흩어져 있던 독립운동가들은 중국 상하이로 모여들었다. 임시정부 수립을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임시의정원 회의에는 이회영도 동생 이시영과 함께 참여했다.

 

그러나 이회영은 어떠한 직책도 사양했다. 자리에 연연할 때가 아니라는 이유였다.

 

서 교수 “그 분은 처음부터 애국계몽운동에 뜻을 두었고 을사조약 이후부터는 국권회복운동에 노력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신 인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벼슬 같은 건 아예 생각하지도 않았다. 다른 사람들이 존경해서 떠받는 것이다. 원로이며 우리의 최고 지도자다, 이렇게 모신 거였지 자신이 어떤 직위를 가지려고도 하지 않았다.”

 

이회영은 임시정부 결성을 반기지 않았다. 정부를 세우면 자칫 감투 싸움에 매달리느라 독립운동을 소흘히 할까 걱정했기 때문이었다.

 

김명섭 ‘자유를 위해 투쟁한 아나키스트 이회영’ 저자 “상해 임시정부나 다른 지도자들은 독립운동을 본격적으로 펼칠 역량이 아직 부족한 상황에서 정부라는 형태로 체계를 갖추고자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인물 중심의, 또는 파벌 중심의 세력연합이 될 수밖에 없고 그 속에는 권력과 암투가 존재하고 있었던 거죠.”

 

상하이의 임시정부와 결별한 이회영은 베이징으로 돌아왔다. 이승만(李承晩) 중심의 임시정부를 반대한 신채호(申采浩), 이동녕(李東寧) 같은 동지들도 속속 귀환해 이회영과 함께 북경그룹을 형성했다.

 

이회영의 집은 수많은 독립운동가가 북적거리는 사랑방이었다. 베이징에 온 독립운동가들이 한번쯤은 거쳐가는 필수 코스였다.

 

이 박사 “당시 독립운동의 중요한 축이 상하이와 베이징이라고 본다면 우당 이회영 선생은 가장 지도적인 위치에 있었던 인물 중에 한 분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아들 이규창이 기억하는 당시 이회영과 북경에서 자주 만난 인물들은 그야말로 한국 독립운동의 대표적인 인사들이다. 한국 독립운동사의 모든 노선이 이회영을 중심으로 나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김규식(金奎植)·신채호(申采浩)·김원봉(金元鳳)·안창호(安昌浩)·조소앙(趙素昻)·정인보(鄭寅普)·이관직(李觀稙)......).  

 

“애국지사들이 매일 대여섯명씩, 적을 때는 두세명씩 오는데 집에 여자라곤 아홉살된 딸과 나뿐이니 만삭의 몸으로 오죽이나 어려우랴?”

 

정문경 “하루에 수십명씩 와서 그분들을 다 조석을 해서 나르려니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우리 시어머니가 그렇게 고생하셨어요.”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을 만나면서 이회영은 독립의 방식을 고민했다. 그가 내린 결론은 모든 단체가 독립이란 단일한 목표 아래 총집결하고 통일된 기구로 연합하는 것이었다. 1922년 남만주에 흩어져 있던 무력(武力) 독립운동(獨立運動) 단체들이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라는 하나의 제도와 명칭 아래 결속한 것도 이러한 생각이 반영된 결과였다.

 

통의부 의용군으로 재편된 남만주의 독립군들은 일본 군경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이들은 1924년 4월부터 약 2개월간 모두 20여차례에 걸쳐 국내 진공작전을 펼쳤다. 이회영은 신채호와 함께 의열단(義烈團)의 무력투쟁도 지원했다. 이들이 작성한 조선혁명선언(朝鮮革命宣言)은 당시 독립운동 세력에게 큰 반향을 일으켰다. 당대의 명문장으로 알려진 조선혁명선언은 오직 무력투쟁만이 독립을 쟁취하는 유일한 길임을 역설하고 있다.

 

서 교수 “조선혁명선언은 우리 나라 독립운동의 성서와 같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라고 본다. 그만큼 그 안에는 독립운동을 왜 해야 하는가 하는 기본 이유에서부터 독립운동을 어떻게 전개해 나갈 것인가 그리고 나중에 우리는 어떤 국가를 세우는 것이 좋은가 이런 것들을 그야말로 참 적절하게 잘 표현하고 있다.”

 

김원봉을 비롯해 상당수가 신흥무관학교 출신 인사들로 구성된 의열단은 이회영·신채호의 후원과 지지에 힘입어 더욱 과감하고 강력한 행동에 돌입했다. 이들은 독립이 더 이상 평화적인 방법으로는 해결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식민지 통치기구의 파괴와 요인 암살 같은 직접적인 행동이었다.

 

목숨을 건 의열단의 폭탄 투척 활동은 일제에게 가장 무서운 저항이었다.

 

이 박사 “당시 의열단의 역할이 어느 정도였냐면 의열단원 한 명이 국내에 잠입했다는 소문만 들리면 국내 전 경찰에 비상이 걸릴 정도로 당시 의열단은 막강한 위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죽음을 감내한 투쟁을 통해서라도 이회영이 되찾고 싶어했던 조국은 어떤 것이었을까? 그의 어록비에서 단서를 찾을 수 있다. 그는 개인이 어떠한 권력에도 종속되지 않는 자유와 평등에 기초하는 자치공동체를 꿈꾸었다. 최고 명문가의 자제로 전통적인 유교 교육을 받은 사람이 갖기에는 매우 파격적인 사상이다.

 

박 소장 “대단한 사상의 변화일 수밖에 없다. 이런 부분들 같은 경우에는 바로 자신이 가지고 있던 기성의 고리에 얽매이지 않고 끝없이 새로운 자신을 반성하고 비판하면서 보다 미래를 향해서 나아가는 어떤 점진적 태도, 우리가 흔히 명가라고 한다면 옛날 것만 붙잡고 간다고 생각하지 않던가? 그렇지 않고 오히려 새로운 시대를 호홉하면서 변화와 미래에 대한 전망을 가지고 갔다는 것이다.”

 

신 교수 “50대에 와서 전혀 새로운 사상을 받아들였다는 측면에서 가지고 있는 그 분의 개방성, 그리고 자신이 추구하는 이상적인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서 새로운 사상을 받아들이려고 했던 그 분의 노력, 이런 부분에서 보면 굉장히 선각적인 사람이고 매우 적극적이며 개혁적인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십수년째 계속된 망명 생활에도 독립은 쉽게 오지 않았다. 이회영의 살림은 날이 갈수록 궁핍해졌다. 빈민가를 전전하며 극도의 굶주림에 시달려야 했다.

 

“내 지금도 역력히 생각하노니 그때는 정말 뵙기 딱하고 가엾으시지. 하루 잘해야 한끼나 먹고 그렇지 않으면 하루를 굶기를 한달이면 반이 넘으니 죽지 못해 사는 것이로다.”

 

정문경 “그러니 돈 떨어지면 어떡해요? 굶어야지. 하루이틀 굶는 것은 보통이고 며칠씩 굶고 있으려니 그때만 해도 시아버님이 60세가 지났으니까 노인네가 굶으면 기운을 못 차리실꺼 아녜요?”

 

당장의 끼니조차 잇기 어려운 날들이었다. 생계를 위해 이회영은 난을 그려 팔았다. 배고픈 자식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봐야 하는 가장의 쓰라린 마음을 그는 퉁소를 불며 달랬다.

 

이규동 “밝은 달 밑에서 퉁소를 부시면 아주 그 퉁소 소리가 뼈에 사무쳐서 말이죠.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는 그런 심정이었죠.”

 

서 교수 “1910년 모든 재산을 처분하고 연말에 만주로 갈 때에는 아주 재산이 많았다. 그러나 모든 만주에서의 활동에 재산이 안 들어가는 일이 없었고 특히 신흥무관학교 건립하는 데는 아주 많은 재산이 들었기 때문에 조금 지나게 되면 그렇게 국내에서 떵떵거리던 이회영 집안임에도 불구하고 이회영 6형제는 다 곤경에 처하게 되는 걸 볼 수가 있습니다.”

 

결국 이회영은 아내를 서울로 보냈다. 이은숙은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임신 6개월로 귀국길에 올랐다.

 

그러나 국내에서도 모금은 쉽지 않았다. 이은숙은 삵바느질을 해서 겨우 모은 돈을 중국으로 부쳤다.

 

이규동 “독립운동의 뜻을 가지신 분들은 다 어려워졌어요. 어려워서 뜻은 귀했지만 목돈은 되질 않았어요. 여기서 어머니가 할 수 있는 일은 옛날 분이라 바느질, 침모, 심지어 고무공장까지 다니신 걸로 내가 알고 있어요.”

 

아내가 부쳐준 돈으로 간신히 연명하면서도 이회영의 마음은 오로지 독립의 일념뿐이었다.

 

“하루는 남편에게서 온 편지를 보니 급한 사정으로 현숙, 규숙 두 딸을 천진 부녀 규제원으로 보낸다 하시고 당신은 규창이를 데리고 무전여행으로 상해를 가신다 하시니 세상에 이런 망창한 일이 또 있으리요?”

 

이규동 “지금도 눈에 선한 게 그때도 어머니가 내 손을 잡고 가셨는데 그때 그 기차 가는 걸 보고 어머니께 떼를 쓴 기억이 지금도 나요. 치치폭폭 타고 아버지한테 가자고 그럴 때 어머니 심정이 어땠겠어요? 참 어머니도 가고 싶은데 가지는 못하시고 나는 알지도 못하면서 어머니께 가자고 떼를 쓰고...”

 

그 무렵 이회영은 아들과 함께 상해에 머무르고 있었다. 중국 본토까지 세력을 확장한 일제에 가로막혀 침체에 빠진 독립운동의 새로운 활로를 열기 위해 고심하고 있었다.

 

그런데 1932년 4월 일본군의 전승기념식이 열린 상하이의 홍커우공원(虹口公園)에서 뜻밖의 사건이 일어났다.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 소속 윤봉길(尹奉吉) 의사가 폭탄을 던져 일본군 최고 사령관을 처단한 것이다.

 

신 교수 “당연하게 한국인들의 독립의지를 세계에 알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고 당시 중국인들이 일부이긴 하지만 조선인들 때문에 일본이 만주를 침략했다고 보고 있었는데 이런 중국인들의 반한감정을 돌려놓는데 크게 기여를 했고 동시에 상하이나 베이징에 있던 독립운동 단체들이 서로 통합하는데 큰 자극제가 되었던 의거였다.”

 

윤봉길의 의거는 이회영에게도 적지 않은 자극이었다. 그는 상하이를 떠나 만주로 가기로 결심했다.

 

김명섭 “일본 관동군 사령관이 만주에 온다는 정보를 입수하여 그 사령관을 암살하면 윤봉길의 상하이 의거와 마찬가지로 큰 반향을 일으킬 것이라 생각했다.”

 

정문경 “젊은 분들이 아무리 만류해도 아버님이 나는 이제 살 만큼 살았으니까 거기로 가서 내가 하던 일을 마저 끝맺어야겠다 하시고 상하이에서 떠나셨다.”

 

1932년 11월 8일 이회영은 아들 규창이의 배웅을 받고 만주로 가는 배에 몸을 실었다. 그의 나이 예순 여섯. 최후의 사명을 띠고 떠나는 마지막 여정이었다.

 

만주에서는 중국인들과 연합한 지하조직이 그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열흘쯤 지나 중앙일보에 의문의 기사가 보도된다. 따리앤 수상경찰서에서 한 노인이 목을 매고 숨졌다는 기사였다. 검열로 지위졌지만 노인은 독립운동의 중대인물인 듯했다. 며칠 후 노인의 정체가 밝혀졌다. 그는 바로 이회영이었다.

 

상하이를 떠난 그가 따리앤항이 도착한 것은 11월 13일, 미리 첩보를 입수한 경찰관들에 의해 그 자리에서 체포됐다. 그렇다면 과연 이회영은 일제의 주장대로 수상경찰서의 유치장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일까?

 

아버지의 시신을 수습한 딸 규숙은 사망경위에 의혹을 제기했다. 이회영의 옷에 핏자국이 묻어 있었던 것이다.  

 

이규동 “저희 누이가 연락을 받고 가니까 그때는 일본 경찰관들이 딱 서 있잖아요? 그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그래서 놀라 달려가보니까 아버지를 뵈는데 시신에 피가 흐르고 있더래요.”

 

이회영이 사망한 경위에 대해서는 그를 구출하러 급파된 동지들에 의해 그 진실이 드러났다. 동북의용군 사령부에 제출된 보고서에 의하면 따리앤 수상경찰대에 체포된 이회영은 곧바로 뤼순 감옥으로 압송됐다. 따리앤에서 40킬로미터 남짓 떨어진 뤼순 감옥에 도착한 이회영은 정치범만 들어가는 3층 독방에 수감됐다. 그곳은 많은 항일운동가들이 생을 마감한 곳이었다.

 

파오모쑹 뤼순역사박물관 부주임 “1932년 11월 17일에 이회영 선생은 이곳에서 사망했다.”

 

이회영은 안중근 의사가 교수형을 당한 그 자리에서 똑같이 처형됐다. 나흘 동안 모진 고문을 받았지만 그는 한마디도 발설하지 않은 채 끝내 절명하고 말았다. 치열했던 투사의 생애는 머나먼 이국에서 최후를 맞았다.

 

남편을 기다린 지 7년 아내에게 날아든 것은 한 장의 부고였다.

 

“남편이 오색 비단옷을 입으신 채 들어오는데 청아한 풍채가 신선 같은지라 처가 일어나서 반겨 영접하고 당신을 따라가겠다 하니 아직은 나 있는 곳에 못 온다 하시고 막연히 가시는지라 놀라 깨니 꿈이더라.”

 

이회영과 함께 중국으로 망명했던 형제들은 대부분 비참하게 죽어갔다. 셋째 이철영은 신흥무관학교 교장으로 일하다 병을 얻어 형제 중 가장 먼저 사망했고 막내 이호영은 북만주에서 의열투쟁을 벌이다 전 가족이 한꺼번에 몰살되고 말았다. 만석군의 재산을 내놓았던 둘째 이석영은 상해에서 홀로 굶어죽었고 끝내 유해조차 찾지 못했다. 첫째 이건영은 선산을 관리하러 국내로 들어왔다가 해방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이 박사 “이렇게 6형제 전원이 모든 재산을 팔아서 독립운동에 헌신하고 그리고 6형제 중 5형제가 독립운동 과정에서 순국하는 이런 경우는 우리 나라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찾아보기가 상당히 드문 예입니다.”

 

그토록 기다리던 해방은 너무 늦게 찾아왔다. 6형제 중 유일하게 살아 돌아온 다섯째 이시영은 광복의 환호 속에서 눈물을 훔쳤다.

 

이규동 “보통 가족이라고 하면 한군데 모여서 사는 걸 뜻하는데 저희는 벌써 지리적으로
뚝뚝 떨어져서 정말 해방이 되지 않았으면 저희 가족이 모이기도 힘들었을 거예요.”

 

이회영의 아내 이은숙은 남편의 삶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목격자였다. 남편과 함께 국경을 넘나들었던 이은숙의 삶은 그 자체로 독립운동의 삶의 역사다. 아무도 기억하지 않은 한 일가의 역사는 그녀의 기록으로 생생하게 전해졌다.

 

박 소장 “한국 사회에서 국민들이 가장 안타까워하는 것 중 하나가 왜 우리에게는 존경스러운 지도자가 없고 왜 우리가 내놓을 수 있는 사회 지도층은 항상 부동산 투기라든지 부패라든지 권력의 치부라든지 이런 것들이 나온단 말이죠. 우리는 이회영 일가를 통해서 진실로 노블리스 오블리주, 또는 사회 지도층이라고 하는 것 또 명가라고 하는 것이 어떠한 자기 도덕적 책임과 실천적인 부분들을 행해야 되는가를 알려주는 하나의 귀감이 된다는 것이 중요하겠습니다.”

 

서 교수 “사회적으로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너무 현실적인 이해관계에 연연해 할 수 있는데 오히려 거시적으로 볼 때는 그런 것을 박차고 조국의 독립이라든가 또 국가나 사회를 위해서 혹은 교육을 위해서 모든 걸 바칠 수 있다는 모범적인 예를 보여줬다는 점에서 이회영 6형제가 가지고 있는 우리 나라 역사에서의 큰 의미는 절대 지워질 수가 없다고 봅니다.”

 

수백억원의 재산과 가족마저 모두 독립운동에 바친 이회영 일가, 이들이 보여준 책임과 실천은 오늘 우리가 되살려야 할 정신이 무엇인지 우리가 찾아야 할 역사가 무엇인지 제시하고 있다.

 

역사는 기억하고 아는 만큼 전진한다. 이회영, 그가 묻는다. 당신이 알고 있는 애국의 길은 무엇이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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