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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적절한 남자(11)

리드미온 |2004.04.22 21:32
조회 5,302 |추천 0

"야. 너 오늘 우리 집에 안 올래?"

 

오전부터 뭐가 그리 신이 났는지 민석은 전화를 걸어 대뜸 그렇게 물었다.

 

"왜?"

 

"현아랑 내가 살 집 말야."

 

민석은 정말 전에 말한 대로 동거를 현실화 한 모양이었다.

 

"집을 벌써 구했어?"

 

"집이야 널렸지. 돈이 없어서 그렇지."

 

"내가 물어보는 것도 그거다. 돈이 어디서 떨어졌냐구?"

 

"은행에 돈 많잖아. 현아랑 나랑 조금씩 대출 받았어."

 

사랑이란 건 사람을 저렇게 과감하게 만드는 걸까? 민석은 아무렇지도 않게 대출 받았다고 했다.

나는 혼자라서일까...은행 대출은 꿈도 못꾸고 어렵게 모은 돈으로 3천만원짜리 집을 레종을 키운다는 조건으로 월세를 깎아 구했는데...그것도 이제 사기당한 돈이나 다름 없지만...

 

"집은 제대로 알아봐야지...그렇게 갑자기 하다가 내 꼴 나면 어떻게 하려고?"

 

"하긴 예쁜 여자랑 이중계약되어도 난 현아가 있으니 동거도 못하고 아쉽지..."

 

녀석, 뺀질거리는 대답은....

그나저나 그럼 현아는 오늘 가출한단 말인가?

 

"그럼 오늘...그 집에 들어가는 거야?"

 

"들어가자마자 집들이 하는 사람이 어딨냐?"

 

"그럼?"

 

"어제 이미 거사를 치뤘지..."

 

"뭐???"

 

그럼 현아가 어제 가출을?? 그런데 왜 엄마나 아빠는 조용했던 걸까?

 

"그래서 말인데, 당분간 너도 모르는 척 좀 해줘..."

 

이런 철딱서니 없는 어린애들을 봤나, 부모님을 속이고 이젠 나까지 공범자로 끌어들이다니...

 

"불량 청소년도 아니고, 가출에 동거에...웃긴다... 정말..."

 

"이거 보세요. 처형...당신도 그런 말 할 입장이 못 될텐데..."

 

그래, 나도 할 말 없긴 마찬가지만 그래도 가출 후 동거 보다 독립이 나은 거 아닐까? 라고 생각하다 나의 어설픈 동거가 생각나서 정말 할 말이 없어졌다.

 

"알았어. 다시 연락하자."

 

아침에 진우 때문에 설잠을 잔 것과 민석의 전화가 연타로 나를 멍하게 만들었다.

나와 현아는 엄마 아빠의 기대대로 얌전히 자라 대학까지 나오고 직장 생활하는 모범적인 딸이었다. 그런데 결혼 적령기가 되어서 비뚤어진 걸 것이다. 너무 늦은 사춘기일지도 몰랐다.

큰 딸인 나는 29살이 되도록 결혼은 안하고 독립한다고 가출해버렸고, 둘째 딸은 혼전에 임신해서 동거중인 것이다.

차라리 엄마 아빠가 조금 더 젊었을 때 충격을 주었으면 감당하기 쉽지 않았을까란 생각도 들었다.

엄마 아빠가 자식 걱정하기엔 너무 늙어버린 것일지도 몰랐다.

 

엄마 아빠가 걱정되서 내가 먼저 전화라도 해볼까 하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나도 모르는 척 하는 게 나을 거라고 생각하며 일을 하는 사이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오늘 피아노 나오는 날이다. 피아노 끝나고 갈 테니 점심 먹자."

 

"네."

 

엄마의 목소리는 너무나 밝아서 아까 민석에게 들은 동거의 소식은 농담이 아니었나 싶을 정도였다.

아니면 엄마가 이제 큰 딸, 둘째 딸보다 더 피아노가 좋아진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민아야...혼자 사니까 어때?"

 

월요일과 같은 레스토랑에서 새우볶음밥을 시킨 엄마는 그렇게 물었는데 가출한 두 딸을 가진 엄마라기 보다는 독립을 부러워하는 친구의 모습이라서 그 질문을 받는 내가 웬지 으쓱한 기분이 들었다.

 

"좋은 것도 있고 나쁜 것도 있고..."

 

"그래? 난 평생 내 방 갖는 게 꿈이었다...어렸을 땐 늘 동생들하고 한 방을 썼고, 시집 와선 네 아빠랑 한 방 쓰고..."

 

그렇구나, 평생 자신만의 방을 한번도 가져보지 못한 사람도 있다고는 막연히 생각해봤지만 엄마가 그런 사람이라고는 생각해보지 못했었다.

 

"하긴 나도 현아랑 각방 쓰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 많았어."

 

"알지...그런 모습 볼 땐 우리가 돈이 많아서 각자 한방씩 갖고 살면 어떨까 싶었다..."

 

"그래서 막내인 정훈이가 부러웠어. 남자란 이유로 늘 혼자 방을 차지했잖아."

 

"근데 걔가 제일 혼자 자는 거 싫어했던 거 아니?"

 

엄마의 말에 정훈이가 자기 방을 두고, 하루는 엄마 아빠방, 하루는 우리들 방에서 잤던 기억이 떠올랐다.

 

"맞다. 그 녀석 사춘기 되서 우리가 징그럽다고 그럴 때까진 계속 밤에 같이 자자고 칭얼댔었어."

 

엄마와 막내 동생을 추억하면서 나도 이젠 엄마라기 보단 즐거운 추억을 공유한 친구가 되는 기분이 들었다.

 

"어제 문득 그런 생각 들더라. 딸 둘이 나가서 내 방을 가질 수 있겠구나..."

 

난 그제서야 현아의 가출이 어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나는 민석에게 들은 대로 모르는 척을 했다.

 

"무슨 얘기?"

 

"현아도 집 나갔다. 민석이도 모른다고 하더라..."

 

"뭐라고???"

 

다른 사람은 속여도 엄마를 속이는 일은 참 자신 없는 일인데도 나는 그렇게 놀란 척했다.

 

"딸 둘이 가출한 빈 방에서 참 많은 생각이 들더라...언젠가 돌아오겠지...그런데 어린 아이처럼 길을 잃어버린 것도 아니고 알아서 나간 거니까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겠다...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지? 뭘 잘못했길래 이렇게 두 딸이 날 떠나는 거지?"

 

"엄마 잘못이 아니야...."

 

나는 그것만은 확실하게 말할 수 있었다. 엄마가 혹은 아빠가 미워서 한 가출은 아닐테니까...

 

"가족이란 건 공기 같은 거라고 하잖니...있으면 모르다가 없으면 죽는다고...근데 자식은 우주와 같은 거 같아...날 둘러싸고 있는 큰 어떤 거....절대 무시할 수도 없고 늘 눈에 보이고....절대적인 존재...공기가 없어지면 그 다음에 사람이 죽겠지...하지만 우주는 없어지면 그냥 인간도 없어지는 거야...그 동시에 말야...그 절망감.....넌 모를 거다....나도 60평생 살면서 처음 느껴봤으니까...."

 

나는 그런 엄마의 모습을 보며 민석과의 약속을 배반하고 민석과 동거하고 있으니 안심하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현아의 문제에 내가 개입하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내가 엄마와 만나서 엄마와 대화를 하듯이 현아도 그런 기회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엄마...현아가 나보다 더 똑똑한 거 알지? 나보다 더 잘 지내고 있을테니 걱정마...."

 

내가 엄마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그것 뿐이었다.

 

"그래, 현아한테 연락 오면 알려나 주라...그리고 나 이제부터 네 방 쓸거다... 괜찮지?"

 

"그럼~"

 

원래 그 공간은 엄마의 것인지도 몰랐다. 엄마의 공간을 우리는 잠시 빌려 썼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도 당당한 세입자였던 것이다. 내가 레종까지 인질로 잡아 월세를 깎는 치사한 방법으로 지금의 공간을 마련한 것에 비하면 엄마 아빠라는 이유만으로 나는 당당하게 많은 것을 누리고 살았던 것이다.

혹시나 나와 현아의 가출이 엄마에게도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닐까라는 주제 넘은 생각도 해보았다.

 

"그래, 나 피아노 올 때마다 같이 점심 먹자...딸하고 외식하는 것도 참 즐겁네...."

 

"응."

 

나를 키우느라 젊음과 꿈을 희생한 엄마에게 일주일에 두 번 점심 사는 것은 너무나 송구스러운 작은 보답이란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내가 엄마에게 무언가 해줄 수 있다는 것이 기뻤다.

어찌 보면 가족이란 것이 모여서 행복하게 사는 모습만 자꾸 미화시키는데 진정한 가족애는 이렇게 어려운 일을 겪고 또 떨어져 있으면서 진정한 가족의 의미를 느끼게 하는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오후 일을 어느 정도 처리하고 민석에게 전화를 걸어 집의 위치를 확인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는 순간 낯선 전화 번호가 핸드폰에 떴다. 집 때문에 골머리를 앓기 시작한 후부터 낯선 번호가 뜨면 집과 관련된 일이 아닐까 혹은 현수의 전화가 아닐까란 생각을 하곤 했다.

 

"여보세요?"

 

"hello?"

 

오늘따라 좀 일찍 퇴근하려나 싶었는데 업무 전화가 걸려오다니...좀 짜증이 났지만 그래도 친절하게 대답했다.

 

"hello?"

 

"What's your name?"

 

이상하다 싶었다. hello만 들을 때는 외국 사람인가 싶었는데 저 발음은 한국 사람인 것이 분명했다. 그래도 조심해야겠다 싶어 다시 영어로 물었다.

 

"I'm sorry I think you are Korean..."

 

"하하하하...내 발음이 그렇게 좋았어요? 바로 헬로...그러네..."

 

앗, 박진우의 목소리였다.

 

"누구신데요?"

 

나는 일부러 모르는 척 물었다.

 

"나오세요. 회사 앞이에요."

 

"네?"

 

"보고 싶어서 일찍 퇴근했어요."

 

"네?"

 

박진우, 이 남자 정말 제 정신이 아니다. 회사 앞에서 기다리다니...거기다 보고 싶었다고?

 

"드라이브 가요...미사리 어때요?"

 

가만...이 남자의 여자 친구한테 뺨을 맞은지 48시간도 지나지 않은 것 같았다...그런데 지금 데이트 신청을 받고 있는 걸까?

 

"죄송하지만, 저 약속이 있고요. 집에서만 당신을 보는 것도 아주 피곤한 일이니 돌아가 주세요."

 

나는 알아 듣도록 차분하게 말했다.

 

"약속 취소해요. 앞으로 내가 더 중요한 사람이 될 거니까..."

 

정말 이 사람은 프로가 맞다. 어떻게 저런 대사들을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날릴 수 있을까...

이것이야 말로 진정한 '뻐꾸기 날리기'의 진수일지도...

 

"중요한 사람이 될 거라면 존중도 해주세요. 약속이 있다고 말했잖아요."

 

"저 이미 건물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몇 층에 계세요? 올라갈 게요. 모시러 갑니다."

 

이럴 때 사무실 안까지 들어오라고 버티고 싶었지만 직원들 눈치가 보여 내가 내려간다고 했다.

 

"알았어요. 일단 내려 갈게요."

 

"진작 그러시지..."

 

나는 서둘러 웃옷을 걸치고 핸드백을 챙겨 나왔다.

 

"약속이 어디세요? 제가 모셔다 드릴게요. 아까는 얼굴 한번 더 보자고 협박한 거고요."

 

"됐어요. 혼자 갈 수 있어요. 여자 친구 있다면서요. 데이트 안해요?"

 

"오늘부터 여자 친구 좀 바꾸려고요."

 

그럼, 어제 말한 여자 바꾸기의 다음 대상이 내가 되었다는 뜻인가?

이건 아니다 싶었다.

 

"미쳤죠?"

 

나는 기가 막혀 그렇게 물었다.

 

"네. 미치지 않고서야 하루 종일 보고 싶어했겠어요?"

 

보고 싶다는 말은 5분도 안되서 두 번이나 들은 것은 인생에 처음 있는 일 같았다.

정말 보고 싶었던 걸까? 박진우가 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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