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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적절한 남자(15)

리드미온 |2004.05.05 03:47
조회 8,478 |추천 0

엄마와 내가 약속한 월요일의 점심 시간에 현아도 합류하게 되었다.

역시 집나간 후 처음 보는 현아에 대해서도 엄마는 초연했다.

 

"너도 집 나가니 좋으니?"

 

엄마는 밝은 얼굴로 물었다.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있어...."

 

현아는 나와 비슷한 대답을 했다.

 

"너도 적금 갖고 가출한 거니?"

 

"아니..."

 

"그럼?"

 

나는 현아가 금방 사실을 말할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현아는 어렸을 때부터 엄마의 질문에 금방 진실을 말해버리는 성격이었다. 어렸을 때 학교 끝나고 동네 친구들과 놀다가 늦을 때도 기껏 나와 거짓말하기로 약속해놓고 엄마에게 금방 진실을 말해버려 같이 혼난 적도 많았다.

 

"민석 오빠랑......"

 

옆에서 현아의 대답을 듣고 내가 현기증이 느껴졌다.

 

"그렇게 좋으니? 민석이가?"

 

엄마는 다소 억양이 높아졌지만 상당히 평정을 유지하려 애쓰는 모양이었다.

 

"엄마도 아빠도 다 반대하니까...."

 

"휴우....내가 잘못 키웠지...."

 

엄마는 한숨을 길게 내쉬며 말했다.

 

내가 잘못 키웠지...저 말은 어렸을 때부터 천번도 넘게 들어본 말이었다.

 

"실은 엄마보단 아빠가 무서워서..."

 

현아 말도 일리가 있다.

우리가 무서워하는 사람은 엄마보다는 아버지다. 전혀 대화가 통하지 않을 것 같은 사람....아버지의 유전자가 내 몸속에 들어 있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로 하나도 닮은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드는 사람...

 

"알았다. 아빠는 엄마가 어떻게든 해결해보마..."

 

"어떻게?"

 

이번엔 엄마가 아버지를 설득하겠다고 말하는 것이 신기해서 물었다.

 

"너희들 때문에 요즘 부부싸움을 다시 시작했다. 부부싸움을 해본 것이 얼마만인지..."

 

엄마의 말을 들으니 늘 평화롭고 조화롭기만 해보이던 엄마 아버지가 부럽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는데 엄마는 어쩌면 그런 평화가 불만이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엄마가 아빠만 맞춰주니까 그렇지..."

 

현아가 한마디했다.

 

"그럴 수 밖에 더 있니? 시어머니에 애들에 그리고 매일 드나드는 친척들과 손님들...일생이 눈치만 보다 끝나는가 싶었다. 요즘 눈치볼 사람들이 없으니 아빠한테도 말하기가 편하더라..."

 

요즘엔 엄마와 점심을 먹을 때마다 내가 가출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드는 말을 듣게 되는 것 같았다.

 

"정훈이가 전화했더구나..."

 

정훈?

엄마가 정훈이란 이름을 입에 올린 것이 얼마만인가 싶었다.

엄마는 내가 정훈과 연애를 할 때부터 또 끝날 때까지 참 많이도 정훈에 대해서 물었었다.

 

'정훈이랑 만났니?'

'정훈이랑 뭐했니?'

'정훈이라 결혼하자고 그러든?'

 

그런 난처한 질문을 받을 때마다 괜히 엄마에게 정훈의 존재를 알렸다고 후회도 했었다.

그래서인지 정훈과의 이별을 실감한 것도 엄마가 어느 순간 정훈의 얘기를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였다.

 

차라리 그 때는 엄마가

 

'정훈이 나쁜 놈이지? 왜 널 차버렸다든?'

'정훈이 그 놈 딴 여자 만난지?'

 

이런 말이라도 해주면 엄마 앞에서 정훈과의 이별이 힘들다고 솔직하게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정훈에 대해서 얘기하지 않는 것을 보며 엄마가 정훈을 나보다 먼저 잊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오늘 이렇게 분명하게 정훈의 이름을 얘기하는 것을 보며 엄마도 잊지 않았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왜?"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후식으로 나온 커피를 마시며 물었다.

옆에 앉은 현아는 녹차를 마시고 있었는데 아마도 커피가 마시고 싶었는데 참고 있는 것 같아 안쓰럽다는 생각도 하면서...

 

"네 연락처 알려달라고...꼭 한번 연락하고 싶다고...나한테 죄송하다고도 하더라..."

 

"엄마한테 죄송할 게 뭐가 있어?"

 

나한테 미안하다는 말은 통할 수 있지만 엄마에게 미안하다니...

 

"그게...."

 

대답을 한 사람은 엄마가 아니라 현아였다.

 

"그래...이젠 말해도 되겠지?"

 

그럼 엄마가 나에게 정훈에 대해 지금까지 숨기고 있었던 게 있단 말인가?

 

"그래..언니도 이젠 알아도 되지..."

 

현아도 알고 있었단 말인가?

 

"엄마가 말이다. 네가 처음 연애하는 모습을 보며 참 많은 생각을 했다. 마치 내가 처음 연애라도 하는 것처럼 말야. 왜 그렇게 궁금하던지...그래서 정훈에 대해서 많은 걸 물었지. 그리고 우리 집에 정훈이가 온 적도 있었고..."

 

나도 그 날 기억한다. 엄마는 한번 쯤 집에 와서 같이 저녁 먹자고 했었고 나도 흔쾌히 정훈을 데리고 왔었다. 결혼 하기엔 좀 이르다고 생각했지만 그 때 나는 거의 정훈과 결혼할 결심이 선 상태였다. 이미 다 지나간 일이었지만...

정훈은 엄마를 위한 빨간 장미를 사왔었고 또 엄마가 만들어 준 저녁을 먹으며 잔뜩 긴장해 있었다.

 

"난 그때만 해도 내가 너희들 결혼같은 것도 어느 정도 관여할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엄마니까...그래서 정훈에게 그런 말을 했었지...졸업하고 바로 취직을 하지 않으면 너와 헤어져 달라고...정훈이한테는 너한테는 비밀로 해달라고 했다..."

 

정훈이와 헤어졌던 시기는 정훈이가 졸업하고 취직을 못했던 시기였다. 그 시절 취업재수생도 많으니 나는 힘내라고 했었고 정훈은 나날이 짜증이 늘어가다 결국 나한테 헤어지자고 했었다.

그 때 이별을 하고 아픈 마음을 달래며 얼마나 많은 생각을 했는지 모른다.

처음에는 잘난 것도 없이 날 차버렸던 정훈에 대해서 원망을 하다가 어려운 시기에 조금 더 따뜻하게 대해주지 못한 자책감...그리고 조금 지나서는 우리는 안맞는 사이일지도 모른다고, 원래부터 인연이 없던 사람들일지도 모른다며 스스로를 위안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런 가슴 시린 이별의 배후에는 엄마가 있었던 말인가...

아니다. 엄마탓은 아닐 것이다. 진정으로 정훈이 날 사랑했다면 그래도 날 설득하거나 다른 방법을 찾았을 것이다.

 

"다 지난 일인데...뭐."

 

설사 정훈이 엄마 말 때문에 나와 헤어진 것이라 해도 헤어질 사람이라 헤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하지만 지금 난 후회가 된다. 너희들이 다 집을 나간 것을 보고 자식을 겉낫지 속낳은 것이 아니라는 어른들 말이 딱 맞는 것 같아...그때까지만 해도 어느 정도는 내 뜻대로 너희들이 움직여줄 거라 생각했지..."

 

"그래서 내 전화번호 알려줬어?"

 

"그래. 전화번호 알려주는 게 뭔 대수니? 네가 알아서 처리해라. 그거 안 가르쳐 줘도 걔가 네 연락처 알아내는 일 정도는 하겠지. 나한테 전화할 정도면..."

 

엄마의 대답을 들으며 엄마가 어른이 되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엄마에게 이런 대범한 면이 있었나 싶었다. 집안에서 살림만 하느라고 겁장이 소녀가 되어버렸다고 생각했는데...

 

"남녀간의 문제는 둘밖에 모르는 게 맞는 거 같아. 가족으로 산 너희들도 아버지와 나의 관계를 제대로 모르잖니?"

 

그런데 정훈은 왜 나에게 연락을 한 걸까?

3년 동안 날 잊지 못해서?

아니면 다단계라도 빠져서 어떻게든 아는 사람을 연락해 보는 걸까?

3년 만에 나타난 첫사랑....나는 어떤 얼굴로 마주쳐야 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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