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큰 오해-미국의 分斷 책임론
조화유(재미저술가, 워싱턴)
한국 근/현대사에 대하여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큰 오해가 하나 있다. 그것은 “미국 때문에 한반도가 38도선을 경계로 분단되었으며, 이 때문에 한국전쟁의 비극도 발생하였고 아직까지 우리민족이 통일이 되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미국은 우리 민족의 불행의 씨앗"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은 정말 오해다. 오해도 이만저만한 오해가 아니다. 만일 이것이 오해라면 진실은 무엇인가?
진실은 이와 정반대다. 만일 미국이 38도선을 그어 소련군의 한반도 전체 점령을 막지 않았더라면 오늘날 한반도에는 대한민국은 없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밖에 없었을 것이다“이다. 이러한 오해와 진실을 속시원하게 설명해준 어떤 한국 책도, 어떤 한국 교과서도 필자는 아직 보지 못했다. 그러면 진실은 무엇인가?
우선, 1945년 한반도에 38선이 그어지게 된 경위를 당사자들의 증언을 통해 알아보자. 38선이 그어질 당시의 미국 대통령 해리 트루먼이 1955년 출판한 회고록 "Memoirs by Harry S. Truman" (트루먼 회고록)의 444∼5 페이지에 이렇게 적혀있다.
"내가 듣기로는 번즈 국무장관이 현실적으로 가능한 한 멀리 한반도의 북쪽에서 일본군의 항복을 받도록 선을 그라고 국방부 작전국 정책과에 건의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육군은 한반도로부터의 먼 거리와 병력 부족이라는 극복하기 어려운 장애물에 직면하고 있었다.
따라서 (먼저 한반도에 진입하는 쪽에서 한반도의 일본군 항복을 받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소련이 이의를 제기할 경우, 우리가 실제로 병력을 파견하기에는 38도선도 사실은 너무 멀리 잡은 것이었다. 소련이 이의를 제기해서 우리가 실제로 병력을 제때에 보낼 수 있는 거리에다 선을 그어야 했다면, 그 선은 38도선보다도 훨씬 남쪽에 그어졌을 것이다. 북위 38도선을 따라 군부가 선을 그었기 때문에 우리는 조선의 옛 수도 서울에서 일본의 항복을 받을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된 것이다. 물론 (38선을 그을) 당시에는 일본의 항복을 받는 일을 兩國이 분담한다는 편의성 이외의 다른 생각은 없었다."
트루먼 대통령의 말을 보충 설명하자면 이렇게 된다. 미국은 일본이 항복하자마자 즉시 일본 본토는 물론, 한반도 내의 일본군으로부터도 항복을 받아야 했는데, 미군은 그때 한반도에서 1천km 남쪽 멀리 오키나와에 있었고, 또 미군은 주로 일본 본토에 들어가 일본의 항복을 받아내는 데만 정신을 쏟고 있었기 때문에 한반도에까지 군대를 신속히 보낼 여유가 없었다.
한편 한반도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소련은 신속히 군대를 진입시킬 수 있었기 때문에 일본에 선전포고를 한 바로 다음날(8월9일)에는 벌써 함경북도로 들어오기 시작했고 8월12일에는 청진, 나진, 웅기, 경흥 등을 점령해버렸다. 이런 속도라면 불과 2, 3주 사이에 소련군은 한반도 전체를 다 점령할 염려가 있었기 때문에, 일본이 항복을 선언한 8월14일(워싱턴 시각) 밤늦게 서둘러 38선을 그어 거기까지만 소련군이 내려오도록 결정하여 소련측에 통고했고, 소련이 이를 받아들였던 것이다.
왜 하필 38선인가에 대해서는 38선을 그은 당사자인 당시 미국 국방부 작전국 정책과 소속 딘 러스크(Dean Rusk) 육군중령 (후에 케네디, 존슨 대통령 밑에서 국무장관 역임)의 말을 들어보자. 1990년에 출판한 그의 회고록 "As I Saw It" (내가 본대로) 124 페이지에 이렇게 적혀있다.
"넓은 지역에 흩어져있는 일본군으로부터 언제 어디서 항복을 받느냐 하는 문제에 대해서 국무부와 국방부는 의견이 달랐다. 국무부는 중국 본토의 가능한 한 북쪽에서 일본군의 항복을 받아 만주의 주요 지점들이 우리 점령지역에 들어가도록 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육군은 장래를 염려하여 우리 군대가 아주 조금 있거나 거의 없는 지역들은 아예 책임지지 않으려고 했다. 사실은 아시아 대륙에 들어가는 것 자체를 육군은 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아시아 대륙에 상징적으로 군대를 좀 유지한다는 차원에서 한반도에 발판 같은 걸 하나 마련해 두기로 합의했다.
일본이 항복한 바로 그 날인 (미국 동부시각) 8월14일 늦은 밤 (국방부 작전국 정책과장) 찰스 본스틸 대령과 나는 (국무부, 국방부, 해군이 합동회의를 하고 있던 회의실) 옆방으로 자리를 옮겨 한반도 지도를 자세히 보았다. 급박한 상황에서 우리는 미국이 점령할 지역을 선택해야 하는 막중한 임무를 맡고 있었다....National Geographic 잡지가 만든 지도 한 장을 놓고 우리는 서울 바로 북쪽에서 한 편리한 경계선을 찾았으나 지리적으로 자연적인 선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북위 38도선을 건의하기로 결정했다. 스윙크(국무부, 국방부, 해군 협의회)는 우리 건의를 별다른 이의 없이 받아들였고, 놀랍게도 소련 역시 이의 없이 동의했다. 당시 미/소 양국 군대가 위치한 지점을 고려한다면 소련이 38도선보다 훨씬 더 남쪽의 선을 요구할지도 모른다고 나는 생각했었다."
러스크의 이 증언을 보면, 일본과의 4년간 전쟁에 지친 미국 군부는 아시아 대륙에 들어가는 것 자체를 싫어했으나 국무부가 우겨서 한반도에 들어가기로 했다는 것을 알수 있다. 그리고 가능한 한 한반도 북쪽에 선을 그어 소련의 한반도 전체 점령을 막으려 했다는 것도 알수 있다. 만일 군부의 고집대로 미군이 한반도 진출을 아예 포기했다면 한반도 분단은 없었겠지만, 지금 우리는 김정일 독재 밑에서 살고 있을 것이다.
그러면 국무부는 왜 미군의 한반도 진주를 원했는가?
이유가 있었다. 1945년 봄에 나치 독일과 파시스트 이탈리아가 연합국(미국. 영국, 소련 등)에 항복한 뒤, 소련은 對獨(대독)전쟁 중 점령한 동부독일을 비롯하여 체코슬로바키아, 폴랜드, 불가리아, 루마니아 등 동 유럽 나라들을 전부 공산주의 국가로 만들어가고 있었다. 이 점을 잘 알고 있었던 미국 국무부는 소련이 일단 점령한 나라는 반드시 赤化시킨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소련군이 한반도 전체를 다 점령하는 것을 막기 위해 미국 육군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38선에서 소련군의 남하를 저지시켰던 것이다.
만일 그때 미국이 38선을 긋지 않았다면 소련군이 한반도 전체를 다 점령했을 것이 뻔하고, 그 결과 대한민국은 아예 탄생하지도 못하고, 조선인민공화국만이 만들어져 지금 우리는 김정일 治下에서 살고 있을 것이다. 2차세계대전후 미군이 점령한 서부독일과 일본은 미국식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채택하여 오늘날 경제대국들이 되었고 역시 미군이 점령했던 남한은 오늘날 세계 12위의 경제강국이 되지 않았는가
앞으로 쓰는 초중고 역사 교과서에는 반드시 이 점을 분명하게 알려야 미국에 대한 불필요한 적대감을 없앨수 있을 것이다. ‘월간중앙’ 2007년 7월호는 서울 시내 7개 초등학교 3~6학년 학생 3,66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한 개탄스러운 조사 결과를 보도했다. 이 보도에 의하면, 조사 대상 학생의 38%가 6·25는 조선시대 전쟁으로 알고 있다고 한다. 초등학생 상당수는 6.25전쟁을 일본이 한국을 침공한 것으로 알거나 조선시대 임진왜란과 혼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학교에서 6.25전쟁에 관해 배운 적이 없다고 대답한 학생이 33.5%, 학교 선생님으로부터 들어서 6.25전쟁을 처음 알게 되었다는 학생은 15.5%에 불과했다고 하니 우리나라가 근/현대사 교육에 얼마나 소흘한가를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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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구교수가 모르는것 3가지를 지적한다
강정구 교수(61세, 동국대 사회학과)는 최근 주간지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그로 인해 야기된 최근의 논란과 시위 등에 대해 변명성 주장을 반복하면서 "최소한 이성을 가진 사람이면 이성적으로 대응해야 하는데, 이렇게 반(反)이성적 대응을 할줄 몰랐다"고 말했다. 그래서 필자는 그의 주장에 대해 "이성적 대응"을 한번 해보려고 한다.
첫째, 강교수는 "남북 분단의 책임 90%는 미국에 있고 !0%는 소련에 있다"고 주장했다. 38선을 그은 게 미국이고 소련이 이에 동의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대단히 실례의 말씀이 될지 모르겠지만, 한국 현대사를 연구한 학자라고 자부하고 있는 강교수는 38선의 생성과정을 잘 모르고 있는 것 같다. 결론부터 말하면, 강교수의 주장은 물에 빠진 사람 구해주니까 보따리 내놓으라고 떼쓰는 격이다. 필자가 아는 38선 생성 과정은 이렇다.
소련은 1941년에 체결한 일·소 불가침 조약을 무시하고 1945년 8월8일 일본에 선전포고를 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불과 1주일 전이었다. 히틀러 군대와 싸우느라고 기진맥진한 소련은 유럽에서의 전쟁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태평양전쟁에 뛰어들기를 꺼리고 있다가 이틀 전 히로시마에 원폭이 터지는 것을 보고 용기를 내어 참전한 것이다. 물론 소련은 그해 2월 얄타회담에서 미국의 양해하에 사할린 남부와 쿠릴열도를 차지하고 중국의 부동항 다이렌과 뤼순을 장기간 사용하게 된것에 대한 보답으로서의 참전 약속을 지키지 않을 수 없었다.
8월9일 나가사끼에 또 원폭이 투하되자 일본은 항복을 결심했고 만주에 있던 일본 관동군은 거의 저항을 포기한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소련군은 파죽지세로 만주와 한반도로 밀고 내려왔다. 미국과 소련 중 어느 나라가 한반도 내의 일본군을 무장해제시킨다는 구체적 사전 약속이 없었기 때문에, 한반도에서 약 1,000 킬로미터 떨어진 오끼나와 섬에 있던 미군보다 지리적으로 훨씬 가까운 곳에 있었던 소련군이 먼저 한반도에 진입, 급속도로 남하하자 미국은 당황하여 급제동을 걸었다. (미군은 원래 일본, 한반도, 대만 순으로 점령을 계획하고 있었다.)
8월11일 꼭두새벽(워싱턴 시각) 美국방부 4E 886호실에서 미육군 작전국 정책과 소속 딘 러스크 (후에 케네디, 존슨 대통령 밑에서 국무장관이 됨) 중령과 정책과 과장 찰스 본스틸 3세 대령(1960년대 말에서 1970년대까지 주한 유엔군사령관이 됨)은 상부로부터 "가능한한 북쪽에" 선을 그어 소련의 급속한 남진을 저지하라는 명령을 받고 작은 지도 한장을 꺼냈다. 그들은 처음엔 북위 40도선을 고려했으나 너무 북쪽이라 소련측이 거부할 것 같아 한반도 중심를 관통하는 38도선을 택했다. 수도 서울과 일본군의 미군포로 수용소가 38도선 아래에 있었기 때문에 38선은 적당하게 보였다. 미국은 즉각 소련에게 38도선까지만 내려오라고 권고했고 소련은 이를 순순히 받아들였다. 그래서 맥아더 장군은 종전 직후 일반명령 1호로 38도선의 존재를 선포했다.
그런데 강교수는 문제가 된 그의 글에서 "맥아더는 38선 분단 집행의 집달리였다!"고 말함으로써 마치 미국이 이유 없이 38선을 긋고 한반도를 일부러 분단시키기나 한것처럼 흥분하고 있다. 사실은 미국이 그때 38선을 긋지 않았더라면 소련은 한반도 전체를 점령하고 자기네 위성국가로 만들어 버렸을 것이다. 그 당시 소련은 이미 동유럽 각국을 위성국가로 만들기 시작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시아의 요충 한반도를 위성화하려는 욕심도 분명히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이 사실은 후에 소련 대표들이 미·소 공동위원회에서 취한 행동들을 보면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러므로 미국이 38선을 그어서 우리 나라를 일부러 분단시킨게 아니라, 소련군의 한반도 완전 점령을 저지하려고 38선을 그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남한만은 적화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체제야 어떻든 무조건 한반도 통일을 최고의 가치로 치는 강교수 입장에서는 그때 미국이 38선 그은 것을 매우 원통하게 생각할 것이지만, 대한민국 국민의 대부분은 미국이 38선을 그어 한반도 전체의 적화를 막은 것은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할 것으로 필자는 믿고 있다.
둘째, 강교수는 6.25전쟁을 김일성이 한반도를 통일하기 위해 벌인 내전이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한국 현대사에 정통하다고 자부하는 대학교수로서는 좀 무식한 소리다. 왜냐하면 6.25는 김일성, 스탈린, 마오쩌둥(모택동) 3자가 합의해서 시작한 국제전이었기 때문이다. 1991년 소련이 붕괴되자 소련의 비밀외교문서가 많이 공개되었다. 이 문서들을 직접 보고온 미국의 캐스린 웨더스비(Kathryn Weathersby) 교수에 의하면, 김일성은 6.25 전쟁 1년 3개월 전부터 남침을 하락해 달라고 소련 수상 스탈린에게 졸랐다. 그러나 스탈린은 미국의 참전과 3차 세계대전으로의 확대를 우려해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반대했다. 그래도 김일성은 미국 참전 가능성을 과소평가하고 일단 남침을 시작하면 몇 주 내로 남반부를 완전 점령하겠다고 장담하면서 계속 남침 허락을 졸랐다. 마지못해 스탈린은 1950년 초 남침을 승인하고 군사고문관들과 무기를 북한으로 보내주었다.
6월25일 새벽에 38선을 넘어온 약 9만의 북한군 앞에는 130여대의 T-34형 소련제 탱크가 굴러갔고, 그날 낮부터는 소련제 Yak 전투기들도 서울과 수도권 상공을 날아다녔다. 그때 대한민국 군대는 단 한 대의 탱크도 없었고 비행기는 소형 정찰기 10대 정도가 있었을 뿐이다. 이런데도 강교수는 6.25 전쟁이 내전이고 집안 싸움이라고 한다. 천만에다. 이것은 한반도 전체를 자기 독재체제하에 지배하려는 김일성의 야욕과 한반도를 소련의 위성국가로 만들려는 스탈린의 야심이 일으킨 국제전이었다.
셋째, 강교수는 미국이 한국전쟁에 개입함으로서 "1만명 정도의 희생으로 끝날 전쟁이 확대되어 4백만명이 죽었다. 그러므로 맥아더와 미국은 우리의 은인이 아니라 원수"라고 주장하고 있다. 강교수에게 묻는다. 김일성이 외세를 등에 업고 서뿔리 전쟁을 일으키지 않았으면 그 1만명도 죽지 않았을 건 아닌가? 또 중공군이 참전하지 않았으면 한 2백만명은 덜 죽고도 한반도는 민주체제로 통일되었을 것 아닌가? 설사 강교수 말대로 1만명만 죽고 적화 통일이 되었더라도 김일성이 권력을 자자손손 독점하려고 4백만 이상의 사람들을, 특히 남쪽 사람들을 죽였을 것이다. 그의 상전이었던 스탈린과 마오쩌둥이 자신들의 독재 권력 강화를 위해 수백만명을 죽이거나 숙청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충분히 짐작할수 있는 일이다.
미국이 6.25전쟁에 개입하지 않았으면 한반도는 1950년에 분명 적화통일이 되었을 것이다. 강교수는 공산주의도 좋으니 그때 통일이 되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김일성의 통일 실패가 원통할지 모르지만, 대한민국 국민의 99%는 공산주의 독재하에 한반도가 통일되지 않은 것을 천만다행으로 생각할 것이다. (최근 한 일간신문이 일단의 20대 전후 젊은이를 골라 대담식으로 의식조사를 한 결과 북한에 가서 살고싶다고 대답한 사람이 한명도 없었다 한다.)
강교수가 김일성의 통일 실패를 마음속으로 원통해 하는 것은 본인의 자유겠지만, 자유민주주의 국가 대한민국에서 이 나라가 김일성-김정일 세습왕조식 독재국가가 되지않은 것을 공개적으로 원통해 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특히 중요한 역사적 사실을 도외시하고 그런 언행을 하는 것은 더욱 문제가 있다. 그리고 그가 젊은 세대를 가르치는 대학 교수이기 때문에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강교수는 '한겨레'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1945년 북한을 점령한) 소련군 사령관 치스차코프의 포고문, 그거야말로 조선 민중에 대한 애정이 담겼다"고 감격했다. <<강정구씨, 전쟁 때 월남한 북한동포들에게 한번 물어보시요. 해방 직후 북한에 들어온 "로스께"들이 얼마나 많은 약탈과 부녀자 강간을 자행했는지를! 북한 헌법을 보면 남한 헌법보다 더 인민의 인권을 존중하는 것처럼되어있소. 강정구 씨, 당신은 그 헌법만을 보고 북한은 지상 낙원이라고 감격해 할 사람이오. 공산주의자들이 쓴 포고문 따위에나 감격하는 강정구 씨, 남자답게 떳떳이 "나는 공산주의자다"라고 선언하든지, 아니면 중요한 역사적 사실을 잘 모르고 실언을 했다고 솔직히 사과하는게 좋을 것 같소. (강정구교수 '한겨레' 인터뷰 기사 뒤에 붙임).>>
끝으로, 미국 매도하는 것을 지식인의 상징쯤 되는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에게 한마디 하고자 한다. 2005년 광복절 축하 행사는 보기 드물게 성대하게 진행되었다. 북한에서 축하 대표단까지 내려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광복을 가져다준 미국에 대한 고마움을 표시하는 말 한마디, 플래카드 하나 보이지 않았다. 감사의 표시는커녕 반미 데모를 벌이는 사람조차 있었다. 정확한 역사적 사실을 몰랐기 때문에 광복절 날 반미(反美)구호를 외쳐댄 사람들은 이해할 수 있지만, 그런 사실을 알려고 하지도 않고 무조건 반미를 해야 이 나라가 통일이 되는 것같이 행동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은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체제를 싫어하는 사람들이거나, 물에 빠진 사람 건져주니까 보따리 내놓으라고 떼쓰는 우화의 주인공 같은 사람들이다.
누가 뭐래도 미국은 일본을 패배시킴으로써 1945년에 우리를 해방시켜주었을 뿐 아니라 38선을 그어 소련군의 한반도 완전 점령을 막았고, 5년 후 1950년에는 김일성의 기습 남침을 저지해 한반도의 적화를 막아준 역사적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이렇게 말하면 필자를 지독한 친미(親美)주의자라고 비난할지 모르겠지만, 필자는 국내 대학에서 사회학을, 미국 대학원에서 東아시아 역사를 전공한 사람으로서 역사학도의 양심을 걸고 객관적 사실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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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38선이 그어졌는가를 보여주는 참고문헌을 아래에 붙입니다.
***다음은 미국의 공영 라디오방송 National Public Radio (NPR)이 2003년 1월16일 남북 분단의 과정에 대하여 캘리포니아 주립대학 역사학과장 James Matray 교수와 가진 대담 녹취록의 일부다. (Neary는 아나운서 이름)
January 16, 2003 at 4:20 PM
National Public Radio (NPR)
NEARY: The current tensions on the Korean Peninsula have their roots in the way the country was divided after World War II. Joining us now to review some of that history is James Matray, professor and chair of the history department at California State University-Chico. He says in order to understand Korea's recent history, one has to look back nearly a hundred years.
Professor JAMES MATRAY (California State University-Chico): The important thing to think about when we think about the recent history of Korea is that it's been a very tragic century that the Korean people have just gone through. The events leading to the division of Korea at the 38th parallel have everything to do with the fact that Korea was part of the Japanese empire from 1910 until 1945. And if Japan was not in control of Korea as a colonial power, there would have been no reason, really, for the United States to get involved in Korea at the end of the war. But by virtue of the fact the United States was at war with Japan, it had to play a central role in determining what the destiny of Korea was going to be once the war was over.
Its original plan was to support a four-power trusteeship in Korea, and it had been kind of flushed out in a general way at the Yalta Conference by Franklin D. Roosevelt during February of 1945. But then during the spring, as most people know, President Roosevelt passed away. And his replacement, Harry Truman, beginning in the middle of April 1945, had far greater suspicions about what the Soviet Union was up to in the postwar period. He made the decision, therefore, to postpone action on a trusteeship agreement in hopes that the United States could end the war with Japan quickly and pre-empt Soviet intervention with the expectation that the United States would be able to occupy Korea unilaterally when the war ended.
As we know, the Soviet Union, two days after the atomic bomb was dropped on Japan on August 6th, 1945, declared war against Japan and sent its troops crashing into both Manchuria and into northern Korea. The Soviet Union could have occupied all of Korea and imposed a Soviet-dominated government on that country in the summer of 1945. But at the last minute, the Truman administration proposed a division of Korea into zones of occupation at the 38th parallel, and was surprised--and this is an important point--very surprised that Stalin accepted this proposal.
NEARY: How did they choose the 38th parallel? How did that come about?
Prof. MATRAY: Well, that's a very interesting story that remained a matter of mystery until, eventually, the documents regarding that particular decision were declassified during the period of the 1970s. The record suggests that on August 11th, that in the War Department, two individuals got together, one of them a man named C.H. Bonesteel, and another--he, of course, was an Army officer--but another whose name will be probably familiar to many of the listeners, Dean Rusk, who at that time was an officer in the War Department's Planning Division. And those two gentlemen sat down, pulled out a map, decided on the 38th parallel line for, I think, essentially two reasons. The first one is that it constituted a rough halving of the peninsula geographically. And, secondly, in included, within the American zone, the key city of Seoul, which, of course, was the capital of Korea.
***다음은 유명한 학습 웹싸이트 Sparknotes.com에 실린 한국전쟁 기원에 대한 설명이다.
Origins of the Korean War
On August 10, 1945, after the US dropped atomic bombs on Hiroshima and Nagasaki, Japan offered surrender in World War II. Soviet troops, part of the Allied forces, immediately began pouring into Korea. The US was appalled, and moved quickly to prevent all of Korea from becoming a Soviet satellite state. Dean Rusk, then a Colonel in the army, selected the 38th Parallel as the line that would divide the American- controlled sector from the Soviet-controlled sector. General Douglas MacArthur announced the division of the Korea into two occupation zones in "General Order Number One", which Stalin accepted. The US took control of South Korea, while the USSR controlled North Korea.
***다음은 美육군잡지 Army Magazine 2000년 5월호에 실린 글이다.
Army Magazine May 2000
THE KOREAN WAR: AN INTRODUCTION
By: KEVIN M. HYMEL
The seeds of the Korean War were planted in the defeat of Japan in World War II and the subsequent Cold War. The Allied victory in Asia and the Pacific left a power vacuum that had to be filled. On the same day that the second atomic bomb destroyed Nagasaki, Japan, August 9, 1945, the Soviet Union entered the war against Japan -- sending the Red army into Manchuria and then heading south into Korea, a Japanese-occupied area since 1910. The designated American occupation forces, U.S. Army 6th, 7th and 40th Infantry Divisions comprising the XXIV Corps, were 600 miles away in Okinawa.
In mid-August 1945, half a world away and shortly after the Potsdam Conference in Germany, U.S. President Harry S Truman and Soviet Premier Joseph Stalin agreed that Korea would be liberated jointly by Soviet and American forces. Two U.S. Army colonels, David Dean Rusk and Charles Bonesteel, had selected the 38th Parallel as the line separating the two armies in hopes of limiting the Soviet advance while securing two port cities in the south, Inchon and Pus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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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는 어떻게 분단되었는가? 명백한 사실이 존재함에도 아직까지 많은 학자와 세력이 분단과정을 호도하고 있다. 그 결과 미국과 소련이 분단을 합의했다고 하여 미-소 강대국 의 동반책임론을 거론하고, 심지어 미군 대령 몇몇이 38선을 설정했기에 분단은 미국 책임이라고 말하거나 남한만이라도 정부 수립을 해야 한다는 주장을 근거로 이승만 책임이라고 거론하기도 한다. 좌파 수정주의나 친북적 학자는 말할 것도 없이 전통적 학자들조차 분단의 책임이 미국과 소련 혹은 한국 정치지도자들에게 있다고 주장하는 형편이다.
분명한 것은 한반도 분단은 제2차대전의 종결과정과 스탈린 공산주의의 전략의 결과다. 1945년 5월 독일의 패망으로 스탈린군이 어떤 조건으로 언제 대일본전에 참전하느냐하는 것은 연합군의 핵심사항이었다. 1945년 2월의 얄타회담의 연장선에서 스탈린이 요구한 것은 1905년 러-일전쟁에서 상실된 러시아의 권리를 복원하겠다는 것이었다. 소련이 일본의 만주군을 담당하는 대신 중국 대련과 여순에 대한 권리를 포함한 만주지역에서의 우선권, 사할린과 쿠릴열도 등 일본 소유 섬들에 대한 권리 등을 요구한 것이 그것이다. 적어도 당시에는 한반도에 대한 직접적 명시는 없었다.
문제는 그후 전개된 군사작전에서 어디까지가 만주군 관할지역이냐 하는 것에서 비롯된다. 1945년 2월 얄타회담 시점에서 한반도는 만주군 관할이 아닌 일본 대본영 직할 지역이었다. 만주국과는 달리 조선과 일본은 하나라는 내선일체(內鮮一體)라는 정책에 따라 한반도에는 제17방면군이 주재하며 일본 본토방위를 담당하고 있었다. 소련군이 담당할 만주군 관할지역과 한반도는 아무런 관련성이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얄타회담에 따르면 한반도는 미군이 해방시켜야할 지역이었고 그 결정이 지속된다면 한반도 전체는 미군의 점령지역이 되었을 것이고 분단도 없었을 것이다. 또는 불과 6일간에 지나지 않는 소련군의 참전 없이 미군만으로 대일본전이 수행되었거나, 8월 9일 이전에 일본이 항복선언을 했더라면 한반도 분단은 없었을 것이고 중국의 공산화도 없었을 것이다.
1945년 5월 8일, 독일이 패망하자 소련과 불가침조약을 맺고 있던 일본은 소련의 참전이 불가피하다는 판단을 내리고 소련의 대일본전 참전시 소련군을 방어할 만주군과 한반도내의 군편제를 재편하게 된다. 한반도 북단이 소련 국경과 맞닿아 있는 상황에서 한-소 국경지역으로 공격하는 소련군을 누가 맡을 것인가의 문제가 대두된 것이다. 만주 일본군이 소련군을 담당하고 한반도내 제17방면군이 일본 대본영군 직할로 미군을 담당한다면 한반도 북부인 한-소 국경지역에 군사적 공백이 생길 수밖에 없게 되자, 5월 30일 일본은 한반도를 남부와 북부로 나누어 소련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한반도 북부는 관동군 제34군 관할로 하고, 한반도 남부는 제17방면군이 맡아 계속 일본군 관할로 한다는 군제 재편을 한 것이다.
이러한 재편으로 만주국 관동군 관할지역이 얄탸(Yalta)회담 때와는 다르게 한반도 북부로까지 확대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지정학적 결과에 따른 일본군 편제의 재편으로 스탈린이 한반도 북부까지 점령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받게 되었던 것이다. 1945년 7월 제2차대전 종전 약 20여일 전에 열렸던 포츠담(Potsdam)회담에서 한반도 북부지역의 관동군 제34군 관할은 이미 함경남북도와 평안남북도로 결정되어 있었다. 따라서 얄타회담을 이은 포츠담회담에서 트루먼, 처칠과 스탈린의 합의에 따라 만주군 관할지역은 소련군이 점령하고 일본군 관할지역은 미군이 점령하여 무장을 해제한다는 합의가 이루어짐에 따라 한반도는 북부(평안도 및 함경도)와 남부로 분할 될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해졌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1945년 8월 9일 소련군의 대일본 참전이 시작되고 다음날 10일 일본의 항복의사가 미국에 전달되었다. 미국은 진주만 습격을 받은 이후 3년 9개월에 걸쳐 30만에 가까운 미군 전사자를 희생시키고 거둔 대일본 전쟁에서의 승리였고 소련은 아무런 희생도 없이 단지 6일간의 전투아닌 전투를 치루며 거둔 대일본 전쟁의 승리였다. 스탈린은 자신이 조건으로 내건 모든 것을 요구했고 관철시켰다. 몽고를 점령해 10만군을 주둔시켰고 사할린과 쿠릴열도를 차지하였으며 중국의 대련과 여순을 조차(租借)하여 모택동을 통한 공산주의 확대를 지도했고 공산화를 완성시킨 후인 1955년 흐루시초프 때까지 사용하였다.
일본의 갑작스런 항복의사 전달이후 미군 합참본부에서 본스틸과 러스크 등 두 대령이 설정했다는 38도선이란 결국 관동군 관할지역이자 스탈린군의 점령과 무장해제를 위한 경계선이었을 뿐이다. 얄타회담과 포츠담회담에 따라 관동군 관할지역이었던 평안도와 함경도를 소련 점령지역에 포함되도록 한 기술적(technical) 경계선이었을 뿐이다. 당시 미국에게 혹은 대령들에게는 정치적 혹은 군사적 결정을 내릴 자격도 권한도 없었다. 38도선은 단지 얄타회담과 포츠담회담 그리고 그 회담결정의 연장선에서 이루어진 소련군의 참전과 만주 일본군의 군사관할지역에 따른 실무적 조치였을 뿐이다. 그 결과 함북 함흥에 주둔했던 제34군 사령관 세이부찌 중장도 관동군의 명에 따라 연길(延吉)로 가 만주지역의 다른 관동군 부대와 함께 소련군에 투항하고 정전협정에 서명하였던 것이다.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위한 경계선을 정치적, 민족적 분단선으로 만든 것은 스탈린 공산주의체제였다. 스탈린군은 제2차대전 종결과정에서 동유럽이든, 중앙아시아든 자신들이 군사적으로 점령한 그 어떤 지역에서도 공산주의체제를 만들지 않은 곳이 없었다. 소련군의 점령은 곧 소비에트(soviet)화였던 것이다. 소련이 한반도에 들어온 것은 8월 9일이었다. 미군이 인천에 도착한 9월 8일보다 무려 1개월이나 앞섰다. 동유럽에서 그랬던 것처럼 소련은 미군이 한반도에 오기 이전에 38도선 북쪽지역을 소련의 식민지로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소련군은 38도선을 경계로 8월 24일 경원선 철도를 차단하였고, 25일에는 경의선을 차단하였으며 이 때를 기점으로 모든 도로를 차단하고 남북한간의 통행을 막았다. 미군이 한반도에 들어 오기 이틀 전인 9월 6일에 소련은 전화마저도 단절시키고 우편물 교환을 중단시킴으로써 군사적 무장해제(武裝解除)선을 민족분단(民族分斷)선으로 굳히고 있었다. 1946년 2월에 소련은 북한에 정부를 구성하고 토지사회화 등 공산화초기 단계인 ‘인민민주주의혁명’을 시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해방이후 소련군이 철도 및 통행, 통신을 차단시키기 전까지 우리 한국민들에게 38도선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었다. 경계선에 제약받음 없이 마음대로 오고 갈 수 있는 하나의 나라였던 것이다. 단지 일본군과 대응하고 항복을 받기위해 그었던 편의적인 경계를 스탈린이 포기할 수 없는 공산전체주의 제국의 하나로 만들었고 한민족에게는 그것이 민족분단선으로 굳어진 것이다.
38도선이란 북한 김일성체제와 수정주의 좌파학자들이 주장하는 것과 같은 민족분단선이 아니었다. 그 38도선이 민족 분단선으로 굳어진 것은 점령의 당사자가 스탈린 전체주의체제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북한 전역에서는 매일같이 ‘스탈린 대원수 만세!’를 외쳐야 했다. 스탈린은 조선노동당대회의 명예의장이기도 했다. 만약 한국이 다른 지역처럼 소련이 아닌 나라와 경계를 이루고 있었다면 38도선이란 아무런 문제도 일으키지 않았을 단순한 선이었을 것이다. 이는 미국이 대일본전쟁을 승리로 이끎에 따라 한국과 마찬가지로 함께 해방된 싱가포르나 필리핀,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의 그 어느 나라도 소련의 식민지나 공산체제로 되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한반도 북부에 미친 소련 제국주의의 영향력을 명확히 입증해준다.
한반도의 분단이란 스탈린이 소련의 대일본전 참전 대가로 챙겨 간 것이다. 김일성주의란 스탈린주의의 아류일 뿐이다. 따라서 첫째, 소련이 독-소 불가침조약과 일-소 불가침조약을 파기하고 종전 6일을 앞두고 대일본전에 참전했다는 사실, 둘째 한국이 소련과 국경을 맞닿고 있어 만주국의 관동군 관할지역이 한반도 북부로 확대됨에 따라 한반도 절반이 소련군의 점령 및 무장해제 관할지역으로 편입되었다는 사실, 그리고 셋째는 점령 당사자가 공산 제국주의 국가이자 전체주의를 본질로 하던 소련이었다는 바로 그 사실이 한반도 민족분단을 초래한 것이다. 분단이후의 소련과 스탈린의 모든 대북한 정책이란 위성국가이자 공산주의 제국의 식민지 국가로 만드는 작업이었을 뿐이고 그 후 일어난 한국전쟁이란 공산 제국주의 확산 투쟁의 연장선이자 일환이었을 뿐이다. (kona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