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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克日의 상징’ 白冶 金佐鎭 장군 1.開化思想을 접하다 ⑵

조의선인 |2009.06.13 06:27
조회 408 |추천 0



★ 일본의 조선 침략에 신호탄을 쏜 강화도조약(江華島條約)

 

김좌진(金佐鎭)은 1889년 11월 24일에 충청남도 홍성군 고남면 갈산리에서 김형규(金衡奎)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명여(明汝)이며, 호는 백야(白冶)라고 하였다. 그가 출생할 때 아버지는 25세, 어머니 이씨(李氏)는 26세였으며, 그의 손위로는 여덟살 된 누나 옥출과 네살 된 형 경진이 있었다.

 

그의 가족은 홍성에서 부자로 이름난 양반가문이었다. 그가 출생할 때만 하더라도 90여칸의 큰 기와집에 50여명의 하인을 거느리고 있었다고 전한다.

 

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 때에 대사헌(大司憲)을 지내면서 반청운동(反淸運動)을 벌였던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은 그의 먼 조상이었으며 1884년 갑신정변(甲申政變)을 주도했던 개화파(開化派)의 영수 고균(古筠) 김옥균(金玉均)은 그의 종숙(從叔)으로 알려져 있다.

 

김좌진은 어릴 때부터 옳은 일에는 끝까지 굽히지 않는 씩씩한 기상을 지녔으며 용력이 출중하고 남달리 영특하여 천부적인 장재(將材)라는 칭찬을 들었다. 그러나 그의 나이 세살 때에 아버지가 요절하고 나서 가정의 재정 문제가 조금씩 어려워지기 시작하였다. 자녀들의 교육 문제를 근심하던 그의 어머니는 김좌진이 여덟살이 되자 당시 갈뫼 마을에서 글방을 운영하던 김광호라는 유학자에게 아들의 교육을 맡겼다.

 

김광호는 어린 그에게 일찍이 무관(武官)으로서 자질이 충분하다는 것을 알아보고 육도삼략(六韜三略)과 무경칠서주해(武經七書註解) 같은 병서(兵書)를 가르쳐 주었다. 김좌진이 김광호 문하에서 학문과 무예를 익히고 있던 어느 날에 김광호의 생질(甥姪)인 김석범이 갈뫼 마을에 찾아왔다.

 

당시 갑오경장(甲午更張)으로 조선왕조는 정치·사회·통신·교육 등 전반적인 분야에서 파격적인 개혁이 이루어지면서 반봉건제근대화(反封建制近代化)의 시대에 접어들고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에 맞추어서 김석범도 상투를 자르고 양복 차림으로 외숙부를 찾아왔던 것인데 어린 김좌진은 개화사상(開化思想)을 강조하는 김석범에게 호감을 느끼고 그에게서 나라의 사정과 국제 정세를 듣고 배우기 시작했다.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쇄국정책(鎖國政策)으로 ‘우물 안 개구리’ 신세가 된 조선왕조는 선진문명과 막강한 군사력으로 식민지를 개척하는 제국주의 열강이 한반도에도 눈독을 들이고 있다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러시아·프랑스·미국·영국·독일 등 서양의 강대국들이 동양에서 새로운 무역시장을 확보하기 위해 한반도 진출을 노리고 있었지만 그보다 앞서 한반도를 점령하기 위해 치밀한 침략 계획을 세우고 있었던 나라는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제국주의 대열에 뛰어든 일본이었다.

 

일본은 1867년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이후 모든 행정체계와 군사제도가 서양식으로 뒤바뀌고 나서 정한론(征韓論)이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었다. 일본 외무성은 조선과의 새로운 관계 정립을 위해 사절단을 부산으로 파견해 서계(書契)와 유신 정권의 국서(國書)를 조선 관헌에게 전했다. 그러나 조선 조정은 일본 국왕의 호칭을 ‘천황(天皇) 폐하(陛下)’라고 표현한 점과 조선에서 보낸 인장(印章)을 국서에 찍지 않은 점을 문제삼아 서계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자 기도 다카요시[木戶孝允]·사다 하쿠보[佐田白茅]·야나기하라 사키미츠[柳原前光] 등은 “일본을 상국(上國)으로 인정하지 않는 무례한 조선을 정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야나기하라는 “지금 조선을 정복하여 우리의 영역으로 삼고 중원으로 진출할 수 있는 교두보를 만들지 않으면 다른 나라가 조선을 공취(攻取)할 것이다”면서 누구보다 강하게 조선 침략을 단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고마츠 다테와키[小松帶刀] 등은 먼저 국력을 기르고 조선을 정벌해도 늦지 않다는 ‘선내치후정한론(先內治後征韓論)’을 내세워 반대하였다.

 

그런데 ‘선내치후정한론’의 입장에 선 인물들이 정권을 잡고 유럽의 문물과 제도를 받아들여 국력을 키우자 다시 조선 침략을 거론하게 되었다. 조선의 동래부 관헌들이 부산의 왜관(倭館)에서 밀무역과 암거래를 하는 일본 상인들을 체포해 처벌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이타가키 다이스케[板垣退助] 등은 정한론을 즉각 실천에 옮기자고 주장했고, 일본 외무성은 소에지마 다네오미[副島種臣]를 청나라에 파견해 직례총독(直隷總督) 이홍장(李鴻章)과 회담을 갖게 했다.

 

일본은 정한론을 실천에 옮길 경우 청나라가 조선에 군사적 지원을 할 것을 우려하고 있었지만 청나라에서는 “조선이 비록 우리의 번속(藩屬)이기는 하지만 내정과 외교는 그 스스로 하도록 내버려 두고 우리 조정에서 조선의 일에 대해 간여하였던 적이 없다”는 입장을 일본 측에 전했다. 때마침 조선에서 척왜척화노선(斥倭斥和路線)을 고수하던 흥선대원군이 실각하고 고종(高宗) 군왕이 친정(親政)하면서 대외정책에 변화가 일어나자 일본은 1874년 손쉬운 타이완을 정복하고 이듬해에는 무력위협(武力威脅)으로 조선을 개항시키자는 계획에 착수했다.

 

1875년 9월 20일에 일본 군함 운요호[雲揚號]가 월미도 앞바다에 나타나 강화도 손돌목에 정박하였다. 정체불명의 군함이 나타나자 초지진(草芝鎭) 포대에서 포탄이 발사되었는데, 기다렸다는 듯이 운양호에서도 포격을 퍼부었다. 운요호가 제물포 해안의 영종진(永宗鎭)에 포격을 가하며 상륙작전을 벌였는데, 이곳을 지키던 6백여명의 수비병은 수세에 몰려 도망쳤다. 일본 군인들은 민간인을 닥치는 대로 살해하고 관아의 건물과 민가에 불을 질러 순식간에 영종도 전체가 잿더미로 변하고 말았다.

 

이때까지도 조정과 현지 지휘관들은 그 군함이 어느 나라 해군 소속인지조차 확실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운요호에는 일장기(日章旗)가 펄럭이고 있었는데 이것을 알아보지 못했다. 심지어 이때 죽은 군인과 민간인의 숫자도 밝혀져 있지 않다. 운요호의 이노우에 함장은 나가사키[長崎]로 돌아가 전과를 보고하면서 식수가 떨어져 물을 찾았는데 초지진 포대에서 먼저 발포하였기 때문에 응전하였다고 얼버무리고 사상자의 숫자를 밝히지 않았다. 한국 측 사료인 고종황제실록(高宗皇帝實錄)에도 일본 군인들이 저지른 만행은 적당히 얼버무려 기록했기 때문에 정확성이 떨어진다. 하지만 여러 정황으로 보아 운요호사건(雲揚號事件) 희생자는 신미양요(辛未洋擾) 당시와 매우 비슷했을 것으로 보인다.

 

1876년 정초에 일본 군함 3척과 수송선 2척 등 7척으로 구성된 함대가 남해를 거슬러 올라왔다. 이 군함에는 특명전권대신(特命全權大臣) 구로다 기요타카[黑田淸隆]와 부전권대신의 직함을 가진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와 수행원 30명, 군인 8백명이 타고 있었다. 함대 가운데 4척은 초량 왜관의 앞바다에 정박하고 3척은 쾌속으로 북쪽으로 항진하여 남양만 당진포에 이르렀다.

 

의정부(議政府)에서는 신헌(申櫶)을 접견대관으로, 윤자승(尹滋承)을 접견부관으로 삼아 강화도 연무당(鍊武堂)에서 정식 회담을 열게 했다. 일본의 사절단은 중무장한 군인 4백여명을 거느리고 강화도로 들어왔는데, 머리를 짧게 깎고 서양식 모자를 쓰고 양복을 입은 그들의 복장이 조선인들의 흥미를 끌었다. 일본 군인들은 차양(遮陽)이 좁은 모자를 쓰고 짙은 남색 군복을 입었으며, 등에는 행낭을 지고 가죽신을 신었는데 손에는 착검(着劒)을 한 장총(長銃)을 들고 있었다. 이때 섬에 사는 부녀자들이 모두 숨어 버려 일본 사절단과 군인들은 여자 얼굴이라곤 단 한명도 보지 못하였다. 그들은 조정에서 일본인들이 여자를 다치게 할까봐 금령을 내려 숨게 했거나 자기네들을 짐승쯤으로 여겨 도망쳤다고 생각하며 몹시 불쾌해했다. 조선 여자들은 어느 장소에서건 남녀유별(男女有別)의 가르침을 지켜 내외(內外)를 한 것인데 그들은 조선의 사정을 속속들이 염탐하면서도 이러한 풍습에는 어두웠다.

 

일본 사절 구로다는 조선 대표 신헌에게 왜 일본의 군함에 먼저 포격을 했느냐고 따졌다. 신헌은 일본 군인들이 영종도를 침범해 분탕질한 이유를 물었으나 구로다는 이에 대해 대답하지 않은 채 통상조약(通商條約)을 빨리 체결하자고 독촉했다. 일본 측은 군함을 제물포에 정박시키고 인천, 부평 등지에 상륙할 태세를 취했다. 조약은 만국공법(萬國公法)에 따르는 것이라면서 일이 뜻대로 한 되면 일본의 군함 80여척이 조선을 공격할 것이라는 협박까지 했다. 

 

고종 군왕은 이유원(李裕元)·김병학(金炳學)·박규수(朴珪壽)·이최응(李最應)·김병국(金炳國) 등 전현임대신들을 불러 회의를 열었다. 일본의 요구를 받아들여야 하느냐, 거부하고 전쟁을 해야 하느냐 여부를 놓고 대신들은 논쟁을 벌였으나 당시 조선은 일본의 근대적인 군사력을 대적할 힘이 없었다. 결국 일본의 공갈협박에 눌려 반대하지 못하고 일본 측이 제시한 12개 조항을 놓고 논의를 했다.

 

첫번째, 조선은 자주권을 가진 나라로 일본과 더불어 평등의 권리를 보유한다. 이 뒤부터 두 나라는 화친 관계를 표시하기 위해 동등의 예로 대우한다.

 

둘째, 일본 정부는 앞으로 15개월 뒤부터 수시로 사신을 파견하여 한양에 온다. 이와 마찬가지로 조선 조정에서도 사신을 파견하여 도쿄로 간다.

 

셋째, 이후 두 나라의 왕래 공문은 일본에서는 그 국문을 쓰되 지금부터 10년 동안 한문으로 번역하며, 조선에서는 한문을 쓴다.

 

넷째, 초량의 일본 공관의 관례를 폐지하고 두 항구를 열어 일본인이 거주하며 통상활동을 벌이도록 허가한다.

 

다섯째, 조선의 항구 두 곳을 개항하되 2월부터 기산하여 20개월로 한다.

 

여섯째, 일본 선박들이 조선 연해에서 왕래할 때 모든 편리를 제공한다.

 

일곱째, 일본 선박들의 조선 연해 측량과 수심 측정 등 해도 작성을 자유롭게 보장한다.

 

여덟째, 조선 개항장에 일본의 관리를 파견하여 교섭사무를 보게 한다.

 

아홉째, 두 나라 사람들은 임의로 무역에 종사하되 조금도 간섭하지 않는다.

 

열째, 두 나라 사람들이 범죄를 저지르면 모두 본국으로 돌려보내 심판한다.

 

열한째, 6개월안에 통상장정(通商章程)을 만들되 회담장소를 경성이나 강화도로 지정한다.

 

열두째, 양국은 서로 준수를 다짐하며 조약문 두본을 작성하여 각각 보관한다.

 

그런데 조선 측 대표들이 처음부터 이 내용을 그대로 합의해 준 것은 아니다. 조선 측에서는 합의 조건으로 금칙(禁則) 6개조를 제시하였다.

 

첫째, 상평전(常平錢)의 사용을 금지한다.

 

둘째, 미곡의 무역을 금지한다.

 

셋째, 무역은 물물교환의 방법으로 하되 되걸이 고리대금업을 금지한다.

 

넷째, 일본과만 수호관계를 맺되 다른 나라를 끌어들여서는 안 된다.

 

다섯째, 아편이나 성서(聖書)를 끌어들여서는 안 된다.

 

여섯째, 망명을 목적으로 표류한 자들은 서로 적발하여 돌려보내야 한다.

 

일본 측에서는 금칙 6개조는 구두로 합의하고 기본조약문에는 밝히지 않는다고 우겨 그렇게 하기로 결정했다.

 

이렇게 하여 2월 3일, 양국은 공식 합의문을 발표했는데 이것이 바로 강화도조약(江華島條約)이다. 조약문의 주요 내용을 살펴보면, 찻째 조항에 조선이 자주국임을 밝힌 것은 청나라의 간섭을 배제하기 위한 것이다. 그동안 조선은 외교 교섭을 청나라에 미루었기 때문에 외국은 조선과의 교섭을 청나라에 의뢰해왔다. 일본은 청나라의 간섭을 배제하여 자기네 뜻대로 이권을 챙기겠다는 의도를 드러낸 것이다. 그리고 사신을 교환하여 국제사회로부터 합법성을 보장받으려 하였으며, 개항장을 지정하여 자유무역을 통해 일본 세력이 침투할 길을 열었다. 치외법권을 인정받아 조선의 자주권을 침해하고 자기네들의 활동에 자유를 보장받았다. 해도 작성의 권리를 인정받은 것은 침략의 도구로 써먹기 위한 것이었다.

 

경제적, 군사적으로도 열등한 조선은 이 조약으로 말미암아 불평등한 관계로 시장을 개방하는 꼴이 되었다. 더욱이 이 해 7월에 발표한 조일무역규칙(朝日貿易規則)에는 개항장에서 일본의 화폐를 유통시키고 몇년간 수출입 상품에 면세권을 부여한다고 규정되어 있다. 조선에서 일본에 수출할 수 있는 물품이 별로 없는 실정에서 무관세는 불평등조약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치외법권과 무관세와 일본 화폐의 유통은 일본 자본주의가 조선에 진출하는 기본 틀이 되었다. 세계 자본주의의 후발주자인 일본은 구미 열강에 앞서 함포외교로 조선의 문을 열게 하여 다른 나라에 앞서 여러 가지 권리를 보장받았다.

 

그러나 조선에서 제시한 금칙 6개조는 구두로 보장받았으나 거의 지켜지지 않은 허울뿐인 약조가 되었다. 특히 쌀은 단계를 거쳐 일본으로 대량 수출되었다. 기독교 선교의 자유는 한동안 허락하지 않았다. 천주교 조선교구 제6대 교구장으로 잠입한 리델 주교를 1878년 체포하여 죽이지 않고 추방한 경우처럼 큰 탄압을 가하지 않았을 뿐이다. 중국이나 동남아시아와는 달리 아편만은 공식적으로 수입을 금지한 좋은 선례를 남겼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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