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급진개화주의(急進開化主義)의 실패, 갑신정변(甲申政變)
일본이 서양식 근대적인 군사력으로 조선을 위협하여 강압적으로 체결한 1876년 강화도조약(江華島條約)은 당시 집권 세력인 수구당(守舊黨)과 대립하여 청나라와의 종속관계를 끊고 일본 제국의 유신(維新)을 본받아 내정을 개혁하면서 자주적 독립국가를 수립하려는 뜻을 가진 개화당(開化黨)이라는 새로운 정치세력에게 커다란 자극제가 되었다. 김옥균(金玉均)·박영효(朴泳孝)·서광범(徐光範)·서재필(徐載弼)·홍영식(洪英植) 등은 일찌기 서양의 문물을 소개한 중국의 신서(新書)인 해국도지(海國圖志)·영환지략(瀛環之略) 등을 읽고 조선의 형세가 매우 위급하여 시급한 변혁(變革)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개화당의 청년 정치인들은 충의계(忠義契)라는 집단을 구성하여 동지를 규합하면서 개혁의 수단으로 당시 서구문물에 관심을 보이던 고종 군왕을 개명화시켜 평화적인 개혁을 추구하려 하였다. 특히 1880년과 1881년에 걸쳐 전개된 일본에 대한 수신사(修信使)와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 파견, 청나라에 대한 영선사(領選使) 파견은 개화당이 세계정세의 흐름과 새로운 서구문명을 직접 확인하고 배우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와 함께 개화당은 양반의 자제뿐만 아니라 광범위한 계층의 청년들을 모아 외국에 유학보내어 근대적 제도와 문물을 배워오게 하였는데, 이들은 일본의 군사사관학교와 경응의숙(慶應義孰) 등에 유학하여 근대적인 군사학과 학문, 사상을 배웠다.
1883년 8월에는 박영효의 건의에 따라 박문국(博文局)이 설치되어 한성순보(漢城旬報)를 발행, 나라 안팎의 정세는 물론 서양 국가의 입헌군주제(立憲君主制)와 삼권분립제(三權分立制)의 우월성을 소개·선전하였다. 이런 가운데 개화파는 점차 조선 개혁의 모델로서 일본의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을 주목하게 되었다.
김옥균을 비롯한 급진개화주의자(急進開化主義者)들은 친청수구적(親淸守舊的)인 여흥(驪興) 민씨(閔氏) 일파와 절대 타협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서양의 과학기술뿐만 아니라 근대적인 사상·제도까지 수용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던 급진개화주의자들은 개혁의 관건적 문제로서 여흥 민씨 일파를 지원하던 청(淸)에 대한 사대관계의 종식을 우선과제로 삼았다.
쇄국정책을 고수했다가 1873년에 고종의 친정(親政) 선포로 정권에서 물러났던 흥선대원군이 1882년 6월 임오군란(壬午軍亂)을 계기로 재집권하게 되자 여흥 민씨 일파는 청나라에 구원을 요청하였다. 이에 호응하여 청나라의 군사 3천여명이 조선에 진주해 흥선대원군을 자국으로 납치하여 보정부(保定府)에 유폐하였다. 이 사건은 조선을 청나라의 종속국 상태에서 완전독립시키려던 개화당의 계획에 찬물을 끼얹은 일이었다.
그러자 김옥균을 중심으로 한 개화당은 청군을 몰아내고 조국의 완전독립을 성취하기 위해 먼저 정권을 장악하여 ‘위로부터의 대개혁’을 단행하기로 하고 1883년부터 무력(武力)으로 쿠데타를 일으킬 준비를 시작했다.
1884년 봄부터 청국과 프랑스 사이에 안남(安南)지방에 대한 영유권 문제를 둘러싸고 전운이 일자 청국 조정에서는 조선에 주둔시켰던 3천 군사 가운데 1천 5백여명을 안남전선으로 이동시켰다. 그 후 청국이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패색(敗色)이 짙어지자 개화당은 청국이 안남전선에 신경쓰느라 조선에서 대규모 군사 행동을 할 여력이 없다고 판단하여 9월에 정변을 단행하기로 결정하였다.
그 때 10월에 조선 주재 일본공사인 다케조에 신이치로[竹添進一郎]가 공사관 경비대 150명의 병력과 일본 돈 3백만엔을 빌려주겠다고 호의를 베풀었으므로 개화당으로서는 부족한 무력을 보충하고 청군을 견제하기 위한 수단을 얻게 되었다.
개화당은 마침내 1884년 12월 4일에 우정국(郵政局) 낙성식 축하연을 이용하여 여흥 민씨 일파의 거물인 민태호(閔台鎬)·민영목(閔泳穆) 등을 제거하고 국왕과 왕비를 경우궁(景祐宮)으로 피신시켰다. 그리고 새로운 내각 수립에 착수하여 영의정(領議政)에 이재원(李載元), 좌의정(左議政)에 홍영식, 전후영사(前後營使) 겸 좌포장(左捕將)에 박영효, 좌우영사(左右營使) 겸 우포장(右捕將)에 서광범, 좌찬성(左贊成) 겸 우참찬(右參贊)에 이재면(李載冕), 이조판서(吏曹判書) 겸 홍문관(弘文館) 제학(提學)에 신기선(申箕善), 예조판서(禮曹判書)에 김윤식(金允植),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이재완(李載完), 형조판서(刑曹判書)에 윤웅렬, 공조판서(工曹判書)에 홍순형(洪淳馨), 호조참판에 김옥균, 병조참판 겸 정령관(正領官)에 서재필, 도승지(都承旨)에 박영교(朴泳敎) 등이 선임되었다.
개화당의 정변에 놀란 조선 주둔 청군 사령관 원세개(袁世凱)는 개화당에 합세하는 척 가장한 심상훈(沈相薰)을 경우궁으로 들여보내 민비와 연락을 취하도록 하고 개화당을 토벌하는 계획을 전하도록 하였다. 이로써 청군의 계획을 알게 된 민씨 왕비는 경우궁이 좁아 불편하다는 핑계를 대며 창덕궁(昌德宮)으로 환궁을 적극 주장하자 국왕도 이를 지지하였다.
김옥균은 창덕궁은 너무 넓어 개화당의 소수 병력으로 방어에 극히 불리한 점을 들어 반대의사를 분명히 하였지만, 고종의 명령에 거역할 수 없어 결국 국왕과 왕비의 거처는 창덕궁으로 옮겨졌다. 이것은 일본군 병력으로 청군의 공격을 충분히 물리칠 수 있다고 장담한 다케조에의 호언을 믿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정변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한 개화당은 그들의 새로운 개혁 정치의 지침인 혁신정강(革新政綱)을 제정, 공포하였다. 김옥균의 저서인 갑신일록(甲申日錄)에는 혁신정강의 14개 조항이 수록되어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번째 청나라는 대원군을 가까운 시일내에 돌려보낼 것 그리고 조공하는 허례를 폐지할 것
두번째 문벌을 폐지하여 인민 평등의 권(權)을 제정하고, 사람의 능력으로써 관직을 택하게 하지, 관직으로써 사람을 택하지 않을 것
세번째 전국의 지조법(地租法)을 개혁하여 간사한 관리들을 근절하고 백성들의 곤란을 구하며 겸하여 국가 재정을 유족하게 할 것
네번째 내시부(內侍府)를 폐지하고 그 중에서 재능 있는 자가 있으면 등용할 것
다섯번째 그 동안 국가에 해독을 끼친 탐관오리 중에서 심한 자는 처벌할 것
여섯번째 각 도의 환자제도(還上制度)는 영구히 폐지할 것
일곱번째 규장각(奎章閣)을 폐지할 것
여덟번째 순사제도(巡査制度)를 시급히 설치하여 도적을 방지할 것
아홉번째 혜상공국(惠商公局)을 폐지할 것
열번째 그 동안 유배(流刑), 금고(禁錮)된 사람들을 다시 조사하여 석방할 것
열한번째 4영(營)을 합하여 1영을 만들고, 영 중에서 장정을 선발하여 근위대(近衛隊)를 시급히 설치할 것
열두번째 모든 대신과 참찬은 합문(閣門) 안의 의정소(議政所)에서 매일 회의를 하여 정사를 결정한 뒤에 국왕에게 품한 다음 정령(政令)을 공포하여 정사를 집행할 것
열세번째 모든 국가 재정은 호조(戶曹)로 하여금 관할하게 하며 그 밖의 일체의 재무 관청은 폐지할 것
열네번째 조정은 육조 외에 무릇 불필요한 관청에 속하는 것은 모두 폐지하고 대신과 참찬으로 하여금 토의하여 처리하게 할 것
갑신정변의 혁신정강 14개조는 당시 개화당 정권의 개혁 정치의 의지와 기본 내용을 집약적으로 공포한 것이었다.
고종이 혁신 정강을 재결하고 개혁 정치 실시 조서를 내린 12월 6일 오후 3시에 청군 1천 5백여명은 두 부대로 나뉘어 창덕궁의 돈화문(敦化門)과 선인문으로 각각 침투하여 들어왔다. 친군영(親軍營)의 조선 관군은 이에 대항하여 응전하였으나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많은 사상자를 내며 패퇴하였고, 개화당을 돕겠다고 나섰던 일본군은 제대로 전투도 하지 않고 철수해 버렸다. 창덕궁의 넓은 지역에서 개화당의 장사(壯士) 50여명과 사관생도로 구성된 내위군(內衛軍)만으로는 청군의 침입을 막아낼 수 없었다.
김옥균·박영효·서광범·서재필 등 9명은 청군의 추격을 피해 일본으로 망명하였고, 사관생도 7명과 함께 고종을 호위하여 창덕궁을 빠져 나가려던 홍영식·박영교는 청군에게 붙잡혀 피살되었다. 그 뒤 국내에 남은 개화당 인사들은 여흥 민씨 일파를 중심으로 한 수구당에 의해 철저히 색출되어 수십명이 피살됨으로써 갑신정변의 개화당 세력은 몰락하게 되었다.
갑신정변이 ‘3일 천하(三日天下)’에 그치게 된 것은 청군의 불법적인 궁궐 침입과 민중의 지지 결여, 민씨 왕비가 청군과 긴밀하게 연락하고 있는 사실을 제대로 탐지하지 못한 점 등이 원인으로 볼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일본 측이 개화당의 개혁정책이 실현될 수 없도록 상황을 조작했던 점도 실패에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다.
일본 측은 자주성이 강한 개화당이 정권을 잡아 조선을 근대국가로 변모시키면 자신들이 쉽게 조선의 내정에 간섭하기 힘들 것으로 판단하고 갑신정변이 실패로 끝나도록 상황을 조작했던 것이었다. 다케조에가 보낸 일본군이 청군을 막는데 협조하지 않고 그냥 철수한 것도 수구당 정권이 유지되면 도리어 조선을 다루기가 더 쉽다는 판단을 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중세국가체제를 청산하고 자주적인 근대국가를 건설하려는 뜻으로 일어난 갑신정변이 실패한 때는 김좌진이 홍성에서 출생하기 5년 전쯤의 일이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