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反日獨立運動과 大韓民國臨時政府 1.임시정부의 성립과 초기 활동

개마기사단 |2009.06.17 13:14
조회 165 |추천 0

한국 민족해방운동(民族解放運動)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는 3·1반일시위운동(三一反日示威運動)을 통하여 민족의 독립이 선언되었기 때문에 민족 지도자들은 정부라는 조직체계를 갖추어 주권국가로서의 명맥을 이어 나가고자 하였다. 따라서 임시정부는 한편으로는 한국 민족의 주권을 대표하는 기관이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 민족의 주권을 되찾기 위한 민족해방운동의 대표적인 기구였다.

 

박은식(朴殷植)은 이러한 임시정부 수립의 의의에 대해 “우리 민족은 일본의 기반(羈絆)을 이탈하기 위하여 혁명운동(革命運動)을 하고 독립을 세계에 선포하였으며 자결주의(自決主義)를 발표한 바 있다. 혁명사업(革命事業)은 이제 막 시작한 것이지 결과에 도달한 것이 아니다. 고로 반드시 임시정부라는 최고 기관이 있어 국민의 표준이 되며 국교상(國交上)의 지위를 갖도록 하여야 함은 세계혁명사(世界革命史)의 관례이기도 하다.”고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이 임시정부는 한국 민족의 주권을 대표하는 기관이기도 하지만 현실적인 의미에서는 주권회복(主權恢復)이라는 과제에 더욱 충실해야 할 독립운동기관이었다. 즉 한국인 전체의 의사를 수렴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할 최고의 항일투쟁(抗日鬪爭) 지도부였던 것이다.

 

여기서는 먼저 이러한 임시정부의 초기 수립 과정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임시정부와 3·1운동의 연관성, 임시정부가 가지는 정치사적 의의, 그리고 임시정부가 지향하고 있는 근대민족국가 건설에 대한 의지 등을 주요 대상으로 삼고자 한다. 그리고 임시정부는 주로 해외에서 조직되고 활동하였기 때문에, 그리고 그 시기는 국제정치의 역학관계가 크게 작용하였던 시기이기 때문에 당시의 국제정세에 대한 대체적인 이해도 수반되어야 할 것이다.

 

⑴ 3·1반일시위운동과 국내외 임시정부의 수립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이었던 백범(白凡) 김구(金九)는 3·1반일시위운동이 한국 민족해방운동의 정신적 기초였음을 강조하면서 그 의의(意義)를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3·1대혁명은 한국 민족의 부흥과 재생의 운동이었다. 바꾸어 말하면 이 운동은 단순한 반일복국운동(反日復國運動)이 아니라 우리 민족이 오천년 이래로 연마하고 양성해온 민족정기와 민족의식이 이 운동을 통하여 다시 한번 발양됨으로써 민족부흥과 국가재생의 정신적 기초가 정립되는 운동이었다. 따라서 우리가 삼일절(三一節)을 기념함에 있어서는 반드시 3·1대혁명정신이 천명되고 고양되어야 할 것이다. 3·1대혁명의 가장 기본적인 정신은 물론 반일독립(反日獨立)과 민주자유(民主自由)라 하겠지만 여기에는 다음과 같이 네가지 내용이 포괄되어 있는 것으로 해석하여야 할 것이다. 첫째는 자존(自存)과 공존정신(共存精神)이요, 둘째는 민주(民主)와 단결정신(團結精神)이요, 셋째는 기절(氣節)과 도의정신(道義精神)이요, 넷째는 자신(自信)과 자존정신(自存精神)이다. 이러한 네가지 요점이 바로 3·1대혁명정신의 내용이며 이것이 바로 우리 민족 고유의 우수한 문화전통이기도 하다.’

 

이러한 정신적 바탕하에서 1919년 3월 1일 독립이 선언되었고 그 독립을 실현하는 기구로서 임시정부가 조직되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3·1운동과 임시정부의 수립을 연관시키기 위해서는 당시의 국제정세와 한국 민족의 3·1운동 준비과정에 관한 이해가 필요할 것 같다.

 

먼저 국제정치적인 측면에서 보면 1917년의 러시아 혁명 발생 이후 소련은 러시아 제국주의 정권이 획득한 약소민족국가에 대한 일체의 특권을 포기하고 피압박민족해방운동을 원조할 것을 선언하였으며, 1918년 1월경에는 미국의 윌슨(Woodrow Thomas Wilson) 대통령이 14개조의 평화의견서를 발표한 바 있다. 이에 따라 1917년부터 1919년 사이에 유럽의 약소국가 및 민족의 해방운동이 급속히 진행되어 1917년 폴란드의 독립, 1919년 이집트와 불가리아의 독립, 오스트리아와 독일의 혁명운동 등이 나타나게 되었으며 중국에서는 손문(孫文) 선생의 영도하에 중국의 민주운동이 고조되고 있었다.

 

한국인들은 이러한 국제정치적 상황을 충분히 활용하고자 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을때 한국인들은 세계대전의 종결이 한국 독립운동의 좋은 기회로 작용할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일본이 참여한 협상국과 전쟁을 하고 있던 독일에 대해 우호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그 이유인즉 독일도 제국주의 국가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일본의 세력을 한반도에서 몰아내기 위해서는 일본의 패배와 고립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결과는 협상국의 승리로 끝나고 오히려 일본은 승전국의 일원으로서 당당한 지위를 누리게 되었다. 이때 미국 대통령이 패전국 식민지의 처리원칙으로 민족자결주의를 제시하자 이를 기회로 대대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고자 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의 전후처리 원칙으로 제시된 민족자결주의가 꼭 한반도에 적용되리라는 보장은 없었지만 이러한 국제정세의 변동기를 능동적으로 포착하여 이용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한편 국내에서는 당시 일본인들의 가혹한 착취가 계속되고 있었다. 일제의 조선 병탄이 약탈과 착취를 위한 것이었으므로 경술병탄늑약(庚戌倂呑勒約) 이후 소위 총독정치하에서 무력과 강압수단을 이용한 무단통치로서 전민족을 대상으로 위협과 약탈정책을 자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한국 민족 전체는 신분·직업·종교 등을 불문하고 일제(日帝)와는 병존할 수 없다는 인식을 자연히 같이하게 되었으며 또한 전민족이 반일통일단결(反日統一團結)을 이룰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3·1운동은 특정 종교나 특정 계층에 국한된 민중운동이 아니라 전민족이 함께 준비하고 참여했던 운동이었다.

 

3·1운동에 대한 준비는 해외에서 먼저 진행되었다. 동학혁명운동(東學革命運動)·반일의병항쟁(反日義兵抗爭)·신민회 애국계몽운동(新民會愛國啓蒙運動) 등을 통해 항일투쟁(抗日鬪爭)의 맥을 면면히 이어오던 많은 애국지사들이 해외로 진출하여 독립의 꿈을 키워가고 있었으며 일제의 한반도 병탄 이후 화폐정리(貨幣整理)·토지조사사업(土地調査事業) 등으로 토지를 잃게 된 많은 농민들도 고향을 등지고 해외로 이주함에 따라 해외교민의 수가 더욱 늘어나자 이들은 조직적인 운동을 전개할 수 있게 되었다.

 

먼저 상해에서는 중국의 신해혁명(辛亥革命)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고 있던 한국인들이 중심이 되어 동제사(同濟社)를 결성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경술병탄늑약 이후에는 상해라는 국제도시의 성격을 이용하여 많은 애국지사들이 상해로 운집하여 그 조직은 더욱 강해지고 있었다. 이들은 1917년 스웨덴의 수도 스톡홀룸에서 열린 만국사회당 대회에 대표를 파견하여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기도 하였으며, 1918년에는 모스크바에서 열린 원동(遠東) 약소민족 대회에도 대표를 참가시킨 바 있다. 그러나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가 전해지고 1918년 11월에는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파리 강화회의의 소식을 접하게 되자 국내외에서 대대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고자 하였다. 동제사는 그 하부 조직인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의 명의로 미국 대통령과 파리 강화회의에 참석한 열국 대표들에게 진정서를 보내는 한편 김규식(金奎植)을 한국 민족대표로 파리에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선우혁(鮮于赫)·김철(金撤)·서병호(徐炳浩)·백남규(白南奎) 등과 김규식의 아내인 김순애(金順愛)를 국내에 파견하여 파리 강화회의의 소식을 전하고 대규모 독립운동 전개에 대한 연락을 취하였다. 또한 일본에는 조용은(趙鏞殷)·장덕수(張德秀) 등을 파견하여 재일한인(在日韓人) 유학생들과 연락을 취하는 한편 이들이 독립선언(獨立宣言)을 발표하려고 하자 이광수(李光洙)를 일본에 파견하여 독립선언문을 기초하게 하였다.

 

한편 역사적으로나 지리적으로나 한반도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던 만주와 노령(露領) 연해주 지방은 해외에서 가장 많은 한국인이 거주한 지역으로 일찍부터 조직적인 독립운동이 전개되고 있었다. 이들 해외거주 동포들은 자신이 국외에서 생활하게 된 것 자체가 일본 제국주의 세력의 조선 식민지 지배 때문이라고 생각하였으며 해외에서도 계속 일본의 간섭과 침탈을 받아왔기 때문에 일본에 대한 적개심이 국내에 결코 뒤지지 않았다. 이들은 한인촌(韓人村)을 형성하고 자치조직을 만들어 한국인들의 권익옹호를 도모하는 한편 이 자치조직을 해외 독립운동의 기반으로 삼았다.

 

먼저 신민회(新民會)의 해외 독립운동 기지 건설 계획에 의해 1911년 이상룡(李相龍)·이회영(李會榮)·이시영(李始榮)·이동녕(李東寧) 등이 주동이 되어 경학사(耕學社)가 유하현(柳河縣)에서 결성되었으며, 1912년에는 이를 부민단(扶民團)으로 개칭하여 남만주일대의 독립운동 근거지 확보에 노력하였다. 여기에는 군사학교로서의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가 설립되어 근로와 함께 산업·교육을 우선하는 군사교육을 병행하였다. 그리고 3·1운동 이후에는 유하현·통화현(通化縣)·흥경현(興京縣)·환인현(桓仁縣)·집안현(輯安縣) 등지의 한국인사회를 총망라하여 한족회(韓族會)를 조직하고 그 산하에 군정부(軍政府)를 두어 무력독립운동(武力獨立運動)을 준비하였다.

 

이외에도 의병대장 출신의 애국지사들은 생계와 단합을 위해 보약사(保約社)·향약계(鄕約契)·농무계(農務契)·포수단(砲手團) 등을 조직하고 있었는데 이들도 3·1운동 직후인 1919년 4월에 조직통합을 이루어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을 결성하고 국내진공작전(國內進攻作戰)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북만주와 노령지방에서는 이보다 더욱 많은 한국 독립운동 단체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이들은 3·1운동 직전에 먼저 무오독립선언서(戊午獨立宣言書)를 발표하였다. 이 선언서는 만주와 노령의 독립운동 단체들이 중심이 되어 발표되었음에도 그 명의는 국내와 만주, 노령, 미주, 중국 관내 등지에서 활동하고 있던 김교헌(金敎獻)·김동삼(金東三)·신규식(申圭植)·이상룡(李相龍)·윤세복(尹世復)·이동녕(李東寧)·신채호(申采浩)·김좌진(金佐鎭)·안창호(安昌浩)·이동휘(李東輝)·조소앙(趙素昻) 등 저명한 독립운동가 39명의 것이었던 점으로 미루어 보아 당시의 독립운동가들은 3·1반일시위운동(三一反日示威運動)의 시작을 알리는 기미독립선언서(己未獨立宣言書) 이전에 이미 긴밀한 유대관계를 갖고 있었다고 하겠다. 특히 노령의 한국인사회를 대표하던 전로한족중앙총회(全露韓族中央總會)는 파리 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하기로 결정한 바 있으며 1919년 2월에 중앙총회가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로 발전한 뒤에는 윤해(尹海)·고창일(高昌一)을 파리 강화회의에 파견하여 상해의 대표인 김규식과 합류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만주와 노령의 독립운동은 하와이와 미주의 독립운동 세력과 긴밀히 연락되고 있었으므로 결국에는 한국인이 거주하는 모든 지역에서 3·1운동에 대한 준비가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국내에서 기미독립선언서가 발표된 직후에 세계 각지에서 대규모의 반일시위운동(反日示威運動)이 전개된 것은 이를 명백히 증명하는 것이라 하겠다.

 

이러한 사전준비 끝에 전민족의 참여하에 일어난 3·1반일시위운동은 한국독립운동사(韓國獨立運動史)에서 하나의 분수령을 이루는 것이었다. 3·1운동은 국가지상, 민족지상의 기치 아래에 한국의 각 종교단체, 지식인층, 노동자, 농민 등 전민족 각계층이 단결하여 반일민족통일진선(反日民族統一陳線)의 형태를 취한 운동이었다.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의 인식논리를 빌리자면, “3·1운동은 한국 민족의 정당한 생존과 발전을 위하여, 국가지상의 정신을 관철하며 공존공영(共存共榮)의 신세계를 창조하기 위하여 정의(正義)와 인도(人道)를 제창한 반(反)파시스트 투쟁이니 그 조직은 자못 현대적이며 그 발동은 순전히 민족적 양심에 기인한 것이었다”라고 하고 있다. 3·1운동은 한국 민족의 양심의 발로인 동시에 세계인류의 양심을 일깨우려는 정의와 인도의 운동이었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3·1운동의 성과는 진정한 민족운동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동시에 민주주의적 지도정신을 건립하여 이후의 독립운동을 더 높은 단계로 제고시켰으며 한국 민족해방운동(民族解放運動)의 귀감이 되었다는 사실일 것이다. 물론 현상적으로 볼 때 3·1운동은 정치적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일본의 세력은 한국인들의 혁명역량을 능가하고 있었으며 한국인들에 대한 국제적인 이해는 부족하였고 협조는 없었다. 특히 3·1운동을 영도한 지식인층의 운동역량이 일제의 탄압에 비하여 박약했고 정치상 엄밀한 조직도 존재하지 않았으며 풍부한 경험도 또한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19년말까지 전국 각지에서 계속된 3·1운동은 그 과정에서 임시정부를 수립하게 함으로써 독립운동상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해 주었다. 

  

한국의 임시정부로서 가장 먼저 수립된 것은 노령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전로한족중앙총회가 자체개편한 대한국민의회이다. 대한국민의회는 국내에서 기미독립선언이 발표된 직후 노령은 물론 만주 지방의 독립운동가들도 소집하여 3월 17일 성대한 경축대회를 개최하는 동시에 독립선언을 발표하였다. 이어서 3월 21일에는 민족자결주의에 기인한 한국인들의 정당한 자주독립의 주장, 일본의 통치 철폐 주장, 파리 강화회의에 독립 정부 승인 요구와 국제연맹 가입, 독립운동의 실정과 정부 수립의 사실을 각국에 통고, 이상의 목적이 달성되지 못할때에는 대일선전포고(對日宣戰布告) 등의 5개조에 달하는 결의문을 채택하고 손병희(孫秉熙)를 대통령, 이승만(李承晩)을 국무총리로 추대하는 정부조직을 발표하였다. 비록 국가기본법을 의미하는 임시헌장(臨時憲章) 등의 어휘가 사용되지는 않았지만 결의안 제3항에서 파리 강화회의에 ‘정부 건설의 승인을 요구’하였으며 제4항에서 ‘각국 정부에 정부 건설의 사실을 통지하여 우리의 주권을 주장’한다고 한 것으로 보아 대한국민의회는 임시정부로서의 역할을 스스로 인정하고 있었다고 하겠다. 특히 경술병탄늑약(庚戌倂呑勒約) 전해에 유인석(柳麟錫)·이상설(李相卨) 등 국내에서 항전하다가 국외로 밀려난 지사들은 노령지방에 집결하여 대한국민의회 조직 이후에도 군사교육부를 설치하고, 만주와 노령지방에서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이동휘(李東輝)를 군무총장으로 선임하여 대일혈전(對日血戰)의 전개를 천명하고 있었다.  

 

한편 3·1반일시위운동에 대한 준비가 가장 조직적으로 전개되었던 상해에서는 1천여명의 혁명지사들이 운집한 가운데 국내외 혁명세력을 통일·조직하며 현재의 혁명을 장래로 계속 발전시키기 위하여, 또 민족혁명을 국제적으로 연결시키기 위하여 한국 독립을 목표로 하는 최고 기관을 건립하자는 건의를 하였다. 여기에는 동경(東京)에서 온 최근우(崔謹愚)·이광수(李光洙), 미주(美州)지역에서 온 위임대표 선우혁(鮮于爀), 노령(露領) 대표인 이동녕(李東寧)·조성환(曺成煥)·조완구(趙琬九), 동북삼성(東北三省) 대표인 김동삼(金東三)·이회영(李會榮)·이시영(李始榮)·조소앙(趙素昻)·김대지(金大地), 상해(上海)에서 활동하고 있던 여운형(呂運亨)·신석우(申錫雨), 국내대표인 김철(金撤)·서병호(徐丙浩)·최창식(崔昌植)·현순(玄循)·손정도(孫貞道)·김구(金九)·홍진(洪震) 이렇게 각지의 대표자 29명도 참여하였다.

 

이들의 모임이 쉽게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은 상해에서 3·1운동을 준비했던 동제사와 신한청년당의 인사들이 1919년 3월 하순에는 현순을 총독으로 한 독립정부임시사무소(獨立政府臨時事務所)를 설치하여 조직적 기반을 마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드디어 1919년 4월 11일 상해의 프랑스 조계(租界) 보창로(寶昌路) 32호에서 각도(各道) 대의원 30명이 회합하여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을 구성하고 임시헌장(臨時憲章) 10개조를 결의·반포하였다. 그리고 4월 17일에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를 조직하고 관제(官制) 등을 선포하였는데 임시헌장, 선서문, 정강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대한민국 임시헌장

 

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한다.

제2조 대한민국은 임시정부가 임시의정원의 결의에 의하여 이를 통치한다.

제3조 대한민국의 인민은 남녀 귀천 및 빈부의 계급이 없고 일체 평등하다.

제4조 대한민국의 인민은 종교·언론·저작·출판·결사·집회·신서(信書)·주소이전·신체 및 소유의 자유를 향유한다.

제5조 대한민국의 인민으로 선거권이 유(有)한 자는 선거권 및 피선거권이 유(有)한다.

제6조 대한민국의 인민은 교육·납세 및 병역의 의무가 유(有)한다.

제7조 대한민국은 신(神)의 의사(意思)에 의하여 건국한 정신을 세계에 발휘하며 나아가 인류문화 및 평화에 공헌하기 위하여 국제연맹(國際聯盟)에 가입한다.

제8조 대한민국은 구황실(舊皇室)을 우대한다.

제9조 생명형·신체형 및 공창제(公娼制)를 폐지한다.

제10조 임시정부는 국토회복 후 만1년내에 국회를 소집한다.

 

국무총리 이승만(李承晩)

국무총리비서장 조소앙(趙素昻)

내무부총장 안창호(安昌浩)

내무부차장 신익희(申翼熙)

외무부총장 김규식(金奎植)

외무부차장 현순(玄楯)

법무부총장 이시영(李始榮)

법무부차장 남형우(南亨祐)

재무부총장 최재형(崔在亨)

재무부차장 이춘숙(李春塾)

군무부총장 이동휘(李東輝)

군무부차장 조성환(曺成煥)

교통부총장 문창범(文昌範)

교통부차장 선우혁(鮮于赫)

 

선서문

 

존경하고 열애(熱愛)하는 아(我) 2천만 동포 국민이여! 대한민국 원년 3월 1일 아, 대한민족(大韓民族)이 독립을 선언함으로부터 남녀 노소와 모든 계급과 종파가 일치 단결하여 ‘동양의 독일’인 일본의 비인도적 폭행하에 극히 공명하게 극이 인욕(忍辱)하게 아 민족의 독립과 자유를 갈망하는 의사(意思)와 정의와 인도를 애호하는 국민성을 표현하였다.

 

이제 세계의 동정은 아국(我國)에게 집중하려 한다.

 

차시(此時)를 당하여 본 정부는 전(全) 국민의 위임을 수(受)하여 조직된고로 본 정부는 전 국민과 더불어 진심코 육력(戮力)하여 임시헌법과 국제 도덕의 명하는 바를 준수하여 국토의 광복과 방기(邦基) 확고의 대사명을 이행할 것을 자에 선서한다.

 

동포 국민이여 분기하라. 우리의 흘리는 일적(一滴)의 피가 자손 만대의 자유와 복락에 치(値)하고 신국(神國)건설의 기초가 될 것이다. 우리의 인도(仁道)는 마침내 일본의 야만을 교화하고 우리의 정의는 마침내 일본의 폭력에 승리할 것이다. 동포여, 최후의 일인까지 싸우라!

 

정강 

 

하나, 민족평등·국가평등·인류평등의 대의(大義)를 천명(闡明)한다.

하나, 국제 도덕에 기인(基因)하여 외국인의 생명·재산을 보호한다.

하나, 일체의 정치범을 특사한다.

하나, 외국에 대한 권리 의무는 대한민국 정부와 체결하는 조약에 의한다.

하나, 조국의 절대 독립을 서도(誓圖)한다.

 

한편 국내에서도 3·1운동이 확대·발전되고 있는 과정에서 임시정부의 수립이 선포되었다. 이것이 이른바 대조선공화국 한성정부(大朝鮮共和國漢城政府)이다. 국내에서 활동하고 있던 윤이병(尹履炳)·이규갑(李奎甲)·이종욱(李鍾郁)·안상덕(安商德) 등은 독립선언의 권위를 존중하고, 인간 필연의 요규에 수응하기 위하여, 즉 생존권리의 확보와 자유·평등의 신장, 정의·인도의 옹호를 원해 1919년 4월 23일 13도 대표회의를 개최하고 이승만을 집정관총재(執政官總裁) , 이동휘를 국무총리총재로 하는 임시정부 수립을 선포하였으며 결의문과 약법 6조를 발표하였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결의사항

 

1. 임시정부 조직의 건

2. 일본 정부에 대하여 조선 통치권의 포기와 군대의 철수를 요구함

3. 파리 강화회의에 출석할 인원을 선정함

4. 조선인으로서 일본 관청에 재직하는 관공리는 일체 퇴직함

5. 일반 인민에 대하여 일본 관청에 각항 납세를 거절하게 함

6. 일반 인민은 일본 관청에 대하여 일체의 청원 및 소송 행위를 하지 말 것

 

약법

 

제1조 국체(國體)는 민주제를 채용함

제2조 정체(政體)는 대의제(代議制)를 채용함

제3조 국시(國是)는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존중하고 세계평화의 행복을 증진하게 함

제4조 임시정부는 일체 내정, 일체 외교의 권한을 가짐

제5조 조선국민은 납세·병역의 의무가 있음

제6조 본 약법은 정식국회를 소집하여 헌법을 발표할 때까지 적용함

 

이 약법은 상해 임시정부의 임시헌장에 비하면 국가의 기본법으로서 어색하고 미비한 점이 많지만 정부수립 준비과정에 지하에서 진행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그 논의가 불충분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한성정부는 연합통신에 의하여 전세계에 홍보됨으로써 노령이나 상해의 그것보다는 더 국제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 외에도 전단으로 정부의 조직과 선언문·포고문 등이 발표되는 경우도 있었으나 실체를 갖춘 임시정부의 조직은 위에서 열거한 세 군데의 임시정부, 즉, 노령의 대한국민의회, 상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그리고 서울의 대조선공화국 한성정부이다.

 

이들 세 군데의 정부는 그 결의안이나 임시헌장 또는 약법 등을 통해서 보면 그들 각 정부가 처해 있는 독립운동상의 주체적이며 객관적인 조건의 성격을 반영하고 있으며 또한 그러한 특성들은 상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세개의 임정(臨政)이 통합한 이후에도 문제점으로 작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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