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갈피

편력 (#08 ~ #09)

J.B.G |2004.06.07 00:05
조회 257 |추천 0

 

#08 

토요일 오후… 재환은 공원에서 혼자 비둘기의 모이를 주고 있었다. 그곳에는 많은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다. 그러나 재환은 움직이지 않는 석상처럼 그렇게 한참을 꼼짝 않고 앉아 있었다. 그때 초희가 다가와 재환의 옆에서 모이를 주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서로 아무런 말도 건네지 않고 그렇게 나란히 앉아 한참을 있었다.

 

“난 더 이상 할 말이 없는데...”

“어제는 죄송했어요… 사과드릴께요.”

“…”

“저… 그냥… 제 말만 들어주시면 안되나요.”

“…”

“제발…”

“…”

 

초희는 난데없이 발랄하게 웃으며, 재환의 몸에 밀착하며 말을 건냈다.

 

“그러니까… 제 물음에 간단하게 ‘yes’, ‘no’로만 대답해 주시기만 하면 되요. 그 정도도 안 되나요?”

 

재환은 아무 말 없이 초희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초희은 조금 수줍은 듯… 다시 가볍게 웃으며 대화를 이끌어 나갔다.

 

“대답이 없으시니... 질문을 드릴께요...”

 

재환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여기 오신 이유는... 두 분이 처음 만난 곳이기 때문이죠? 그리고 오늘이 두 분이 만난 지23년째가 되는 날이고요. 음… 만약 딸이 있었다면… 지금쯤 20살이 되었겠죠?”

 

재환은 다소 놀랐다가 이내 표정이 굳어지지만… 그는 여전히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음… 누가 먼저 말을 거셨죠?”

“ ...”

“첫 느낌은...?”

 

재환은 계속 침묵으로 일관했다. 초희는 쉴새 없이 질문을 던지지만 재환은 계속 아무 대꾸가 없었다.

 

“초희라고 했나?”

“네...”

“학생은 이신영을 처음 본 느낌이 어땠나? 이신영이라는 배우의 무엇이 학생을 그렇게 그녀에게 빠져들도록 만들었지?”

“저...”

“…”

“무슨 대답을 원하시죠?”

“내가 원하는 건 없어… 아무것도…”

“…”

“대답해봐… 느낌 그대로… 뭐가 그리 초희양을 끌어들이는지…”

“글쎄요… 기다림…?”

 

초희는 지금 그 어느 때 보다도 긴장하고 있었다.

 

“엉뚱한 대답이군…”

 

순간, 초희는 크게 실망했다.

 

“기대하셨던 대답이 아닌가 보군요”

“그래…”

“하지만 제게는 그렇게 보였어요… 적어도… 항상 뭔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마치 오랜 지인처럼 말하는군… 신영과 말이야…”

“…”

“내가 듣고 싶은 대답이 무엇일까 생각해 봐… 내게서 그녀의 과거를 알고 싶다면 말이야… 내가 그녀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라고는… 그것 뿐이니까… 대답이 생각나면 연락해...”

 

그 말을 하고는 곧 재환은 일어나서 자리를 떠나 버렸다. 그리고 초희는 멀어져 가는 재환의 모습을 한없이 그리워서… 사모하는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날 밤.

재환의 집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재환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수화기에는 아주 가는 가쁜 숨 소리만 들릴 뿐… 아무런 말도 전해지지 않고 있었다.

 

“여보세요…”

“… 외로움 요…”

 

순간 재환은 온 몸이 얼어붙는 것 만 같았다.

 

“뭐.....?”

“외로움... 이라고 요...”

 

초희는 지금 다락에 앉아서 전화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글썽이고 있었다.

 

“이신영의 외로움... 그게 당신의 마음을 사로잡았어요.”

 

그 말을 하고 두 사람은 침묵했다. 지금 초희는 초조하게 재환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재환은 말이 없었다. 그러자 초조함에 지친 초희가 다시 물었다.

 

“어때요… 기대하시던 대답인가요?”

 

재환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정말… 이신영에 미쳤군…”

“그래요… 미쳤어요… 그녀의 모든 것에… 그녀의 인생의 티끌에도… 가족… 한테도…”

 

아주… 잠시… 기나긴 침묵이 이어졌다.

 

“… 초희양… 그녀에게 가족은 없어…”

 

정적… 초희는 떨리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 그래요? 어떻게 확신하죠?”

 

그러나 재환은 대답을 회피했다.

 

“… 내일 보지......”

 

그렇게 전화가 끊겨버렸다.

 

“아빠의 외로움이 엄마를... 엄마를 사로잡았던 것 알아요…? 둘 다 똑 같은 사람이었어… 둘 다… 바보같이…”

 

초희는 다 낡은 엄마의 일기를 펼쳐 놓고 울고 있었다.

 

‘그이의 외로움이 나를 사로잡았다. 그가 나에게 말했다. 당신의 외로움이 나를 사로잡았다고... 우리는 너무 닮았다...’

 

 

 

 

#09

 

시내의 한 식당에서 재환과 초희가 저녁식사를 하고 있었다.

 

“이곳도 두 분의 어떤 추억이 담긴 곳이죠?”

“모든 것을 다 그녀에게 연관시킬 필요는 없어.”

“네?”

“그녀는 나에게는 이미 잊혀진 사람이야… 현재의 내 행동은 그녀와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는 애기야… 아무것도…”

“네…”

“실망했나?”

“…”

“한번에 너무 많은 것을 알려고 하는군...”

 

초희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럼... 한가지 수수께끼를 풀었으니... 한가지 대답은 해 주시겠죠?”

“무슨 질문이지?”

“두 분의 첫 만남 요”

“그건 한마디로 대답하기 힘든 질문이군”

 

초희는 아무 말 없이 주한을 뚫어지게 바라본다.

 

“우린...”

 

1978년 1월 18일 1월 토요일 오후의 공원

재환은 비둘기에게 모이를 주고 있었다. 넓은 공원… 어느 누구도 피차 다른 사람에게 주목하지 않았다.

 

“너희들은 외롭지 않겠구나... 이렇게 몰려다닐 가족이 있으니…”

 

대답 없는 비둘기들...

 

“너희는 자살하고 싶은 충동 느껴보지 않았니…”

 

역시, 대답 없음…

 

“과묵한 녀석들이로구나… 그럼 말이야… 혹시… 웃음의 참 의미를 아니...”

 

그래도 역시… 대답 없음...

 

“외로운 자만이 웃음의 참 의미를 알죠...”

 

재환은 그만 묻기를 멈추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신영이 벤치에 책을 펴서 들고 앉아 있었다. 그가 돌아보자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재환의 옆 자리에 앉았다. 재환의 옆 자리에 앉은 그녀는 화장기가 전혀 없는 얼굴에 조금 날카로운 듯한 갸름한 얼굴형 이었다. 긴 웨이브 머리에 얇고 가는 투명한 뿔태 안경을 하고 있었다. 짧은 점퍼와 긴 세무 치마 사이로 꼰 다리가 살짝 보이는 자세로 앉아 있었다. 신발은 굽이 높지 않은 세무로 된 캐주얼 한 목이 짧은 부츠를 신고 있었다. 그리고 손에는 두터운 양장본의 아주 낡은 책을 들고 있었다.

 

“참... 재미있는 분이시네요... 그래... 비둘기들이 뭐래요...?”

 

재환은 잠시 당황하지만, 곧 마치 오랜 친구처럼 편안히 마음이 편안해 짐을 느꼈다. 그것은 정말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자기들은 외롭지 않아서 잘 모르겠다는 군 요...”

 

신영은 웃으며 다시 물었다.

 

“그럼 당신은요...?”

“전... 그냥 공상가에 불과합니다.”

“무슨 대답이 그래요...?”

 

두 사람은 잠시 침묵했다.

 

“무슨 책을 보시죠?”

“이거요... 외로움을 돋우는 책이죠... ‘율리시즈’요.”

“정말 그렇군요. 하지만 외로워 보이는 모습이 더 매력적입니다.”

“이런… 상황이 익숙하신가 봐요… 지금 절 유혹하시는 거죠?”

 

재환은 그만 당황해서 얼굴이 화끈거리며 말을 더듬었다.

 

“저… 그게 아니고… 실례가 됐다면 죄송합니다.”

 

재환의 반응을 본 신영은 재미난 듯이 호탕하게 웃는다.

 

“금새 얼굴이 붉어지시는 걸 보니, 지금 무척 용기를 내신 거군요… 이런... 이거 죄송해서 어쩌죠… 그렇다고 한마디에 꼬리를 내리시면 재미가 없죠...”

“그… 그럼… 당신의 고행에 절 길동무로 써 주실 수는 없겠습니까?”

“고행 길?”

“이렇게 아름다운 분이… 토요일 오후의 공원에… 혼자 나와서 책을 읽으시니 말입니다.”

“그런가요? 당신도… 만만치는 않군요… 비둘기 밖에 친구가 없나요?”

“딱히 그런 것은 아니지만… 동반자가 될 만한 사람을 찾기란 쉽지는 않죠?”

“좋아요… 음… 그럼, 저는 ‘골드문트’가 좋은데… 당신은?”

“음… 전 그럼 ‘나르치스’을 하겠습니다.”

“약속 대로 정말, 평생 친구가 되어 주어야 해요…”

 

두 사람은 첫 만남에 대화가 통한 듯… 한참을 그렇게 이야기 나누었다.

 

 

 

(각주)

*골드문트 : ‘헤세’의 작품인 ‘데이만’에서 예술가고 사랑과 자연을 상징하는 인물

*나르치스 : 골드문트의 평생 친구자 스승으로, 수도사이며 지와 정신을 상징하는 인물. 골드문트는 나르치스의 품에서 생을 마감한다.

 

추천수0
반대수0

공감많은 뉴스 시사

더보기

뉴스 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