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제(日帝)는 왜 전투 결과를 왜곡하였을까?
한편,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의 기관지인『매일신보(每日申報)』는 일본군의 독립군에 대한 토벌작전을 보도하면서 전황(戰況)을 왜곡하는 기사를 자주 게재하였다.『매일신보』는 14일부터 16일 사이에 ‘훈춘현의 토벌대는 사도구(四道溝)에서 음모단(陰謀團)의 소굴을 발견하고 몇 명은 쏘아 죽였으며, 20여명을 체포하였고, 소총(小銃) 50자루와 육혈포(六穴砲) 1정, 탄약(彈藥) 660발을 얻었다’고 보도하였다. 그리고 대황구 부근에서는 ‘독립군으로 보이는 3명을 사살하고 총기(銃器)·탄약 및 음모 관계서류를 획득하여 귀환하였다’고 하였다. 10월 10일에는 ‘교장 김약연(金躍淵) 이하 직원 생도가 모두 독립운동에 가담하고 있는 명동학교(明東學敎)를 수색하여 총기와 괴문서 등을 압수한 후 학교와 집을 불태우고 돌아왔다’고 하였다. 또한 10월 28일에는 일본군이 김좌진 부대와 교전한 일에 대해 다음과 같이 상세히 보도하기도 하였다.
‘초적단(草賊團)을 합한 1천여명의 수괴 김좌진 부하, 어로촌(漁老村)에서 서로 만나 충돌되며 일장접전이 시작, 피차사상이 불소(不小)했다. 두도구(頭道溝)에 있던 동(東) 지대(支隊)의 예비대는 봉밀구(蜂蜜溝) 부근에 음모단의 집단이 있는 것을 탐지하고 당시 봉밀구 서북방 약 80리 되는 후차창구(後車廠溝)로부터 돌아오는 길은 21일 이른 아침 기병연대와 합하여 동지 서편 산중에서 음모단과 충돌하여 오후 7시까지 싸움을 계속한 후 드디어 그들을 뒤편 되는 밀림지대 안으로 격퇴하였다. 그 싸움에 대한 일본군의 손해는 전사자 3명 부상자 11명이고 기관총 1정, 소총 11정, 총검 2자루, 탄약 1천 2백발, 면총(眠銃) 1정을 노획하였는데 음모단의 두목은 김좌진이요, 부하 3백여명을 거느렸으며, 그 외에 초적단 7백여명이 그에 참가한 듯 한데 그 합계는 1천명 내외인 바, 음모단의 사상자는 다대한 모양이나 아직 알 수 없다.’
위 기사에는 일본군의 토벌대가 21일 오전 김좌진 부대와 ‘어로촌’이란 곳에서 대규모의 접전을 치른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여기서 김좌진 부대의 병력을 1천여명이라고 묘사했는데, 일본군의 피해와 전과만을 언급하고 있으며 ‘음모단의 피해는 다대한 모양이나 아직 알 수 없다’고 함으로써 토벌대의 패배를 은폐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매일신보』는 독립군에 대해 ‘음모단’ 혹은 ‘초적단’이란 표현으로 극히 폄하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으며 일본군의 피해에 대해서는 ‘전사자 3명 부상자 11명’이라고 하는 등 궁극적으로 전투의 상황을 심각하게 왜곡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0월 29일의 조선주차군사령부(朝鮮駐箚軍司領部) 발표를 인용한『매일신보』의 기사에서는 아즈마 지대의 예비대가 ‘어로촌’에서 홍범도 부대의 노영지(露營地)를 돌격했다고 하면서 ‘아군에게는 피해가 없으며 음모단의 손해는 캄캄한 밤중이라 그 수효를 알 수는 없으나 죽은 자가 30명 가량이요, 손해가 다대한 모양’이라고 보도하였다. 더욱이 11월 6일자 기사에서는 ‘음모단 가운데 가장 두려운 두령 홍범도가 10월 25일 수비대의 맹렬한 야습공격을 받고 혼잡한 틈에 저격당했다는 설(說)’이 있다고 하는 등 마치 토벌대가 홍범도 장군을 사살하는데 성공한 듯한 추측성 보도를 게재하는 등 토벌대의 전황을 극단적으로 왜곡하고 있다.
『매일신보』의 이러한 보도는 모두 ‘어로촌’, 즉 독립군과 일본군 사이에 벌어진 최대의 격전이었던 어랑촌접전(漁郞村接戰)의 상황에 대한 일본 측 언론의 보도인 것으로 추정된다. 일제 당국자들은 독립군을 결코 정규군으로 인정하지 않았기에 일본군이 독립군과 벌어진 전투에서 큰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만약 독립군이 일본군에게 승전(勝戰)했다는 사실이 식민지 조선 민중에게 전해진다면 다시 독립에 대한 열기가 치솟아 3·1운동보다 더한 거족적인 저항에 직면하게 될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조선총독부는 독립군의 청산리전투(靑山里戰鬪) 승리가 조선 민중에게 알려지지 않도록 철저히 언론을 통제하고 일본군의 토벌작전 성과를 왜곡하는데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이는 어랑촌접전에서 일본군이 받았던 충격이 상당히 컸음을 보여준다.
이 밖에『매일신보』는 ‘소지(小池) 대위(大尉)가 지휘하는 헌병과 경찰관이 12월 4일부터 18일까지 무산 건너편 유동(柳洞)과 맹하동(孟下洞)에서 토벌작전을 전개하여 음모단 조선인 1명을 사살하고 감추어 둔 총기 20여정을 확보했다’고 보도하였다. 12월 22일자 기사에서는 ‘합마당으로부터 서편으로 약 50리 되는 중국인의 집에 10여명의 음모단 조선인이 숨어 있다는 밀고를 받은 도전(島田) 소위가 30여명의 부하를 이끌고 그 집을 포위하여 5명을 사살하고 2명을 포박하고, 총기와 탄약을 노획했다. 일본군의 피해는 병사 3명이 부상당하는 데 그쳤다’고 하였다. 1921년 12월 1일에는 ‘근등(近藤) 중위(中尉)가 조종하는 항공기가 국자가 용정의 삼상봉(三上峰)에서 저공비행으로 부근의 조선인 음모단에게 폭탄을 투하하고 귀환했다’고 보도하였다.
『매일신보』12월 11일자 기사에서는 ‘19사단이 간도지방에 출동한 이래 체포한 조선인 음모단의 연인원은 116명인데 간도영사관에 인도한 인원은 44명이며 소총 356정, 탄약 19110발, 권총 65정, 기타 불온문서, 피복, 나팔 등을 압수하였다’고 주장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 기사에서는 또한 ‘12월 1일까지 훈춘현과 사도구에서 귀순한 인원이 605명인데, 앞으로도 귀순할 자가 더 있을 것’이라고 하여, 전체적으로 일제의 ‘간도 토벌’이 소기의 성과를 거둔 것으로 보도했다.
12월 18일자에서는 ‘김좌진은 이도구로, 홍범도는 안도현으로 도망쳐서 그림자도 없으며, 음모단체 중 한민회(韓民會)는 귀순하였고 기타 단체도 그림자도 없다’고 하였다. 12월 22일자에서는 ‘군정서 경신국장 채규오(蔡奎五)가 12월 10일 목촌(木村) 토벌대에 귀순하였으며, 광복단 총무 홍두식(洪斗植), 독립군과 국민회의 연락원이었던 박춘서(朴春瑞) 등 2명이 12월 18일에 동(東) 지대에 귀순하였을 뿐만 아니라 음모단의 수령이 토벌을 견디지 못하여 속속 기순하는 모양’이라는 보도기사를 게재하였다.
게다가 12월 16일자 보도에서는 ‘말 70~80두를 가진 140~150명의 조선인 음모단이 영고탑(寧古塔)에 도착하였는데, 이들은 남방에서 토벌한 자들의 잔당이며, 십수명의 부상자를 데리고 있는데 적당한 가옥을 급여 받을 수 있으며, 대신 무기를 제공하고 농사일에 종사하겠다고 신청하였다’는 기사를 게재하여 궁극적으로 독립군 부대가 전의를 상실해 가고 있는 것처럼 보도하였다.
이러한 보도 경향에도 불구하고『매일신보』는 토벌작전에 참여했던 야스카와[安川三郞] 소좌가 ‘청산리 서대포(西大浦)에 있던 무관학교(武官學校)는 군대의 편성도 매우 규칙적으로 되어 있었으며, 김좌진과 홍범도 부대는 모두 크나큰 수목 속에 기타 수림 사이에 숨어 있어서 토벌하기에 간단치 않았다’는 증언을 보도하는 등 독립군 토벌이 성공하지 못했음을 간접적으로 시인하였다.
이상의 내용을 종합해 보면『매일신보』는 일본군의 토벌계획이 성공적으로 전개되고 있다는 보도기사를 반복적으로 게재함으로써 상황을 왜곡하였고, 당시의 상황을 왜곡·보도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일제의 절박한 상황을 대변하고 있는 것을 알 수가 있다.
한편, 상해의 임시정부는『독립신문(獨立新聞)』을 통해 김좌진 장군의 병사 6백여명과 홍범도 장군의 병사 3백여명이 10회의 교전에서 일본군 1천 2백여명을 사살했다고 주장하였다. 중국의『요동일일신문(遼東日日新聞)』은 청산리전투에서의 일본군 전사자를 2천여명으로 추산하였다. 박은식(朴殷植)은『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에서 일본군 사상자를 2천여명으로 추산하였고, 청산리전투에 참전했던 이범석이 쓴「우등불」은 일본군 사상자가 약 3천 3백명이라고 회상하였다.
이에 비해 일본군의 작전 보고서에서는 백운평교전(白雲坪交戰)에서 병사 4명이 전사하고 하사 1명과 병사 2명이 부상당했다고 하고 있을 뿐이며, 어랑촌접전(漁郞村接戰)에서조차도 보병 1명과 기병 2명이 전사하고 보병 4명과 기병 4명이 부상당했을 정도라고 하고 있을 뿐이다. 고동하곡교전(古洞河谷交戰)에서는 일본군의 피해가 없으며 독립군 30명을 사살했다고 하여 전투 상황을 철저하게 왜곡하고 있다.
그러나 전황에 대한 이러한 왜곡에도 불구하고 오가[大賀龜吉] 간도 주재 일본총영사가 고무라[小村壽太郞] 외무대신에게 보낸 긴급전문에서 보면 조선주차군(朝鮮駐箚軍) 2개 연대의 병력으로서 2개월 동안이면 소탕할 수 있다고 믿었던 기대에 반해, 성적은 다소 실패로 끝났다는 비난을 면키 어렵다고 보고함으로써 일본군이 패전(敗戰)한 사실을 간접적으로 시인하였다. 이 밖에 일본 영사관의 비밀보고서에는 일본군이 연대장 1명, 대대장 2명, 소대장 9명, 병사 8백여명의 사상자를 내는 피해를 입었다고 하였다.
독립군 측도 상대적으로 경미하기는 했지만 인명의 손실이 있었다. 이범석의「우등불」은 전사 60여명, 부상자 90여명, 실종 2백여명으로 파악하면서 실종자는 그 후 대부분 복귀한 것으로 회고하고 있다. 임시정부 군무부의 특파원 안정근(安定根)은 10월 22일부터 3일간의 전투에서 3백여명에 달하는 독립군 사상자가 발생하였다고 보고하였다. 이 경우 21일의 백운평교전과 25~26일의 소규모 전투들에서 피해를 합치면 독립군의 피해는 안정근의 보고보다 많다.
청산리전투(靑山里戰鬪)는 우리 민족의 대일항전 역량이 총집결되어 20세기 초반 세계 2위의 군사강국이었던 일본의 막강한 군사력에 대항하여 제국주의 세력의 자존심에 큰 타격을 가한 쾌거의 승리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당시 만주의 독립운동 지도자들은 일본군과의 전투에만 승리했을 뿐, 그것을 대규모의 대일전면전(對日全面戰)으로 숭화시키지 못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우리 민족이 제국주의 침략자들의 식민통치에 순응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자주독립정신을 표방하여 치열한 항쟁의지를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청산리전투의 역사적 의의는 크고 깊다.
이렇게 1920년 10월 청산리전투에서 독립군의 승리를 이끌었던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의 총사령관 김좌진(金佐鎭) 장군은 당시 나이가 겨우 32세의 청년이었다. 오늘날 국내 최고의 유명 방송연예인 이효리(李孝利)와 같은 연령이었다. 북로군정서의 참모장인 나중소(羅仲昭)가 당시 나이 55세였고 북로군정서의 보병중대장인 홍충희(洪忠熙)는 당시 43세, 보병대대장인 김규식(金奎植)도 김좌진 장군보다 10여세가 더 많았다. 이처럼 자신보다 연령이 높은 사람들을 부하 참모로 거느리고 항일전(抗日戰)을 지휘한 청년 사령관 김좌진은 청산리전투 승리를 통해 자신의 군사적 지도력과 전략을 입증했던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