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갈피

[210] 고딩 연예인과 사귄다면... <11> 자기 자리 찾기

이원영 |2004.06.08 15:38
조회 2,052 |추천 0


꼬마 녀석과 같이 자던 그 날 밤

난 밤새 한 잠도 잘 수 없었다

 


내 가슴을 꼬옥 쥐고 자는 녀석의 손이 혹시라도 떨어질까

나의 작은 움직임이 간신히 잠든 녀석의 곤한 잠을 깨울까

날이 새는 것을 두려워 하면서 밤을 지새우고 있었다

 


그러나

시간은 날 위해 기다리지도 멈추지도 않았다

기어이 아침이 찾아왔다

 


얼핏 잠이 들었는가 싶은 순간에

슬그머니 내 가슴에서 녀석이 손이 빠져 나감을 느꼈다

 

「......」

 

녀석은 조심스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 아무 말도, 아는 척도 하지 않고 누워 있었다

 


녀석이 잠시 날 쳐다보는 듯 하다

조심조심 옷을 갈아 입는 듯 하다

 


난 잠자는 듯 일정하게 호흡을 내뱉었다

이 고요함을 깨지 말아 달라는 듯 호흡을 내뱉었다

그러나 녀석은 옷을 다 입고 갈 준비를 마친 듯 하다...

 

「새근새근 우리 아저씨 잘 자네...」

 

속삭이는 그녀 목소리가 들려 온 것인가...

 


꿈과 현실이 구분되지 않는 상태에서

그녀의 따뜻한 손이 내 머리에 닿는다

 


천천히 어루만진 손은

이마에

눈썹에

눈에서 머뭇거린 후

볼을 지나 까칠한 턱을 매만진 뒤

이젠 따뜻한 호흡이 내 얼굴로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

부드러운 것이 내 입술에 머물렀다...

 

 


꼬마가 아무 말 없이 그렇게 돌아간 후

나는 인터넷에 비로소 글을 올리기 시작했다

 


꼬마가 지적했던 쌍팔년식 개그는 다 버리고

꼬마가 느끼게 해 준 감각적인 문장들을 많이 차용했다

 


반응은 상상을 초월했다

인터넷이라는 곳이 즉각적으로 반응을 알 수 있어서 그런지

첫 글을 올리자마자 엄청난 응원메일이 쏟아졌고

한 편씩 올릴 때 마다 읽는 사람의 숫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갔고

급기야는 팬클럽이라는 것이 자발적으로 결성되게 되었다

 


한 동안은 글 올리는 일에 흠뻑 빠져 지냈다

실시간으로 느껴지는 독자들의 반응도 즐거웠고

팬레터 쓰는 재미도 쏠쏠했고

어느 덧 유명 인터넷 작가라는 칭호를 받게 되는 것도 즐거웠다...

...고 스스로 자위하였다...

 


그러나

 


그렇게 가 버린 꼬마 녀석에게 두 번 다시 연락이 없었기에...

영화 촬영중이라는 매스컴 보도만 간간히 들려오는 정도였기에...

 


끊임없이 떠오르는 상념을 잊기 위해서 연재에 집중해야만 했다

실시간 올라오는 독자들의 반응을 열심히 살피지 않는다면 않는만큼

실시간 끊임없이 괴로워야 하기 때문이었다...

 


잠적은 꼬마만 한 게 아니었다

범생 녀석도 그 날 저녁 (꼬마가 품에 안긴 날) 이후로 사라져 버렸다

 


고시텔의 장기 계약자라서 짐은 그대로 남아 있지만

밤에도 안 들어오는 듯 계속 텅 비어 있었다

 


그녀는 그 날 밤 무슨 오해를 했기에 사라져 버린 것일까

아니면 지극히 개인적인 잠적인데 내가 민감해져 있는 것인가

 


꼬마 녀석도 그렇고

범생 녀석도 그렇고

 


눈에 보여도 걱정이고

안 보여도 걱정이고

 


난 왜 그녀들과 얽히게 되어 버린 것일까

난 왜 그녀들에게서 자유로워 질 수 없는 것일까

 


그렇지만

고민한다고 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기에

난 그저 인터넷 연재만 생각하고 열심히 글을 올릴 수 밖에 없었다

 

 


범생이 다시 고시원에 나타난 것은

인터넷 작가로 입지를 굳힌지 꽤 지난 뒤였다

 

「저기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컴퓨터 앞에서 연재 반응을 살피고 있었는데

여느 때와 마찬가지인 얌전한 그 모습 그대로 나타나 사무실 문을 두드렸다

 

「어디 갔다 왔어요!」

 

그녀를 본 순간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졌다

 

「잠시... 좀...」


「어디 가면 간다고 말을 해야죠!

  걱정했잖아요!」

 

내 목소리가 너무 컸던 것일까...

그녀는 머뭇머뭇 거리더니

학교 갔다가 막 집에 돌아오는 착한 아이처럼 방긋 웃으며 꾸벅 인사를 했다

 

「다녀왔습니다」

 

그녀의 그런 인사는 마치 마법과도 같다

모든 불안과 걱정이 해소되면서 평온한 일상의 모습을 보는 듯 하다

 


이럴 때 보면 귀엽고 착한 아이 같은데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여자라니깐...

 

「앞으로는 꼭 말하고 다니도록 해요」


「알겠습니다」

 

그녀는 동그란 안경 너머로 내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 보았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황급히 고개를 숙이면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기... 부탁 드릴 게 있습니다」


「아 그래요. 말해 봐요」

 

난 친절한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말하기 힘든지 머뭇 거리더니 간신히 입을 열었다

 

「저하고... 병원에 좀 같이 가 주셨으면...」

 

 


병원......

 

 


아아...

그런 거였구나...

술 취해서 같이 보낸 그 날 밤에...

기어이 일이 있었던 거구나 ...

 


임신을 하여서...

어떻게 해야 할지 혼자 고민을 하러 떠난 뒤에...

혼자 결정을 하고 돌아온 거였구나...

그래서...

아이를 지우려고 하는 거구나...

 


난 만감이 교차되는 심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이, 이런 일이 있었다는 것이 너무 힘들지만...

  그렇지만...

  당신 혼자 결정해도 되는 겁니까...」


「죄송합니다...」

 

그녀는 고개만 숙이고 있다...

 

「왜...

  당신 혼자 결정해서 대답만 구합니까...

  적어도...

  제게 물어 보기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제 생각을 물어봐야 하는 거 아닙니까...」


「......」

 

그녀는 더 이상의 대꾸 없이 고개만 숙이고 있다

우린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그렇게 서 있었다...

 

 


서울 대학교 부속병원

 

 

그녀와 함께 병원으로 들어가고 있다

그녀는 아까부터 미안한 듯 거듭 말하는 중이다

 

「죄송합니다...

  저 혼자 결정해서...

  근데 꼭 참석해야만 하는 자리라서...

  절 너무 아껴 주신 은사님 환갑인데 빠질 수가 없지만...

  혼자 가기 너무 두려웠거든요...」

 


은사님 환갑잔치 함께 가자고 겨우 말을 꺼낸 그녀의 말을

아주 지멋대로 단단히 오해를 해 버린 나란 놈의 상상력이란-_-...

 


근데 더 웃긴 건 나란 놈은 여전히 화를 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수현씨가 잘못한 거에요!

  이런 자리가 있으면 미리미리 말을 해야 하는 겁니다!

  그래야 내가 선물도 준비하고 장기자랑도 다듬고 그러지요!」


「정말 죄송합니다...」


「됐어요! 뭐 다 지난 일

  다시는 이번 일에 대해서 왈가왈부하지 마세요!」


「네 알겠습니다」

 

그래

내가 쳐 죽일 놈이라는 거 아니까

거기 돌 들 좀 내려놓고 읽어라-_-...

 

 

그녀의 은사님은 인격적으로도 인간적으로도 성숙된 분이셨다

모든 제자들에게 존경받고 사랑받을 뿐 아니라

학교에서 거의 투명인간 수준인 그녀의 외로움을 잘 알아 주셔서

재학시절 그녀를 항상 옆에 두고 일을 시켜 주셨었다

 


이번 환갑연도 충분히 호텔 연회장을 빌려서 할 만도 했으나

바쁜 인턴, 레지던트들 밥이라도 한 끼 먹이려고

병원 식당을 빌려 환갑연을 열고 있었다

 


그녀는 진짜 모범생이었다

선후배 동료들이 그녀를 보면 항상 같은 표정으로 인사를 했다

(특별히 반갑지도 불편하지도 않는 적당한 얼굴들)

그녀 역시 몸에 배인 모범생틱한 모습으로 그들을 맞이했다

 


그러나 그녀는 역시 눈에 안 띄는 곳을 찾아 다니는 것에 선수였다

반갑게 인사를 주고 받으면서도 결코 눈에 띄지 않도록

자신이 서 있는 위치, 자리, 조명, 주변 분위기들을 기가 막히게 조절했다

 


이게 만약 본능적인 감각이라면 타고난 주변인이었을 테지만

고도로 계산된 행동이었다면

그녀 삶이 얼마나 피곤했을지는 안 봐도 잘 느껴졌다

 


은사라는 교수님은 확실히 그녀를 다루는 법을 알고 있었다

 

「힘들지?」


「아니에요...」


「좋은 의사가 되려나 보다. 남들보다 고생을 더 하고」


「괜찮습니다...」


「 지금의 힘든 기억을 오래오래 기억해서

  환자들에게 좋은 어머니가 되어야 한다」


「네에...」

 

변변히 인삿말도 못하는 제자의 등을 두들겨 주는 선생님은

제자가 미처 표현하지 못한 애정을 넉넉하게 느끼고 있다는 표정이었다

 


교수님과 인사를 나눈 뒤에 그녀는 본래 위치 (눈에 안 띄는)로 돌아왔다

그녀 동기들은 새파란 인턴들이라서 그녀와 아는 척 할 여유가 없었다

거의 미친년놈들처럼 입구멍에 음식들을 쏟아 넣느라 정신들이 없었다

 

「좀 아쉽네...」


「네에?」

 

아쉽다는 나의 말에 그녀가 쳐다본다

 

「내가 교수님 위해 장기를 보여줄라고 했거든요」


「어떤 장기요?」

 

난 들고 있던 종이컵을 손가락 위에 올려 놓고 뱅글뱅글 돌렸다

 

「어머!」

 

그녀가 신기해 하면서 좋아한다

 

「진짜 잘 돌리세요!」


「내가 고등학교 때 우리학교 챔피언이었습니다」

 

난 종이컵을 내려놓고 쟁반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다른 데 쳐다보면서 같잖지도 않다는 듯 돌려 버렸다

 

「어머!」

 

그녀 좋아한다

 

「자 이번엔 난이도를 높입니다」

 

이번엔 쟁반에 음식이 가득 든 채 돌렸다

소스 한 방울 안 흘리고 팽팽 잘 돌아간다

 

「우아!」

 

그녀 놀라느라 정신없다

 

「이것도 껌이죠」

 

기고만장한 나는 반으로 쪼갠 수박을 들었다

수박도 돌렸다

 

「우아!! 우아!!」

 

수박뿐이랴

참외

토마토

딸기

 

(딸기는 뻥이다)

 

하여튼 손에 올릴 수 있는 것들은 모조리 돌렸다

그녀는 이런 걸 처음 봤는지 동그란 안경에 동그란 눈이 더 동그랗게 되어서

돌릴 때마다 신기해 해주고 좋아해 주고 감격까지 해 주었다

 


분위기 완전히 탔다

난 나의 비장의 묘기를 그녀에게 보여주기로 했다

 

「자 잘 봐요」

 

500원짜리 동전을 손에 들고 그녀에게 보여줬다

그리고는 아주 가볍게 쓱쓱 콧구멍 안에다가 집어 넣었다

 

「어머!」

 

그녀의 눈이 500원짜리 동전만해졌다

 

「이건 껌이죠」

 

다시 백원짜리 하나를 더 넣었다

 

「어머머!」


「아직 놀라긴 이릅니다」

 

난 백원 하나를 더 집어 넣었다

 

「어머!! 한 콧구멍에 700원이나 들어갔어요!!」


「놀라지 마십쇼. 950원 들어갑니다」


「우아!! 진짜요!!」


「동전이 더 없어서 진짜 아쉽네

  혹시 동전 있으면 줘 봐요」


「네!」

 

그녀에게 동전을 받아서 더 집어 넣었다

근데 900원까지 들어가고 50원짜리가 안 들어가는게 아닌가

 

「아... 잘 안 되네요」


「아니에요! 그것만으로도 멋졌어요!」


「아닙니다. 제가 예전에 주일학교 선생님 할 때

  애들 앞에서 950원까저 넣어 봤거든요

  근데 하두 안 한지 오래 되어서 콧구멍이 좁아졌나 봅니다」


「그럼 무리하지 마세요. 지금 걸로도 대단하셔요」


「아닙니다 잠시만 기다려 보시면...」

 

난 그녀를 위해 이 세상을 위해

필사적으로 50원을 구멍에다 쑤셔 넣었다

 

「어머!! 피나요!! 콧구멍이 찢어졌나 봐요!!」

 

이런 젠장...

동전이 피범벅이 되 버렸다

 

 

 

「오늘 너무 즐거웠습니다」

 

그녀의 표정은 한결 나아졌다

 

「앞으로는 미리 말해 주세요

  조금만 훈련 더 했으면 교수님 앞에서 보여드릴 수 있었는데 아깝습니다」


「아니에요. 정말 멋있었습니다」


「하하! 제가 가진 게 몸으로 때우는 것 밖에 없어서」

 

난 그녀에게 두꺼운 팔뚝을 보여 주었다

 

「어머! 멋져요!」


「그럼 매달려 보십시오」

 

그녀가 팔뚝에 매달렸다

난 뱅글뱅글 다섯 바뀌 정도를 돌렸다

 

「재밌어요!!」


「그래요! 헉헉!」

 

다섯 바뀌 더 돌렸다

 

「재밌어요!!」


「헉헉!! 그래요!! 헉헉!!」

 

두 바뀌 더 돌렸다

 

「재밌어요!!」


「헉헉헉!! 이제 그만!!」

 

이번엔 발등 위에다가 그녀 발을 올려 태웠다

 

「둥가둥가 알죠?」


「알아요! 어렷을 때 아빠가 한 번 해 줬어요!」


「한 번... 밖에 안 해 줬습니까?」


「아... 아빠가 바쁘셔서...」


「음... 좋아요. 그럼 내가 매일 해 줄게요」


「앗! 감사합니다!」

 

발등에 태우고 노래를 부르며 춤을 췄다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너의 희망이 무엇이냐~~~」

 

4분의 3박자 뽕짝에 맞춰서 춤을 추니 너무 즐거워 한다

 

「자 그럼 이제 그만~~」


「하나 더 해 주세요!」


「음... 그래요 뭘 해 줄까요?」


「엄마가 섬그늘에 해 주세요」


「음... 엄마가 섬그늘... 맞벌이 가정을 장려하는 훌륭한 노래죠」

 

엄마가 섬그늘에를 같이 부르면서 둥가둥가 했다

그녀를 만난 이후로

오늘처럼 행복한 표정을 보는 것이 처음이었다

 


「순대볶음 먹고 싶어요」

 

그녀가 순대볶음 먹고 싶단다

꼬마 녀석과 같이 갔던 순대타운으로 갔다

 

「3인분 먹을 꺼에요」

 

그녀도 3인분을 먹겠다고 한다

 

「너무 많지 않아요?」


「많이 먹을 꺼에요」


「방금 먹고 왔는데...」


「그래도 먹을 꺼에요」


「그래요 그럼」

 

묘하다

범생과 꼬마는 전혀 틀린 아이인데

이상하게 닮아 있다...

 


순대볶음을 시켜서 열심히 먹었다

아까 뭔가를 잔뜩 먹은 우리 둘이 분명한데도

웃고 떠들고 배 빵빵 두들기면서 맘껏 먹었다

 


그렇게 즐겁게 한참을 먹고 있던 그 때...

무심코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는데...

꼬마 녀석의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 아닌가...

 

「우리의 앙증맞은 고교생 스타가 예쁜 사랑을 하고 있다죠?」


「네. 최고 인기 그룹 X.X.X 의 멤버인 XX군과 예쁜 사랑을 한다고 합니다」


「두 사람 다 최고의 스타인데 정말 어울리는 한 쌍이군요~」

 


텔레비전의 생방송 연예프로에서는

꼬마와 모 그룹의 최고 인기가수와 사귄다는 말을 하고 있었다...

 


꼬마의 소속사에서는 극구부인하고 있는데

꼬마 입으로 순순히 시인을 하고 있어 크게 당황하는 모습이었다...

 

「나 저 두 사람 다 좋아하는데」

 

같이 텔레비전을 보던 그녀가 잘 됐다는 듯 말한다

 

「참 잘 어울리는 거 같아요 두 사람」


「아... 네...」

 

난 그녀의 미소에 화답하는 미소를 지어 주었다

 


화답하는 미소를...

 

 

<다음편에 계속...>


 

* 다음편부터는 이 곳에 올리지 않겠으니 보실 분은 제 카페 오셔서 읽으시면 됩니다

 

  다음에 좀 더 유익한 연재로 네이트 유머 게시판에 찾아 뵙겠습니다

 

커뮤니티 : http://cafe.daum.net/leewonyoung

 

 

 

추천수0
반대수0

공감많은 뉴스 시사

더보기

뉴스 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