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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克日의 상징’ 白冶 金佐鎭 장군 6.山市驛의 銃聲 ⑵

조의선인 |2009.07.13 22:06
조회 213 |추천 0

 

★ 신민부의 내분과 삼부통일회의 결렬

 

김좌진 장군은 만주 각지에 흩어진 독립운동 단체를 하나의 통합체(統合體)로 만들어 모든 대일항전(對日抗戰)의 역량을 모아 일제(日帝)의 거대한 세력과 야욕을 분쇄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구상은 비단 김좌진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었다. 만주와 중국 관내, 소련 땅 연해주 등지에 흩어져 활동하고 있는 독립운동가들 모두의 한결같은 소망이었다. 그러나 단체의 주도권과 독립운동 노선의 대립, 공산주의 계열과 자유민주주의 계열의 갈등으로 독립운동 진영의 대동단결(大同團結)은 현실적으로 쉽지 않았다.

 

그러던 가운데 북경(北京)의 한국유일독립당촉성회(韓國唯一獨立黨促成會)와 상해(上海)의 한국유일독립당촉진회(韓國唯一獨立黨促進會)에서 1928년 1월에 재만한민족통일운동(在滿韓民族統一運動)을 벌이기 위해 홍진(洪震)·정원(鄭遠) 등을 파견하였다. 이들은 남만주 각지의 독립운동 단체들을 순방하면서 민족유일당 성립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그런가 하면 정의부(正義府)의 간부인 김동삼(金東三)과 김원식(金元植)도 같은 해 4월에 신민부(新民府)를 방문하여 독립운동 진영의 대동단결을 역설하였다.

 

이렇게 만주의 독립운동 단체들 사이에 민족유일당 조직을 위한 분위기가 고조되어 가자 1928년 5월 12일부터 화전현(樺甸縣) 성흥학교(城興學敎)에서 민족유일당 조직을 의논하기 위한 전민족유일당촉성회의(全民族唯一黨促成會議)가 개최되었다. 참가 단체 및 대표자는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통을 합하여 18개 단체에 39명이었다. 그러나 이 회의에는 참의부(參議府) 및 신민부 측의 인사는 참여하지 못하였다. 참의부의 경우는 대표자를 선출하여 파견하였으나 한국인 독립운동가를 체포하려는 중국 관헌의 경비가 삼엄하여 중도에 포기하였고, 신민부는 대표자로 선출된 신숙(申肅)이 회의가 종료된 후에야 도착하였기 때문이었다.

 

만주의 독립운동 지도자들은 화전현과 반석현에서 15일간 세 곳으로 장소를 옮겨가며 민족유일당 결성을 위한 회의를 진행하였다. 이 회의에서 우선 이관일(李貫一)·이청천(李靑天)·이의태(李義太)·이광민(李光民)·이도(李道) 등이 진행위원으로 선출되어 세계의 정세를 파악하고 일본 제국주의 세력을 타도하려는 방안을 모색하기 위한 연설회를 열었다. 각 대표자들은 민족유일당 결성을 실천에 옮길 집행위원으로 현정경(玄正卿)·현익철(玄益哲)·고할신(高轄信)·김상덕(金尙德)·이웅(李雄) 등 21명이 선출되었다. 하지만 이어 토의된 결성 방법론에서 각 대표자들은 자신들이 이미 속해 있는 단체들의 형편에 따라 통일의 방법을 주장하면서 종래 분산적으로 조직되어 있던 각 독립운동 단체의 존재를 본위로 한 연합체로서 민족유일당을 조직하자는 단체본위조직론(團體本位組織論), 기존의 군소 단체가 대부분 지방적이고 파벌적으로 결합된 단체이므로 이들 단체를 완전히 무시하고 철저하게 개인위주로 참가하는 민족유일당을 구성해야 한다는 개인본위조직론(個人本位組織論), 기성단체 가운데 가장 권위가 있는 유력한 단체를 중심으로 군소 단체가 종속되어 결합한 다음 점차 그 세력을 확충해 나가야 한다는 단체중심조직론(團體中心組織論) 등으로 이견이 도출되었다.

 

결국 민족유일당 결성 방법론에서 이와 같은 의견차이는 좁혀지지 않아, 전민족유일당촉성회의는 결국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끝나고 말았다. 그리고 각 대표자들 간에는 세 방법론 중 단체본위조직론과 개인본위조직론 두가지 안(案) 중 한가지 안을 지지하며 분열되었다. 따라서 단체본위조직론을 주장한 단체와 대표들은 전민족유일당조직협의회(全民族唯一黨組織協議會)를 결성하게 되었고, 개인본위조직론을 주장한 단체와 대표들은 전민족유일당조직촉성회(全民族唯一黨組織促成會)를 결성하게 되었다.

 

전민족유일당조직협의회의 중심 역할을 했던 정의부 측은 민족유일당 조직을 위한 새로운 노력을 벌였는데, 바로 1928년 7월 참의부·신민부 측에 통합을 논의하기 위한 삼부통일회의(三府統一會議)를 제안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같은 해 9월에 김동삼을 비롯한 정의부의 대표자 5명, 김좌진 장군을 중심으로 한 신민부의 대표자 7명, 심용준(沈龍俊)이 포함된 참의부의 대표자 3명이 참석한 가운데 길림 지역에서 회의가 개최되었다. 그러나 삼부통일회의는 처음부터 3부의 대표자들 사이에 여러 면에서 의견이 충돌되어 난관에 부딪쳤다. 즉 민족유일당운동 당시부터 단체본위조직론을 주장해 온 정의부 측은 참의부·신민부와 통일을 위한 회의에서도 이 논리를 계속 주장했던 것이다. 그러나 참의부와 신민부에서 파견된 대표자들의 의견은 달랐다. 이들 두 단체도 만주 지역에서 군정부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긴 하였지만, 그 세력면에서는 정의부에 미치지 못하였다. 따라서 정의부의 주장대로 단체본위조직론으로 3부를 통합한다면 그 주도권은 정의부 측으로 넘어갈 것이 당연하였다.

 

신민부의 대표자인 김좌진 장군은 정의부 측의 논리를 반대하는 입장에서 첫째 신민부·참의부·정의부의 모든 조직을 완전히 해체할 것, 둘째, 과정조직(過程組織)으로서 잠시 그 잔무(殘務)를 정리·청산할 것, 셋째 촉성회·협의회의 분규를 타파하고 전만(全滿) 일반의 대당주비(大黨籌備)를 실현할 것을 제시하였다. 이것은 결국 촉성회 측의 의견대로 기존의 단체를 모두 해체한 뒤 구성원들이 개인자격으로 가입해 민족의 대당(大黨)을 조직하자는 논리로서 정의부 측의 주장과는 정면 반대되는 것이었다. 3부 통일의 문제는 이를 이루기 위한 첫번째 조건에서 이 같이 제동이 걸렸다. 게다가 신민부내에서 군정파와 민정파간의 대립이 점점 심화되면서 끝내 내분이 발생하고 말았다.

 

1928년 10월 20일 빈주(賓州)에서는 신민부의 관할 지역에 있는 한국인 4~50명이 회합하여 일제의 무력으로부터 자신들을 지키기 위한 자위책과 관련한 회의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신민부의 군정파 측에서는 이 회의를 민정파가 주최한 비밀회의로 오해하였다. 따라서 군정파에서는 회의장소에 무장병력을 파견하여 회의의 책임자인 황혁(黃赫) 등 수명을 사살하도록 하고 다수의 한국인들에게 중경상을 입혔다.

 

이 같은 불화가 생기자 11월 하순 영안현(寧安縣)에서는 민정파를 지지하는 신민부 관할의 6개현 16구역의 한국인들이 회합하여 북만주민대회(北滿住民大會)를 개최하고 빈주에서 발생한 군정파의 무력행위를 성토하면서 군정파의 책임자인 김좌진에게 모든 책임을 물으며 그를 사형에 처한다는 선고를 내리기까지 하였다. 이렇게 삼부통일회의 이전부터 있었던 신민부 내부의 갈등은 이 같이 악화되어 한 단체내에서 서로간에 적대시하는 관계로까지 변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삼부통합운동이 실패로 끝나게 된 것은 단체본위조직론과 개인본위조직론의 의견차이 뿐만 아니라 신민부의 내분 역시 그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그리하여 1927년 초기부터 일기 시작했던 민족유일당운동은 우여곡절 끝에 3부 통합운동에까지 이르렀지만 정의부·신민부·참의부의 통합을 위해 진행된 3부 회의는 결국 본회의를 개최하지도 못한 채 결렬되고 말았다. 3부 통합운동이 실패로 끝나자 단체본위조직론을 지지하는 정의부를 이탈한 김동삼·이청천 등은 신민부 군정파의 김좌진, 참의부를 탈퇴한 김승학(金承學) 등과 손잡고 혁신의회(革新議會)를 조직하였다. 이 단체는 새로운 정식 기관을 구성하기 전까지 약 1년 이내 운영될 과도기적인 임시기관이었다. 하지만 체계적인 일을 추진하기 위해 중앙의 집행기관은 구성되었는데, 중앙집행위원장에는 김원식이 선임되고 위원에는 김승학·이청천·정신(鄭信) 등이 선출되었다.

 

혁신의회는 전민족유일당촉성회의 당시 협의회 및 촉성회 어느 쪽에도 가담하지 않고 중도적 입장을 취했던 전민족유일당조직기성회(全民族唯一黨組織期成會) 측과 통합하여 민족유일독립당재만책진회(民族唯一獨立黨在滿策進會)를 구성하였다. 책진회는 혁신의회의 이면기관 역할을 하면서 유일당의 촉성을 기하기 위한 조직체로 중앙집행위원장에는 김동삼, 동위원(同委員)에는 김좌진·전성호 등이었으며, 좌우합작으로 민족유일당을 조직하고 군정부를 설치하려는 계획을 세웠으나 길림 지역은 이미 국민부(國民府)의 세력권이었기 때문에 사실상 유명무실(有名無實)한 유령기관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 한족총연합회(韓族總聯合會) 조직과 피살(被殺)

 

1920년대 중반 이후 북만청년총동맹(北滿靑年總同盟)·남만청년총동맹(南滿靑年總同盟)·조선공산당 만주총국(朝鮮共産黨滿洲總局) 등 사회주의 사상을 이념으로 제시하는 단체들이 조직되어 신민부를 비롯한 민족주의 진영의 세력기반을 위협하게 되자 김좌진 장군은 아나키즘(Anarchism)으로 공산주의 세력에 대항하기 위해 중국의 무정부주의운동(無政府主義運動)에 가담했던 유림(柳林)과 접촉하였다. 그 후 신민부 군정파의 일원으로 김좌진의 사촌동생인 김종진(金宗鎭)이 아나키즘에 입각한 경제공동체로서의 농촌자치조직과 그 교육 및 훈련을 위한 방안인「교포의 조직화와 훈련계획안」을 김좌진에게 제시하였다. 이후 두 사람은 상해에 있던 이을규(李乙奎)까지 북만주로 불러들여 유림과 함께 공산주의에 대항할 수 있는 새로운 이념인 아나키즘에 대해 토론하고 이를 바탕으로 한 새로운 단체를 성립시키기로 합의하였다.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쳐 신민부 군정파와 아나키스트들이 손잡고 1929년 7월 21일 영안현(寧安縣)에서 한국인들의 자치조직인 한족총연합회(韓族總聯合會)를 결성하였다. 집행위원장에 김좌진(金佐鎭) 장군, 조직·선전·농무위원장에 김종진, 교육위원장에 이을규, 경제위원장에 박찬순(朴燦舜), 군사위원장에 이붕해(李鵬海), 군사부 별동대장에 이승래·박형식이 취임한 한족총연합회는 재만한인(在滿韓人)의 경제적·정치적 향상과 발전을 도모하며 항일투쟁(抗日鬪爭)을 위해 재만동포의 총력을 집결한 자주자치적 협동조직체임을 목적으로 하고, 당면사업으로 교포들의 정착사업과 협동조합·교육문화 사업, 유격대·공작대의 육성과 치안을 위한 군사훈련 사업을 설정했다.

 

문제는 사업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는 일이었다. 김좌진 장군은 영안현 중동철도선 산시역(山市驛)에 작은 정미소를 세웠다. 그런데 해가 바뀐 이듬해 1930년 1월 24일에 참으로 애통하고 비극적인 일이 벌어진다. 이 정미소에서 작업현황을 살펴보던 김좌진 장군이 러시아제 모젤식 M1921 권총을 겨누고 나타난 박상실(朴尙實)의 총탄에 배와 가슴을 관통당해 쓰러진 것이다. 깜짝 놀란 강인수(姜人壽)와 유창덕(兪昌德)이 달려와 김좌진을 부축하는 사이에 박상실은 혼란스러운 분위기를 틈 타 도망쳤다.

 

“아직도 할 일이 많은데… 내가 죽어야 하다니… 그게 한스러워서…”

 

김좌진 장군은 자신을 흔들며 흐느끼는 강인수와 유창덕을 올려다보며 식어가는 목소리로 신음하고는 숨을 거두고 말았다. 향년(享年) 41세였다.

 

백야(白冶) 김좌진(金佐鎭) 장군이 암살된 사건은 그 당시 우리 민족에게 엄청난 불행이 아닐 수 없다. 일제(日帝)와 결탁한 중국 관헌의 탄압으로 만주에서의 독립운동이 점차 난관에 부딪치고 있는 상황에서 청산리전투(靑山里戰鬪) 승리의 주역인 김좌진 장군을 잃은 민족해방운동 진영은 군사력을 양성하여 대대적인 국내진공작전(國內進攻作戰)을 펼쳐 일제를 구축(驅逐)하겠다는 무장투쟁(武裝鬪爭) 노선을 사실상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의 주석인 백범(白凡) 김구(金九) 지사가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을 조직해 1932년 4월 윤봉길(尹奉吉)의 홍구공원의거(虹口公園義擧)를 성공시켜 중국 국민당의 장제스[蔣介石] 총통으로부터 독립군 양성을 위한 부지와 자금 지원을 약속받고 1940년 9월에 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을 창군했지만 국내진공작전을 계획한 날짜에서 1주전에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태평양전쟁(太平洋戰爭)이 종결되면서 임시정부가 승전국(勝戰國)으로 인정받지 못해 결국 미국 정부의 신탁통치를 받게 된 일은 결과적으로 장기적인 남북분단(南北分斷)의 원인이 되었다는 점에서 참으로 안타까운 역사가 아닐 수 없다. 당시에 우리 민족에게 군대가 없었기 때문에 38선 이북은 소련이, 38선 이남은 미국의 통치를 받는 남북분단이 시작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지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미 수십년 전에는 북만주에 수천명의 독립군 전투병력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 독립군의 군사력이 김좌진 장군 피살로 소멸된 것이니 참으로 민족적인 큰 손실이었다.

 

그렇다면 김좌진 장군을 암살한 박상실은 누구인가? 고려공산청년회(高麗共産靑年會) 만주총국에서 활동했던 양환준은 “조선공산당 아성총국의 무장공작대원 공도진이 김좌진을 암살했다”고 증언했다. 김동화 연변대학교 교수는 “공도진과 박상실은 동일인물이며 1930년대에는 이복림(李福林)이란 이름으로 활동했다”고 주장했다. 이강훈 전 광복회장은 김좌진 장군 암살의 배후인물로 김봉환(金奉煥)을 지목했는데, 그는 일성(一星)이란 가명(假名)을 사용하여 6·25남북전쟁을 도발한 김일성(金日成) 북한 국가주석과 혼동되기도 하였다.

 

박상실과 이복림이 동일인물이라면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의 화요파가 김좌진 암살을 지시했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양환준은 “김좌진이 일제와 내통해 공산당원들의 활동에 대한 정보를 하얼빈 일본영사관 측에 제공해주고 그 대가로 사업자금을 받았기 때문에 만주총국에서 그를 제거하기로 결정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러한 이야기는 전혀 근거가 없는 것으로 한국인들의 분열을 꾀하기 위해 좌·우간의 대립을 부채질하는 일제의 모략전술에 의해 만들어진 왜곡된 정보라고 앞서 설명한 바 있다. 가장 설득력이 있는 설은 “김봉환이 하얼빈 영사관에 매수돼 김좌진 암살 계획을 꾸몄다”고 증언한 서재춘과 이강훈의 주장이다.

 

김좌진 장군이 암살되기 직전, 김봉환은 하얼빈에 갔다가 일본영사관의 경찰대에게 체포되었는데 마츠시마[松島] 경부(警部)는 소설가인 강경애(姜敬愛)를 꾀어내어 하얼빈영사관 유치장 취조실에서 김봉환과 함께 취조했다. 이 과정에서 강경애가 마츠시마 경부의 변절 요구를 수용했고, 그 결과로 김봉환과 강경애는 석방됐다. 당시 일제의 형법대로 하자면, 몇 년의 옥고를 치러야 할 두 사람이 석방된 것이다. 김봉환과 강경애는 1927년부터 동거관계에 있던 사이였다.

 

김봉환은 일제가 가장 눈에 든 가시처럼 여기는 존재가 김좌진 장군이고 공산주의 세력도 최대의 기피인물로 김좌진 장군을 꼽고 있기 때문에 김좌진 장군을 없애면 자신을 처벌하지 않고 석방한 일본 경찰대에게 은혜를 갚고 자기 동료들에 대해 환심을 살 뿐만 아니라 애인인 강경애와의 달콤한 생활이 보장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자신이 믿는 박상실, 즉 이강훈에게 권총을 건네주며 김좌진 암살을 부탁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상경 한국과학기술원 인문사회과학부 교수는 지난 2005년에 김좌진 암살에 간접적으로 참여한 강경애를 3월의 문화인물로 추천했고, 문화관광부도 그 추천을 받아들여 강경애를 문화인물로 선정해 논란을 일으켰다. 물론 김좌진 암살의 배후와 동기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확실하게 조사된 적이 없다. 하지만 항일독립운동사(抗日獨立運動史) 최대의 오점이며 비극으로 손꼽히는 김좌진 장군 암살 사건은 자세한 역사적 연구와 정확한 조사가 진행되어 분명한 진실이 가려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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