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회
세준은 기차에 몸을 싣고 서울로 향한다. 들을 지나 산을 넘고 다시
바다가 나오면 또 다시 들이 나온다. 인생은 돌고 도는 것이라 했던가.
결국 세준이 그렇게 힘겹게 내달려서 온 길은 자신이 처음 출발했던
시작의 원점이란 사실을 깨닫는다. 세준은 가만히 눈을 감는다.
*******
-너무 조르는 거 아니에요? 지금 나...숨 막힌다구요, 김실장님이
자꾸 내 목을 조르는데 내가 숨이 안막혀요?....다음 주까진 해볼게요.
안되요 글쎄....자꾸 이러면 나 이제 윤미라씨 땜방 노릇 안해요...
알았어요, 다음주까지요...네에, 네....그때 뵐게요.
이내는 수화기를 내려 놓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정인이 그때
문을 열고 들어온다.
-준비 다 됐어요?
-이제 준비하려구요, 미안해요...출판사에서 전화와서 좀 길게 싸웠어요.
-누가 이겼어요?
-그야 뭐...내가 이겼죠.
이내가 웃으며 말하자 정인이 환하게 웃는다.
-잘했어요, 절대로 져주지 말아요.
-옷만 갈아 입으면 되요, 기다려요.
이내가 방으로 들어가고 정인이 기분 좋은 얼굴로 베란다 앞에 선다.
베란다에서 보이는 놀이터가 눈에 들어온다. 처음 이내를 보았던 날
저 놀이터에 앉아 있었지...정인은 그때의 이내를 떠올린다.
잠시 후에 이내가 문을 열고 나온다. 단정하게 입은 노란색 투피스가
화사하다. 정인이 웃으며 다가와 팔을 내민다. 그러자 이내가 웃으며
팔짱을 낀다.
-가시죠, 사모님.
-살아 생전 사모님 소린 또 첨이네, 그러시죠, 사장님.
키득키득 대며 둘은 집에서 나간다.
**********
예진은 주방에서 모친을 거들며 음식을 준비한다. 부침개를 부치느라
부산을 떠는 예진은 만들어진 부침개를 집어 먹어 본다.
-너무 맛있는 거 아냐?
제 솜씨를 자랑하듯 예진이 말하자 모친이 그런 예진을 돌아보다 피식
웃는다.
-그런데, 박서방은 오늘도 못 온대니?
-어...일이 좀 바쁘잖어, 안그래두 죄송하대요.
모친의 물음에 예진이 둘러대며 말한다.
-그래도 다행이다, 유진이 못 잊을 줄 알았더니...어떤 여잔지 진짜
궁금하다 얘.
-나보단 좀 떨어지긴 하지만, 뭐...썩 괜찮은 여자지.
예진이 혀를 낼름 거리며 농을 던지자 모친이 흘기며 웃는다.
그때 초인종이 울린다.
-오빤가 부다, 내가 나갈게요.
예진이 뛰어 나가 벨을 누른다. 잠시후에 현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정인과 이내를 보고 예진이 씨익 웃는다.
-엄마, 오빠 왔어요.
예진이 주방쪽으로 돌아보며 소리친다.
-어서와요.
예진이 이내를 보고 살갑게 대한다.
-아버진?
정인이 묻자 이층으로 눈짓을 한다.
-이층 서재실에 계셔, 올라가봐.
정인이 이내를 돌아보자 이내가 고개를 끄덕인다. 정인이 이층으로
올라가자 주방에서 모친이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나온다.
-처음 뵙겠습니다, 조이내라고 합니다.
-어서 와요, 만나서 반가워요.
모친이 이내를 유심히 훝어 보며 고개를 끄덕이자 예진이 그런 모친을
보며 피식 웃는다.
-엄마, 사람 무안하게 뭘 그렇게 뚫어지게 봐?
-그랬니?...내가 원래 좀 그래요, 이해해요.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긴장한 듯 이내가 어렵게 말하자 모친은 그런 이내를 보며 흐뭇해 한다.
이층으로 올라간 정인은 서재실 문을 노크하고 들어간다.
부친이 자리에 앉아 안경 너머로 책을 읽고 있다가 정인을 보고 덮는다.
-저 왔습니다.
-앉어.
부친이 무뚝뚝하게 내뱉으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정인이 쇼파에 앉는다.
다가와 정인과 마주 보고 앉는 부친은 쓰고 있던 안경을 뺀다.
-죄송합니다, 진작에 찾아 뵙지 못해서요.
-죄송한 건 알고 있었더냐?
부친이 헛기침을 하고 묻자 정인이 아무 말 없이 부친을 본다.
어느새 흰 백발이 무성해진 부친의 모습을 보니 코끝이 찡해온다.
-결혼하면 어쩔 셈이냐?
부친의 물음에 정인은 무슨 뜻인가 하는 얼굴로 본다.
-여자를 데리고 왔을 때는 결혼까지 생각한 게 아니냔 말야...그러면
지금 니가 이렇게 놀고 먹을 수는 없는 일이잖아, 뭘 할 거냔 말이지.
-남해에 병원을 하나 차렸으면 합니다...복지시설이 낙후된 곳이라
의사들을 필요로 합니다. 아는 후배가 거기에 있는데, 같이 일을
해볼까 합니다...집으로 들어오겠다 하지 않아서 서운하시죠?
-다 큰 자식이 어디 품안의 자식이더냐, 다 저 잘나서 혼자 큰 줄 알지.
그래, 언제나 떠날 거냐?
-이번 달 말쯤에 떠날 생각입니다.
-결혼은 어떻게 하기로 했냐?
-다음 주에 가족들만 모여서 단촐하게 올렸음 좋겠습니다...이내씨가
그러길 원해서요.
정인의 말을 들은 부친이 고개를 가만히 끄덕인다.
-아직도...유진일 미워하세요?
-내가 미웠던 건 유진이가 아니라 네 녀석이었어...그때 니가 나한테
어떻게 했는지 기억하느냐?...천하의 몹쓸 놈, 그때 난 배신감 같은 걸
느꼈다. 단 한 번이라도 니가 나한테 죄송하단 말 한 마디쯤이라도
했다면 내가 유진일 그렇게 내치진 않았을 게야....여자한테 환장한
놈이라고 생각할 수 밖에.
-죄송해요 아버지...그땐 제가 철이 없었던 것 같아요....유진일
미워한 게 아니라서 다행입니다.
-유진인....연락이 없는 게냐?
부친의 말에 정인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인다. 어쩐지 유진에게
미안하단 생각이 든다.
*********
나는 사랑을 믿지 않았습니다....사랑을 믿는 순간부터 집착으로 바뀔
거라는 막연한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표정은
모두들 가증스럽다 생각했었습니다. 그들의 웃음이 다 가짜일 거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들이 보고 있는 건 사랑이 아니라, 사랑이라고 믿는
사람의 표정이었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즐기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내게도 사랑이 이렇게 왔다는 걸, 내가 전혀 눈치를 채지
못하는 사이에 사랑으로 변해 내게 왔다는 걸 알게 된 오늘....나는
그들의 행복이 무엇인지 새삼 느끼게 됩니다.
*********
세준은 어두운 골목길에서 서서 예진의 방을 올려다 본다.
어쩌면 예진은 거기에 없을지도 모른다. 예진과 함께 지냈던
그 방의 불빛은 이미 꺼져 있다. 세준은 오랫동안 그렇게 서서
예진을 떠올린다.
**********
이내는 잠이 든 정인을 돌아본다, 정인이 이내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
한 쪽 팔은 팔베개를 하고 잠이 들어 있다. 이내는 이제 더 이상 불안
하지 않다. 가만히 정인의 이마에 키스를 한다. 그때 전화벨이 울린다.
이내는 정인이 잠에서 깰까봐 조심스럽게 일어나 밖으로 나간다.
수화기를 찾아 든다.
-여보세요?
상대는 말이 없다. 이내는 순간 세준일지도 모른단 생각을 한다.
이내는 말없이 수화기를 들고 있다. 잠시후에 세준이 낮게 입을 연다.
-바쁘지 않으면 잠깐 좀 만났으면 하는데....호수에 와 있어.
-알았어요.
이내는 수화기를 내려 놓고 가늘게 한숨을 내쉰다. 아직도 그의
목소리가 불안한가....이내는 옷을 갈아 입고 정인이 깨지 않게
조심스럽게 나간다.
벤치에 앉아 호수를 내려다 보고 있는 세준의 뒷모습을 이내가 물끄러미
바라보다 옆에 와서 앉는다. 세준은 이내를 돌아보지 않고 호수만
바라본다. 이내 역시 말없이 호수를 내려다본다.
-이제 여름이 다 간 것 같아.
세준의 목소리가 갈라진다. 이내는 순간 그런 세준이 낯설다.
-결혼....한다는 얘기 들었어.
세준의 말에 이내는 아무 말 없이 호수를 본다.
-눈에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이제서야 보이기 시작하더라.
갈라진 시멘트 사이에 난 이름 없는 작은 꽃이며, 잘게 부서져서
빛처럼 흩어진 호수의 잔물결이며, 북두칠성, 그리고 바람소리..
이따금씩 사람들의 이마에 진 잔주름들, 그리고 흙냄새.
세준의 말에 이내가 돌아본다.
-그리고....당신.
이내의 눈빛이 흔들린다. 이내의 눈에서 눈물이 그렁하게 차오른다.
이내는 고개를 돌려 다시 호수를 본다. 세준이 이번엔 이내를 본다.
-아직까진 당신한테....용서를 빌고 싶진 않아. 내 잘못을 몰라서가
아니라...내 잘못을 씻는 순간이 오면...그때, 그때 당신을 다시
찾을게.
-당신만 잘못한 건 아니었어, 내 잘못도...컸던 거야.
이내가 나지막히 말한다. 세준은 그런 이내를 보다 다시 고개를 돌린다.
-하지만...당신이 단 한 번이라도 내 진심을 마음으로 들여다 봐 줬더라면
여기까지 오진 않았을 거야...난, 당신을 사랑했던 게 분명해.
처음으로....마음을 열었던 사람이었어. 당신은...사랑을 믿게 했던 것과
동시에 사랑을 믿지 못하게 했던 사람이야. 그 상처를 용서하고, 이해하게
만들어준 사람은....정인씨였어.
이내의 머리 위로 햇볕이 잘게 부서져 내린다.
사랑은 광기로 혹은 향기로 다가온다. 당신은 내게 광기 같은 사랑이었어.
느닷없이 다가온 사랑 앞에 눈이 금새 멀고, 마음이 멀어 당신 말고는
아무 것도 보지 못했었어....나는 그게 사랑인지 처음엔 몰랐어. 이런 사랑도
있었구나, 사랑이 이렇게도 오는 구나 싶었지. 가끔 그럴 때가 있잖아,
지독하게 외로워서 어떤 인연을 만나면 순간적으로 미쳐버리게 되는 거.
당신은 내 사랑을 미치게 만들었고, 미친 나는 눈과 마음이 금새 멀어버린 거야.
그런데....정인씨는 내게 당신과 달리 향기로 다가왔었어.
그리 짙지 않은 향기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차츰 짙어지더란 말야...오래
오래 내 코끝에 머물러서 어디를 가든 그 향기를 금새 찾아낼 수 있었어.
지금은 그 향기가 내 몸 구석구석 베어 버렸어....하지만, 광기로 온 사랑이
사랑이 아니진 않아...당신을 사랑했던 건 사실이고, 그땐 진심이었어.
이내는 호수를 바라보며 그렇게 되내인다. 세준은 마치 그런 말들을
다 듣고 있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다행이야, 당신을 제대로 알아봐주는 사람을 만나서....진심이야.
세준이 고개를 돌려 이내를 본다. 이내 역시 고개를 돌려 세준을 본다.
-그때 사랑한다고 말해주지 못해서 미안해....아마도 난, 당신을 순간이었지만
사랑했었던 것 같아. 그걸, 너무 늦게서야 알게 됐지만.
세준의 말에 이내는 눈물을 그렁한 채 그저 보기만 한다.
시시때때로 오는 사랑이 그저 바람 같은 것이라 해도 그 바람마저도
이제는 오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바람이라도 떠나면 아픈 것을.
우리는 왜 몇 번의 사랑을 만났다 헤어지기를 반복해야 할까요?
그럴 때마다 매번 아픈 것을.......그래도 우리는 사랑을 또 기다립니다.
인간은 사랑하기 위해서 태어났기 때문이죠.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오늘따라 무척 이 말을 누군가에게
절실하게 하고 싶습니다.
*********
조촐한 결혼식이 진행되었다가 끝이 난다. 을씨년스런 초가을 바람이
이내의 하얀 웨딩드레스를 스치고 지나간다. 가족들끼리 모여 앉아
교외에서 식사를 하며 담소를 나눈다. 이내와 정인의 모습이 눈부시도록
하얗다. 예진은 그런 둘의 모습을 부러운 듯 본다. 예진은 순간
세준을 떠올린다. 멀리서 세준은 그런 그들의 모습을 지켜 보고 서 있다
돌아 선다. 세준이 씨익 웃으며 걸어 나간다.
-예진아...기다려줄래? 니가 기다린다면....그리 오래지 않아, 니 앞에
다시 돌아올게.
세준은 씩씩하게 걸어간다. 멀리서 그들의 웃음소리가 바람처럼 들려온다.
봄 속에서인지 꿈 속에서인지 언젠가 당신을 만난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당신과 나는 가을 속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당신은 내 손을 잡고....그리고 우십니다.
당신이 우는 것이
하늘로 뛰어가는 구름탓일까요.
아니라면 선지피 빛깔 같은 붉은 나뭇잎 때문일까요.
나는 알 것 같습니다.
그것은 일찍이 당신이 행복했기 때문.
봄 속에서인지 꿈 속에서인지 분명치 않은 속에서.....
이내가 환하게 웃으며 눈물을 흘린다. 정인이 그런 이내의 눈물을
제 손으로 닦아주며 등을 토닥여 준다. 바람이 자꾸 이내의 하얀 드레스를
들추고 달아난다. 그들이 웃음 소리는 끊어질 줄 모른다.
*****감사합니다^^
광기 혹은 향기로란 작품은 생각보다 일찍
끝나게 됐습니다....어떻게 끝을 맺을까 쓰면서 생각했습니다.
다른 작품들은 거의 끝을 정해놓고 쓰기 시작했는데
이번 작품은 쓰면서 생각했거든요.
많은 님들의 관심에 귀를 기울이며 썼지요^^
해피엔딩으로 끝을 맺게 되어서 다행입니다.
무지 더운 날이에요~끝까지 잘 맺을 수 있도록 관심
가져주신 모든 님들께 무지 감사드립니다.
항상 잊지 않고 저를 기억해 주시는 님들 때문에
제가 더 좋은 작품을 쓸 수 있는 걸 다시 한 번 새삼 느낍니다.
오늘도 행복하시구요, 좀 짧았지만...다음엔
더 좋은 글, 재미있는 글로 다시 오겠습니다^^
건강하시구, 더위 조심하시구, 태풍 조심하십시요~
그럼..저는 이만 훌러덩 사라집니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