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변화는 시작되다.
하연은 바싹 타들어간 입술을 혀로 핥으며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스스 일어나던 하연의 무릎 위로 무엇인가가 풀썩 하고 떨어졌다.
미지근해진 물수건.
그게 무엇인지 한참을 들여다보고 난 뒤에야 물수건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이게 왜 여기에?
물컵을 잡으려 손을 뻗던 하연의 눈에 반쯤 물이담긴 작은 대야와
그 옆에 얌전히 놓인 갈색 약병 하나가 들어왔다.
잠을 잤던 시간들이 아주 먼 과거처럼 느껴졌다.
펄펄 끓던 이마는 식었고 따끔거리던 목도 가라앉았다.
이곳저곳이 조금 쑤신다는 것을 빼면,
몸 상태는 정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물을 마시자 좀 더 또렷하게 정신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똑― 똑― 하며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하연은 대충 눈을 비비며
헝클어진 머리를 손가락으로 빗어 내렸다.
“네. 들어오세요.”
당연히 조비서일거라 생각했던 그녀의 예상은 빗나갔다.
조심스레 방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은 아주머니였다.
아주머니의 손에는 커다란 쟁반이 들려 있었다.
난생처음 침대에서 음식을 받아먹는 처지가 되어버린 하연은
황급히 아주머니의 손에 들린 쟁반을 받았다.
“아…! 이, 이건….”
무슨 이유였을까.
쟁반에 놓여 있던 따뜻한 크림 스프 한 그릇과
껍질을 까먹기 좋도록 다듬어진 오렌지 앞에서
하연은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커다란 눈에 물이 가득 괴더니 말릴 틈도 없이 주룩주룩 흘러내렸다.
갑작스럽게 눈물을 흘리는 하연을 향해 다가간 아주머니는
걱정스러운 눈빛을 하고서 하연의 등을 말없이 쓸어 내렸다.
하연은 등에서 느껴지는 따스한 온기가,
그 손길이 사무칠 만큼 반가웠다.
사람이 입으로 옮기는 말보다
때로는 손짓 하나가 더 큰 위로가 될 수도 있다.
바로 지금 상황이 그랬다.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크림 스프 그릇에 감동할 만큼
하연은 따뜻함을 그리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얼마나 울었을까.
훌쩍이며 아주머니의 품속에서 눈물로 범벅된 얼굴을 든 하연은
아주머니의 손을 꼭 잡아 드렸다.
하연의 눈동자를 바라보는 아주머니의 표정은 다 알고 있으니
어서 먹으라고 재촉하는 듯 했다.
“죄송해요. 그냥…너무 뜻밖이라…눈물이 나오고 말았어요. 고맙습니다. 잘 먹을께요.”
행여라도 놓칠까봐 한 마디 한 마디 힘을 주어가며 말했다.
다행히 아주머니는 다 알아들었는지
하연의 손에 숟가락을 쥐어 주고는 얼른 먹으라는 손짓을 했다.
따뜻한 스프는 허기진 하연의 배를 채워주었고 기운을 차릴 수 있게 도와주었다.
남김없이 그릇의 밑바닥까지 스프를 먹는 동안
아주머니는 하연의 옆에 서서 열심히 먹는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부드러운 스프는 하연의 목구멍 속으로 별 저항 없이 잘 넘어갔고
앓느라 잃어버린 입맛을 찾아주기까지 했다.
하연은 배려심이 깊은 여자였다.
한 숟갈을 떠넘길 때마다 소중하게 먹었고
한 방울이라도 흘릴까봐 조심스레 먹었다.
손짓 하나, 몸짓 하나에 고마움을 담아내는 하연을 지켜보는 눈동자가 있었다.
들키지 않는 곳에서 물끄러미 하연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건 다름 아닌 민혁이었다.
오렌지를 다 까먹을 때까지 하연의 방문 앞에서 머물러 있던 민혁은
조용히 그 자리를 떠났다.
거실에서 기다리고 있던 조비서가 휠체어의 손잡이를 잡았다.
“오랜만에 자네 도움 받아볼까?”
“어디로 가시겠습니까?”
“…멀리 가지는 않을 거야. 바람이나 좀 쏘일까 해서.”
조비서는 능숙한 솜씨로 휠체어를 밀기 시작했다.
민혁은 하연과 함께 갔던 그 길로 방향을 잡았다.
조비서는 언제나 그렇듯 묵묵히 걸음만 걸어갔다.
아직 날이 저물지 않아서인지 밤에 보던 것과는 딴판으로 황량했다.
누르스름하게 맨살을 드러내고 있는 흙길과
무성하게 자라나고 있는 이름모를 들풀들.
어둠이 만들어내는 마법이 시작되기엔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아 있었기에 달빛도 있을리 만무했다.
“자네는 언제나 내가 먼저 입을 열길 기다리는 군. 보고사항 빼고는….”
“그건 도련님의 지시사항이었습니다.”
“…죽을 만큼 아프면서도 절대 나에게 오지 않더군. 약도 없으면서.”
민혁의 말투 끝에는 약간의 불만이 묻어났다.
그런 기색을 알아차린 조비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변화가 시작되고 있었다.
원래 민혁은 전혀 연관성 없는 이야기들을
무질서하게 툭툭 던지는 습관을 갖고 있었다.
그렇지만 하연이 이 집에 온 뒤부터는 민혁의 화제가
진하연이라는 여자를 향해 옮겨가는 일이 잦았다.
“처음 간병인이 필요하다고 부득부득 우겼던 건 자네였지.”
“그랬습니다.”
“처음엔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아서 일부러 고약하게 굴었어.
그런데 지금은…그런 제안을 꺼낸 자네한테 고마운 생각이 드는군.”
조비서가 뭐라고 말할 틈도 주지 않고 민혁은 다시 말을 이었다.
“고맙다는 말, 나도 할 줄 알아.”
“뭐가 고마운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도련님 입에서 고맙다는 말은 너무….”
“지금 날 떠보는 건가? 별로 반갑지는 않군.”
별안간 주위 공기마저 싸하게 얼려버릴 만큼 차가운 목소리가
민혁의 입을 통해 흘러 나왔다.
조비서는 민혁의 변덕에 이미 적응이 되어 있었기에 그다지 놀랄 필요는 없었다.
다만 짧게 한숨을 내쉬는 것으로 대신했다.
“…돌아가지. 지나친 참견은 금물이야.”
“앞으로 주의하겠습니다.”
돌아가는 길의 중간쯤 왔을 때 민혁은 다시 입을 열었다.
“D-day는 얼마나 남았지?”
“대략 두 달 쯤 남았습니다.”
“앞당겨.”
“…예?”
“앞당기라고! 열흘이 됐든 보름이 됐든 최대한 빨리! 알아들었나?”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오랫동안 준비해 왔던 일.
민혁은 뿌드득, 소리가 날 정도로 이를 악 물었다.
하나씩 둘씩 어둠 속에 숨어서 준비해 왔던 일이 코앞에 다가오고 있었다.
사실 조비서가 말한 두 달이라는 기간도 최대한 빨리 서두른다 해도 빠듯한 시일이었다.
그렇지만 민혁의 입에서 한 번 지시가 떨어진 이상
알량한 이해를 구한다는 건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 불 보듯 뻔 한 일이었다.
그렇지만 조비서는 한 번 시도는 해보기로 했다.
“위험부담은 예상하셨습니까?”
“위험부담이라니?”
“…지나치게 서두를 경우 그 쪽에서 움직임을 감지할 수도 있습니다. 모르셨습니까?”
모르고 있었다.
한 번도 일에 관한 한 빈틈없이 확률까지 예상했었는데.
조비서의 지적에 민혁은 순간적으로 눈빛이 허공에 멈추었다.
한 가지에만 몰두하면 다른 한 가지는 잊어버리고 마는 습관을 아직도 지니고 있었다니.
지금까지는 한 가지에만 몰두하면 됐었는데.
잠깐 다른 쪽으로 기울어진 틈을 타 판단 착오를 일으킨 것이었다.
조비서는 당혹스러워 하는 민혁의 얼굴을 살펴보며 내심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다행히 차 안에서 토막잠을 잘 시간은 겨우 확보된 셈이었으니 말이다.
“…그냥 계획대로 진행해.
어차피 카운트다운이 시작되면 걷잡을 수 없이 연쇄적으로 반응하게 되어 있으니
딱히 서두를 필요는 없겠지.”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공손히 머리를 숙이는 조비서를 향해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채로
민혁은 집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렇지만 고개를 드는 조비서의 표정은 밝아 보였다.
확실히 변화하고 있는 게 틀림없어.
다른 사람은 눈치 챌 수 없을지 몰라도 조비서 자신 만큼은 달랐다.
되도록이면 그 변화가 빨리 진행되었으면 좋겠지만 조비서는 조바심을 내지 않기로 했다.
“카운트다운이 시작되면 걷잡을 수 없이 연쇄적으로 반응하게 되어 있다구요, 도련님?
부디 그 말이 사실이길 바랍니다. 진심으로.”
사람에게 작은 변화들이 반복되다 보면 어느 순간,
예전의 모습과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게 마련이니까.
민혁이 오래 전 모습을 버리고 지금의 모습으로 변해버린 것처럼 말이다.
그녀는 놀랄 만큼 빠른 속도로 따스함을 전염시키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마비되어 있던 따스함을 깨우고 있는 지도 몰랐다.
☆★☆
하연은 난생처음 사람을 만난 것처럼 굴었다.
아주머니의 작은 손바닥 위에 손가락으로 글씨를 써가며
때로는 웃고 때로는 슬픈 표정을 지었다.
아주머니는 어렸을 때 아주 심하게 앓았던 적이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그 때의 고열로 인해 목소리를 잃어버린 것이라 했다.
방 안에는 아무런 말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이미 두 사람이 마음 속으로 나누고 있는 이야기들은 산더미처럼 쌓여가는 중이었다.
〔이제 가봐야 해요. 몸조리 잘하고, 꼭 따뜻한 물을 자주 마셔요.〕
“벌써 가시게요…? 조금만 더 있다 가시지 않구요….”
하연은 굶주린 아기처럼 아주머니의 팔을 붙잡았다.
아주머니는 눈으로 말하고 있었다.
다음에 오면 또 이야기 상대를 해주겠다고.
어느 정도 눈빛으로 나누는 이야기에 적응한 하연은
아주머니의 뜻을 읽어 내고는 아쉬운 듯 팔을 잡은 손에서 힘을 뺐다.
그러다 문득 잊고 있었다는 듯 나가려던 아주머니의 옷자락을 다시 붙잡았다.
“저, 저기요! 아주머니…. 아주머닌…도련님이라는 사람이…무섭지 않으세요?”
못 알아들었을 리가 없는데.
아주머니는 무슨 소리냐는 듯 하연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너무…차갑잖아요. 살아있는 사람인데…분명 그런데도…마치 죽은 사람 같아요.
아주머닌 안 그러세요?”
아주머니는 가만히 좌우로 고개를 저었다.
그럼 나한테만 그렇게 고약하게 구는 걸까.
하연은 묘한 표정을 지으며 또 다른 질문을 했다.
해서는 안 될 질문.
“민혁씨 아니,…도련님이 왜 그렇게 됐는지 아세요? 도대체 뭐 하는 사람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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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같이 이곳에 들러 글을 올릴 때마다 두근거리는 제 마음 아시나요?
오늘은 무엇보다도 [토크의 신]이 되어서 더욱 더 기쁜 날이었답니다. ㅎ
축하해 주실꺼죠? ^^ 이미 알고 계셨던 분들, 그리고 모르고 계셨던 분들...
제 글을 읽으시는 모든 분들...정말로 제겐 소중한 인연입니다.
오늘도 어김없이 지난 이야기에 빠짐없이 댓글을 달았답니다.
늦게 들러주신 꽃송이님께는 댓글 대신 미니홈피에 살짝 다녀 왔구요. ^^
그럼 전 이만 물러갑니다. 힘차게! 활기차게! 활짝 웃으면서 수요일 맞이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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