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MEMORIES
사람들은 누구나
기억에 얽매여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것은 누구라도 예외가 아니다
아무리 부정하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기억의 노예들이다
(2)
다시 거리로 나왔을 때, 6월의 뜨거운 태양이 우리를 맞아 주었다.
눈이 부실 정도로 강렬한 햇빛 탓에 거리는 더욱 환한 느낌을 주었다. 반대로 그의 표정은 더 어두워 보였다.
우리는 카페를 나온 뒤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꾸 그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지만 내색은 하지 않았다.
“저는 여기서 지하철을 타고 가면 됩니다.”
먼저, 말을 꺼낸 것은 그였다. 어느새 지하철역까지 걸어와 버렸다. 그가 내 대답을 기다리는 것 같았다.
“네, 안녕히 가세요. 오늘 만나서 반가웠어요. 그럼…….”
나는 목례를 하고 돌아섰지만 걸음마를 처음 배우는 아이처럼 쉽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납덩이를 매달고 있는 느낌이랄까, 아니면 보이지 않는 올가미에 걸려 움직이지 못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뒤를 돌아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지만 그렇게 하진 않았다.
그래. 미련을 두지 말자. 어차피 처음부터 모르는 사람인걸.
“저…….”
“미애씨.”
그와 나는 거의 동시에 서로를 불렀다.
그는 아직 역을 내려가지 않았다. 입구에 서서 날 부르고 있었다. 나 역시 그렇게 많이 걸어가진 못했다. 불과 서너 걸음?
“먼저, 말씀하세요.”
그는 수줍음 많은 소년처럼 어깨에서 흘러내린 가방 끈을 만지작거리며 머뭇거렸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우릴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았지만 별로 신경이 쓰이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몇 분이 흐르고 나서야 비로소 그가 입을 열었다.
“음,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가슴이 뛰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심장박동이 빨라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네?”
“그러니까, 우리 다시 만날 수 있겠냐고요.”
그가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그러고 싶으세요?”
나는 그가 부담스러워하지 않도록 최대한 조심스럽게 물었다.
“네. 미애씨는?”
그도 나에게 묻는다.
나 역시 '네'라고 대답하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나는 대답을 하는 대신 겨우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그가 소리 없이 웃었다.
눈물을 흘려 눈이 퉁퉁 부었지만, 그가 짓는 미소는 여전히 보기 좋았다.
“손, 이리 줘 봐요.”
“손이요?”
잘못 들은 것이 아닌지 확인하고 싶은 마음에서일까. 똑똑히 들었으면서도 나도 모르게 되물었다.
“네. 빨리.”
그가 재촉했지만 선뜻 손을 내밀 수가 없었다.
“아.”
그가 내 손을 잡아끌어 손바닥에 무언가를 빠르게 적기 시작했다. 굵은 싸인펜이 주는 촉감이 간지러웠지만 나쁘진 않았다.
“자, 됐어요.”
“이……이건?”
펼쳐진 손바닥에는 굵은 정자체로 그의 이름과 연락처가 적혀있었다. 마치 여자가 쓴 것처럼 예쁜 글씨체였다. 이 사람은 이런 필체를 가지고 있을 거야, 하는 상상과 정말 꼭 들어맞았다.
“연락 주세요. 그럼.”
그가 도망치듯 인사를 하며 돌아선다.
“아……!”
난 아직 인사도 하지 못했는데, 그가 계단을 달려 내려갔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그의 모습이 사라졌다.
그가 떠난 뒤에도 나는 한동안 그 자리에서 떠나지 않고 서 있었다.
그가 남긴 손바닥의 글씨를 보며.
“가버렸어.”
나는 조심스럽게 손을 감싸 쥐었다. 혹여, 그가 남긴 흔적이 지워질까 아주 조심스럽게.
“바보……. 난 할 말을 하지도 못 했는데…….”
투투둑. 투투둑.
“어?"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어느새, 해를 가린 먹구름의 그림자가 커튼처럼 거리에 드리워졌다. 일기예보에서 비가 온다고 했었나? 모르겠다.
쏴아아아―.
빗줄기가 점점 굵어진다.
우연인지 몰라도 그가 떠나자마자 바로 비가 내렸다. 그냥, 내 기분 탓일까?
하늘을 보니 쉽게 그칠 비가 아닌 것 같아, 가방을 머리에 쓰고 비를 피해 달렸다. 그러고 보니 점심시간도 훨씬 전에 끝났다. 너무 오랫동안 사무실을 비웠기 때문에 돌아가면 신나게 잔소리를 들을 각오를 해야겠지.
하나 둘씩 떨어지던 빗방울은 이제 샤워기에서 쏟아지는 물처럼 세찬 빗줄기를 뿌리기 시작했다. 순간, 그의 연락처가 손에 적혀 있다는 것이 생각나서 오른손을 가슴으로 가져갔다.
물에 젖어 지워지면, 그러면 안 되니까.
꿈을 꾼 것 같았다.
잠에서 깨면 한동안 몸서리쳐지는 악몽이 아니라 꾸는 동안에는 부드러운 소프트 아이스크림처럼 달콤하여 눈을 떴을 때 못내 아쉬움을 주는 그런 꿈을, 아주 단꿈을 꾼 것처럼 그는 깊은 여운을 남기고 사라졌다. 그 여운은 아련한 향기처럼 사라질 듯 하면서도 내 안에서 희미하게 맴돌았다.
뚜렷하지 않기에 더욱더 간절한 느낌…….
내게 남겨진 여운 탓일까? 나는 몇 걸음 달리지 못하고 우뚝 멈춰 서고 말았다. 그리고 천천히 돌아서서 그가 마지막에 있었던 지하철 입구를 바라봤다.
“바보, 그 사람이 아직 남아있을 리가 없잖아. 너, 지금 뭐하고 있는 거니…….”
그는 이미 어디론가 떠나고 없지만 나의 시선은 미처 발견하지 못한 흔적을 찾으려는 듯 지하철 계단에 고정된 채 움직일 줄 몰랐다.
나의 의지이면서 또 한편으로 내 의지가 아닌 행동이다.
이런 느낌, 뭐라 표현할 길이 없는 기분을 어떻게 감당해야 하는가. 너무나 혼란스러웠다. 따지고 보면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인데. 그의 부탁을 거절하고 그냥 지나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러지 못하고 그와 1분을 공유했고 다시 그가 돌아섰을 때 나도 모르게 멀어지는 그를 붙잡고 말았다.
그리고…….
그가 나에게 부탁한 1분보다 긴 시간을 함께 보냈다.
생각해보면 내 자신의 행동이 너무나 우습다고 여겨졌다. 커피라고? 그것도 나의 시간을 뺏은 값으로?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었을까. 분명, 평소의 내 모습은 아니다. 어째서 나는 그를 무시하지 않았을까.
모르겠다. 정말 모르겠어. 꿈을 꾼 기분이야.
하지만 꿈을 꾼 것이라 여기기엔 그가 남긴 향기가 너무나 진했다. 너무나.
살며시 감싸 쥐었던 오른손을 조심스럽게 폈다. 여전히 그의 필적이 뚜렷하게 남아 있었다. 스르륵 내 입가에 미소가 새겨진다.
‘꿈은 아냐. 분명히 꿈은…….’
문득 빗방울 하나가 손바닥 위로 떨어지면서 마지막 숫자인 ‘8’이 물에 번져서 모양이 어그러졌다. 나는 깜짝 놀라서 재빨리 손을 말아 쥐며 다시 가슴께로 가져갔다. 
차갑다.
그에 대한 생각을 잠시 멈추었을 때, 차가운 무언가 머리와 어깨에 닿는 느낌이 들었다. 머리 위로 빗방울이 후두둑 떨어지면서 몸을 적셨다.
빗줄기는 점점 더 거세졌다.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이 내게 이상한 시선을 보낸다. 그러고 보니 나는 우산도 없이 멍하게 지하철 입구를 바라보고 있었다. 얼굴이 달아올랐다.
나는 황급히 몸을 돌려 가방을 우산 삼아 걸음을 재촉했다. 조금이라도 빨리 사람들의 시선에서 벗어나고 싶은 기분에.
눈에 익숙한 건물들을 지나 회사 앞 횡단보도까지 단숨에 달려왔다. 아직 회사까지 가려면 좀더 달려야하는데, 공교롭게도 신호에 걸리고 말았다. 발을 동동 구르며 신호를 바뀌기만을 기다렸다.
비에 흠뻑 젖은 내 모습을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부담스럽다.
문득, 몸을 적시는 비의 감촉이 사라졌다.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드니, 파란 하늘과 구름이 눈에 들어왔다. 자세히 보니 우산 안에 그려진 그림이었다.
우산? 누구의 우산일까?
“다행히 그렇게 멀리 가진 않았네요. 난, 못 찾으면 어쩌나 했는데.”
인하. 바로 그였다.
그 역시 비를 맞고 달려온 것인지 흠뻑 젖어 있었다. 그런데 나를 씌우고 있는 것은 분명 우산인데, 왜 쓰지 않고 이렇게 젖어있는 거지.
“아니 어떻게…….”
“열차를 기다리는데, 사람들이 다들 우산을 가지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비가 내린다는 것을 알았어요.”
“…….”
난 말을 잇지 못했다. 울컥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은 기분에 그냥 조용히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사소한 일이지만 누군가 나를 걱정해주고 있다는 생각에 왠지 모를 행복감이 밀려왔다. 나를 이렇게까지 당황스럽게 만들다니. 이 사람, 정말 이상한 사람이다.
“그런데 미애 씨는 우산을 가지고 있지 않잖아요. 그래서 비를 맞을까봐 이렇게 달려왔는데, 제가 조금 늦은 것 같네요.”
“아니요, 괜찮은데…….”
“괜찮기는요, 이렇게 많이 비가 많이 내리는데. 자요, 우산 가져가요.”
그가 우산을 내민다.
“그럼 인하 씨는요. 인하 씨도 우산이 없잖아요. 전 정말 괜찮으니까 인하 씨가 가져가세요.”
신호가 바뀌었다.
“무슨 소리에요. 미애 씨 주려고 가져온 거예요. 그럴 수는 없죠. 미애 씨가 가져가세요.”
“전 정말 괜찮아요. 봐요, 이렇게 젖었는걸요.”
“젖은 건, 저도 마찬가집니다. 그러니까 어서 가져가세요.”
“하지만 전 여기서 회사까지 금방이에요. 인하 씨는 계속 비를 맞고 가야하잖아요. 그러니까 우산은 인하 씨가 가져가세요.”
“저도 역까지만 가면 돼요. 작업실도 역에서 가깝거든요. 그러니까 우산은 미애 씨가.”
“전 정말 괜찮다니까요.”
신호가 다시 바뀌었다.
“어? 신호가 바뀌었네요. 미애 씨, 우리 이러다가 여기서 날 새겠는데요.”
“그러네요.”
“그럼 어떻게 하죠?”
“글쎄요.”
“일단 신호가 바뀔 때까지 좀더 싸워볼까요? 후훗.”
“네? 하하.”
그가 멋쩍게 웃었다. 나도 그를 따라 웃었다.
이런 기분 좋은 느낌, 정말 오랜만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