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 마음을 가다듬고...
#극장
-이 영화 재밌데?
-내 친구가 시사회 갔다왔는데... 재밌었데.
-그래?... 보다가 자는 거 아니야?...
-설마...
-재밌겠지?...
-재밌겠지... 팝콘 먹을래? 내가 사올게.
-그래, 네가 사주면 먹어야지... 같이 갈까?
-복잡한데 그냥 나 혼자 갔다올게. 여기 있어...
-알겠어...
그리고 잠시후.
난...
꿈에도 그리던 그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 사람은 친구랑 같이 영화를 보러 온 듯 했습니다.
이렇게 뜻하지 않은 우연을 얼마나 바랬는 지 모릅니다.
심장이 멎지 않고, 비명을 지르지 않은 게 얼마나 다행인지...
먼저 아는 척 하기 싫었습니다.
내가 예전부터 생각하던 시나리오는...
그 사람이 먼저 나에게 인사를 건네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람은... 날 봤을까요?...
팝콘파는 곳을 보니 친구는 아직 한참 뒤에 줄을 서 있습니다.
친구가 오기 전에 그 사람이 나에게 아는 척을 한다면,
난 과감히 남자친구와 왔다고 거짓말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아예 내가 있는 곳에 눈길도 주지 않습니다.
다시 봐도, 또 다시 봐도...
그 사람이 맞습니다.
내가 그리도 좋아하던 사람...
짝사랑이지만, 날 오해하게 만들었던 그 사람.
어쩌면 저 사람도 날 좋아할 수 있겠구나...
굉장한 희망을 품게 해놓고
그걸 하루 아침에 물거품으로 만들어 놓은...
그래서 나의 1년을 아주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놓은 사람.
그 사람이 분명했습니다.
난 가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 사람이랑 이렇게 우연히 마주쳤는 데,
먼저 말을 건다면,
아주 차갑게...
내가 너 없이 못 살았을 것 같냐, 어디 두고보자...
이렇게 쏘아붙이려고 했습니다.
도도하게,
그가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그런 냉정하고 싸늘한 눈빛...
나 할 수 있을까요, 만약에 그 사람이 날 본다면...
그래서 다가온다면...
그 사람은 왜,
내가 싫은 건 아니었으면서 그렇게 1년 넘게 연락도 없이...
날 내팽겨친걸까요.
아마, 그 사람 소심해서 날 봐도 못 본척 돌아설 지도 모릅니다.
그럼 뭐...
없던 일이 되는 거겠죠.
하지만 무지 섭섭하겠죠. 또 한 동안은 일이 손에 안 잡히겠죠.
괜히 두리번거렸구나...
친구따라 그냥 팝콘사러 갈걸.
아니면 그냥 화장실에라도 가버릴걸.
왜 거기서서 사람들을 둘러봤을까.
괜한 것 마저 후회가 되었습니다...
오늘은 사람이 제일 많을 때라
팝콘사려는 사람들도 정말 많습니다.
친구는 이제 거의 지루해서 미치겠다는 표정으로
앞 사람만 노려보고 있습니다.
의도적으로,
난 그 사람 곁으로 걸어갔습니다.
내 뒷모습...
알까요?
에스컬레이터를 탈 때... 그 사람은 뒤에서 내 뒤통수를 손으로 누르곤 했었는 데...
다정하게 내 이름 부르면서 장난 치곤 했었는데...
심장은 뛰었다 멈췄다를 정신없이 반복하고 있는 데,
그래서 정신 없어 죽겠는 데
나는 아주 태연한 표정으로 그 사람 앞으로 지나갔습니다.
그리고 의자에 앉았습니다.
고개를 숙이고 사람들의 다리를 봤습니다.
그 사람의 신발도 보입니다...
지나갑니다, 그냥...
나는 마냥 바보가 된 느낌입니다.
왜 그랬을까, 혼자...
비참해지는 방법도 참 여러가지다...
혼자 꾸짖기도 했습니다.
반면,
이런 우연... 어쩌면 다시 못 올수도 있는 데...
그냥 이렇게 지나치기 너무 아깝다 싶습니다.
그 사람은...
1년전보다 조금 더 멋져졌습니다.
더 여유로워 보이고 더 편해보입니다.
내가 없어서 그런걸까요?...
지나가버린 그 사람 뒷모습 보고 앉아있는 데...
그제서야 친구는 팝콘과 콜라를 사들고 씩씩대면서 왔습니다.
-맙소사야... 가뜩이나 사람 많아 죽겠는 데 내 앞에 있던 아저씨가 콜라를 받자마자 쏟은거야... 그래서 그거 닦고, 다시 받는데... 옷 젖었다고 직원한테 막 뭐라고 하는거야... 자기가 똑바로 받아야지... 그거 실갱이 하느라 더 늦어졌어. 아저씨만 아니면 뒤통수를 한 대 갈기는 건데... 성격 죽이느라 힘 다빠졌다...
-그랬어?
-어... 근데 너 표정이 왜 그러냐?
-왜?
-뭐 씹은 얼굴이다... 이렇게 내가 팝콘 큰거랑... 콜라까지 사왔구만 왜 그래?
-아니야... 야... 우리 들어가도 되나보다... 들어가자!
-그래. 이건 네가 들고 가라. 이 언니 팔 아프다...
한 몇 분 웅성거리며 사람이 들락거리더니 이내 자리가 꽉 찼습니다. 광고를 지루하게 쳐다보며 팝콘을 먹고 있는 데, 친구가 자리를 바꾸자고 했습니다.
-왜?
-네가 나보다 앉은키 더 크잖아. 나 이 앞사람 때문에 잘 안 보여... 아우... 머리크다, 진짜...
더 꿍얼거리면 앞 사람이 들을 것 같아서 난 얼른 자리를 옮겨줬습니다.
-됐냐?
-어... 잘 보인다... 고마워...
그리고 무의식중에 옆을 봤는 데...
이건 정말 우연 치곤 너무 소름끼치는 우연이었습니다.
바꾼 내 옆자리엔 그 사람이 있었습니다.
난 얼른 고개를 돌렸습니다.
어두컴컴해서 그 사람은 아직 날 못 본듯 합니다.
하지만...
영화를 보는 2시간동안...
그 동안도 날 알아채지 못할까요?...
잠시 진정됐던 내 심장이 또 발길질을 시작합니다.
나는 나도 모르게 몸도 어찌할바 모르고 비틀었나봅니다...
-야, 너 왜 그래? 화장실 가고 싶어?
-어?... 아... 아니...
-근데 왜 그렇게 몸을 비비꼬고 그래?
-아니야, 등이 근지러워서...
-그러길래 좀 씻고 다니라니까... 긁어줘?
-아니야, 됐어...
너무나 불편했습니다.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아 먼저 연락은 못했지만,
이렇게 꼭 마주쳐보고는 싶었는 데,
그렇다고 2시간동안 옆 자리에서 숨죽이고 싶진 않았거든요...
아는 척 하면 나는 도대체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도통 알 길이 없었습니다.
그저 빨리 영화가 시작되고, 영화에 집중할 수 있길 바랬습니다.
그 지루했던 광고가 끝나고 드디어 영화가 시작됐습니다.
영화의 장르는 공포.
평소 공포영화라면 소리소리 질러가면서도 끝까지 보던 나였기에 곧 영화에만 몰입할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한 가지만 안 하면 됩니다. 무서운 장면에서...
"엄마야" 하면서 그 사람 팔을 붙잡지 않으면 됩니다.
설마 그 사람이 소리 지르며 날 잡진 않겠죠...
영화는 심하게 무서웠습니다.
나는 소리를 지르지 않으려고 내 손가락을 깨물고 봤습니다.
끔찍한 장면에서는 아예 눈을 질끈 감아버렸습니다.
난 옆 사람이 신경쓰이지 않게 최대한 조용히 앉아있었습니다.
너무 긴장을 한 탓일까요.
잠시 지루한 부분에 그만 졸음이 쏟아지고 말았습니다.
안된다... 안된다...
난 콜라도 마셔보고 팝콘을 입이 터져라 꾸역꾸역 먹어보기도 했지만 영화가 좀처럼 재밌어지질 않았습니다.
전날 일 때문에 잠을 제대로 못 자서 피곤했고, 그 사람 의식하느라 피곤했고, 재미없으면 얄짤없이 자는 3박자가 고루 갖춰지자 그만... 그만... 잘하고 있었는 데 잠이 들었나봅니다.
구제불능...
어떻하면 좋지?...
그냥 벌떡 일어나서 나가버릴까?...
모른척할까?...
한참 후 눈을 떴을 때 내가 머릿속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눈을 떴을 때,
극장 안은 환했고, 옆에 있던 친구는 없었습니다.
난 누군가의 어깨에 기대있었고,
맙소사. 잠 깨려고 먹었던 팝콘도 그 때까지 물고 있었습니다. 한술 더떠 그 어깨에 몇 조각 흘리기까지...
왼쪽으로 기댄걸 보니...
oh my god. 그 사람입니다.
난 먼저 입 안에 남아있던 다 불어터진 팝콘을 목구멍으로 삼키고 머리를 계속 굴려댔습니다.
저 앞에 직원이 청소하러 온 거보니 나가야 될 시간이긴한데... 친구는 또 어디로 간걸까요.
난감해 미칠 지경이었습니다.
에이, 모르겠다. 난 벌떡 일어났습니다.
그 사람을 내려다볼 용기가 차마 나지 않았습니다.
이게 무슨 망신인지...
그 사람 어깨에 흘린 팝콘을 어떻게 처리를 해줘야 되나, 말아야되나... 쓸데없는 생각도 들고...
헛기침을 하고 슬그머니 발걸음을 옮기자.
-잘 잤어?
헉!
숨이 멎는다는 건 그럴 때 쓰는 말일까요?
그 사람은 내가 흘린 팝콘을 털어내고 일어났습니다.
도대체 그 상황에서 난 뭘 해야 하는걸까요.
잘 잤다고 얘기를 해야 되는 걸까요.
씹고 나가야 되는 걸까요.
죄송하다고 해야 되는건가... 혹시 내 친구는 못 봤냐고 물어볼까... 새삼스레 아는 척을 해볼까...
나는 아무말도 못하고 고개만 숙이고 서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살짝 웃었습니다.
-나가자, 청소하려나보다...
그러곤 앞장서서 출구로 걸어나갔습니다.
나는 쭈뼛거리며 출구까진 일단 간 다음 냅다 튈 생각이었습니다.
이왕 잊고 지내온 사람... 앞으로도 안 보면 그만입니다.
뒤끝이 안 좋아서 몹시 기분이 나쁘지만
어찌됐든 우리 인연은 여기까지려니... 했습니다.
그리고 당장 친구년!? 에게 전화해서 어디있는 지 물어본 후 상황을 따져보려고 했습니다.
출구까지 걸어나온 후... 난 그 사람이랑 반대방향으로 몸을 틀었습니다. 이제 냅다 뛰기만 하면 되는 데,
덜컥, 그 사람이 내 손목을 잡았습니다.
이건 또 뭐야...
난 벗어나려고 손목을 비틀었지만 그 사람... 꽤 꽉 잡고 있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그 사람을 정면으로 쳐다보고야 말았습니다.
-왜 도망가려고 해?
-네?... 친...친구...
-네 친구 갔어.
-네?
-갔다구... 따라와. 시원한 거 사줄테니까 잠이나 깨고 가...
쉣.
1년만에 우연히 만나 한 첫 대사가...
이 모양 이 꼴이라니...
역시 아주 근사한 모습은 영화나 드라마에서만 가능한 것이구나...
거의 좌절이었습니다.
난 경찰한테 잡혀가는 전과 7범쯤 되는 사람마냥 질질질 아이스크림 가게로 끌려갔습니다.
-넌... 아몬드봉봉?
-네?... 네...
-컵으로?
-아니요... 콘으로...
바보. 바보... 바보............
그냥 컵으로 먹지.......... 아휴... 미쳤어 미쳤어...
그 상황에 컵이나 콘이나 매 한가지 일텐데 난 그걸 또 따지고 있었습니다...
창 쪽에 일렬로 있는 의자에 나란히 앉았습니다.
난 자포자기 표정으로 아이스크림을 핥아먹고 있었고,
그 사람은 창 밖으로 지나가는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둘 다 무슨 말을 해야할 지 몰라서
그 분위기는 거의 뻘쭘의 극치라고나 할까...
그 사람도 나도...
내가 아이스크림을 다 먹고 콘까지 다 먹어치운 후에도 말이 없었습니다.
잠은 확실히 깼는 데 눈은 멍합니다...
내 손에 아무것도 들려있질 않자 그 사람은 날 쳐다봅니다.
-많이 피곤했나봐...
-네?... 아... (고개만 푹...)
-코도 골더라...
oh my god... 갑자기 불타는 고구마가 되어버린 내 얼굴.
그런 걸 꼭 말로 하다니, 참 야속하기도 하지.
웃으면서 했으면 나도 웃어버릴텐데,
아주 심각한 얼굴로 코 골더라 얘기하면 무안해하지 않을 사람이 어딨을까...
-미안해요, 나 때문에... 아이스크림... 잘 먹었어요. 먼저 가보겠습니다.
뭐야, 뭐야... 야! 너 뭐야...
먼.저.가.보.겠.습.니.다?...
난 그렇게 벌떡 일어난 나 자신에게 지금 무슨 짓이냐고 따졌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딱히 다른 방법도 없었습니다.
그 사람...
더 이상 보는 게 너무 불편했습니다.
쫓아올까봐 전속력으로 뛰었습니다. 지나가는 사람들 다 밀쳐내며 미친애처럼 지하철역까지 뒤도 안 돌아보고...
그렇게...
그렇게...
어느 순간 눈물 때문에 앞이 뿌옇게 흐려져서 안 보일때까지 뛰었습니다.
누가 보던말던 난 지하철 안에서 엉엉 울어재꼈습니다.
사람들은 다 쳐다봤겠지만
난 오늘 내 자신이 너무 한심하고 처량하고 그렇게 맘 속으로 써내려가던 시나리오가 단 한 대목도 맞아떨어지지 않음에 속상해서 목이 쉬어라 울었습니다.
한 할머니가 조용히 하라고 했고, 어떤 아저씨가 손수건을 쥐어주셨습니다.
지나가던 지하철 공익근무요원이 왜 그러냐고 물어봤고 한 꼬마아이가 밑에서 빤히 쳐다봤습니다.
한참 후 숨을 고르고 손에 쥐어져 있는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고
여기가 어딘가 살펴봤는 데 영 반대편으로 와 있었습니다.
울화통이 치밀어올라 다음 역에서 내려 의자에 앉아 또 울었습니다.
밤 12시.
머리는 헝클어져 있고 우느라 번진 마스카라 때문에 다크서클이 한 2cm는 되보였고 화장도 다 지워져서 간신히 가린 뾰루지도 그대로 보이고 아주 가관인채로 겨우 집에 들어왔습니다.
샤워를 하고, 잠옷으로 갈아입고 침대에 누웠습니다.
정말 고달픈 하루였습니다.
그 사람 때문에 이런 쌩쑈를 하게 될 줄은 생각도 못했습니다.
그리고 문자 오는 소리...
일어날 기운도 없었지만 그래도 확인해봤습니다.
광고문자면 핸드폰을 부숴버릴 생각으로...
[집에 잘 들어간거야? 전화를 왜 그렇게 안 받냐, 아침에 다시 전화할게.]
저장되어 있지 않은 번호.
낯선 번호.
번호를 바꿔버린 그 사람이 보낸 문자였습니다.
똑같은 번호로 찍혀있는 부재중통화.
그 사람은 아직 내 번호를 자기 핸드폰에서 지우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이제와서...
왜, 갑자기 전화를 한다고 이럴까...
내가 그렇게 애타게 전화를 기다리던 1년전에는 모질게도 안하더니...
죽을힘 다해서 잊었더니 다시 다가오면 날 더러 어쩌라는 건지...
그 사람만 오케이 하면 연인이 될 수 있었던 사이었지만,
그 사람은... 내 마음만 새카맣게 태워놓고 1년동안 연락이 없었습니다. 그 동안 난 오기로 잊었고, 잘 살아보겠다 다짐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아직 난 그를 못 잊었고, 바보같이 그 사람이 다시 시작하자면 좋다고 흐뭇해할 지도 모릅니다.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 게 이런건가봅니다.
내일 전화오면 받아야할까요.
받아서 아무일 없었다는 듯 통화를 할까요.
다신 전화하지 말라고, 다 잊었다고 쌩뚱맞게 굴까요...
늘 애매했던 그 사람 마음이
지금은 정리가 된건지, 아직도 날 갖고 놀 샘인지...
그것부터 따져 물을까요?...
갈팡질팡.
난 또 다시 엉망진창 그 사람의 늪으로 빠져들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