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호텔 커피숍
백 번째 나간 맞선. 수안은 이번 역시 별 기대가 없다. 맞선의 부정적 생각은 여전하고
이런 건 자기 취향이 아닌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어머니의 잔소리가 귀찮아 황금 같은
휴일, 운동의 유혹도 뿌리 치고 주말마다 호텔 커피숍에 앉아있지만 여전히 이 자리는
불편한 자리이다.
주변은 온통 똑같은 말에 똑같은 옷차림. 서로를 탐색하며 재고, 사랑의 깊이보다 연봉이 중요한 그런 사람들에게 자신의 사랑을 끼워 맞추는 사람들뿐이다.
수안에게 선은 말 그대로 어머니의 잔소리를 피하기 위한 구실이다.
그런 만큼 오늘도 그의 옷차림은 운동용 반바지에 슬리퍼 차림이다. 영락없는 집 앞
편의점에 담배 사러 가는 모습이다. 여자는 약속시간 10분이 지나가도 오질 않는다.
누군가를 십분 이상 기다려 본 적 없는 수안이 일어서려는 찰나, 여자가 헐레벌떡
뛰어온다. 예쁘지도 않고 학벌이 좋은 것도 아니고 몸매가 빼어난 것도 아닌 이 여자는
늦어서 미안하다는 한 마디 말만 던지고 핸드폰을 손에 꾹 쥔 채 고개를 숙이고 있다.
수안은 짜증스런 맘에 말투까지 퉁명스러워 졌다. 환자들이 알면 놀랄 일이다.
“뭐 마실래요?”
“커피요.”
여자(이하 주하)는 커피도 마시지 않고 그 자리에 앉아 한참을 티스푼을 가지고 장난친다. 수안에게 어떤 질문조차 하지 않은 채 침묵의 공간의 자신만의 생각을 가진 두 남녀가
앉아 있다. 수안의 인내심은 극에 달한다. “볼 일 없으면 서로 찢어지죠.”
한참을 조용하던 주하가 고개를 들고 수안을 본다. “우리.. 결혼 할래요?”
꺅! 어디선가 비명소리가 들린다. 돌아보니 그 곳에 시연이 있다.
수안과 여자의 시선이 시연에게로 향한다.
# 치과
시연이 출근하지 않았다. 그날 호텔 커피숍에서 비명을 지른 이후로 수안은 시연을 볼 수 없었다. 시연은 아파서 며칠 출근하지 못한 다는 말과 함께 무단결근중이다.
수안은 시연의 몫까지 대신 하느라 종일 힘이 든다.
‘결혼할래요?’ 대책 없는 주하의 대답에 수안은 피식 웃음이 나온다.
시연의 외마디 비명만 아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도 한다.
하지만 그 이후 그 백 번째 여자를 만날 일도 만날 수도 없다.
“선생님. 손님 오셨어요.”
정확히 일주일 하고 반의 일이다. 주하가 당당하게 수안의 병원으로 들어선다.
“어떻게? 생각은 좀 해봤어요?”
처음 봤을 때처럼 대책 없는 이 여자 수안에게 묻는다.
# 수안 집
다소곳한 주하가 수안의 부모님을 향해 인사를 드린다.
수안에게 대하던 엉뚱함과 대책 없음은 사라지고 요조숙녀의 모습으로 조신하게 앉아 있다.
수안은 지금 이 여자와 결혼 할 참이다.
이유를 굳이 꼽자면, 무슨 이유에서 만난 지 세 시간 만에 두어마디 주고받은
남자와 결혼을 하려는지, 그 의도가 궁금하고 무엇보다 주말마다 나가는 선 자리가 지겹다. 주하는 수안에게 선 자리를 쫑내고 자유를 준다고 했다.
어차피 첫사랑 연우가 아니면 수안에게 모든 여자는 다 똑같으니 그 제안을 고맙게 받아들였다.
# 병원
시연이 사표를 제출했다. 무단결근 일주일도 모자라 살이 쪽 빠진 모습으로 나타나더니
수안의 결혼소식을 듣고 기절해버렸다. 그러더니 사표를 냈다. 아무것도 모르는 수안은
시연을 설득하려 했지만 시연은 “너 그러는 거 아니야!” 란 말만 던지고 떠나갔다.
요즘 시연 선배가 정말 이상하다. 억지로 잡아 놓긴 했지만 가끔 이럴 때 정말 무섭다.
# 바다
시연은 바다로 향했다. 갑자기 결혼이라니. 아무나 괜찮다면 나도 괜찮은 거 아닌가.
시연은 고백할 걸 하는 생각마저 든다. 문득 죽어버린 연우가 부럽다.
연우가 떠나기 마지막 전날, 자신을 찾아 왔다. 이곳에서 둘은 대화를 했다.
연우는 떠난다고 했다. 어딜 가냐고 물었지만 연우는 그저 수안에게 자신을 기다리지
말란 말만 전해 달라고 했다. 그리고 떠나갔다. 방황하는 수안을 지켜보며 자신도 많이
울었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연우의 죽음소식을 들은 건 그로부터
한참 후에 일이다. 알았지만 말 할 수 없었다. 그땐 그게 최선이었다.
# 수안과 주하의 집
결혼식 사진이 걸려있는 수안의 집. 냉랭한 분위기의 목석같은 결혼식이다.
같은 공간에 남녀가 살뿐 그 외엔 아무것도 없다.
그들은 그렇게 자신들의 공간에서 동거인인 채 살아간다.
서로의 고유 영역을 침범하지 않은 채 말 그대로 올바른 동거 생활을 착실하게 해나간다.
서로에게 간섭 없는 그 생활이 너무 편해 수안은 여전히 자신은 혼자 살고 있는 느낌마저 든다.
주하와 가끔 마주치는 순간도 있지만 그럴때 주하는 조용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별 간섭도 터치도 없다. 처음에는 후련했지만 나중에는 아쉬웠다.
주하의 정체가 뭘까. 수안은 궁금하다.
주하가 수안에게 처음으로 말을 건다. 이가 아픈데 치과에 가도 되냐는 조심스런 물음이다.
오랜 치통을 참고 며칠 만에 용기를 내 건넨 말이다.
# 치과
주하가 오길 기다리는 수안은 하루 종일 시계만 들여다본다. 아는지 모르는 지 병원식구들과 환자들은 결혼 후 살이 빠졌다며 농을 건다.
주하가 왔다. 사람들이 수군대고 멀리 시연의 서슬어린 기운이 느껴진다.
주하의 치아는 정갈하다. 조용한 말투만큼이나 화사한 미소만큼이나 정갈하다.
치료가 끝나고 고맙다는 주하의 인사에 수안은 괜시리 얼굴이 붉어진다.
# 커피숍
시연과 대면한 주하.
시연은 가려는 주하를 다짜고짜 불러 세워 요리조리 뜯어보았다. 아무리 봐도 자신보다
나은 구석이 없는 것 같은데 수안이 주하에게 간 이유가 궁금하다.
주하를 자극하기로 했다.
“수안이.. 못 잊는 사람 있어요.”
“알아요.”
“알아요? 어떻게 알아요?”
주하는 빙그레 미소를 짓는다. 주하의 미소에 시연은 수안이 이 여자와 결혼 한 이유를
알 것 같다.
# 수안과 주하의 집
주하가 식탁에 앉아 혼자 늦은 저녁을 먹는다.
수안은 저녁을 먹고 들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밥을 차려 먹는다.
주하는 버릇처럼 일어나 수안의 찬을 챙겨준다.
“못 잊는 여자.. 있다면서요?”
밥을 먹던 수안에게 주하가 건넨 최초의 질문이다. 수안은 순간 경직했다.
“누구한테 들었어요?”
“그 여자.. 아직도 사랑해요?”
수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었다.
# 포장마차
시연과 술을 마시는 수안.
지금의 명목상인 부인에게 자신의 첫사랑에 관해 듣게 되자 마음이 안 좋아졌다.
이럴 때 찾을 수 있는 건 정신적 지주이자 편한 누나 같은 시연뿐이다.
주하에게 연우의 얘기를 듣게 됐다며 마음이 이상하다는 수안에게 시연은 자신이 말한 사실을 내색하지 않는다. 오히려 과거를 캤다며 이혼을 종용한다.
그러자 수안은 시연에게 고백한다.
“그 여자가 점점 좋아지려 그래. 연우를 잊은 건 아닌데 그 여자가 신경 쓰여. 연우를 내 가슴에 묻었다면 그 여자는 내 가슴을 뛰게 해.
수안의 고백에 시연은 가슴이 아리다.
오랜만에 찾은 사랑을 또 주저하는 그 녀석.
마음이 가는 걸 알면서도 연우를 잊게 될까봐 주저하는 불쌍한 녀석.
“연우.. 죽었어.”
# 납골당
여전히 그 화사함을 간직한 채 한줌 뼛가루가 되어버린 연우가 웃고 있다.
그 앞에서 수안은 오열하고 오열한다.
“그래서 내가 널 가슴에 묻었었나봐.”
시연으로부터 모든 얘기를 듣게 된 수안. 연우가 불쌍하고 가여워 말을 잇지 못한다.
“수안아. 나도 너 좋아했어.”
갑작스럽게 시연은 고백한다.
“연우랑 만나기 훨씬 전부터.. 내가 먼저 좋아했어. 이제 잊어. 니 가슴에 묻은 연우.
나도 너 잊을게.”
“누나.”
“니가 하도 불쌍하고 가여워서 니 가슴을 뛰게 하는 그 사람한테 내가 보내준다.”
수안에 품에 안긴 시연은 결심한다. 오랜 짝사랑을 끝내기로.. 그리고 조금만 아프기로..
# 수안과 주하의 집
여전히 말 없고 조용한 주하가, 수안의 어떤 영역도 침범하지 않는 주하가, 수안의 밥을
준비한다. 며칠 만에 들어오는 수안에게 아무 것도 묻지 않은 채 묵묵히 밥을 준비한다.
“앉아 봐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려는 주하를 수안이 붙잡는다.
“나 걱정 안 했어요?”
“...”
“정말 안 했어요?”
“했어요.”
“사랑했던 사람이 죽었어요.”
“...”
“우린.. 뭐에요?”
“...”
“우린 뭔데요?”
“뭐긴요. 결혼한 사이죠.”
“나 이제 결혼한 사이 안 할래요.”
“네?”
“나 이제 주하씨랑 결혼 한 사이 안해요. 우리 이제 결혼 말고 사랑합시다.”
주하에 얼굴에 미소가 퍼진다.
에필로그 (주하 이야기)
첫 눈에 반하는 사랑을 믿으세요? 저는 믿어요. 맞선, 처음이에요. 억지로 끌려 나왔는데 반바지에 차림에 껌을 질겅거리며 세상만사 다 귀찮은 듯한 얼굴을 한 남자를 봤어요.
근데 눈이 슬퍼요. 눈이 너무 슬퍼서 그냥 돌아갈 수가 없었어요. 갈까 말까 망설이던
그 남자에게 걸어가 한참을 침묵했죠. 말하기 싫다는 얼굴인데 말을 걸 수 없잖아요.
그러던 중 알게 됐어요.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대요. 그 사람이 죽었대요. 근데 가슴에
품었대요. 저는요. 그런 남자를 사랑해요. 바보같이 하나밖에 볼 줄 모르는 그 남자를
사랑해요. 언젠간 봐 주겠죠. 언젠간 알아주겠죠. 우린 이미 부부니까요.